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의 가추법 다시 생각하기

가추법(abduction)은, 가설추리법으로도 불리며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가 창안한 이론적 방법론이다. “까마귀는 공룡의 후예가 아닐까?”라는 방식의 참신한 가설을 제시하여 지도제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가추법은 복잡계 이론으로 나아간 현대의 과학풍토에 가장 최적화된 방법론이다. 이를 통해 연구과정은 더욱 상상력이 넘치고 치열하고 지극해질 수 있다.

1. 들어가며 : 연구과정과 연구결과물 간의 분열

“저는 빛 투과물이 오늘 먹은 야채수프와 관련이 있다고 상상해 봅니다.” 연구실에서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내놓는 자리가 있다. 참신한 가설, 기발한 아이디어, 엉뚱한 상상력 등을 발휘해서 연구의 방향성을 이리저리 바꾸어보는 과정이다. 이러한 브레인스토밍 과정은 연구 자체가 이미 나와 있는 답을 검출하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하는 과정이 아니라, 미지의 것을 탐색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수적이다. 떠나기 전에 결과가 이미 나와 있는 관광이 아니라, 미지의 곳으로 향하는 여행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모든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따뜻한 연구풍토의 마련이 필요하다. 다소 엉뚱한 의견이라고 하더라도 수용하여 입증하려는 시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옳다/틀리다’에 의해서 결정되는 경성과학의 전통보다 ‘다르다’를 수용하는 연성과학의 전통이 필요하다. 경성과학의 경우에는 칼 포퍼의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이라는 개념으로도 드러나는데, 원인과 결과, 문제 제기와 대답 사이를 딸깍하며 인과론적으로 맞출 수 있는 열쇠 개념이 있다는 방식의 논증이다. 반면 연성과학은 하나의 문제 제기에 대답이 여러 개일 수도, 모두가 대답일 수도, 대답이 없을 수도 있다는 관점에서 원인과 결과, 문제제기와 대답 사이에 지극함 개념이 들어가는 과정형적이고 진행형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오히려 반증가능성이 높을수록 지식체계에 이바지하는 면이 있다는 점에서 잘 실패하도록 하는 것이 연성과학의 전통이다.

연구 과정이 참신한 가설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연구 결과물을 발표할 때는 논문을 써야 하므로 인과론적인 이론과 법칙의 서술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연구 과정에서 이리저리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지극함 개념을 발휘했던 것들이 사라지고, 하나의 열쇠 개념에 따라 서술된다. 이에 따라 연구 과정에서의 가설추리법에 입각한 방법론은 연구 결과물의 연역법, 귀납법의 형태의 서술로 돌연 바뀌어 버린다. 그 과정에서 좌충우돌하면서 이리저리 헤맸던 과정은 모두 사라지고 원래부터 결론은 그거였다는 식의 서술에 따라 연구결과물이 제출된다. 결국, 자유로운 연구풍토는 연구결과물인 논문에 종속되는 연구가 아니라, 보다 더 모험적이고 도전적으로 연구 과정을 설계하는 바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2. 연역법과 귀납법, 그리고 가추법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출처: Unknown autho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harles_Sanders_Peirce.jpg?uselang=ko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사진 출처: Wikimedia

가추법(abduction)은, 가설추리법으로도 불리며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가 창안한 이론적 방법론이다. 전제에 결론이 이미 나와 있는 연역법(deduction)이나 근거의 양적 확장으로서의 결론을 도출하는 귀납법(induction)이 아니라, 가정 자체를 통해서 결론으로 지도제작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방식을 의미한다. 이는 참신한 가설이 일단 설명력을 갖추고 있다면 일단 이론으로 인정하면서 추론과 추리를 전개하여 이를 지도제작하는 방법론을 의미한다. 일단 가추법에 대해서 접근하기 어렵다고 느낀다면, 연역법과 귀납법부터 차근차근 비교하면서 점검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연역법은 “까마귀는 새다”라는 명제처럼 전제에 결론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참일 수밖에 없다. 반면 귀납법은 “까마귀는 검다”라는 근거의 양적 확장을 통해서 결론으로 향하기 때문에 개연성의 여부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가추법은 “까마귀는 공룡의 후예가 아닐까?”라는 방식의 참신한 가설을 제시하여 지도제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근대 시기의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의 대립은 사실은 논의의 시작점에 불과하다. 칸트에 의하면 대륙의 합리론인 스피노자,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등의 논거들은 대부분 연역법이 갖고 있는 선험적(a priori)이면서도 분석적인 명제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합리론에서 선험적이라는 것은 법칙과 이론이 미리 주어져 있고 내장되어 있다는 얘기이고, 분석적이라는 얘기는 동어반복적인 토톨로지(tautology)로 이루어져 있다는 얘기이다. 반면 칸트에 따르면 영국의 경험론은 흄, 로크, 버클리 등의 인물로 구성되며 그 논거는 대부분 귀납법이 갖고 있는 후험적(a posteriori)이며 종합적인 명제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경험론에서 후험적인 것은 법칙이 아닌 경험상의 습관과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고, 종합적이라는 말은 분석적인 것이 정보의 양을 늘리지 않는 동어반복인데 비해 정보의 양이 늘어난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사실 이러한 법칙과 이론의 합리론과 경험론에 대한 칸트의 정리는 다소 고루하고 도식적이다. 뭐 새로운 것 없을까?

3. 가추법의 도전과 시사하는 바

하나의 인과관계가 아닌 다양한 상관관계가 작동하는 복잡계에서 하나의 정의가 모든 이론과 법칙을 장악하는 세상은 없다. by Alina Grubnyak 출처: 
https://unsplash.com/photos/ZiQkhI7417A
하나의 인과관계가 아닌 다양한 상관관계가 작동하는 복잡계에서 하나의 정의가 모든 이론과 법칙을 장악하는 세상은 없다.
사진 출처: Alina Grubnyak

어려운 근대철학 수업 시간에 졸음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과 사고실험을 통해 뭔가 알듯 말듯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추법은 완전히 다른 장을 개방한다. 현실이 복잡계이기 때문에, 근거(ground)와 정의(definition)를 인과론적으로 일치시킬 수 없다는 바로부터 시작한다. 하나의 인과관계가 아닌 다양한 상관관계가 작동하는 복잡계에서 하나의 정의가 모든 이론과 법칙을 장악하는 세상은 없다. 다양한 정의와 모델이 가능하기 때문에, 참신한 가설은 환영 될 수밖에 없으며 일단 설명력을 갖춘다면 모두 이론으로 긍정되는 포용적인 연구풍토가 생긴다. 엉뚱한 상상력은 환영된다. 일단 가설을 세우면 이를 입증하려는 노력 역시도 필요하기 때문에 지극함이 요구된다.

이런 점에서 가추법은 복잡계 이론으로 나아간 현대의 과학풍토에 가장 최적화된 방법론이다. 연구과정은 더욱 상상력이 넘치고 치열하고 지극해진다. 반증가능성에 따라 실패하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 풍토도 필요하다. 잘 실패하면 되는 것이다. 연구결과물인 이론과 법칙에 종속되지 않는다면, 미리 논문을 염두에 두고 결론을 내놓고 연구를 시작할 필요도 없다. 거대한 실험과 실천이 앞에 기다리고 있고, 모험가와 도전가, 혁신가들이 연구자가 된다. 가추법은 근대를 넘어선 복잡계 과학의 선도적인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기존 연구를 레퍼런스로 삼아 그것에 기댈 필요도 있다. 그러나 더 그것을 넘어서는 참신한 것이 필요하다. 다소 엉뚱하더라도 상상력과 사고실험을 더욱 요구하는 연구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연구과정은 무척 재미있어진다. 뭔가 새로운 혁신의 바람이 연구실에서 감돌 수도 있다. 연구자간의 위계 역시도 상당히 불식될 것이다. 젊은 새로운 바람이 환영된다. 기존 연구에 짓눌리지 않는 젊은 연구자의 제안과 가설이 환대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4. 나가며 : 경성과학에서 연성과학으로

우리는 ‘틀리다’가 아닌 ‘다르다’가 존중되는 연성과학적 전통이 아카데미에서도 또 교육과정에서도 싹 트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적인 경성과학은 ‘질문과 대답’, ‘원인과 결과’, ‘근거(ground)와 정의(definition)’, ‘입구와 출구’의 대칭성과 선형성에 입각하여 열쇠개념을 제시하면서 전문가들의 권위를 증대시켜 왔다. 그러나 연성과학은 근거와 정의, 입구와 출구, 원인과 결과 사이가 비대칭적이고 비선형적이기 때문에 엄청난 시행착오와 지극함이 필요하며 더욱 노력하면서도 참신한 가설을 만드는 혁신적인 연구자들을 배태하고 있다.

연구실에서 재미있게 연구하는 방법에는 연구실 자체가 블랙박스처럼 폐쇄 환경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복잡계로서의 현실을 더욱 참신한 경로로 관계 맺을 수 있는 장이 된다면 가능할 것이다. 연구를 마치고 피자파티 한번 하면서 여러 가지 상상력을 발휘하며 참신한 가설을 세우는 젊은 연구자의 모습은 어쩌면 혁신적인 연구의 토양이 마련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더 지극하게, 더 치열하게, 더 참신하게 연구가 진행된다면 출근길에 다리가 그렇게 무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한번 상상해 보자. 연구과정에서 엄청난 상상력을 발휘하는 혁신적인 젊은 연구자의 모습을 말이다. 그것이 바로 과학기술의 미래일 것이다.

이 글은 한국광학회지 2021년 10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댓글 2

  1. 좋은 포스트 잘 읽었습니다. 다만 한가지 지적을 하자면, , 에 해당하는 영어 표기가 바뀌어 있네요. 연역법=deduction, 귀납법=induction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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