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졸업 논문을 쓰고 있다. 대학원 생활을 앞서 경험한 이들에게 ‘학위 논문 쓰기의 곤경’에 대하여 익히 들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밀도 있는 작업이라는 걸 온몸으로 체감한다. 자기 전이나 이른 아침이면 하루에 몇 페이지, 몇 단락만큼은 써내자고 스스로 약속하지만, 그것은 대개 다짐으로만 끝난다. 어떤 날은 ‘지금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고 있지?’ 하는 우스꽝스러운 신세 한탄에서부터, ‘심사 통과’라는 부담감이 거세게 밀려와 온몸을 짓누를 때도 있다. 분량은 또 어떤가. 찾던 소단락에 도움이 될 학술 논문을 찾아 진도가 나갈 줄 알았건만, 한 페이지도 겨우 써 내려가는 날이 있는가 하면, 예상치 못한 대목에서 흐름이 트여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몇 시간씩 몰입하는 날도 있다.
한편으로는 최대한 정제되고 학술적인 언어와 표현으로 글을 쓰다 보니 일상의 감각이 무뎌지기도 한다. 틈을 내주고 오랫동안 지켜보기보다 예리한 판단이, 누군가의 말에 귀 기울이기보다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는 글쓰기가 일상의 언어를 야금야금 잠식할 때면 아찔해질 때도 있다. 학문적 글쓰기를 통해 ‘전문적 지식’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때론 상아탑의 언어가 만들어 내는 갑갑함이 일련의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는 『권력과 지성인』(1996)에서 지성인이란 방대한 지식의 소유자나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사이드가 보기에 지성인이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의 앎을 마치 칼처럼 날카롭게 벼리되, 그 지식을 자신의 전문성을 세상에 알리고 권력을 키우는 데 쓰기보다, 타자의 고통과 연대할 수 있는 자리를 찾는 데에 쓰는 사람1이다.
여기에서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것들을 생각해 본다. 제아무리 설득력이 있고 통찰이 가득하더라도, 이 글이 독백으로만 끝난다면 그것은 쓸모없는 글이 되고 말 것이다. 글쓰기란 아주 단순하게는, 한국어의 경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이어 붙이고 가끔은 그 사이를 띄워 가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단순함이 항상 유효한 것은 아니다. 형식에 따라 글은 삶의 복잡함과 나란히 걸을 때도 있고, 때론 삶과 무관해질 때도 있다. 공부하는 사람에게 글쓰기는 숙명과도 같은 일일 텐데, 나는 여기서 어떤 형식으로든 나의 글쓰기가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헤아려 본다. 소울컴퍼니는 그런 점에서 일종의 실험과도 같다. ‘자기 이야기’와 ‘자기 인식’ 사이의 긴장을 버리지 않고, 꾸준히 자신의 유혹과 싸우며 나아가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신쌤2의 정동(affect) 역할론을 통해 글쓰기를 생각해 본다. 신쌤은 정동을 이렇게 소개하신 적이 있다.
“정동(affect)은 사물의 본질에 있지 않고, 사물의 곁에 서식합니다. 본질과 곁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 소유권이지요. 어떤 지주가 등기부상으로 땅을 가졌다면, 그 땅을 돌보고 관리하고 부드럽게 살리는 소작농이 동시에 있을 수 있습니다. 땅의 소유권이라는 본질은 지주에게 있지만, 정동은 땅의 곁에 있는 소작농에게 있는 셈이지요. 정동, 사랑, 욕망과 같은 영역은 사물, 상황, 인물, 장소 등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배제되고 주변화되어 가장자리에 머물러 왔던 영역입니다. 그러나 정동의 영역이 세상을 살리고 재창조하고 돌본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본질이 아닌 곁, 가장자리, 주변을 살핌으로써 그것을 닦고 돌보고 살려냈던 보이지 않는 주체성에 대해 알게 됩니다.”3
결국 글쓰기 역시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세계와의 마주침과 얽힘 가운데 이뤄지면서 새로운 구조와 이야기를 마련할 수 있다. 말과 글을 공연히 어렵게 만들지 않고서도(이오덕), 누군가에게 읽히고 들릴 수 있는 글이 될 때에야 비로소 세상의 파편이 사실은 글의 자리, 글의 내용임을 알게 될 것이다.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의 『바냐 삼촌 (Дядя Ваня)』(1897)의 결론부에서 조카 소냐는 숱한 좌절과 어려움으로 허무함에 사로잡힌 삼촌 바냐에게 이렇게 말을 건넨다.
“바냐 삼촌, 우리는 살아갈 거예요. 길고 긴 낮과 밤들을 살아갈 거예요. 운명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이 시련을 꾹 참고 견뎌 낼 거예요. 우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지금도, 그리고 늙어서도 쉴 새 없이 일할 거예요!”4
글 쓰기는 길고 긴 낮과 밤들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처럼 지루하고 긴 시간을 할애하는 행위다. 누가 이 시련을 꾹 참고 견딜 수 있을까. 쉬이 끝나지 않는 지루하고 긴 호흡으로 결국 그 글이 누군가를 향해 열려 있다는 사실을 붙잡고 한 글자 한 글자를 써 내려갈 때 결국 서로에게 가닿을 것이다. 글은 결코 닫힌 채로 쓰이지 않는다. 서로를 향해 열린 채로, 다름을 알고 싶어 하는 호기심과 타자를 향한 마음을 품고서 써나가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