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과 팬데믹

팬데믹을 둘러싼 주류 담론들은, 1) 국민국가의 경계선을 토대로 하는 주권국가 중심의 통제 전략, 2) 인간중심주의적 세계 이해, 3) 신체에 대한 수동화 및 개체화, 4) 도구적 합리성의 언어(자연에 대한 과학적 통제, 통계와 예측을 통한 수량화에의 집착)의 득세, 5) 팬데믹을 기준으로 한 시간성의 단절과 그에 따른 노스텔지아의 낭만화 등으로 요약된다. 정동의 정치학은 이러한 주류 지배 담론에 대한 효과적인 치료술이 될 수 있으며, 팬데믹의 상황 속에서 집단적 신체의 힘을 증대시켜 슬픔의 연결망을 기쁨의 연결망으로 전환시킬 단초를 제시할 수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시작된 팬데믹의 시대는 우리에게 슬픔의 연결망을 떠올리게 했다. 이 연결망에는 중국의 야생동물 시장의 쇠창살 안에 갇힌 동물 무리, 인간 통제를 위해 전지구적 지침을 내리는 국제기구들, 팬데믹을 이윤 창출의 절묘한 기회로 보는 제약회사, 최소한의 의료적 조치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가는 빈곤 국가의 희생자들과 전지구의 빈곤자들, 국경 봉쇄 속에서 그 지위가 더 취약해진 이주민과 난민 등이 있다.

팬데믹의 이 슬픈 연결망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by James Beheshti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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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의 이 슬픈 연결망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사진 출처 : James Beheshti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이 연결망을 관통하면서 인간 신체에 도달한다. 팬데믹의 이 슬픈 연결망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신체가 개체 차원으로 한정되지 않고, 외부의 힘들에 의해 규정되는 관계의 총화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쉽사리 피하거나 선택할 수 없는,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구성하는 그 무수한 요소들의 망 안에 우리의 몸이 있는 것이다. 운명처럼 다가오는 슬픔의 망을 벗어날 방법은 있는가? 없다. 아니 바깥의 낙원, 유토피아는 그 어느 곳에서도 존재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저주받은 운명의 노예일 뿐인가? 희극은 존재할 수 없는가? 팬데믹 속에서 어떻게든 기쁨의 삶을 긍정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최선의 길 안내서가 있다면 그것은 스피노자의 저작들, 그의 정동이론일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이렇게 ‘외부의 힘에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 필연적으로 정동된다는 점은 우리 신체의 취약성이자 슬픔의 원동력이 아니라, 우리의 비할 수 없는 강점이자 기쁨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팬데믹을 둘러싼 미디어의 무수한 보도, 그것의 정치경제학 그리고 각종 의학 담론은 죽음과 고통의 공포를 극대화하면서 우리의 약한 면만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킬 뿐이다. 그것들에 따르면 신체는 외부로부터 침투된 바이러스의 희생물이며, 따라서 바이러스는 그리고 신체는 통제되어야 할 대상으로만 접근될 뿐이다. 팬데믹을 둘러싼 이러한 주류 담론들은, 1) 국민국가의 경계선을 토대로 한 주권국가 중심의 통제 전략, 2) 인간중심주의적 세계 이해, 3) 신체에 대한 수동화 및 개체화, 4) 도구적 합리성의 언어(자연에 대한 과학적 통제, 통계와 예측을 통한 수량화에의 집착)의 득세, 5) 팬데믹을 기준으로 한 시간성의 단절과 그에 따른 노스텔지아의 낭만화 등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는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을 포함하는) 존재의 해방 기획 및 새로운 세계 짓기의 과정을 떠올리지 못하게 제약하며, 현재의 지배질서와 통제시스템을 정당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나는 정동의 정치학이 이러한 주류 지배 담론에 대한 효과적인 치료술이 될 수 있으며, 팬데믹의 상황 속에서 집단적 신체의 힘을 증대시켜 슬픔의 연결망을 기쁨의 연결망으로 전환시킬 단초를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을 아래와 같이 단편적으로 개괄하고자 한다.

첫째, 인간이 아닌 비인간 동물의 관점에서 보면 현재 인류가 겪고 있는 팬데믹은 예측이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불가피한 것이었다. 공장식 축산의 형태로 고기를 생산하는 방식은 인수공통 바이러스의 등장 및 바이러스의 진화 가능성을 필연적으로 증대시키기 때문이다. 코로나-19의 시초가 식용 야생동물 시장의 동물에서 비롯된 것이든, 실험실의 동물에서 비롯된 것이든 상관없이, 인간과 동물의 비대칭적이고 위계적인 관계 및 밀집도가 높은 동물의 생활환경은 슬픈 정념에 사로잡힌 병든 동물 무리의 생산, 미생물과 공생할 수 없는 동물의 운동능력 및 신체력의 약화, 축산종의 다양성에 비례한 변이 바이러스의 생성 가능성, [오늘날의 로지스틱스 혁명을 고려했을 때] 빠르고 광범위한 인간 신체로의 전파 등을 계기로 삼아 현재의 팬데믹 상황을 연출하게 했다. 그렇다면 오늘날과 같이 인간중심주의에 기초한 동물의 도구화가 지속되는 한, 팬데믹은 예외가 아니라 정상상황의 가시적 예화와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인간과 동물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서로의 영향을 견뎌낼 뿐만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자신의 존재보존 및 확장의 힘으로 전환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들 사이의 관계맺기 방식의 재설정이 필요하며, 오로지 그때에만 팬데믹은 극복될 것이다.

하향식 지휘체계의 가동은 전지구적 협치 하에서 힘을 잃어가던 국가 주권 및 그 요소로서의 규율기관들의 권위와 정당성을 회복시켰다. by Nick Fewings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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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향식 지휘체계의 가동은 전지구적 협치 하에서 힘을 잃어가던 국가 주권 및 그 요소로서의 규율기관들의 권위와 정당성을 회복시켰다.
사진 출처 : Nick Fewings

둘째, 팬데믹의 정치경제학이 우리에게 확인시켜주는 것은, 바이러스를 둘러싼 인간과 동물의 경계뿐 아니라 국가 간 경계, 나아가 세대·지역·종교·젠더·섹슈얼리티·계급 등 기존의 모든 형태의 범주적 경계가 더욱 강화되고 심화된다는 점이다. 관련된 모든 통계자료는 기본적으로 국가와 지역을 기본 단위로 삼아 매일 새롭게 갱신되는 양적 논리를 따른다. 각국 정부의 최고통수권자로부터 시작해 관계 당국과 지방정부를 거쳐, 병원, 동사무소, 학교, 군대, 일터, 종교시설, 유흥시설로 이어지는 하향식 지휘체계의 가동은 전지구적 협치 하에서 힘을 잃어가던 국가 주권 및 그 요소로서의 규율기관들의 권위와 정당성을 회복시켰다. 위로부터의 힘[매개하는 권력]의 강화는 필연적으로 누구와 어떤 만남을 가질 것인가에 대한 선택권(이로운 만남과 해로운 만남을 선별할 수 있는 능력)을 아래로부터 민주적으로 형성할 기회를 제한받게 만들며, 그것은 이후 팬데믹 상황의 최대피해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규정, 화폐수급 및 지급의 기본단위로 설정되는 가족에 대한 구획화, 노동과정과 유통과정 안에서의 중요도에 대한 구별, 직업(군인·의료인·교육자 등)과 세대(노년·중장년·청년 등)에 백신접종의 순위 부여 등 국가가 자신의 질서를 유지 및 계획하기 위한 선별과 배제의 논리를 동일성의 계열을 따라 관철시킨다. 즉 위로부터의 힘은 팬데믹의 정치경제학을 통해 국민을 반복해서 재생산하는 것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기본단위, 몸의 동일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신체는 자신의 부분들 간의 관계로 구성된다.”(『에티카』 4부 정리39) 그리고 그러한 부분들의 수와 구성은 늘 변화가능하다. 우리의 몸을 하나의 개체로서가 아니라 무수한 부분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관계로, 따라서 다양체로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몸의 경계는 늘 유동적이고 우리의 노력에 따라 매번 새롭게 재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이성과 합리성에 의해 인간의 신체를 지배 및 장악하고자 했던 근대성의 기획은 좌절하였는데, 그러한 지배의 기획마다 (집단적) 신체의 능력은 그 기획을 좌초시킬 만큼 흘러넘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팬데믹의 상황 속에서 신체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는 것 마냥, 이성의 기획에 의해 관리될 수동적인 희생물로 전락했다. 무력한 신체가 있는 곳에서, 아니 신체가 무기력해진 그곳에서만 합리성의 통제 권력은 자신의 힘을 발현할 수 있다. 그 결과 오로지 과학계와 의료계, 거대 제약회사와 거대 병원만이 진단-격리-예방-치료의 유일하고 합법적인 전문가의 자격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들은 여기에 정치가 끼어 들어서는 안 되며, 감정(몸의 정동적 반응양식)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사유와 판단은 사회의 두뇌인 전문가가 해내야 할 고유의 업무이며, 사회의 몸이자 세포들은 두뇌의 통제에 말없이 따를 것을 강요받는다. 물론 합리적인 사고와 판단은 중요한 것일지 모른다. 우리는 원인을 알고 싶고, 우연성이 가져올 위험을 벗어나길 원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합리적인 사고와 판단이 왜 두뇌의 문제여야만 하는가에 있으며, 왜 전문가만이 우리 몸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판단할 유일한 주체여야 하는가에 있다. 스피노자의 정동 개념과 몸 개념에 대해 들뢰즈는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우리 몸의 수동성이 능동성으로 전환되기 위해서 몸은 그 해법을 별도로 배울 필요는 없다. 대신 몸은 일정한 조건 하에서 원인과 하나의 관계를 창출하거나 몸을 구성하는 관계를 확장함으로써 원인을 감쌀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우리 몸에서 발생하는 어떤 현상을 알기 위해 필요한 것은 몸과 분리된 두뇌의 작용이 아니라 몸 그 자신의 기쁨의 구성과 그 안에서 공통 관념을 형성하는 일이다. 일단 우리가 다른 신체와의 마주침으로 기쁨의 공통관계를 구성하고, 그러한 관계를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기쁨의 원인을 포함하는 새롭고 더 큰 몸을 구성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정동은 어떤 점에서는 우리가 마주치는 다른 몸의 손상과 파괴를 일으키지 않는 그 몸에 대한 포식이자, 존재의 삼킴이며,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구성되는 새로운 신체화이다. 우리는 이러한 공통신체의 구축을 통해서만 원인에 대한 적실한 앎에 도달할 수 있다. 정동의 윤리학이 근대의 도구적 합리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와 정동될 수 있는 존재를 발견하고, 그와의 마주침이 서로의 존재를 보존하는 기쁨의 관계를 맺을수록 우리의 힘이 늘어나며, 그와 나란히 우리의 앎도 확장되는 것이다.

넷째, 팬데믹의 담론은 우리가 마스크를 쓰고 함께 모여 떠들고 밤의 시간을 자유롭게 누렸던 시절의 향수로 가득 차 있다. 팬데믹 이전과 팬데믹 이후의 시간을 단절적으로 구성하고, 팬데믹 이전의 시대로 안전하게 복귀, 회복하는 것을 주류 담론은 목표로 삼는다. “일상의 회복”이라는 말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삶이 비정상적임을 함의하고 있으며, 언제가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면 없었던 듯이 살아갈 수 있으라는 희망을 배포한다. 이것은 팬데믹 이전의 시기에도 비인간 동물에게 팬데믹이 있었고, 빈곤지역에서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간 생명들이 있었으며, 자본주의의 냉혹함 속에서 사라진 생명들이 있었음을 과거에 대한 향수로 지워버리는 기능을 한다. 우리의 과제는 (여전히 고통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과거로 회귀하여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이다.

이제 우리는 팬데믹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시대, “트러블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시기로 접어들었다. by Benjamin Wedemeyer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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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팬데믹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시대, “트러블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시기로 접어들었다.
사진 출처 : Benjamin Wedemeyer

이에 대해 정동의 정치학은 유의미한 대답을 제공한다. 정동의 정치학은 수동 정서를 능동 정서로 변형시키는 기획으로 구성한다. 이때 우리의 과제는 새로운 기쁜 관계를 구성하고 슬픈 관계를 해체하는 것이다. 이는 곧 새로운 몸을 구성할 지속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팬데믹은 우리에게 슬픔의 연결망을 보여주었다. 갇혀 있는 동물들의 고통과 슬픔, 빈곤 지역의 질병과 아픔이 바이러스라는 매개를 통해 집단적・사회적 신체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팬데믹을 둘러싼 지배적인 담론 및 정치경제학은 우리 신체의 정동되는 힘을 약화시키고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정동의 정치학은 이러한 슬픔의 연결망을 기쁨의 연결망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방향으로 삼을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아닌 비인간 존재들과 슬픔과 우울, 기쁨과 희망의 정동을 나누면서 팬데믹이 확장 시킨 고통의 연결망을 기쁨의 연결망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리라.

정동의 정치학에서 다른 이들에 의해 정동되는 것은 ‘덕’이다. 이는 정념을 수동적인 것, 극복하거나 통제해야 할 것, 타인에 의해 영향받지 않는 것을 ‘강한 것’으로 보는 서구 근대적 사유와의 결별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가장 강한 자는 최소한으로 정동되는 자가 아니라, 반대로 최대로 그리고 최고의 방식으로 정동되는 자”이다. 이러한 명제는 현재의 팬데믹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을 새롭게 독해할 수 있도록 영감을 제공한다. 팬데믹의 비극 속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희망은 우리가 (비인간을 포함한) 타자들에 의해 최대로 정동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집단적 신체의 잠재력이 쌓여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힘을 긍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는 “윤리적・정치적 활동을 위한 대안적 경로를, 더욱이 실재를 있는 그대로 통과할 수 있는 길을 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때로는 강한 형태의, 때로는 약해진 형태의) 팬데믹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시대, 해러웨이식으로 말하자면, “트러블과 함께 살아가야”하는 시기로 접어들었다. 더 정확히는 우리는 항상적으로 팬데믹과 살아가고 있었지만, 인간중심주의의 시선에서 그에 대해 무지했었을 뿐이다. 이것은 이전과는 다른 세계를 만들기 위한 상상력을 요구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신체를 하나의 개체가 아닌 관계의 다발로 생각도록 관점을 이동시켜야 한다. 이에 따르면 “하나의 새로운 관계가 더해지면 더 큰 하나의 몸이 구성되고, 하나의 관계가 깨지면 그 몸은 약해지거나 해체된다.” 그리고 팬데믹을 경유하는 정치적 기획은 팬데믹의 비극이 낳은 우리의 유일한 자산인 슬픈 연결망을 어떻게 보다 확장된 기쁨의 연결망으로 재구성할 수 있느냐가 되어야 한다.

오귤희

연구공간L 연구원, 생태적지혜연구소 조합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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