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니 이제껏 가장 긴 장(章)은 강의실이 아닌 학생 책상 위에서 쓰였다. 구치소 출소 후 할 일을 찾아 인터넷을 기웃거리다 우연히 알게 된 과외브로커. 대치동 사무실에서 면접을 본 후, 바로 다음 주부터 수업에 투입되었다. 그 인연으로 이십 여 년 간 이어진 과외생활이다.
강남과 잠실 일대의 고급 아파트나 한적한 주택에서, 매일 서너 개의 수업을 하며 동분서주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일 년 늦게 얻은 역사교육과 졸업장은 임용시험을 포기한 내게 자연스럽게 과외선생님 직함을 준 셈인데, 메가스터디의 손주은이 ‘손사탐’으로 유명세를 얻을 때였다.
때로는 만삭의 몸으로, 때로는 깁스를 한 채로 마주했던 기묘하고도 치열했던 세계. 성적, 학생관리, 학부모와의 관계 그리고 돈 관리. ‘선생님’이라는 고용자가 되어 홀로 맞닥뜨리게 된 키워드들이다. 생존을 위한 그 장은 내 안의 새로운 감각도 열어 젖혔다.
지금까지 ‘슬기로픈 깜빵생활’이라는 큰 제목을 달고 모두 여섯 편을 연재했다. 생지연 식구들과 밥 먹다가 얘기 끝에 한 번 웹진에 써보라는 권유에 깊은 생각 없이 글쓰기 시작했었다. 기억을 더듬어 한 편으로 생생하고 또 아득한 이십 대의 나를 돌아보았다. 이제 내 안에 남은 말들이 있나? 그 질문에 [슬기로픈 과외생활] 연재로 답해볼까 싶다.
공민왕, 그 애
역삼동 L아파트. 수업은 밤 10시부터 두 시간 동안, 다른 수업처럼 매주 두 번씩 하기로 정했다. 삼수생이라 했다.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다가 한국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공부 중이었다. 전년도 입시에도 떨어지는 바람에 낮에는 대형 재수 전문 학원을 학교처럼 다니고 밤마다 과외를 하고 있었다. 그 아이의 특이한 이력만큼이나 신선한 것은, 슬쩍 들춰 본 미국 고등학교 역사책이었다. 미국냄새 나는 두꺼운 교과서는 역대 대통령들의 프로필 모음 혹은 전기나 평전 같았다.

처음 들어선 집안 공기는 미국 냄새만큼 이질적인 부자 냄새가 났다. 금박이 테두리로 둘러진 목재 진열장은 와인빛 감도는 앤틱 브라운 톤이고, 푹신한 크림색 소파와 커다란 화분으로 가득했던 거실이 나를 맞이했다. 아니 정확히는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아이 아버지였다. 여느 아버지라면 집에 계시지 않을 낮 시간이 첫 약속이었다.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그 분은 한 쪽 다리를 꼰 채 안경을 치켜 올리며 나를 응시했다.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를 챙겼다. 생각지 못한 의외의 인물은 꼼짝 않고 버티고 앉았다. 다른 집들은 대체로 아이의 엄마가 반가운 얼굴로 웃으며 먼저 아이에 대해 자랑 섞인 방어적 몇 마디로 첫 인사를 했을 터였다.
좀처럼 무거운 분위기가 가시지 않을 때, 옆에 서 계시던 부드러운 인상의 어머니가 “선생님, 아이 방은 이 쪽이에요” 하며 나를 안내했다. 저 편에 서 있던 아이도 걸음을 옮겨 내 옆에 나란히 섰을 때였다. 묵묵하던 그 아버지가 그제야 우리 앞에 마주 일어서며 입을 뗐다.
“열심히 공부 안 하면 맞을 줄 알아!”
게다가 엉덩이를 때리는 것 같은 그 느닷없는 스윙 몸짓은, 애를 때리는 건지 선생을 때리는 건지 둘 다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다음날 수업을 소개해 준 브로커에게 이 장면을 가감 없이 전했다. 수업은 어땠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일갈했다.
“워낙 못 배워서.”
그녀에 의하면, 그 아버지는 국민학교밖에 못 나왔지만 유명 브랜드 의류 수입업체 사장님이었다. 아들의 입시성공으로 자신의 ‘가방끈이 짧은 한’을 풀고 싶었던 ‘K-자수성가’의 일면이랄까. 첫 수업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아이가 책상을 툭툭 두드리며 “선생님, 이거 좀 보세요.” 그 표정은 자랑이라기엔 조금 냉랭한 구석이 있었다. 아버지는 소위 명문대에 입학한 입시성공담을 신문스크랩해서 아들 책상 유리커버 밑에 매번 끼워 놓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맹렬한 관심과 정성에 가려지긴 했지만, 어머니의 소리 없이 강한 간식 내조를 잊진 않았다. 밤늦은 시간에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챙겨주신 간식쟁반. 종류별 초콜릿, 초코빵, 초코과자로 가득한 그것은 음료마저 초코우유였다. 저녁시간과 한밤중 사이, 그 흐릿한 경계의 시간에, 다른 수업들을 마치고 헐레벌떡 모여 앉은 아이와 선생에겐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수험생의 시간은 길고도 짧았다. 늦게 사탐(사회탐구) 수업을 시작하는 삼수생은 더욱 그랬다. 수능이 다가오니, 문과생이 한국사를 비롯한 선택과목 사회탐구 영역 네 과목들만 챙기기엔, 국영수 주요과목들도 무시할 수 없는 형국이랄까. 시간에 정신없이 쫓기고 있었지만, 다행히 평소에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실시하는 모의고사 말고도 매달 학원에서 자체 모의고사가 실시되었다. 아이에게 성적표를 보자고 했다.

“학원 친구가 제 성적표를 빌려 달라고 했어요” “깜빡했어요, 다음번에 꼭 가져 올게요”
결국 수능까지 단 한 번도 아이의 성적표는 보지 못했고 자신의 성적을 구두로만 전해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360점인가 맞았어요”라고 했다. 당시에 그 점수면 k대도 가능했다.
수능 전날 밤에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의아한 마음에 집어든 휴대폰 너머로 아이가 다급히 물었다. “선생님, 공민왕이 뭐 했다 그랬죠?”
오 마이 갓! 공민왕과 노국공주와의 사랑 얘기를 했던가? 그들의 사랑은 비극적 결말이었고 그 애에 대한 부모와 과외선생의 기대도 그렇다. 사람 일이 그러하듯 기대대로 되지 않는 일이 수두룩하다. 시간과 돈을 쏟아 부어도 말이다. 벌써 삼십 년이 흘러서 이제는 중년에 이르렀을 내 학생들. 그 중 독보적인 충격과 공포로 기억되는 ‘공민왕, 그 애’를 소환해 보았다.
다음은 조왕신과 시루떡으로 기억되는 거문고 타는 소녀 이야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