한파 특보와 함께 강추위가 찾아왔던 입춘을 힘겹게 보낸 후 초봄처럼 포근해지던 2월말의 날씨가 정작 3월을 시작하며 다시 눈과 비를 동반한 강하고 차가운 바람을 몰고 왔습니다. 이번 겨울은 유독 눈도 많이 자주 내렸지만 한겨울에는 초봄 같고 늦겨울에는 한겨울 같은 날씨를 연출하며 오락가락 행보를 보였습니다. 지난 2월 25일 산림청에서 발표한 ‘2025년 봄철 꽃나무 개화 예측지도’에 따르면 올겨울 평균기온이 영하 1.8도로 지난해보다 2.5도 낮아 봄을 맞이하는 꽃나무들도 예년에 비해 나흘에서 일주일 정도 늦게 필거라 전망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침을 이기는 저녁이 없듯이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음을 알기에 마침내 눈부시게 꽃을 뿌리며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봄을 두 팔 벌려 껴안아 볼 날이 곧 오리라 믿고 기다립니다.

봄은 삭막한 겨울 풍경을 지워 내며 새롭게 찾아오는 볼 것이 많은 계절이라 봄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한자인 봄 춘(春)은 원래 풀을 의미하는 초(艸) 아래에 ‘어려울 준’(屯), 다시 그 아래에 해를 뜻하는 ‘날 일(日)’이 원형으로, 초목이 추운 겨울을 견디고 새순을 틔워내는 인고 끝에 봄이 왔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1 영어에서 봄을 뜻하는 Spring은 ‘튀어 오르다, 솟아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spring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맑은 물이 솟아오르는 옹달샘도 spring이라 하지요. 이렇게 봄은 솟아나고 튀어 올라야 하니 낮은 아래로부터 높은 곳으로,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올라오나 봅니다. 떨어진다는 fall에서 유래된 가을 Fall이 낙엽 지듯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과는 반대되게 말입니다. 봄을 뜻하는 프랑스어 printemps와 독일어 Frűhling은 각각 첫 번째 계절, 이른 계절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모두 겨울이 끝나고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계절을 의미합니다. 러시아어에서 봄을 뜻하는 весна [베스나]는 ‘밝다, 빛나다’에서 유래된 것으로 밝고 따뜻해지는 계절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펴보니 봄에도 겨울의 끝이자 새로운 계절의 시작이라는 시간의 변화에서 유래한 프랑스어와 독일어와 러시아어의 봄이 있고,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나는 자연의 변화에서 유래한 한자와 영어의 봄이 있습니다. 이들의 봄에 비해 우리말 봄은 시간과 자연의 변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행위에 그 유래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따르면 봄을 봄이라 구분할 수 있는 변화의 주체는 시간도 자연도 아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언어 전문가가 아닌 제가 너무 무리한 해석을 했나요?
각자의 언어마다 어떤 유래로 봄이라는 단어가 나왔던, 비록 예년과 다르게 날씨가 오락가락하며 좀처럼 봄날 같은 날이 찾아오지 않는다 하여도 시간은 경칩을 지나 춘분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경칩을 맞아 개구리가 깨어났다는 것은 단순히 기온이 올라 푸근해진 날씨 덕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추운 겨울잠에서 깨어난 배고픈 개구리가 따뜻한 공기만 마시며 살 수는 없으니까요. 개구리가 기지개를 켜고 나왔다는 것은 배고픈 개구리들의 밥이 되어줄 벌레들 또한 깨어났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벌레들이 깨어났다는 것 역시 이들의 굶주린 속을 채워 줄 밥상이 준비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겨울잠에서 깨어나 ‘배고파요. 밥 주세요’ 하는 모든 생명들에게, 그리고 겨우내 마른 풀과 씨앗으로 연명하던 생명들에게 풀과 나무들은 햇빛으로 빚어낸 수액과 꿀이 흐르는 밥상을 차려줍니다. 뭇 생명에게 주어지는 이 풍성한 봄날의 밥상은 공짜입니다. 혹독한 겨울을 함께 이겨낸 풀과 나무가 아무런 대가 없이 차려준 봄날 밥상으로 벌레들을 살리고, 개구리를 살리고, 새들을 살리고, 다람쥐, 토끼, 노루, 너구리, 오소리, 뱀, 삵, 담비, 멧돼지, 곰, 그리고 사람을 살리는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봄이 왔습니다.
우리말 봄은 ‘바라보다’에서 유래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봄을 맞이하는 자세는 초록 생명이 뭇 생명을 살리는 현장을 잘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을 취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먼저 속도를 늦춰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빠르게 살아갑니다. 그저 휙휙 지나칠 뿐 생명 가득한 주변을 살펴볼 여유를 갖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화단 가장자리에 경계목으로 많이 심고 흔히 도장나무라고도 부르는 회양목은 아시지요? 이 나무가 이른 봄 산수유보다 먼저 꽃을 피운다는 걸 알고 계신가요? 꽃이 있었나 하시겠지만 당장 걸음을 멈추고 살펴보시면 이 나무가 일찍 일어난 벌레들에게 얼마나 푸짐한 밥상을 차려주는지 아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몸을 낮춰야 합니다. 꽃마리의 꽃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우리 주변에 흔하디 흔한 풀이지만 꽃이 너무 작아 몸을 낮추지 않고는 볼 수 없습니다. 올해로 몇 번째 봄을 맞이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여태껏 꽃마리의 꽃을 본 적이 없으시다면 올해가 당신의 첫 번째 봄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주 보아야 합니다. 노루귀라는 야생화를 아시나요? 이른 봄 우리나라 어느 산에서도 만날 수 있는 귀여운 봄꽃입니다. 물론 산에서 정상을 목표로 빠르게 오르겠다는 생각에 휙휙 지나쳐서는 안 되고 천천히 속도를 늦추고 몸을 낮춰야 만날 수 있는 꽃입니다. 아직 갈색의 칙칙한 겨울 땅을 배경으로 화려하지만 결코 천박하지 않은 보라색, 청색, 분홍색, 흰색의 꽃을 피워 올린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이른 봄 만나는 꽃의 모습에서는 노루귀라는 이름이 연상되지 않습니다. 이 친구는 꽃이 진 뒤에 올라오는 작은 잎이 둥글고 솜털 가득한 어린 노루귀를 닮았기에 노루귀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친구를 제대로 알려면 꽃이 있을 때는 물론이고 꽃을 떨구고 난 후에도 지속적으로 자주 봐야만 하지요.
생강나무, 산수유, 매화, 진달래, 개나리, 벚나무, 목련도 봄에 잎보다 꽃을 먼저 내어 봄날 밥상을 차려주는 나무들입니다. 꽃이 진 뒤에도 이들을 알아보려면 자주 봐야겠지요? 올 봄, 마주하는 모든 생명을 향해 속도를 늦추고 몸을 낮추어 자주 바라보시기를 권유 드립니다.
윤성훈, 『한자의 모험』, 비아북, 2013, pp20-22 ↩
글에서 봄내가 물씬 나네요. 아직은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어느덧 봄이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와 고개 내미는 따뜻한 햇살 같은 봄날을 기대해 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계속 연재해 주세요^^
볼 것이 많아 봄
바라보다에서 유래된 봄
봄을 맞이하는 자세에 대한 꽉찬 소망과
현장감있는 봄소식, 깊이 있는 해석이 담긴 글 맛있게 잘 읽었습니다. 헤어나올 수 없는 늪이세요. 감사합니다.
아침을 이기는 저녁이 없듯이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음을 알기에
지금은 힘들어도 참고 견디고 기다리겠습니다.
봄에 올라오는 새싹과 꽃에서
많은 글 배웁니다
오호…봄의 유래가 그렇군요.
우리 마음도 봄꽃을 피워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