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코로나 19시대와 구성적 인간론 ③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확인된 것처럼 이제 ‘사회’는 외부에 주어진 상수가 아니다. 사회 심지어 인간조차 끊임없이 구성해 나가야 하는 것이 되었다. 자연주의처럼 그대로 놔두면 저절로 치유된다는 자가면역, 자가치유력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집사마인드를 가진 새로운 인간론에 대해 말해야 한다. 세계를 돌보고 양육하듯 만들어 나갈 수 있는 더 강건한 인간론을 말해야 한다. 펠릭스 가타리, 웬델 베리, 피터 싱어, 린 마굴리스, 그레고리 베이트슨. 이들의 목소리를 따라 새로운 구성적 인간론을 생각해 보자.

4. 뉴노멀 시대의 구성적 인간론

스튜어드십(Stewardship)은 경영학에서의 용어지만 쉽게 말하자면 집사마인드이다. 기업에 대한 스튜어드십 코드는 ESG[Environment, Society, Governance]를 통해서 주주가 진지전을 펼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불량기업에 대해서 주식을 팔고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주주가 아니라, ESG가 지켜지고 있는지 감시하고 견제하고 심의하는 주주의 모습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행위자가 가만히 앉아서 일이 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부추기고 양육하고 도모하지 않으면 일이 성립되기 어려워진 시대가 찾아 왔다. 우발적으로 고객이 찾아와 넘치고, 소식만 알리면 사람들이 모여들던 시대는 이제 낭만적인 과거의 시대이다. 이제는 어떻게 판을 짜고 도모하고 양육할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된다. 흔히들 청소년의 교육에 있어서 ‘자란다’와 ‘키운다’의 묘한 경계선에서의 논의가 있다. 그러나 ‘자란다’가 자율성이었던 시대가 끝났다. 자연주의처럼 자연을 그대로 놔두면 몸에 털이 자라듯이 저절로 치유된다는 자가면역력, 자발성, 자가치유력의 시대는 지나갔다. 자연주의는 생태주의가 아니다. 어떻게 돌보고 양육하고 보살필 것인지에 대한 제도와 관계망 둘 다의 노력이 자연과 생명에게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팬데믹 상황은 기능적인 완결형인 “관료주의=자동주의=기능주의”를 멈추게 하고, 대신 과정적이고 진행형적인 구성(construction)의 노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구성적 인간론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의미가 아닌 정동(affect)을 통한 인간론의 재생과 부활에 대해서도 주목해봐야 할 것이다. “~은 ~이다”라고 의미화하는 것을 통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어떻게 돌봄, 살림, 모심, 보살핌, 섬김 등의 정동을 수행할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된다. 의미화함으로써 기능과 역할을 부여하던 시대는 사실상 시니어의 의미와 가치부여와 활동가의 기능과 역할의 수행이라는 이분법을 남겼다. 이는 의미화 방식으로 정동을 추출하던 인지자본주의양상과 정동의 생성과 과정 자체에 따라가는 정동자본주의 양상의 차이점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므로 불변자본에 의하여 생산된 기계에 의한 잉여가치가 있다. 이 잉여가치는 자동화 및 생산성과 더불어 발전하며, 경향적 저하를 방해하는 요인들(인간의 노동을 착취하는 강도의 증대, 불변자본의 요소들의 가격의 저하 등)에 의해서는 설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요인들은 도리어 자동화와 생산성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우리도 문외한으로서 말해야 하겠지만 이 문제는 코드의 잉여가치가 흐름의 잉여가치로 변모하는 조건들 아래서만 검토될 수 있을 성 싶다”1

인지자본주의는 비교적 합리적인 유형의 의미화를 통한 코드의 잉여가치(surplus de code)2를 추구한다면, 정동자본주의는 인지부조화와도 같은 모방, 따라하기, 흐름을 통한 흐름의 잉여가치(surplus de flux)3 자체를 추구한다. 정동자본주의에서는 모든 활력과 정동이 권력과 자본을 수반하기 때문에 수많은 관심종자(關心種子)를 낳았다. 자본과 권력은 활력과 생명력과 관련된 정동을 어디로부터 수혈 받을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플랫폼자본주의는 정동을 여타 천연자원처럼 추출하고 채굴한다는 점에서 정동자본주의이다. 이제 플랫폼에서 웃고, 울고, 즐기고, 떠들다 보면 그 이득은 모두 플랫폼이 가져간다. 정동은 인간을 구성하는 생명력이자 활력이다. 그러한 구성적인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정동자본주의는 그저 정동을 소재나 자원으로 바라볼 뿐 구성적 인간의 원천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정동의 토대는 플랫폼자본주의와 정동자본주의를 넘어 살림해방, 정동해방, 돌봄해방, 욕망해방의 지평에 닿아 있다는 점에서 68혁명의 야성적인 메시지와 상통한다.

구성적 인간론 1 : 펠릭스 가타리의 주체성 생산

주체성 생산(the production of subjectivity)는 ‘그 일을 해낼 사람을 만들기’이고, ‘뜻과 지혜와 아이디어를 가진 우리 중 어느 누군가를 만들기’이다. 구성적 인간론의 전모는 펠릭스 가타리의 주체성 생산전략이 사실상 담고 있다. 주체성 생산은 관계망과 배치로부터 기인한 자율적인 주체성의 생산이라는 점에서 관계망 창발이다. 관계망과 배치가 성숙될 때 홀연히 그 일을 해낼 사람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하나의 선택지로서의 특이점(singularity)이 생산되는 순간이라는 점에서 특이성 생산이다. 또한 이질적이고 낯선 것들이 혼합현실을 만든다는 점에서 기계적 이질발생이다. 완성형으로서의 책임주체에게 역할, 기능, 직분을 부여하던 기존의 방식은 사실상 주체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적이고 진행형적인 것을 규명할 수 없는 방식이다. 그 일을 해낼 사람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베일에 쌓여있지만, 가타리는 이를 규명하기 위해서 여러 개념을 사용하고 창안한다. 그것은 의미화를 통해서 기능, 역할, 직분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정동의 흐름 속에서 지도화하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특이점이다. 그러나 일을 도모하고 설립하기 위해서는 판짜는 자와 나서는 자 모두를 필요로 한다. 그런 점에서 나서는 자가 있기 이전에 판짜는 자가 선행되어 있기 마련이다. 팬데믹 상황이 찾아오자, 미리 주어진 주체의 기능정지가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 일을 해낼 사람을 만드는 작업은 근원적인 판과 구도를 결정한다.

구성적 인간론 2 : 웬델 베리의 대지의 양육자와 기후농부

관료주의 시대, 대공장 시대의 인간과 전혀 다른 주체성을 가진 소농은 기후위기 시대에 새롭게 평가받게 될 것이다.  by V. Atakos 출처 : https://www.flickr.com/photos/cgiarclimate/9253204963/
관료주의 시대, 대공장 시대의 인간과 전혀 다른 주체성을 가진 소농은 기후위기 시대에 새롭게 평가받게 될 것이다.
사진 출처 : V. Atakos

팬데믹 이후에 찾아올 기후위기의 상황에서 대지를 양육하고 보살피는 기후농부의 역할은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문명은 테크네(Techne)와 같이 대지를 쥐어짜고 갈취하고 착취하는 관행농의 방향에서 성장해 왔다. 이제 포이에시스(Poiesis)와 같이 돌보고 양육하고 보살피는 소농의 유기농의 방향이 전환사회의 전망을 밝힌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기후농부는 대지를 양육하는 소농이자 전환사회의 마중물이다. 이러한 양육자로서의 소농은 갈취자로서의 전문가와 스페셜리스트와는 구분된다. 착취자는 돈과 이윤을 위해서 전문가를 가장하여 대지에서 갈취행위를 하는 반면 양육자로서의 소농은 대지의 건강과 풍요로움 속에서 수확을 한다. 웬델 베리는 “새들이 알을 낳으면 알을 품듯 양육자는 언제나 생각을 품은 자로 변모하여, 다시 그 생각을 키우는 양육자로 변신한다. 봄이 올 때마다 반복적으로 이상주의적이며 몽상적인 탐구정신은 파종을 거쳐 실제 세상을 키우는 역할을 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소농의 돌봄, 정동, 보살핌, 양육의 과정이 생태적 지혜와 연결되어 있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 “왜?”라는 본질과 이유에 대한 질문을 기반으로 하여 기능, 역할, 직분에 대해서 대답을 쉽게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철저히 괄호치고 “어떻게?”라는 작동과 양상에 대한 질문으로 이행하여 “어떻게 건강한 대지와 생명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것이다. 기후농부는 이러한 양육자의 생태적 지혜를 통해서 기후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구성적인 인간론의 전모를 보여준다.

기후위기 시대는 식량위기의 시대이다. 동시에 먹거리라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핵심적인 생활양식을 바꾸지 않으면 기후위기에 대한 민감성을 갖기 어려울 것이다. 기후농부는 식량위기 시대를 대비하여 먹거리 탄력성을 갖추기 위한 활동가 자신이다. 그런 점에서 미래를 대비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도시와 농촌의 관계는 통속적인 관계로부터 벗어나 그 관계를 재창안해야 할 시점이다. 그 역할을 바로 기후농부가 나서 새로운 판짜기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안다. 아마도 우리 세기에 식량이 돈으로 거래되지 않는 시점이 올 것이라는 점을, 식량위기가 공동체와 마을을 급습할 때 이를 대비해 왔던 기후농부들의 역할이 주목되리라는 점을. (〈기후농부선언문〉 중에서)

결국 기후농부와 같은 전환사회의 마중물로서의 주체성이 구성적 인간론의 전모를 밝힐 인간형인 것이다. 다시 말해 자연의 순환의 과정에 대해서 함께 하고 이를 도모하고 양육하고 부추기는 살림꾼으로서의 주체성인 소농이 그들이다. 소농은 발생 중인 주체성이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서 쉽게 무엇이라고 규정내릴 수 없다. 미래를 일구는 탈성장 전환사회가 농(農) 중심의 사회일 것이라는 예감은 어김없이 소농이라는 주체성에 대해서 주목하게 한다. 그것은 웬델 베리에게는 토착성, 뿌리내림의 장소성, 향토성의 주체성으로 제시되지만, 사실상 어느 한 지점에 점착된 주체의 형태가 아니라 융통성, 민감성, 탄력성의 주체성이기도 하다. 그런 점이 웬델 베리의 아이디어를 넘어선 구성적 인간론을 상상하게 한다.

구성적 인간론 3 : 피터 싱어의 가장자리상황논증과 동물의 대리인

피터 싱어는 유정성(sentience)이라는 고통을 느낄 능력이 동물과 인간 모두에게 있다고 하면서 이익동등고려의 시선을 요청하고 이에 어긋난 동물학대적인 문명을 종차별주의라고 규정했다. 또한 유인원과 인간의 경계가 IQ라는 척도로 보면 6세 아동의 지능을 갖고 있음으로 모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자리 상황논증을 펼친다. 그는 종차별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동물과 인간의 경계를 허물고 동물의 대리인으로써의 구성적인 인간을 제시한다. 가장자리 상황 논증은 구획, 경계를 분명히 하는 합리주의를 무력화하고 중간현실, 혼합현실의 가장자리, 곁, 주변을 개방한다. 생태학에서의 가장자리효과처럼 산과 들, 바다와 육지 등의 가장자리가 강렬도가 높은 바람과 물의 반복과 순환의 영역이기 때문에 생명이 발아할 수 있는 토양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핵심 문제설정의 정중앙에 있는 인물이 아니라, 주변 문제설정의 곁에 있는 인물에게서 구성적 인간론을 찾을 수 있다. 곁과 가장자리는 모호한 중간현실의 지점으로 사이주체성이나 커먼즈, 정동과 같은 영역이 서식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피터 싱어의 가장자리 상황논증은 색다른 주체성 생산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구성적 인간론의 하나의 섹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가족이 와해된 상태에서 동물이 주인공으로 하여 가족을 재구성한 사례가 있듯이 동물의 대리인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구성적 실천의 맥락을 발견할 수 있다. 동물의 대리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도구적 이성의 폐해를 극복하고 혼종적 주체성으로 재탄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 사물, 생명, 기계, 자연 등이 어우러진 혼종적 주체성에 있어서 생명의 역할은 가장자리를 더욱 두텁게 만들고 중간현실로 향할 수 있는 문턱을 개방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 이는 구성적 인간론의 색다른 전략 중 하나일 것이다.

구성적 인간론 4 : 린 마굴리스의 공생명론

팬데믹의 상황에서 공생명론은 다시 부각되었다. 인간의 세포의 대부분은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가 외부로부터 들어와 착상된 것이며, 우리의 DNA는 바이러스의 유전자조각으로 구성된다. 이렇게 미생물과 공동생명체를 구성한 것이 인간이라는 점은 팬데믹 상황에서 방역의 논리를 저해하는 면역의 논리로 치부될 수만은 없다. 생태계의 동적 평형, 미생물과의 균형, 동물과의 조화 등이 깨져버린 현재의 상황에서 공생명론은 어느 때보다 생태적 완충성과 회복탄력성을 필요로 하는 상황임을 보여준다. 물론 유기적인 생명이냐, 생태적 다양성이냐는 철학적으로 심원한 차이를 갖고 있지만, 공생명론은 이 두 가지 요소를 함께 갖고 있다. 생명을 미시적인 영역의 공간으로 이르게 한 것이 공생명론이라면, 온 우주와 생태자연까지 확장한 것이 온생명론이다. 두 생명은 사실상 포괄적인 생명의 상을 밝힌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공생명론과 관련된 린 마굴리스 등의 연구는 사실상 인체의 몸의 구성요소의 대부분이 외부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점을 밝혔다. 사실은 우리가 먹는다라는 행위를 연구해보면 음식과 유전자, 영양물질, 무기질, 유기질 등을 공유하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이를 테면 10억년 전 원시세균이 다른 세균을 삼켰던 이유는 유전정보를 통해서 환경정보를 얻기 위한 점이라는 점에서 먹는다는 행위는 단순히 영양물질 섭취를 위함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공생명론은 발아 중이고 생성 중인 구성적 인간론이며, 팬데믹 상황에서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는 미생물과의 공존의 지도를 그리는 작업이다.

구성적 인간론 5 :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생태계의 특이점

베이트슨의 『마음의 생태학』에서의 논의는 “모종의 복잡성이 마음을 수반한다.”라는 논의로 간략히 생태계의 특이점으로서의 마음을 가진 인간을 드러낸다. 팬데믹 상황에서 마음의 깊은 우울과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그러나 생태계의 복잡성처럼 마음의 성좌와 배치를 자연과 생명으로 향하게 한다면 자연과 생명, 사물, 기계 등은 미학적이고 윤리적인 마음의 성좌로서의 마음생태를 선물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마음은 모종의 복잡성 속에서 조성될 조화와 균형을 가진 하나의 성좌와도 같다. 사실 마음은 사물, 기계, 생명, 자연, 둘레환경에서 유래된 넓이의 마음이 있고,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깊이의 마음이 있으며, 의미와 가치를 통해서 삶의 존엄성을 높이는 높이의 마음이 있다. 이 모든 마음이 한꺼번에 우리에게 광대역으로 주어지며 이를 어떻게 마음의 생태계로 조성할 것인가에 대한 지혜를 갖고 있는 특이점이 바로 구성적 인간이다. 결국 깊이의 마음, 높이의 마음, 넓이의 마음을 어떻게 배치하고 조화롭고 균형잡힌 마음의 생태계를 조성함으로써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삶을 살아갈 것인가가 구성적 인간론의 과제인 셈이다. 펠릭스 가타리는 『세 가지 생태학』(2002, 동문선)에서 정신생태학으로서의 주체성 생산과 사회생태학으로서의 사회적 관계와 사회변혁, 자연생태학으로서의 자연과 인간의 신진대사에 대해서 얘기했다. 이 속에서 정신생태학은 구성적 인간론의 영역인 주체성 생산의 과제를 갖는 우리 안의 마음의 생태계를 다룬 영역이었다. 그런 점에서 베이트슨의 작업은 사실상 마음의 생태계를 통해서 뜻과 지혜를 가진 주체성을 만들어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구성적 인간론의 토대에 대한 이론작업이다.

에필로그 : 뉴노멀의 시대의 인문학

팬데믹 상황은 책임주체의 기능정지를 드러낸 사건이며 미리 주어진 어떤 사회, 인간, 공동체가 있다는 나이브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더 강건한 실존적인 주체성의 영토로 우리는 인도되었다. by geralt 출처 : https://pixabay.com/images/id-4938929/
팬데믹 상황은 책임주체의 기능정지를 드러낸 사건이며 미리 주어진 어떤 사회, 인간, 공동체가 있다는 나이브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더 강건한 실존적인 주체성의 영토로 우리는 인도되었다.
사진 출처 : geralt

뉴노멀의 시대 다시 인문학을 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인문학을 통해서 지혜와 정동의 어떻게(How)를 묻는 것은 지식과 정보의 왜(Why)보다 앞선다. 우리는 이 험난한 과정을 지혜와 정동을 가진 인문학을 통해서 위기를 건너갈 하나의 다리를 만든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란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을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인간의 본질과 이유에 대한 질문을 던졌던 형이상학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말한다. 그리고 작동과 양상으로서의 “어떻게?”를 말하려는 색다른 구도를 근대는 개방했다. 그러나 근대는 쉽게 기능적인 대답을 통해서 이에 응답하려 했기 때문에 대답의 자본주의로 걸려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설정 자체가 갖고 있는 깊이와 잠재성을 응시하면서 발생 중이며 구성 중인 인간에 대해서 주목하게 된다. 쉽게 “~은 ~이다”라고 단정내리지 않는 이유는 복잡계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의 단선적이고 선형적인 이유로만 움직이기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근거(ground)와 정의(definition)은 분열되어 있고 우리는 욕망과 정동의 지도를 그림으로서 근거와 정의를 연결하는 하나의 횡단선을 그릴 수 있을 뿐이다.

팬데믹 상황은 책임주체의 기능정지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정동의 주체, 중간현실의 주체, 관여적 주체 즉 다시 말해 사이주체성이 우리의 삶의 다양한 일상을 구성하고 만들어가는 점이 갑자기 부상하였다. 경제보다 살림이, 자원보다 활력이, 의미보다 정동이 더욱 부각되었다. 우리는 미리 주어진 어떤 사회, 인간, 공동체가 있다는 나이브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사회가 기능정지되고 소실되고 소진되었던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는 사회와 인간이 선험적인 전제조건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나가야 하는 구성 중인 과제임을 발견하게 된다. 구성적 인간론은 하나의 과제로서, 하나의 문제설정으로서,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인간에 대해서 다루는 이론이다. 목적이나 대답, 완성형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확실한 것이 있을 수 없으며, 삶의 현장에서는 다사다난하고 더듬더듬거리고 주저주저하는 듯이 만들어지는 것이 구성적 인간론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모른다는 전제 속에서 이 먼 여정을 떠나야 할 것이다. 근대를 넘어섬과 동시에 더 강건한 실존적인 주체성의 영토로 우리는 인도되었다. 그것은 삶 자체이자 생명 자체인 것이다. 〈끝〉


  1. 들뢰즈/가타리, 『앙띠 오이디푸스』(1998), 147쪽.

  2. 펠릭스 가타리의 코드의 잉여가치(surplus de code)라는 개념은 정동을 포획하는 자본주의의 방법론에 대해서 다룬다. 그 항목으로는 ⓵ 1세계와 3세계의 분리차별, ⓶ 공동체적 관계망의 시너지효과에 대한 자본의 전유양상, ⓷ 그 다음은 골목상권으로의 대기업의 진출, ⓸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⓹ 플랫폼자본주의 양상 등이 있을 수 있다.

  3. 흐름의 잉여가치는 정동의 흐름에 따라 일과 활동을 만드는 대안운동의 전략이었으나, 정동자본주의의 원리로 차용된다. 공동체가 시너지를 발휘하고 이에 따라 정동의 강렬한 흐름을 촉발하고 생성시키는 것은 기존의 대안세력의 중요한 핵심명제였다. 그 항목으로는 내발적 발전전략, 공동체 경제 등이 있다.

신승철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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