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이 뻐근할 때면 나는 집 바로 뒤에 있는 북한산으로 달리러 간다. 달리기에는 나만의 규칙이 있다. 오르막은 달리고, 내리막은 걷는다. 처음엔 버거웠지만, 점점 실력이 붙으면서, 이제는 그 규칙을 곧잘 지켜가며 달릴 수 있게 됐다. 달리기 코스 중간 즈음엔 공터가 있다. 그곳에 도착하면 잠시 한두 바퀴를 걸으며 숨을 고른다. 어느 날, 평소처럼 공터를 걷고 있을 때였다. 까치 한 명(命)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마치 사람처럼 한 번에 하나씩 말이다. 새가 계단을 그렇게 오르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한적한 오후, 사람 하나 없는 숲속. 나뭇잎들이 서로 쓰다듬는 소리 사이로, 까치 한 명이 돌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며 문득 느꼈다. 이 비인간 동물은 그 자체로 고유한 존재라는 것을. 만약 이동이 목적이었다면, 그 멋진 날개로 단숨에 날아올랐을 것이다. 먹이를 찾으려 했다면 주위를 살피거나,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시력으로 멀리 있는 목표를 포착해 곧장 낚아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단지 계단 근처를 관찰하다가 계단을 오르는 인간의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그들이 없는 틈을 타 따라 해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모습은 단순히 “새가 인간을 따라 하다니 신기하다!”는 감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먹고, 자고, 놀며 살아가는 ‘하나의 존재’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운 다양한 감정이 밀려왔고, 그중 큰 하나는 분명 ‘존중’에 가까웠다.
‘자기인식 실험’이라는 것이 있다. 동물의 얼굴에 빨간 점을 찍고 거울 앞에 세워, 스스로 달라진 모습을 인식하는지를 확인하는 실험이다. 까치는 이 실험을 통과한 몇 안 되는 동물 중 하나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까치를 ‘인격체’로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인위적인 방식으로 자격을 부여하는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은, 오히려 새로운 차별의 기준이 되기 쉽다. ‘이 기준에 들어맞아야 인정 받는다’는 논리는, 기준 밖에 있는 수많은 존재를 배제하고 침묵하게 한다. 그날 내가 까치를 보며 느낀 감정은 실험에 따른 이성적인 판단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미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어떤 타자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신비’를 받아들이는 감각이었다. 까치만 그런 존재일까? 아니다. 내 주변의 모든 존재는 내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진정한 존중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세계는 인간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그 탓에 수많은 고유의 세계들이 매일 같이 무참히 파괴당하고 있다.
세계 어디를 가든, 공장식 축산업의 축사는 열악하다. 좁은 공간에 빽빽이 갇혀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는 이들의 모습은,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열등한 생명체처럼 보이기 쉽다. 그러나 인간 역시 같은 환경에 갇혀 자유를 박탈당한다면, 그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일 것이다. 아무리 지적 능력이 뛰어난 인간이라도 독방에 갇히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누구와도, 심지어 같은 인간인 간수와도 ‘인간적인’ 방식으로 소통할 수 없다. 그저 정해진 시간에 음식을 먹고, 정해진 시간에 잠드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렇게 비인간동물이 열등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놓고, 그 겉모습만을 보고 판단한다. 그러곤 그들을 고문해도, 유전자를 조작해도, 강제로 임신시켜도, 밤낮의 구분 없이 스트레스를 줘 알을 낳게 해도 괜찮다고 여긴다. “어차피 그들은 열등하니까”라는 섣부른 자기 합리화와 함께 말이다.
그러나 농장에서 살아가는 동물 한 명, 한 명은 고유한 존재이며, 도덕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생명이다. 그들 중에는 자식을 극진히 아끼는 마음을 가진 이도 있고, 지능이 높은 이도 있으며,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지닌 이도 있다. (이 경우 대부분은 시멘트 바닥에 내던져져 천천히 죽어가도록 방치된다) 산책을 즐기는 이, 놀이를 좋아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돼지’, ‘닭’, ‘소’라는 이름 아래 뭉뚱그려진 종의 일부가 아니고, 가격표가 붙은 상품이나 단백질 덩어리도 아니다. 이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삶을 느끼고,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며 공포에 떨고, 마취가 덜 된 상태에서 목이 베이며 피가 빠져나가는 고통 속에서 살아있는 몸으로 사지가 잘려 나가는 고통을 생생히 경험한다. 우리는 그런 ‘한 명’을 조각내어 먹고 있는 것이다.

비인간동물을 진심으로 존중하게 될 때, 우리는 ‘인간’이라는 개념이 ‘동물성’에서 벗어나 주위의 모든 생명을 지배할 명분을 얻기 위해 발명된, 편협한 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는 경계를 넘어서, 지구 위의 다양한 존재들과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겸허히 받아들일 때, 오히려 더 깊은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균형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평안을 얻는다. 나는 그 평안 속에 살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절대 녹록지 않다. 우리는 살면서 반려동물이 아닌 비인간동물을 진심으로 존중해 본 적이 있는가? 일 분, 일 초를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자기 착취를 강요받는 삶엔, 그런 여유도, 계기도 사라져 버렸다. 그저 인간에게 호감을 살 수 있도록 품종 개량된 개나 고양이가 애교를 부리는 영상을 자기 전 몇 분 보는 것으로 ‘동물을 좋아한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동물을 좋아하는 것’과 ‘동물을 존중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그들이 귀엽고 예쁜 모습으로 등장하는 15초짜리 영상에 매료되어, 15년 이상 살아갈 생명을 마치 물건처럼 쇼핑하듯 구매한다. 그리고는 기대와 다르다는 이유로 학대하고, 방치하고, 심지어 버리는 일도 여전히 비일비재하다. 그렇게 길들었다가 버려지는 동물은 매해 10만 명이 넘는다. 2024년엔 106,824명에 달했다. 길들인 생명을 유기하는 것은 그를 직접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지 말고, 입양하지도 말고, 촬영하지도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비인간동물을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동물을 ‘애호’가 아닌 ‘존중’으로 마주할 때 느낄 수 있는 평화를 더 많은 사람이 경험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