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아이들은 자라서
군장을 메고 탄창을 장전하는
방법을 배우고
이미 눈에 보이지 않게 된 자본의 세계에서
손에 피 묻히지 않고도 끊임없이 죽이는
자신만이 살고, 또 자멸로 이어지는
투명한 폭력을 배운다
맑은 날
무기거래율이 치솟고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에서 계약된 무기가
내가 가본 적 없는 나라의 본 적 없는 아이들을
손에 쥔 것 없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쓰러뜨리는
‘힘에 의한 평화’라는 이름의 군사주의
시집 『유리 광장에서』에 실린 윤은성의 시 「행사장」의 일부다. 이 시는 ADEX(서울 국제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 2023의 에어쇼 행사장에서 무기박람회를 비판하는 저항 액션을 함께 한 뒤에 쓰였다. 나 역시 이 액션의 참여자였다. 우리는 온몸에 붉은 천을 두르고 천천히 걸으며 ‘전쟁 반대’와 ‘무기 거래 반대’를 외쳤다. 행사장은 사람들로 빽빽했다. 가족 단위로 모인 이들이 많아 보였다. 우리를 향해 비아냥대며 작게 웃거나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 작은 웃음과 속삭임이, 굉음을 내며 곡예하는 전투기 소리보다 내겐 더 거칠고 크게 느껴졌다. 아득하고 막막했다. 시의 표현처럼 “끊임없이 죽이는” 폭력의 세계, 폭력을 기본값으로 기입한 세계는 이처럼 가르침 하나 없이도, 자라나는 이들의 숨결과 피부로 흘러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달 1일에는 국군의 날 기념 시가행진이 있었다. ‘힘에 의한 평화’를 말하는 윤석열 대통령이 10년 만에 부활시킨 행진이었다. 그는 2년 연속으로 시가행진을 밀어붙이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 이후 40년 만이었다. 연속적 시가행진의 부활은 군사정권의 부활이자 ‘힘에 의한 평화’의 현현이었다. 이는 비단 남북 긴장 상황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힘에 의한 평화’를 향한 욕망은 지난해 12월, 12.3 계엄령 발표로도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떠들었던 ‘힘’은 군사력의 절대적이고 독재적인 사용이고, 그가 꿈꾼 평화는 무수한 입과 몸을 모조리 표박함으로써 얻는 고요였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 힘과 평화 모두가 이제는 수치스러운 것이 되었다. 추위와 어둠을 뚫고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의 비폭력 저항, 군인들의 태업과 불복종 덕분이었다. 매주 퇴진 집회와 행진을 이어 온 시민들 덕분이었다. 이는 윤석열이 말하는 힘이 아니라, 다른 힘을 통해 일궈낸 결말이다. 이때 다른 힘이란, 저항하는 힘이다. 국가 수장의 무력과 폭력에 맞선, 시민의 비폭력이라는 힘이다. 결말이라 말하기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이 힘을 만나고 경험한 것만으로도, 이 힘을 기억해냈거나 늘 기억하고 있었던 다수의 대중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지난 ADEX 에어쇼 행사장에서 느꼈던 나의 막막함은 크게 사그라드는 듯했다.
위에서, 윤석열이 하도 떠들어대서 이미 오염돼버린 것만 같은 ‘힘’이라는 단어를 굳이 끌어와 ‘다른 힘’이라고 쓴 데에는 이유가 있다. 책 『전쟁 없는 세상』에서 저자 마이켄이 말한 다음의 대목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평화주의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는 평화주의를 수동성과 연관 짓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비폭력은 오히려 갈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이에요.”
갈등, 혹은 폭력이 휘몰아치는 비상사태에 비폭력과 불복종으로 대응하는 것은 대항폭력 못지않은 적극적 액션이며, 그것이 발휘하는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계엄 시도에 맞서, 사람들은 지금 죽을힘을 다해 싸우고 있다. 잃으면 안 될 것을 잃지 않기 위해. 그 무엇보다 적극적인 투쟁의 방식으로. 이에 대한 뒷받침처럼 마이켄은 비폭력이 단지 도덕적이라서 비폭력 저항이 필요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짚는다. 객관적 데이터에 기반한 통계 연구에 비추어볼 때, 그 효과 면에서도 비폭력 투쟁의 성공률이 폭력적 투쟁보다 두 배 이상 높다.
러시아의 공격에 노출된 우크라이나의 상황에 대해서도 저자는 같은 논리를 적용한다. 무장 투쟁만큼이나 위험한 실험이 될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비무장 저항이 더 큰 희생과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식이라는 것. 그러면서 우크라이나 바깥에 있는 이들이 우크라이나의 비무장 투쟁을 조력하는 방법을 소개하기도 한다. 조력 또한 당연히 비무장의 방식인데, 그 대표적인 예가 국제 동행 또는 비무장 경호다.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 인도네시아 등의 시민들이 우크라이나로 건너가 우크라이나 사람들과 동행하고 이들을 경호하는 것이다. 러시아 군대가 공격에 나서지 못하도록. 인적 드문 밤길이 위험하다 느낄 때 친구들과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는 경우처럼 말이다.
비폭력 저항의 힘
그렇다면 우크라이나의 핵심적인 지원국이었던 미국이, 트럼프 정권으로 교체되자마자 푸틴의 편에 서려 하는 지금의 정세에서는 어떤 움직임이 필요할까. 유럽연합은 연합 측에서 동결한 러시아 자산 2천 196억 달러(331조 원)의 압류 가능성을 논하며 러시아를 압박하려 하고 있다. 나는 적어도 이 같은 조치가, 우크라이나에 공급할 무기를 지원하는 데 해당 비용을 쓰는 쪽으로 흐르는 방식이 아니라, 경제적 압박을 통해 러시아를 멈추게 하는 힘으로 작동하기를 바란다. 또한 국제사회의 시민들은 이스라엘의 수장 네타냐후에 대한 조치처럼, 푸틴을 국제형사재판소 법정에 세울 것을 요구하는 운동을 만들어나가길 바란다.
책 속으로 조금 더 들어가보자면, 이 책의 재미 포인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책에서는 시니컬한 포즈의 ‘회의론자’라는 가상의 인물이 불쑥불쑥 등장해 마이켄에게 질문을 퍼부어댄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기존 질서를 잡음 없이 따르며 일상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평범한 이들의 보편적인 목소리이기도 한 듯 보인다. 마이켄의 비무장 투쟁 제안에 대해 ‘회의론자’는 가감 없이 따져 묻는다.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푸틴 정권에 위협을 느끼는 모든 나라에 대한 너무 순진한 대답 같아요. 군대를 해산하고 침략에 맞서 비무장 투쟁을 시작하라고요?”
“그럼 모두가 푸틴의 지배를 받도록 내버려두자는 건가요?”
어떤 대답이 나올지 궁금했다. 마이켄은 이렇게 답한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누구의 지배를 받도록 내버려두자는 얘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 잠시 상상해봅시다. 러시아처럼 완전 무장한 국가가 군대도 없는 주변 나라들에 둘러싸여 있다고 가정해보는 거예요. 위협적이지도 않은 나라들을 상대로 수십 억 달러를 무장에 쏟아붓는 지도자를 러시아 국민들이 얼마나 오래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렇다. 지도자의 자리는 시민의 지지 없이 지속되기 어렵다. 권력은 시민에게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독재 정권이라 한대도 국민들의 다수 의지에 반하는 행위를 강행할 수는 없다. 필요도 없고 가치도 없는 일에 나라 살림을 지속적으로 탕진하는 수장은 머잖아 저지당하거나 아웃되고 말 것이라는 얘기다. 마이켄은 이어 말한다. 설령 러시아가 중무장을 하고 이웃 국가들을 침략할 기회를 계속 노리더라도 유럽 전역의 시민들이 강하게 맞선다면 이들을 통제하는 데 얼마나 막대한 자원이 필요하겠냐고. 이때 내 마음 한편에 돋아난 목소리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회의론자’가 대신 질문을 던진다. 그렇게 되면 민간인 사망자 수가 엄청나게 늘어나지 않겠냐고. 마이켄은 답한다.
“저는 비무장 투쟁을 인간이 시행착오를 통해 배워가는 현재진행형 실험이라고 봅니다. 인류는 수 세기 동안 전쟁을 실험해왔지만 그 모든 전쟁이 지구상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번영과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했잖아요. 그러니 저는 제안하고 싶습니다. 전쟁과 불의에 맞서는 비무장 투쟁에도 몇 세기 동안 기회를 줘보자고요.”
이 같은 대답은 일견 피상적이거나 관조적인 것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마이켄의 대답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변주한 듯한 주디스 버틀러의 다음 문장에 기대어보는 건 어떨까.
“폭력에 저항하는 것은 맞폭력이라는 주장이 제기될 때,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폭력은 항상 순환 중에 있고 이미 우리가 폭력장 안에 있다 하더라도, 폭력의 순환이 계속될 것인가의 여부에 의견을 내놓고 싶지는 않은가? 항상 순환한다고 해서 순환이 불가피하다고 결론지어야 하는가? 순환의 불가피함을 반박한다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지는 않겠는가?”
폭력의 순환을 끊을 수 있을까?
『비폭력의 힘』에 쓰인 이야기다. 버틀러는 책의 후반부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우리가 비폭력이라는 윤리적 의무에 묶여 있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서로에게 묶여 있기 때문이라고.
마이켄의 목소리 역시, 즉 ‘비무장 투쟁’과 ‘비폭력 저항’이라는 실험에 대한 제안 역시, 영원할 것만 같은 폭력의 순환 고리를 어떻게든 끊어보자는 간절한 요청인 것이 아닐까. 그걸 끊음으로써만 필연적으로 상호의존적이며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우리 삶의 구조 속에서, 더 늦지 않게 서로를 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행사장>이라는 시 속의 경고처럼 “자신만이 살고, 또 자멸로 이어지는” 세계와는 이제 그만 결별하기 위한, 보다 급진적인 투쟁의 방식에 관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