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미 클라인의 『도플갱어(Doppelganger)』는 “좌파인 나 자신이 어떻게 우파의 거울상과 같아 보일 수 있는가”라는 혼란스러운 자기 인식과 그 정치적 효과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 그런데 왜 ‘도플갱어’라는 단어를 선택했을까? 사실상 이것은 책 구조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물음이다. 거울상—도플갱어는 단지 개인적 혼동 이상의 철학적, 심리적, 정치적 층위를 함축한다.
왜 도플갱어인가?

도플갱어는 ‘나’의 내부 타자이자 기이하게 닮은 타자이다. 이는 단순히 좌파-우파라는 정치적 진영 논리를 넘어서, 동일성(identity)과 차이(difference)의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 존재다. 프로이트의 원래 개념인 ‘Das Unheimliche’를 경유하면 도플갱어는 무의식적으로 억압되었던 자기(self)가 외부에서 불쑥 등장한 것처럼 느껴져 낯설고 불쾌한 감정을 유발한다. 클라인의 시선에서 좌파 내부의 자기검열, 자기회피, 그리고 정치적 혼란은 바로 이 ‘낯설고 기이함’의 감정에서 비롯된다. ‘나는 내가 아닐 때에야 나일 수 있다’는 정치적 은유는 좌파 진영 내부의 도덕주의, 순수주의, 단일한 주체성의 허구를 비판하면서, 분열된 자기를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클라인에 따르면 도플갱어는 현대 사회의 문화를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이른바 ‘도플갱어 문화’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며 복제의 향연을 펼친다.(온라인 페르소나, 아바타, 개인 브랜드화, 가상 정체성, ai 인격체..등) 또한 개인, 문화를 넘어 국가도 분신을 둘 수 있다는 대목에서 도플갱어 논의가 어떤 확장력을 지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민주주의에서 독재주의로. 세속주의에서 신정주의로. 다원주의에서 파시즘으로.(…) 다른 곳에서는 거울에 비친 상처럼 가깝고도 친숙하게 느껴진다”는.
좌파와 우파: ‘미러링된 적대성’
나오미 울프와 나오미 클라인은 ‘여성 지식인’ 이미지를 공유하지만 전혀 다른 정치 노선을 택하고 있다. 그런데 좌파-우파 지식인들은 코로나, 기후위기, 세계화 등 동일한 문제에 대해 각기 해석을 시도하며 거의 유사한 언어와 정동 구조를 활용한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아이러니는 바로 이러한 우파가 좌파의 언어를 훔쳐 쓴다는 사실이다. 좌파는 자신을 우파와 구분 짓기 위해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정화하려 든다. 그런데 결국 그 둘의 말과 욕망은 닮아 있다. 이 점에서 클라인은 우파가 단순히 반대편이 아니라, 좌파가 억압한 어떤 정동이나 욕망, 혹은 자기 모순의 반영일 수 있다고 암시한다. 즉, 좌파와 우파는 완전히 다른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공통된 감정 구조 안에서 ‘어긋난 접촉면’을 가진다는 것이다.클라인과 울프의 관계도 그런 어긋난 접촉의 정치적, 상징적 형상이라 볼 수 있다. 클라인은 좌파와 우파는 구분되지만 동시에 서로를 반영하는 거울 관계에 놓인다는 점을 착안하여 도플갱어로 개념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도플갱어』는 개인 정체성과 정치적 동일시의 균열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이에 프로이트의 ‘언캐니(Das Unheimliche)’는 정치적 실천의 심리적 조건을 보여주는 도구로 사용된다. 또한 프로이트적 맥락에서 도플갱어는 단순한 쌍둥이 이미지를 넘어선다. 도플갱어란 나 자신이지만, 나와 닮아 있어 더 불편하고 낯선 존재다. 낯선 것은 본래 친숙했으나 억압되어 돌아온 것이라는 프로이트의 언캐니 논의를 클라인의 도플갱어에 대입하면, 울프는 ‘나’와 전혀 다르지만 이상하게도 닮아 있는 존재, 즉 좌파로서 내가 부정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품은 ‘나’의 반영일 수 있다. 그렇기에 울프를 바라보는 경험은 단순한 정치적 혐오가 아니라, 일종의 자기 불안, 즉 언캐니한 만남일 수 있다. 그래서 도플갱어는 심리적 현상일 뿐만 아니라, 21세기 정치의 정체성 교란(dis-identification)에 대한 제언처럼 보인다.
도플갱어는 두려운 존재이지만, 자기 성찰과 윤리적 재정립을 가능하게 한다. 좌파/우파는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서로를 비추고 조작하는 거울 이미지(mirroring image)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단순히 좌파 비판서도, 우파 풍자도 아니다. 도플갱어라는 개념을 통해 ‘자기 동일성’이라는 믿음을 흔들며 정치적 주체성의 재구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버틀러식의 수행성과도 연결되는 이 시도는 현시대 정치적 혼란을 철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 과제를 연결하며, 또는 스케치

나오미 클라인의 『도플갱어』는 정동(affect), 이미지 정치(image politics), 탈진실(post-truth)이라는 키워드들을 반복적으로 호출하며, 사라 아메드의 『감정의 문화정치』와 상당한 접점을 형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동: 감정의 교차점으로서 정치
『도플갱어』에서 클라인은 ‘정서적 유사성’과 ‘감정의 미러링 효과’에 주목한다. 특히 도플갱어(나오미 울프)와의 이상한 동기화는 혐오, 불안, 공포, 배신감 같은 감정들이 어떻게 정치적 동원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아메드가 말한 “감정은 몸과 사회를 연결하는 표면에서 작동한다”는 논의와 맞닿아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 감정은 단지 내면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며 대상들을 구성하고, 경계를 긋고, 공동체를 만들거나 해체”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백신 거부 운동에 대한 정서적 동일시는 ‘진실’보다 ‘느낌’에 기반한 연대로서 정동적 공동체로 볼 수 있다.
이미지 정치: 브랜드화된 정체성과 정치적 기표
클라인은 ‘브랜드로서의 자아’를 통해 이미지가 신념과 정체성을 대체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 나오미 울프가 여성운동의 이미지에서 반(反)백신 음모론자의 이미지로 이동하는 과정이 그 사례이다. 한편 아메드는 “감정은 몸에 흔적을 남기고, 이미지화되는 정치적 방식으로 대상화된다”고 말한다. 특히 ‘혐오’ 감정은 특정 타자에게 이미지를 입혀 놓고, 그것을 ‘대상화된 감정-대상’인 사회가 공유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가령 울프가 ‘자유’의 상징처럼 소비되며, 그녀의 이미지가 감정적 소비의 대상이 되는 방식을 연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탈진실: 진실보다 ‘느낌’이 앞서는 시대

클라인은 음모론과 극우의 성장에서 중요한 동인을 “사실이 아니라 감정이 진실을 대체하는 경향”으로 보는데, 이것이 바로 탈진실 정치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아메드는 “진실이란 감정적으로 설득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단지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이 진실을 형성하는 방식이 되어 버리는 시대라는 뜻이다. 가령 좌파가 ‘팩트’를 제시할수록 우파는 더 ‘느낌’에 기대는 논리를 구축하는 방식을 통해 감정의 정치적 도구화를 드러낸다.
종합적 연결
이처럼 『도플갱어』를 감정 정치의 해부서로 본다면, 정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진실’과 ‘정체성’이 어떻게 브랜드화되고 이미지화되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좌파가 왜 헤매게 되었는지 어느 정도 명료하게 밝힐 수 있지 않을까. 아메드처럼 클라인도, 감정은 단순히 ‘속마음’이 아니라, 사회적 경계를 긋고 정체성을 분할하는 힘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 둘의 작업은 ‘몸-감정-정치’라는 하나의 지형에서 교차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가며
「윌리엄 윌슨」1의 윌슨은 자신의 도플갱어와 만날 때마다 혐오와 공포를 느낀다. 윌슨이 자신의 도플갱어와 조우하고 결국 자기 파괴의 길로 가는 것은 죄의식과의 치열한 대립처럼 보인다. 마찬가지로 좌파와 우파의 조우는 자기 정체성의 경계를 흔든다. 정동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를 지탱하는 억압적 구조의 공모자들이다. 우리 자신을 욕망의 층위에서 바라본다면, 좌파와 우파라는 양극의 시소놀이가 서로를 지탱하는 시선의 욕망 가운데서 대칭을 이루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이 야기하는 다양한 감정을 통해 타자를 사랑(혐오)하며 그 사실을 확인받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구조 속에서 자기 존재의 확신을 얻으며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애드거 앨런 포의 단편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