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탈성장 담론의 실마리를 보여주다 ;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독후기

버트런드 러셀의 수필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문자 그대로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기도 하지만, 여가의 중요성을 힘주어 말하는 글이기도 하다. 이 수필에서 러셀은 노동의 신성함이라는 거짓 이야기가 노동을 노예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유지시켜왔으며, 그 거짓을 유포해서 이득을 본 사람들의 의식마저도 병들게 하였다고 보았다.

수필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1935년에 출간된 버트런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의 수필집 『게으름에 대한 찬양』의 맨 앞에 실려 있다. 이 수필집은 ‘게으름’이라고 하는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기획 출판된 것이라고 한다. 수필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그냥 어쩌다 이 수필집의 맨 앞에 놓이게 된 것이 아닌 듯하다. 출판기획자도 그렇고, 글을 쓴 러셀도 그렇고, 당대 영국 사람들이 이 수필집의 중심 주제를 심각하게 함께 생각하여 보아야 한다고 판단하였던 듯하다.

버트런드 러셀(저), 송은경(역), 『게으름에 대한 찬양』, 사회평론, 1997. (2013년 5월 13일 개정판 17쇄) ∥ Bertrand Russell, IN PRAISE OF IDLENESS,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35.
버트런드 러셀(저), 송은경(역), 『게으름에 대한 찬양』, 사회평론, 1997. (2013년 5월 13일 개정판 17쇄) ∥ Bertrand Russell, IN PRAISE OF IDLENESS,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35.

1935년을 전후한 시기, 이탈리아나 독일뿐만 아니라 서구세계 전반에서 파시즘은 나름 설득력 있는 정치적 지향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영국에서 파시스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다는 아니지만 영국의 유력 정치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히틀러를 대화 가능한 상대로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이 파시스트였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파시즘을 완전히 절멸시켜야 할 정치적 지향으로 보지는 않았던 듯하다는 것이다. 파시즘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가장 호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부류는 자본가들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대로써는 극도의 효율을 가능하게 하였던 자동차 생산방식을 구축한 포드 같은 자본가로서는, 모든 것이 정확히 관리되는 상태를 비교적 손쉽게 얻을 수 있게 하여주는 것으로 보이는 파시즘은 자신이 구축한 생산방식을 더욱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게 하여주는 정치체제를 향한 지향으로 받아들여졌을 수 있었던 것이다. 파시즘과 히틀러가 구축한 제3제국이 얼마 가지 않아 무엇보다도 경제적으로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고 그것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면서 세계의 많은 정치인과 자본가들이 파시즘에 대해 가졌던 기대는 급속히 퇴색되었지만, 자본의 활동에서 창의성이 중시되는 듯한 지금도, 효율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한, 자본가들에게 파시즘적인 관리체계는 매력적인 것으로 느껴질 때가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1935년을 전후한 시기에 서구세계 전반에서 파시즘은 나름 설득력 있는 정치적 지향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를 들여다보는 것은 어쩌면 지금 여기에서 파시즘이 어떻게 자리매김 되고 있는지를 보다 정확하게 살펴볼 수 있는 단서를 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1935년을 전후한 시기, 러셀의 처지에도 주목하여볼 만하다. 러셀은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반전운동을 펼쳤다. 그 결과 그는 대학에서 쫓겨나야 했다. 반전이 옳은 주장이었다는 것과 무관하게 반전을 주장한 러셀이 영국사회에서 칭찬을 받기는커녕 거센 비난을 받고 따돌림을 당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따돌림의 기간을 짧지 않았던지 1918년 종전으로부터 17년이 지난 1935년에도 러셀을 미국 등지를 떠도는 신세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러셀이, 당대의 정치가들 가운데 상당수와 유력한 자본가 다수가 호의적으로 바라보고 있던 파시즘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던 듯하다. 결국 러셀은 1939년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것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고 하는데, 그러한 그의 처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줏대 없는 것으로 보였을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이 수필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읽어보면, 러셀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이 참전하는 것을 찬성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아마도 러셀은 1935년을 전후한 시기의 자본주의가 더 이상 지속될 이유가 없는 체제라고 생각한 듯하고, 그러한 자본주의 속에 숨어있는 문제들이 극대화되어있는 것이 히틀러의 파시즘에 입각한 독일 제3제국이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소멸시키는 것이 인류 전체에게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하여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야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 같다. 이 수필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문자 그대로 게으름에 대한 찬양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1935년을 전후한 시기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도 있다.

“현대의 생산방식은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편 사람들에겐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리석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음을 영원히 이어나갈 이유는 전혀 없다.”

33p

수필 「게으름에 대한 찬양」의 마지막 문단이다. 러셀은 1935년을 전후한 시기 서구의 생산방식이 모두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고 했다. 러셀이 반대했던 전쟁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인류는 사상 초유의 대학살을 겪긴 하였지만, 1920년대 후반에 발명된 페니실린(penicillin)의 예에서 볼 수 있듯 인류를 질병으로부터 구해주는 수많은 약과 의료기술이 등장하면서 수명이 현저히 길어졌으니, 삶이 편안하고 안전해졌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러셀은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고 판단한 듯하다. 러셀은 아직 굶주리는 사람이 있음을 지적한다. 또한 러셀은 기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 늘어났음에도 옛날처럼 힘들여 일하는 사람이 있음을 지적한다. 더 편안하고 더 안전할 수 있는데도 덜 편안하고 덜 안전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뭔가 할 수 있는 좋은 일이 있는데 그것을 하지 않고 있으니 당대의 서구 사람들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러셀은 평가한다. 이렇게 평가하려면 당대의 자본주의가 과잉생산을 하고 있는 상태여야 할 것이다. 결국 러셀에 따르면 1935년의 자본주의는 당대의 현존인구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고도 남을 만큼 과잉생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러셀은 과잉생산은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편중분배와 초과노동을 지적한다. 아마도 당대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과잉생산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지적할 필요가 없었던 것일 것이다. 그에 비하여, 편중분배와 과잉노동은 문제 삼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러셀은 “세상에는 너무나 일이 많으며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에 의해 엄청난 해악이 발생한다” [15쪽] 라고 단언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단언을 직설적으로 바로 정당화하는 대신 역설(逆說)을 통하여 납득시키려한다. 그는 “어떤 정부에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셰익스피어의 얘기에 나오는 살인자를 고용하는 악당과 다름없다. 그 사람의 절약 습관이 돈을 빌려 준 나라의 군비만 증강시키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17쪽] 라고 한다. 한 사람이 열심히 일하고 절약해서 저축을 했다치면 은행은 그 돈을 어떤 나라에 빌려줄 것인데 돈을 빌려간 나라는 군비를 증강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열심히 일하는 것은 군사적 긴장만 강화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억지인 듯 보이기도 하는 설득 방식이지만 이런 화법은 노동이 정작 사람들을 기쁘게 하지는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그가 친구들에게 파티를 열어 주는 데 그 돈을 쓴다면 (아마도) 그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정육점 주인이나 빵굽는 사람, 주류 밀조자 같은, 그의 돈이 쓰여지는 곳의 사람들을 기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지역의 노면 전차 레일 까는 일에 돈을 투자했는데 나중에 그 지역에선 전차가 별로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날 경우 그는 막대한 노동력을 아무에게도 기쁨을 주지 못하는 쪽으로 허비한 셈이다.”

17~18p

노동을 통해 벌어들인 돈이 노동자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는 쪽으로 허비되고 있는데도, 당시의 세상은 그저 열심히 일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사람들이 굳게 믿도록 만들었다고 러셀은 주장한다. 그와 같이 주장하는 과정에서 러셀은 먼저 노동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일이란 무엇인가? 일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지표면 혹은 지표면 가까이 놓인 물질을 다른 물질과 자리를 바꿔 놓는 일이다. 또 하나는 타인들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시키는 일이다.” [18쪽] 그리고 이렇듯 노동을 할 수 있게 하여주는 제3의 계층이 존재한다고 한다. “유럽에는 이러한 일을 하는 두 계층보다 존경받고 있는 제3의 계층이 존재한다. 바로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남들에게 일할 수 있는 은전을 베푼 대가를 받는 사람들이다.” [18쪽] 여기에서 토지는 문자 그대로의 토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장 같은 생산 수단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러셀은 이 제3의 계층이 노동은 신성하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보았다.

“이러한 지주들은 게으르다. …… 그들의 게으름은 불행하게도 타인들의 근면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사실, 안락하게 게으름을 피우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이야말로 역사적으로 볼 때 일해야 한다는 신조가 생겨난 뿌리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본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일 것이다.”

18~19p

“문명이 시작된 이래로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인간은 열심히 일해도 자신과 가족의 생계에 필요한 정도밖에 생산할 수 없었다. 비록 그의 아내도 남편 못지않게 열심히 일했고 아이들도 나이가 차는 대로 노동력을 보탰겠지만 말이다. 최소한의 필요를 웃도는 작은 양의 잉여물이 생긴다 해도 전사나 사제 집단에게 돌아갔다.”

19p
“지주들은 게으르다. 그들의 게으름은 불행하게도 타인들의 근면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by Dương Nhân 출처 : https://www.pexels.com/ko-kr/photo/2817422/
“지주들은 게으르다. 그들의 게으름은 불행하게도 타인들의 근면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사진 출처 : Dương Nhân

지주뿐만 아니라 전사, 사제 집단 등 노동하지 않는 자들이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는 거짓을 퍼뜨렸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믿어야만 노동하지 않는 자기들에게 필요한 몫을 노동자들이 생산해 줄 것이기에 그랬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거짓에 속아 초과노동을 했다는 것이다. 러셀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의무란 개념은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자기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주인의 이익을 위해 살도록 유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져 왔다.”

20p

그러다가 기술이 급격히 진보하는 시기가 오게 되었다는 점을 러셀은 중요하게 지적한다.

“현대의 기술은 여가를 소수 특권 계층만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공동체 전체가 고르게 향유할 수 있는 권리로 만들어 주었다.”

19~20p

“근로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며 현대 세계는 노예 제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20p

“다수의 노동이 가치있는 이유는 일이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여가가 좋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현대 사회는 기술의 발전으로 문명에 피해를 주지 않고도 얼마든지 공정하게 여가를 분배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의 기술은 만인을 위한 생활 필수품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을 엄청나게 줄였다.”

21p

“생산을 과학적으로 조직하면 현대 세계는 노동력 중의 작은 일부만으로도 사람들을 아주 편안하게 지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전쟁은 결정적으로 보여주었다. 당초 사람들을 전투와 군수 노동에 투입할 목적으로 생겨난 그 같은 과학적 조직이 만일 전쟁이 종식된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더라면 노동 시간을 4시간으로 줄이고도 모두들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21p

세계대전으로 다수의 노동자들이 징집되자 국가와 자본가들은 생산조직을 상황에 맞게 개편하였는데, 그런 새로운 조직이 생산을 충분히 수행해 낸 것을 보면, 세계대전 이전에는 쓸데없이 물건을 많이 만들어냈던 것이라는 것이 러셀의 주장이다. 과잉생산의 긴 역사가 드러나 버렸다는 것이다. 생산조직의 개편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당대의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인류의 생활필수품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이 크게 줄었다고 보았으며 그러한 변화가 여가를 지주나 공장주만의 것이 아닌 모든 사람의 것이 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상태에서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하여 노동자들을 더 열심히 일하게 하는 도덕이 있다면 그것은 노예 도덕이라고 러셀은 단언하였다. 러셀은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나가야 인류가 더 행복해지고 더 번영할 수 있다고 한다. [18쪽 참조]
그러나 당대 사람들의 인식은 러셀과 같지 않았다.

“만일 사회를 현명하게 조직해서 아주 적정한 양만 생산하고 보통 근로자가 하루 4시간씩만 일한다면 모두에게 충분한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고 실업이란 것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부자들에겐 충격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여가가 주어지면 어떻게 사용할지도 모를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24p

러셀이 보기에는, 지주와 공장주 뿐만 아니라 전사, 사제 집단 등 노동하지 않는 자들은 일찍이 노동이 신성하다는 꾸며댄 노예도덕을 노동자들이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자기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노동자들이 만들어내게 하더니만, 과학기술과 생산조직이 발달하여 노동자들이 일을 많이 줄여도 자기들을 포함한 모든 인류가 쓸 물건을 충분히 만들게 된 후에도, 자신이 유포시킨 노예도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여, 노동자들에게 여가가 주어지는 것을 위험시하는 병적 의식상태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었다. 러셀이 본 것이 맞는다면, 1935년 유럽의 지배집단은 병적 의식상태에 빠져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지배집단 자신들을 불행하게 할 것임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 같다. 러셀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간다.

“여가의 현명한 이용은 문명과 교육에 의해 가능하다. 평생 동안 장시간 일해 온 사람이 갑자기 일을 하지 않게 된다면 따분해질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상당한 양의 여가 없이는 최상의 많은 것들로부터 차단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박탈을 겪어야 할 이유는 이제 더 이상 없다. 다만 우매한 금욕주의-그나마 자기는 지키지 않으면서 남에게나 강요하는-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과도한 노동을 주장케 할 뿐이다.”

24~25p

우매한 금욕주의 달리 말하자면 노예 도덕은 노동자들에게 초과노동을 강요하여왔다는 점을 러셀은 이미 지적하였다. 나아가 러셀은 그 도덕이 노동자들이 가열찬 노동 이외의 것을 상상할 수 없도록 가두어놓기 때문에, 생산성의 향상으로 여가가 생겼을 때에도 여가를 제대로 누리기 어렵게 만든다고 보았다.

“과거에는 속편하게 노는 것에 대한 수용력이 있었다. 그러나 능률 숭배로 인해 그러한 부분은 사라져 버렸다. 현대의 인간은 모든 일이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자체를 목적으로 일하는 법이 없다.”

29p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능률 숭배로 인하여 사람들은 속편하게 놀 줄을 모르게 되었고, “이익을 가져오는 것만이 바람직한 행위라는 관념이 모든 것을 뒤바꿔 버렸다.” [29쪽]는 점 또한 러셀은 지적한다.

“우리는 생산에 관해선 너무 많이 생각하고 소비에 대해선 너무 적게 생각한다. 그 결과로 우리는 즐거움의 향유나 소박한 행복에는 별 중요성을 두지 않으며 생산을 그것이 소비자에게 주는 기쁨에 근거해 판단하지 않는다.”

30p

“농부들의 무도회는 외진 시골 지역들을 제외하곤 사라져 버렸지만 그들을 도야시켜 주던 그 충동은 여전히 인간의 본성 속에 남아 있음에 틀림없다. 도시 사람들의 즐거움은 대체로 수동적인 것으로 되어 버렸다. 영화를 보고, 축구 시합을 관전하고, 라디오를 듣고 하는 식이다.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의 적극적인 에너지들이 모조리 일에 흡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여가가 더 있다면, 그들은 과거 적극적인 부분을 담당하며 맛보았던 즐거움을 다시 누리게 될 것이다.”

30p

러셀은 즐거움이나 행복이 거세된 노동을 문제시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즐거움과 거리가 있어 보이는 여가에 대해서도 우려하는 듯하다. 도시 사람들의 즐거움이 대체로 수동적인 것이 되어버렸다는 지적에서 그러한 면을 엿볼 수 있다. 이 수필의 제목에서는 게으름이 돋보이나, 글 속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 가운데 하나는 진정한 여가에 관한 걱정인 듯하다.

“유한 계층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결코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 그렇다고 이 계층이 전반적으로 유별나게 똑똑한 것도 아니었다.”

31p

“현대에서는 대학이란 곳에서 유한 계층이 어쩌다 우연히 부산물로 제공하던 것을 보다 체계적으로 제공해 준다. …… 평범한 남녀들이 어떤 일에 몰두해 있는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학문적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 대학의 연구작업들이 조직화되어 있어서 다소 독창적인 방법을 생각하는 사람을 좌절시키기 쉽다는 것이다.”

31~32p

러셀은 1935년 이전 인류의 역사 속에서 유한계급들이 인류를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런 역할을 한 사람들은 유한계급들 중 극히 일부에 불과했음을 러셀을 상기시킨다. 나머지 대다수는 밥만 축내거나 자신들을 먹여 살리는 노동자들을 괴롭히는 짓을 했고 당대에 이르기까지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러셀은 주장한다. 그리고 당대에 들어서는 대학이 과거에 유한계급이 하였듯 문명의 진보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해내고 있기는 하지만, 대다수 대학인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어서 정작 노동자에게 보탬이 되는 일은 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고 러셀을 걱정한다. 러셀은 대학의 연구작업들이 조직화되어 있어서 다소 독창적인 방법을 생각하는 사람을 좌절시키기 쉽다는 점까지도 섬세하게 걱정한다. 그렇다면 이제 인류의 진보는 누가 가능하게 할 것인가? 러셀을 여가를 누리는 노동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이전보다 더 나은 방식과 내용으로 인류를 진보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누구도 하루 4시간 이상 일하도록 강요받지 않는 세상에서는 과학적 호기심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호기심을 맘껏 탐닉할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수준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든 배곯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32p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생의 행복과 환희가 충만할 것이다. 신경 쇠약과 피로와 소화불량증 대신에 말이다. 필요한 일만 함으로써 기력을 소모하는 일 잆이 여가를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가 시간에 지쳐 버리는 일은 없으 것이므로 사람들은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류의 오락거리들만 찾진 않을 것이다. 적어도 1퍼센트는, 직업상의 일에 써 버리지 않은 시간을 뭔가 유용한 것을 추구하는 데 바칠 것이다.”

32~33p

바로 이런 과학적 호기심을 맘껏 탐닉할 수 있는 어떤 노동자가 과거 유한계급이 이루어낸 것보다 나은 진보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것이 러셀의 글 속에 시사되어있는 것 같다.

“모든 도덕적 자질 가운데서도 선한 본성은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자질이며 이는 힘들게 분투하며 살아가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과 안전에서 나오는 것이다.”

33p

문명의 진보에서 더 나아가 러셀은 여가가 보장하는 편안함과 안전이 사람들 내면에서 도덕적 자질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글을 끝맺다.


이 수필은 1935년의 유럽과 아메리카의 상황을 러셀이 어떻게 보았는지를 보여준다. 필자는 러셀이 본 당대의 유럽과 아메리카의 현실이 지금 여기의 현실과 매우 흡사하다고 생각하였다. 러셀은 한 사람이 열심히 일하고 절약해서 저축을 했다치면 은행은 그 돈을 어떤 나라에 빌려줄 것인데 돈을 빌려간 나라는 군비를 증강할 것이라는 식으로 주장하기도 했고, 여기에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과잉생산이 쌓이면 전쟁을 통해서 그것을 해소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러셀의 주장들은 최근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는 것을 떠올리게 하였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전쟁비용을 쏟아 부었는데 그것은 미국이 외국에 빚을지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한다. 또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사용한 무기 하나 미사일 하나가 미국 내에 일자리를 만들고 유지시켜 주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았고, 그것이 또 미국 내의 과잉생산을 해소하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리라는 생각도 해 보았는데, 필자의 상상이 크게 틀리지는 않는 것 아닐까? 또한, 1935년의 도시 사람들이 수동적인 즐거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 대학의 연구작업들이 조직화되어 있어서 다소 독창적인 방법을 생각하는 사람을 좌절시키기 쉽다는 판단 등이 지금 여기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수필은 지금 여기의 현실 바로보기를 1935년 유럽과 아메리카의 현실 보기의 한 예를 통하여 예행연습 시켜주는 것 같은 글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큰 의의를 가지는 이 수필의 한계를 굳이 지적하여 보자면, 러셀이 거의 날카로운 예지력을 발휘하듯 글을 쓰면서도 유럽과 아메리카가 넓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는 현실은 전혀 짚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필자 이 문제에 관하여 보다 섬세하게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더 시급한 문제가 있다는 생각 때문에 이 문제의 논의는 독자 각자에게 맡겨보겠다. 여기에서 필자는 식민지의 보유 여부가 개인의 상상력의 색깔과 넓이에 까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는 점만 밝혀놓고 넘어가려고 한다. 그 영향에는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가 뒤섞여있다는 저도 부가적으로 지적해 두겠다.

또한 러셀은 자원의 한계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러셀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생산방식의 개선을 통한 생산성 향상, 여가를 누리게 된 노동자에 의한 문명의 진정한 진보 등을, 낙관을 바탕으로 확신에 차서 설파한 듯하다. 이러한 태도가 피할 수 없는 맹점 하나는 자원의 한계를 상수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 같다. 필자는 지금의 지식인들과 러셀 사이의 중요한 차이 가운데 하나로 이런 면을 꼽을 수 있을 듯하다.

또한,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러셀은 ‘탈성장’이라는 발상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것 같다. 로마 클럽이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를 낸 것이 1972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러셀이 성장의 한계를 논의의 전제조건으로 부각시키지 않은 것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보여준 대량 살육과 대량 파괴를 이미 경험하고도 성장의 한계를 자기 논의의 주요란 전제로 삼지 않은 것은 그의 사상의 한계 가운데 하나로 지적되어야할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듯 몇몇 한계를 지적하기는 하지만, 필자는 이 수필과 이 수필이 실린 수필집 전체가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수필집을 읽으면서 지금 여기의 현실을 관조할 수도 있었고, 1935년의 사람들도 지금 여기의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외롭지 않다’는 엉뚱한 위안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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