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지리학개론- 장소』 중 ‘젠트리피케이션 편’에 사례 덧붙이기

13년 5개월 동안 정의로운 노동과 페미니즘, 탈핵과 기후위기를 논하고 이와 관련된 실천을 도모했으며, 채식과 농사, 바느질 등 각종 실험들을 꾀했던 울산의 대안문화공간 품&페다고지. 성소수자들이, 채식인들이, 여성들이, 농부가 또는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독립예술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며 다른 이들과 만나는 장소였고 일상을 나누는 삶의 공간이었으며 사회변화를 도모하는 정치적 공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2021년 11월, 품&페다고지는 젠트리피케이션에 밀려나게 되었다.

“들리는가? 오버! 젠트리파이어들에게 쫓기고 있다. 오버!”

그러니까, 한때, 골방 시절이 있었다. 언제 어떻게 털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자취방에 들어설 때마다 누가 들어온 흔적 없나 꼼꼼히 살폈던 시절. 공장 노동의 고단함조차 잊고 우리들은 긴장과 안심이 묘하게 어우러진 마음을 나누며 밤새 뭔가를 도모했다. 그때는 그곳이 우리의 정치적 공간이었다. 한밤중, 자취방 짐을 가방 하나에 싸서 혼자 도바리치던 공포의 밤을 기억한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골목과 자취방들은 세상을 바꿔보겠다던 열정과 함께 생생하게 묻혀있다. 그때 우리를 쫓던 이들은 정보과 형사들이었다.

그런데, 지금도 우리는 쫓기고 있다. 이제 우리를 쫓는 이들은 젠트리피케이션을 이끌고 있는 젠트리파이어들이다. 2008년 6월 대안문화공간 품&페다고지는 장춘로 거리에 자리를 잡았다. 13년 5개월이 흘렀고, 창문 밖 은행나무는 부쩍 자라 키가 2층에서 3층 끝자락까지 올랐다. 부동산의 ‘부’자도 몰랐던 그때 우리는 이곳이 문화의 거리가 될 거라 예견하며 이 자리에 터를 잡았고, 덕분에 지금 우리는 쫓겨나갈 처지가 되었다.

이사를 자주 했던 나의 개인사에 비춘다면, 이곳은 내가 가장 오래 머문 곳이라 머문 시간으로 따지자면 나의 고향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그리고 이곳은 나만의 고향이 아니다. 품&페다고지에는 우스갯소리가 하나 있다. “부모가 오면 자식이 안 오고 자식이 오면 부모가 안 온다.” 그러니, 이곳은 혈육으로 얽힌 고향이 아니다. 그러면 어떤 고향인가? 열여섯에 품&페다고지를 처음 찾아왔던 YJ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오랜만에 왔다. 그녀에게 여기는 어떤 곳이었을까?

“저는 여기 와서 처음으로 내 속마음을 얘기해도 괜찮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독서모임하면서 내가 토론을 즐긴다는 것도 알았죠.” 그녀는 말한다. 자신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졌다는 경험이 놀라웠고 어디를 가서도 자신을 소개할 때, 여기에서의 경험을 얘기한다고 말한다. 얼마나 그 장소에 오래 살았느냐와 상관없이 자신이 받아졌다는 환대의 경험이 고향의 의미를 구성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정의로운 노동과 페미니즘, 탈핵과 기후위기를 논하고 이와 관련된 실천을 도모했으며, 채식과 농사, 바느질 등 각종 실험들을 꾀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가치로 만나면서, ‘편하지 않지만 그렇다 해서 불편한 것은 아닌’ 관계들을 유지하려 애쓰며 때론 충돌하고 경합하기도 하고 서로를 기웃거리며 토닥이기도 했다. 탈학교 청소년들은 스스로 배움의 장을, 정의로운 세상을 꿈꿨던 청소년들은 토론의 장을 열었고, 독립예술인들은 콘서트, 연극, 독립 영화로 시민들과 만났다. 이곳에서 성소수자들이, 채식인들이, 여성들이, 농부가 또는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독립예술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며 다른 이들과 만났다. 길게 이어진 인연도 있었고 짧은 만남도 있었다. 만남의 장소였고, 일상을 나누는 삶의 공간이었으며, 사회변화를 도모하는 정치적 공간이기도 했다. 2년 전에는 평등사회노동교육원, 평화밥상연구소, 채식평화연대라는 새로운 식구들이 들어와서 한 지붕 아래 네 단체를 이뤘다. 그때 어떤 이가 이렇게 말했다. “와, 울산에서 가장 핫한 곳이 되었네요.”

그런데, 나는 지난달 한 부동산 업자로부터도 똑같은 말을 들었다. “이곳은 울산에서 가장 핫한 곳이에요.” 품&페다고지 정면에 울산시립미술관이 들어서고, 그 뒤로 대단지 아파트가 건설 중이다. 2년 전 이곳의 오래된 도서관과 공원이 허물어졌고 그 앞에 있던 거대한 키의 느티나무가 뽑혔다. 그리고 울산에서 놀라운(?) 곳이라며 지역 언론에서 칭송받았던 품&페다고지는 11월 말까지 이곳을 떠나야 할 운명이며, 울산시립미술회관은 바로 다음달 12월에 개관식을 한다. 장춘로는 도심으로부터 벗어난 지역으로 골목 곳곳에는 오래된 인쇄소, 옷수선 집, 자전거방, 반찬가게, 분식집 등 조그마한 가게들이 오밀조밀 이웃하며 나란히 있다. 여기서 50년 넘게 살아온 동네 주인아저씨들은 이제 젠틀(gentle)하게 상승할 것을 꿈꾸며 집값과 땅값을 수군수군 속삭이고 있는, 하, 수상한 요즈음이다. 나는 지금 평당 5천만 원짜리 하는 곳을 깔고 앉아 밥 먹고 놀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내 평생 이리 호화스러운 생활은 처음이다. 물론, 곧 쫓겨나갈 판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우리는 13년 5개월의 시간들을 송두리째 뽑힐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두 달 동안 울산 곳곳을 발품 팔며 뒤진 결과, 지금 우리가 들고 있는 돈으로는 갈 곳 없으며 울산 곳곳이 빈틈없이 개발 열풍에 휩싸여 있다는 무서운 현실만 손에 쥐었다. 혹시나 새로 들어올 건물주인에게 지하에 있는 소극장이나마 살려볼 수 있을까 싶어 지금 건물주인에게 물었다.

  • 나 : 이곳엔 이제 누가 들어와요?
  • 건물주의 : 그쪽에서 말하지 말래요!
  • 나 : 네? 왜요?
  • 건물주인 : 모르겠어요. 하여튼 말하지 말래요…

웬 비밀스런? 우리를 쫓고 있는 이들은 누구야? 아주 오래 전 그 한겨울 밤의 식은땀이 기억난다. 세상 모든 이들로부터 쫓기는 듯 했던 그날 밤처럼, ‘투자가치, 투자가치, 투자가치, 투자가치….’ 하며 골목골목 수군대는 소리들 사이로, 낯선 이 되어 거주할 곳 찾아 오늘도 거리로 나서야 한다. “쿼바디스, 품&페다고지?”

품&페다고지는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가치로 다양하게 만났던 장소이다. 2013년 여성의 날, 송전탑반대투쟁을 하던 밀양주민들과 울산시민들의 첫 만남.

“울산에서 가장 핫한 곳이네요.” 2년 전 네 단체가 한 지붕 아래 모이면서 들었던 소리를, 이제는 부동산업자가 다른 맥락에서 말한다. “이곳은 울산에서 가장 핫한 곳이에요.”

품&페다고지 바로 건너편에 울산시립미술관이 올 12월에 들어서고, 덕분에 우리는 11월 말에 이곳에서 쫓겨나간다.

하루

울산시 중구 장춘로 거리에 있는 대안문화공간 품&페다고지에서 오래토록 살고 있다. 소극장 품과 도서관 페다고지는 2008년 6월 임대 계약을 맺고 4개월째 울산의 노동자 시민들의 피와 땀이 배긴 긴 노동 끝에 10월 10일 문을 열었다. 우리는 이곳이 자본을 너머 선 다양한 만남과 실천을 실험하는 장소가 될 것을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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