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 조각모음] ② 새로움이 가치인 세계의 명암

새로움 추구는 자본주의가 그럭저럭 굴러가게 하는 힘들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고대에서부터 새로움 추구를 중시하는 역사를 이어온 듯하다. 그 결과, 자본주의 속에서 한국이 긍정적인 의미로 돋보일 때도 꽤 있다. 이럴수록 한국의 새로움 추구의 연원과 그늘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신라, 문화 중심의 문자 언어로 나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새 이름

1987년 출간된 《한국철학사》에서 이남영은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신라’라는 나라 이름이 정해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신라는 원래 개국[기원전 57] 이래로 일정한 국명이 정해지지 않은 채로 이른바 사라(斯羅), 사로(斯盧) 혹은 신라(新羅) 등으로 불리어 왔다. 《삼국사기》에 의거한 이 3가지 명칭 외에도 신로(新盧), 서나(벌)(徐那(伐)), 서야(벌)(徐耶(伐)), 서라(벌)(徐羅(伐)) 및 서벌(徐伐) 등으로도 씌었다.1 이에 지증왕(智證王) 4년[503], 당시의 신하들은 국명을 ‘신라(新羅)’로 통일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 취지는 신라(新羅)의 “신(新)은 덕을 닦고 맡는 일에 종사하기를 날로 새롭게 한다는 뜻이고, 라(羅)는 사방 온 누리를 망라한다는 뜻[新者, 德業日新, 羅者, 網羅四方之義]”이라고 밝히고2, 이 제안은 그대로 채택되어 국명을 확정하게 되었다.”3 이 설명에 의하면, 한반도 동남부의 한 작은 나라는 개국 후 무려 57년 더하기 503년이 지난 후, 스스로 나라 이름을 정하여 자신들 뿐만 아니라 타자들에게도 자기들을 신라라고 불러달라고 한 것이다.

서라벌은 박혁거세가 세운 나라의 이름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사진출처 : 문화재청

이남영은 이 새 나라 이름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였던 말인 ‘덕업일신(德業日新)’이 《주역》에 있는 “군자(君子)는 진덕수업(進德修業)하나니”4라는 구절과 “일신기덕(日新其德)이니”5라는 구절을 연결하여 만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6 이남영은 서기 503년 쯤 한반도 동남부 지역에는 이미 《주역》 속의 정치사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그 지역의 정치체를 강화하는 바탕으로 삼을 만한 지식인들이 있었다고 본 듯하다. 이남영은,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는 통치자가 덕으로 다스리는 정치라 할 수 있는 덕치(德治)를, 신라라는 국호를 제안한 지식인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그런 국호를 제안한 것은 권력자에게 낮은 수준이라 할지라도 덕치를 요구한 것이라고 추정한 듯하다. 그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사방 온 누리를 망라[網羅四方]한다는 뜻을 가진 라(羅) 자가 신(新) 자 뒤에 붙은 것도, 새 이름의 주인이 되는 나라가 덕치를 온 누리에 펼치는 중심이 되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새 나라 이름에 담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사방 온 누리를 망라[網羅四方]한다는 말은 덕치의 확산을 설명하는 말로만 해석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정복과 전제(專制)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한 무제의 집정기[기원전 141~기원전 87]에 유교가 국교화되면서 중국에서는 덕치와 전제가 표리관계를 이루게 되었다. 덕치 이념은 전제군주의 폭주를 완화하는 역할도 하였지만 전제군주가 가진 힘이 겉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도록 수식(修飾)하여주는 겉치장의 역할도 하였다. 덕치와 전제가 표리관계를 이루는 정치논리를 503년 쯤 한반도 동남부 지역 지식인들과 권력자들이 받아들이게 하였던 유인(誘因)에는 덕치가 가진 ‘겉치장’의 역할도 포함되어있었을 것이다. 이런 면에 주목한다면 신라라는 작명은 유교 정치 이념의 공인(公認) 보다는 한문화(漢文化)의 유행(流行)의 예증(例證)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그것은 이웃인 동시에 강력한 구심력을 가지고 있는 문화 중심의 문자 언어로 나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새 이름 짓기였다고 할 수 있다.

서라벌·새벌, 생존과 결부된 고대인의 바람이 반영되었던 옛 이름

503년 한반도 동남부 지역에서 성장하던 정치체의 새 이름 신라는 만들어지기까지 몇 단계를 거쳤다. 먼저, 고조선이 멸망하고 한(漢)이 4군을 설치하여 그 지역을 지배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남하한 고조선 유민들이 경주 일대에 정착하는 와중에 작은 나라라고 할 만한 정치체 하나가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7 독자적 문자가 형성되어있지 않은 단계에서도 그 정치체는 토박이말로 된 이름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문자가 없어 그 이름은 토박이말 그대로 기록되어 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신 그 토박이말 이름은 한자를 차용(借用)하여 사라(斯羅)·사로(斯盧)·신라(新羅)·신로(新盧)·서나(徐那)·서나벌(徐那伐)·서야(徐耶)·서야벌(徐耶伐)·서라(徐羅)·서라벌(徐羅伐)·서벌(徐伐) 등으로 여기저기에 표기되었다. 이들 가운데 사로는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에 한반도 동남부 지역에 있었던 작은 나라들 가운데 하나의 이름으로 기록되어있다. 서라벌은 박혁거세가 세운 나라의 이름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는 박혁거세가 세운 나라의 이름을 서라벌이라고 소개하고 서벌·사라·사로 등도 이칭으로 소개하였다.8 이 가운데 지금 여기의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름은 서라벌일 듯하다. 서라벌은 신라의 수도라고 하기도 하지만 서라벌이 팽창하여 신라가 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신라가 꽤 큰 국가가 된 후에도 서라벌·금성(金城)·계림(鷄林) 등 수도의 이름이 신라를 일컫는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신채호는 서라벌을 ‘새라[새라라는 이름의 작은 강]’ 위[북쪽]에 있는 ‘불[벌판]’이라고 설명하였다고 한다.9 이는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연상시킨다. 산지남 수지북(山之南 水之北)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굳이 풍수지리를 동원할 필요도 없이, 이 두 말은 살 땅을 살필 때 항상 염두에 두는 기준으로 오래 전부터 통용되어오던 속설이다. 여기에는 산이 후방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는 믿음이 깔려있다. 산이 뒤에 있을 때, 바람을 막아주고 안전하게 지켜주는 보호막 역할을 하며, 그 앞에 자리 잡은 곳은 안정감을 준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하여 산의 남쪽은 양(陽)한 즉 따뜻하고 밝은 기운이 왕성한 곳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여기에는 물이 기운을 모으고 순환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믿음이 깔려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믿음까지 거론할 필요도 없이 물은 생존에 반드시 필요하며 수로 또한 공동체의 유지에 긴요하므로 인근에 강이 있다는 것이 주거지로서 큰 이점이 되는 것은 상식이라 할 수도 있다. 지금의 서울이 이러한 일련의 사고에 부합되는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고, 서울의 옛 이름인 한양(漢陽)은 한수(漢水) 즉 한강(漢江)의 북쪽 양지바른 땅이라고 뜻을 풀 수 있는 지명이다. 이런 점들을 참고하면 서라벌은, 강의 북쪽에 있는 벌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지형의 보호를 등지고 물을 얻기 쉽고 수로로 이용하기 쉬운 강을 앞에 둔 양지바른 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서라벌·서벌의 서라·서가 한자 동(東)을 의미하는 토박이말 ‘새’와 연관된다는 추정도 있다. 동쪽에서 부는 바람을 샛바람이라고 하는 것과 해 뜨기 전 동쪽 하늘에서 보이는 금성을 샛별이라고 하는 것이 이러한 추정의 방증(傍證)이라 할 수 있다. 이로부터 서라벌·서벌을 ‘동쪽의 들판’을 의미한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에 더하여,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성의 토박이말이라 할 수 있는 소부리(所夫里)에서, ‘소’를 샛바람의 ‘새’와 같이 ‘동쪽’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부리’를 ‘벌판’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 소부리도 서라벌·서벌과 마찬가지로 동쪽의 들판을 의미한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한편, 자기를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여 이름에도 중자가 들어가는 중국에 비하여, 한국의 고대 문화에서는 자기를 중심으로 한 방향에 대한 생각이 상대적으로 희박하였던 듯하다. 그래서인지, 고려시대에 북송 사신 손목은 그의 저서 《계림유사》에서 고려의 동서남북을 뜻하는 말은 중국과 같다고 하였다. 이는 방향에 해당하는 토박이말이 발달하지 않았음을 뒷받침하는 증거일수도 있다.10 그런 가운데 유독 동쪽에 해당하는 ‘새’라는 말만 명확하였던 듯하다. 이는 고대 동북아시아들의 태양 중시와 연관된 현상일 수 있다. 고대인들에게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르는 것은 밝음과 따뜻함을 가져다주는 주기적 사건이었을 것이다. 유독 동북아시아인들에게만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독 고대 동북아시아에서 태양은 중시되었다. 이를 실마리로 태양과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새]이 중시되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런 추정들을 종합한다면 새벌은, 동쪽 벌판일 수도 있고,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에 있는 땅일 수도 있고, 태양의 밝고 따뜻한 빛을 가장 먼저 가장 많이 가장 길게 누릴 수 있는 양지바른 곳일 수도 있다. 한편, 어느 날 새로운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 큰일 난 것이었을 것이다. 새로이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공포와 절망과 죽음을 예고하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새벌은, 매일 새로운 태양이 거듭 떠오르는, 새로움의 땅일 수도 있게 된다. 결국 서라벌/새벌 등의 옛 이름은, 실제 지명으로 기능하기도 하였지만, 고대인의 생존과 결부된 바람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새로움이 가치인 세계의 명암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57년에 한반도 동남부에서 형성되던 어떤 정치체에서는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절실한 바람을 담아 자신들이 사는 곳을 서라벌 혹은 새벌에 근접하는 토박이말로 불렀다. 그들은 날마다 동쪽하늘에서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그들에게 공포와 절망과 죽음이었을 것이다. 그 후 560년이 흘러 503년이 되었을 때, 그 정치체의 최고권력자인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은 휘하의 지식인들에게 나라의 새 이름을 짓도록 하였던 듯하고, 결국 신라라는 이름이 나라의 새 이름이 되었다. 이 이름이 나라 이름으로 처음 쓰인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러나 신(新)에 ‘德業日新’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라(羅)에 ‘網羅四方’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일은 503년에 일어났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였다.

503년 한반도 동남부 일부 지식인들은 신(新)에 ‘德業日新’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남영에 따르면 덕업일신은 ‘덕을 닦고 맡는 일에 종사하기를 날로 새롭게 한다’로 풀이할 수 있었다. 앞서 추정한 바에 따르면 ‘신(新)’이라는 표음에 해당하는 토박이말 ‘새’는, 동쪽을 의미할 수도 있고, 태양과 함께하는 밝음과 따뜻함을 의미할 수도 있고, 날마다 떠오르는 태양이 보여주는 새로움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라의 새 이름 신라에서의 신에 대한 ‘덕업일신’이라는 의미부여는 앞에 열거한 의미들 가운데 새로움에 강조점을 찍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여기에서 다소 과격하게 해석을 끼워 넣어 보자면, 503년에 한반도 동남부의 일부 지식인이 했던 신라라는 작명은 새로움을, 지금 여기의 자유나 평등 같은, 가치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는 실마리를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 들어서서, 한국인들은 새로움을 매사의 기준으로 사고하면서 새로움을 끊임없이 추구할 것을 정체모를 누군가로부터 강요받는 듯한 삶을 살아왔다 사진 출처 : Sushobhan Badhai

앞의 해석이 과격하다고 할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 근거가 무엇이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사람들이 새로움을 미친 듯이 추구하는 것을 보면, 왜 새로움도 자유 못지않은 가치임을 인정하지 않는지 의문이 들 지경이다. 지금 여기에서 새로움이 사고와 행위의 강력한 기준이 되고 있음은 확연하다. 모든 방면에서의 변화의 가속화를 고려한다면, 매사에 새로운가 새롭지 못 한가를 따져보는 태도를 이해하고 용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새로움은 가속화되는 변화와 표리관계에 있으면서도, 중심적인 것의 구심력을 부정하지는 않는 듯하다. 한반도 동남부에서 성장과 팽창을 꾀하는 정치체가 나라 이름을 정하면서 한자의 음을 차용할 뿐만 아니라 유교 경전을 인용하여 작명에 의미부여를 했다는 것은, 우선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당대 동북아시아의 이른바 ‘천하질서’를 따르고자 하는 현실적인 선택으로 볼 수 있지만, 나름의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문화 중심의 구심력을 부정하지 않는 태도를 취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런 일련의 추정과 해석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한국문화에서는 새로움을 가치기준으로 보고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면서도, 문화 중심의 구심력을 부정하지 않는 것을 바람직한 삶의 태도로 보는 문화적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는 생각을 억측으로만 볼 수 없을 것이다.

21세기 들어서서, 세계 모든 사람들 특히 한국인은, 새로움을 매사의 기준으로 사고하면서 새로움을 끊임없이 추구할 것을 정체모를 누군가로부터 강요받는 듯한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낙오자와 냉담자들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집단으로서의 한국 사회는 이러한 요구에 순응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추세는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듯하다. 그런데 그러한 성공의 이면에서 새로움은 끊임없이 자원을 남용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것이 옷이건 기계이건 아니면 노래나 춤이건, 새로움은 낡은 것을 끊임없이 밀어낸다. 그리고 밀려나간 것들은 어디엔가 쌓이게 된다. 그것을 찌꺼기나 쓰레기라고 할 수 있고, 편리하고 쾌적하며 어떤 경우에는 즐거운 소비생활에 따른 엔트로피(Entropy)의 증가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자원 고갈과 표리관계를 이루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K-’라는 식별부호[Identifier code]가 붙은 모든 것은 끊임없이 낡은 것과 잘 쓰던 것과 잘 즐기던 것들을 밀어내서 어디엔가 쌓이게 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503년 이후 1522년 동안 새로움을 가치로 모셔온 결과, 변화가 가속화되는 세계에서 승자 대접을 받는다면 그것은 안심하고 기뻐할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남들보다 쓰레기를 더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의무가 면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1. 李楠永, 〈統一新羅時代의 儒敎思想〉, 韓國哲學會(編), 《韓國哲學史》(上卷), 東明社, 1987, 286쪽, 註. 2).

  2. 《삼국사기》 권4,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4년.

  3. 李楠永, 286쪽.

  4. 《주역》〈건괘(乾卦)〉‘문언전(文言傳)’

  5. 《주역》〈대축괘(大畜卦)〉‘단전(彖傳)’

  6. 李楠永, 286쪽 참조.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로국’ 참조.

  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로국’ 참조.

  9. 《위키백과》 ‘서라벌’ 참조.

  10. 《나무위키》 ‘서라벌’ 참조.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