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산책] ⑦ 그 꽃과 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차갑고 음침하며 뻣뻣한 것들을 다 쓸어버리고 마침내 우리를 찾아온 봄을 환영하는 꽃들이 여기저기서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 꽃들의 이름을 아시나요? 색깔이나 모양은요? 관계맺음은 이름을 아는 데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름이 관계의 전부는 아닙니다.

마땅히 가야 할 것인데 가지 않고 버티고 서서 모두의 봄을 훼방하던 것이 드디어 쫒겨나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침내 봄이 왔습니다.

차갑고 음침하며 뻣뻣한 것들 다 쓸어버리고 온통 초록과 부드럽고 연하고 순하고 따뜻하고 환한 빛으로 우리를 찾아온 봄을 환영하고 축하하며 사방에서 꽃들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 산수유, 생강나무, 히어리, 국수나무, 버드나무, 목련, 개나리, 진달래, 매실나무, 살구나무, 자두나무, 앵두나무, 벚나무, 귀룽나무, 수수꽃다리, 조팝나무, 산철쭉은 우리 주변 공원에서도 쉽게 만나는 봄꽃나무들입니다. 이 나무들 아래 부지런히 잎을 내고 꽃을 피워올린 냉이, 꽃다지, 꽃마리, 봄맞이, 광대나물, 별꽃, 제비꽃, 민들레, 씀바귀, 고들빼기, 양지꽃, 애기똥풀도 지천입니다. 냉이와 꽃다지는 벌써 열매를 맺은 것들도 있지요.

혹시 이름만 들어선 꽃의 색깔이나 모양이 기억나지 않으신가요? 따뜻하고 소박한 우리말로 자연과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나태주 시인은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는 시1를 썼습니다.

실례합니다만 이 글을 읽는 분은 애기똥풀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이웃? 친구? 혹시 연인?

(좌)봄맞이, (우)애기똥풀. 사진 : 강세기

안도현 시인은 “나 서른다섯 될 때까지 / 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 / 해마다 어김없이 봄날 돌아올 때마다 / 그들은 내 얼굴 쳐다보았을 텐데요 / 코딱지 같은 어여쁜 꽃 / 다닥다닥 달고 있는 애기똥풀 /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 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 / 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 라는 시2를 썼습니다. 자신의 무지와 무관심 때문에 눈앞의 모든 식물을 이름 없는 들꽃으로 만든 것이 부끄러워 참회하는 마음으로 이 시를 썼다고 시인은 이야기합니다. 안도현 시인은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 이 들길 여태 걸어 왔다니 //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다!”라는 시3를 쓰기도 했습니다. 시인은 작은 풀꽃의 이름 하나가 깊은 사유라고 부를 만한 우주 속으로 자신을 이끌고 간다며 이름을 아는 일은 그 존재의 입구로 들어서는 일이며 이름을 알면 함부로 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김춘수 시인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는 시처럼 이름은 관계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이름이 관계의 전부는 아닙니다.

초봄에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꽃 중에 ‘큰개불알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좀 민망하지요? 여름에 맺히는 열매의 생김새가 개의 불알을 닮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입니다. 이 꽃의 국제 공식 명칭인 학명은 Veronica persica(복숭아 모양의 베로니카)입니다. 베로니카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던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피땀을 자신의 수건으로 닦아주었다고 전해지는 천주교의 성녀입니다. 베로니카의 수건에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졌다고 하는데 이 꽃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고 꽃의 열매는 복숭아를 닮았다고 생각하여 만들어진 학명이지요. 누구는 꽃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이름을 붙였는데 누구는 열매에서 개의 불알을 보고 이름을 붙였다니 난감합니다. 민망한 이름 대신 큰봄까치꽃으로 부르자는 의견도 있습니다만 우리나라 국가표준식물명은 큰개불알풀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 2막2장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이름이 뭐가 중요하지요? 장미는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향기롭기는 마찬가지일 텐데요.” 큰개불알풀, 큰봄까치꽃, 베로니카 페르시카, 뭐라 불리우든 이 작은 풀꽃은 우리나라 황량한 겨울 들판에서 어느 꽃보다 먼저 피어나 곧 봄이 오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귀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초봄에만 잠깐 피는 다른 풀꽃과는 달리, 겨울 끝자락에 오는 봄이 우리 곁에 머무는 봄이 되고 떠나는 봄이 되는 기간 내내 피고 지는 꽃입니다.

(좌)큰개불알풀, (우)큰개불알풀 열매. 사진 : 강세기

유명한 저서 『침묵의 봄』을 통해 20세기 현대 환경운동의 선구자로 불리는 해양생물학자인 레이첼 카슨은 그녀가 유작으로 남긴 『센스 오브 원더』에서 “어린이에게나, 어린이를 인도해야 할 어른에게나 자연을 아는 것은 자연을 느끼는 것의 절반만큼도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녀의 말처럼 저 풀꽃의 이름은 큰개불알풀이라고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직 차가운 땅에서 벌과 등에와 한줌의 따뜻한 햇살을 나누며 희망의 봄이 온다는 것을 함께 느끼는 게 더 중요한 것이겠지요.

아, 풀꽃의 이름을 구별 못했다고 삼십대 자신과 절교를 했던 안도현 시인 역시 환갑에 가까운 나이로 8년 만에 낸 새 시집에서 이렇게 말하시네요. “이름에 매달릴 거 없다 / 알아도 꽃이고 몰라도 꽃이다 / 알면 아는 대로 / 모르면 또 모르는 대로”4. 마침내 우리 곁으로 찾아온 봄을 경축하며 만발하는 꽃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안아주면 더 좋겠지만 비록 이름을 모를지라도 꽃들과 함께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하는 봄날 되시기 바랍니다.


  1. 나태주, 「풀잎·2」, 『멀리서 빈다』, 시인생각, 2013

  2. 안도현, 「애기똥풀」, 『그리운 여우』, 창비, 1997

  3. 안도현, 「무식한 놈」, 『그리운 여우』, 창비, 1997

  4. 안도현, 「식물도」감,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창비, 2020

강세기

빨리 이루고 많이 누리기 위해 무겁게 힘주고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천천히 조금씩 가볍게 살아도 괜찮다는 걸 풀과 나무로부터 배우고 있습니다. 숲과 산에서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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