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리된 시간을 의미있게 견디는 법 –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며 군복무 기간의 ‘격리’를 떠올려 본다. 그리고 전역 이후 코로나19 상황이나 기후위기 시대의 전지구적 운명 또한 거대한 수용소와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과 에크하르트 톨레의 저서를 통해 인간의 자기 감금이라는 이 거대한 ‘수용 상황’에서 어떻게 해방될 수 있는지 말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마음챙김’을 통해 풀과 같은 모양새를 갖추는 것이 아닐까?

1. 슬기로운 수용생활 말하기

군대 이야기는 지겹다. 답답한 선후임과 갑갑한 지휘체계, 본인만 유독 고생한 것 같은…. 수용소 이야기는 궁금하다. 얼마나 참혹했을까…. 인간사회는 어디까지 처참해질 수 있는 걸까…. 이 책은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한 개인의 생생한 체험기이다. 2차 세계대전의 참상과 전개과정 등을 객관적으로 다룬 보고서가 아니라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그러면서 교훈적이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엄한 존재이고 모든 사람은 인생을 살아갈 마땅한 이유를 가지고 있음을 설파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그의 이력 자체가 굉장한 설득력을 가진다. 홀로코스트(독일 나치 정권에 의한 타인종·소수자 대학살)라는 사건은 인류가 공인하는 흑역사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당사자들은 크나큰 시련을 겪었고, 생존자가 지켜낸 사상은 엄정한 검증과 테스트를 겪었다고 인정된다. 이 책의 저자 빅터 프랭클의 책이 널리 읽히고 또 유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랭클은 자신이 겪은 시간들을 정제하여 철학적 사상과 정신치료 방법으로 승화시켰다. 그로 인해 수많은 유럽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되찾고 전쟁의 상처를 치유받을 수 있었다. 그는 마블 세계관의 등장인물 ‘캡틴 아메리카’를 떠올리게 한다. 캡틴 아메리카가 자신이 ‘슈퍼솔져’였던 경력을 자기가 잘난 인간임을 증명하고 세계대전도 안 겪어본 ‘요즘 것’들을 비하하는 데에 사용했다면, 그는 ‘꼰대 아메리카’ 취급을 받았을 것이고 지구를 수호하는 어벤져스 팀에 합류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 군대 경험담은 아래의 이유로 지겨운 것이 아닐까. 지난하고 힘들었으며 일정 부분 대의를 위해 희생한 경험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공공적인 말하기가 되는 것에는 대부분 실패하기 때문에. ‘라때’(“나 때는 말이야~”)타령, 즉 자기 자랑이나 신세한탄이라는 개인적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재미도 감동도 어떤 의미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야기를 끊지 못하고 듣고 있는 담화 상황에는 젠더나 나이같은 권력이 작용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면 그 이야기는 지겨워지기 마련이고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공감과 소통이 안 돼서 괴로워지기 쉽다.

나 또한 올해 초에 의무복무를 전역했고 그동안 친구들을 만나 내 근황 겸 군대 이야기를 종종 하였다. 그들 중 신체적 이유로 병역이 면제된 친구가 있었고, 그는 요즘 다른 남자 애들이 앵무새처럼 군대 얘기만 해서 기분이 안 좋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는 ‘조금 다른’ 군대 얘기를 하겠노라며 내가 부조리한 악습을 몇 개 없었다고 말했다. 듣고 나서 친구는 “다~ 그렇게 얘기하더라”-라고 한다. 아 그래…?

그러면 어떤 이야기가 영양가 있고 맛 좋으며 신선할까? 나는 그러한 이야기가 담긴 글을 만들어 보려다가 실패했고 지난 일년 반의 시간을 빠르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개인적인 군대경험을 곁들인 서평쓰기를 부탁받았다. 이 기회를 감사하게 활용하여 저자 프랭클과 나의 것을 함께 엮은 ‘슬기로운 수용생활’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물론 많은 것을 세세하게 다룰 수는 없고, 책에 나온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격리된 생활을 지혜롭게 대면하는 삶의 태도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2. 격리와 수용이라는 세상

지난해 말 나는 ‘지금껏 가장 어두웠던’ 성탄절을 보냈다. 부대에서 애인도 친구도 아닌 동료들과 있어서 칙칙해진 것은 아니었다. 며칠 뒤 티비 속 새해맞이 방송에서 자정에 맞춰 타종이 울리고, 동료동생들이 찾아와 “형 이제 반오십이야”라고 알려주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아마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우울, 이른바 ‘코로나 블루’가 뒤늦게 찾아온 탓이었을 것이다. 군대라는 곳은 원래 바깥 사회와 여러모로 단절된 곳, 의무복무는 기본적으로 18개월가량의 격리생활이다. 하지만 나는 도심의 경찰서에서 의무경찰로 전환복무를 하는 중이었고 일주일에 한번 외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 확산세가 거세지고 정부가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을 펼치자 그 메리트는 전면 철회되었다. 한곳에 고여가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제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배송시켜 나누어 먹어도 기분은 계속 가라앉았고 주변 사람들이 왠지 꼴 보기 싫었다. 혼자 있는 게 싫지만 혼자 있고 싶고, 혼자 있을 수도 없는 환경이었다.

내가 했던 군생활도 일종의 ‘수용’ 경험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임금이 지급되고 기간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누군가는 ‘해볼 만한’ 경험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래도 굳이 비교하자면 내가 제일 힘들었을 때의 정서는 프랭클이 말한 ‘생존’ 단계의 것에 가까웠다. 수용소에 사람들이 들어오고 (운이 심하게 좋았던 경우) 나갈 때까지 그곳에서 전반적으로 유행했던 심리적 반응을 그는 네 단계로 나누었다. 입소(환상과 충격)-적응(섬뜩함과 냉담함)기를 거쳐 해방기(비통함과 환멸감)가 오기 전, 생존이 주가 되는 세번째 단계에 이르면 사람들은 혐오와 동시에 무감각을, 모멸감과 동시에 분노를 느낀다고 한다. 사람이 죽음을 받아들일 때 다섯 과정을 거친다고 설명하는 어느 이론처럼, 수용소라는 극한 환경이 벌인 일종의 사회실험에서 프랭클이 언급한 도식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현재 중점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을 단서로 삼아, 자기 상황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 지를 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전역을 하면 모든 게 해방인가?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여전히 거리두기 4단계는 시행 중이고 폭염으로 인해 바깥 외출이 어렵다. 활기찬 생활을 위하여 수영과 춤을 배우는 것을 전역 후 목표로 가지고 있었지만 사람이 모이는 실내 공간을 꺼리게 되어 미루게 되었다. 실외에서 유산소 운동을 하려고 해도 어렵다. 새벽 시간을 놓치면 햇빛의 열기와 습도가 무섭다. 복무했던 경찰서 내의 체육관이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폐쇄되었을 때의 일이 떠오른다. 러닝머신을 뛰는 것의 대안으로 나는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좁은 오솔길에서 왔다갔다 하며 달리기를 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민원을 넣은 모양인지 어느 날, ‘하지 말라’는 지시를 전달받았다. 그날 이후 얻은 교훈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가 다른 직원들에게 눈에 띄면 거슬리는, 경찰서안 계급에서 최하층의 존재라는 것. 그리고 수평으로 뛰지 못하면 수직으로 뛰면 된다는 것. 그날부터 계단을 오르고 내렸다.

지금은 나를 계급으로 찍어 누르는 사람은 없다. 구획된 장소에 갇혀서, 밖으로 나가기 위해 보고하고 허가를 받아야 하는 사람도 없다. 그것으로도 민간인이 된 것을 축하하고 기뻐할 만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시민을 열돔 속에 가두는 온실가스와 온난화 된 기후 속에 살아간다. IPCC 6차 보고서에 따르면, 지구는 ‘오버슈팅 현상’(특정 수치가 일시적으로 폭등이나 폭락을 했다가 장기적 균형값으로 수렴하는 현상)으로 인해 21세기 내 한 번 이상은 기온 상승이 섭씨 1.5도를 넘어갈 것이 확연하다.1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평균 온도 섭씨 1.5씨 상승은, 지구에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마지노선으로 정부간 협의체가 설정한 값이다. 이러한 지구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수용소에 입소하게 되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전세계에서 폭염, 가뭄, 홍수같은 기후재해가 더 자주, 더 강도높게 벌어지고 있으며 한반도 안에서도 서울을 비롯한 토지가 침수될 수 있다고 예측된다.2 여태껏 인간은, 같은 인간인 권력자와 사회가 만든 권력의 기구에 의해 억압되고 희생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현재는 인간에 의한 것임이 명백히 밝혀진, 인류세의 기후변화로 인해 모든 인간이 수용소 같은 환경 안에 살아가게 되었다. 기후위기의 피해는 지역과 계층 등에 다르게 적용되지만, 지구를 벗어나 자유로운 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수용기’의 정서에 머물러 아직은 미뤄 둘 시간이 있거나, 지금껏 살아온 방식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믿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3. 시련에도 Yes to Life

지구사람들은 모두 수용소에 입소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by Vicky Scott 출처 : https://images.app.goo.gl/gDjQZiJcQNEyzbyN6
지구사람들은 모두 수용소에 입소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진 출처 Vicky Scott

사실 세상이 거대한 수용소라는 생각은 저자가 살았던 시대에는 더 익숙했을 것이다. 세계대전을 겪은 후에 세계에 대한 염세적인 사상이 퍼지고 있었다. 신(神)과 기존의 문명은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이유를 더 이상 주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 가운데 실존주의자라 불리는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우리 인간이 선택권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 ‘내던져진’ 존재이고 ‘부조리한’ 현실에서 고군분투해야 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의심할 수 없이 현존하는 스스로의 힘을 통해 실존적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조언했다.

빅터 프랭클도 그러한 시대적 흐름 위에서 세상을 치유하려고 했던 철학자였다. 『Yes to life』라는 그의 강연집을 보면, 프랭클이 사람들 앞에 서서 사상활동을 펼치는 목적을 읽을 수 있다.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것 같은 전쟁의 분위기에서 ‘쇠퇴한 낙관주의’를 제치고 득세한 ‘붉은 빛의 운명론’에 대항하고 싶다고 그는 말한다.3

프랭클에 따르면 인간은 의미4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그러한 의미찾기 욕구는 인간의 본능을 이루며 인간성의 한 부분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인간의 뇌를 꿰뚫어보고 그 구조와 작동 과정을 알아가고 있는 뇌과학에 따르면, 인간의 의미추구 활동은 뼛 속 깊이 각인 되어있다. 인간의 대뇌피질과 전두엽이 특정 대상에 대한 복잡한 사고를 펼치고 그에 기반하여 미래를 계획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한 활동에 필요한 데이터로 활용하기 위해, 지식을 탐구하고 지혜를 사랑하도록 인간은 디자인되었다. 덕분에 인간종은 지구에서 가장 강력하고 힘있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5 하지만 문제는 개체가 자신의 삶에 대해 갖는 기대와 욕구이다. 사회와 문명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결정해줄 수 없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말했듯이 각자 인생의 ‘본질’은 타자가 결정지을 수 없다. 결정지어서도 곤란하다. 인간종은 개미와 벌과 달리, 이집단적인 속성이 지배적이면서도 유전자 안에 이기적인 속성이 섞여있기 때문이다.6

한 사람에게 있어, 스스로가 살아갈 이유를 찾으려고 하는 욕구는 늘 살아있다. 바깥 환경에 의해 그 이유가 도전 받고 억눌릴 때 그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 ‘수프 한 접시도 못한’ 존재로 인간 존재를 깎아내리는 홀로코스트 수용소를 생각해보라. 그곳에서 수용자들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말그대로 ‘헐벗은 존재’가 되어 자신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당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는 절망과 무기력을 경험했다고 프랭클은 보고하며, 그 이유는 가혹한 대우, 굶주림과 질병 등 사회적이고 신체적인 요인과 더불어 그들이 ‘삶의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는 이때 느낀 통찰을 기반으로 홋날 ‘로고테라피(의미치료)’ 학파를 창립한다. 빅터 프랭클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알프레드 아들러를 계승하는 ‘정신치료 제3학파’라고 불리며, 의미를 상실하고 정신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상담하고 치유하는 활동을 펼쳤다. 그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세 영역을 창작, 사랑, 생존으로 제시했다. 그 말은, 인간은 살아만 있어도 삶을 가치있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희망이 고통, 죄, 죽음이라는 모든 비극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향해 긍정할 수 있는 (“Yes to Life”) 그의 태도를 이룬다.

4. 고통에도 Yes to Now

의무경찰로 복무하며 많은 동료들이 힘들어했던 근무가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서울의 중요 시설에 가서 그곳을 지키고 서 있는 일이었다. 이 근무의 특징은 사무실, 그러니까 여기서는 행정반에 앉아서 근무하는 보직이 하는 정신노동이 아니면서도, 멘탈 관리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보통 두 번에 걸쳐 2시간씩 근무했는데, 철야 근무의 경우 경찰버스에서 자다가 새벽에 다시 나가야 했다. 그것을 피하고자 한 번에 연속으로 4시간을 근무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다리가 아파서만은 아니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한아름 꺼내서 추억하고, 남은 군생활 동안 무슨 일을 할지 계획하는 일은 도움이 되었다. 군대 밖이라면 인생에서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들을 넓은 시야에서 숙고하는 기회를 갖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게 꼼꼼히 무아지경으로 생각의 꼬리의 꼬리를 물고 쫓아가다 맨정신으로 돌아오면 고작 30분이 지났다. 남은 3시간 30분은…? ‘정신과 시간의 방’에 입장한 느낌이다.

가지 않는 시간과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내 군대 선임 중에는 매일 저녁 점호 시간에 침상에 걸터앉아 수첩을 보는 사람이 있었다. 거기에 그려진 달력에 그날의 날짜칸을 볼펜으로 박박 그었다. 요즘에는 ‘군전역 계산기’라는 어플리케이션이 있어서, 실행시키면 남은 시간이 일수와 초단위까지 나온다. 그걸 보면서 저들은 뭣하러 시간이랑 싸우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과의 전쟁은 타임킬링(time killing)용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생활실 안에 달린 커다란 티비로, 바깥 사회에서는 다들 보지 않는다는 음악방송이나 세계에서 벌어진 이슈들에 랭킹을 매기는 프로그램 등을 봤다. 그런 것보다는 의미있는 일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군생활을 전략게임 속 테크트리에 비유하자면 친목이나 운동보다는 공부루트를 탔다. 군생활의 초중반까지는 계획한 자격증들을 취득하기 위해서 초조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니 요즘 아직 군인인 한 친구와 전화를 할 때면 나는 이렇게 조언한다. ‘지금의 시간은 그저 버티고 흘려보내기만 해도 충분한 것이다. 거기에 자격증 공부니 뭐니하는 것들은 플러스 알파라고 생각하고 편안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프랭클이 그 말을 들었으면 흡족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사람이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세상에 기여하는 ‘창작’과, 상대를 수용하는 ‘사랑’이 있지만 그것들이 가능하지 않을 때는 그저 버티고 인내하는 ‘생존’으로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내가 더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이라는 것. ‘ㅇㅇ야, 까르페 디엠~ 오늘을 즐겨’-라고, 조롱하는 말처럼 들릴까봐 군인친구에게 자제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 경험 상 ‘암흑의 크리스마스’와 수십번의 경비근무를 슬기롭게 보낼 수 있었던 확실한 방법이었다. 오래 전에 예수님은 ‘내일 일은 내일이 걱정하게 두라7’고 하셨다. 그리고 오늘 일은 오늘의 뇌가 하게 놔두는 것이 행복해지는 비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말은 쉽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에 능동적으로 깨어있는 ‘마인드풀’함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들을 하고 살아간다. 부대에서도 내 별명 중 하나는 ‘명상맨’이었고 침상 옆에 매트를 펼쳐놓고 요가를 했다. 마음이 괴로웠을 때를 돌아보면 내가 놓인 상황 자체가 문제일 때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문제라고 받아들이고 그것에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는 생각이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던 것 같다. 프랭클의 언어로 말하면 ‘과잉투사’와 ‘과잉의도’에서 벗어나, 자아의식의 생각작용과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 나에게는 더 맞는 처방이었다.

5. 죽음에도 풀되기를

바람에 의해 흔들리지만 중심을 잡고 햇빛을 향해 나아가며 한 존재를 살아가는 풀과 같이 살면 좋겠다. by pxfuel 출처 : https://www.pxfuel.com/en/free-photo-eboqq
바람에 의해 흔들리지만 중심을 잡고 햇빛을 향해 나아가며 한 존재를 살아가는 풀과 같이 살면 좋겠다.
사진 출처 : pxfuel

나는 지금을 긍정하고 이 순간에 깨어 있고 싶다. 현재를 미래를 위한 수단으로 삼거나, 진정으로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한 과정 혹은 장애물로 만들고 싶지 않다. 내가 아닌 것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있는 대로 존재하는 것이 관념과 감정의 굴레에서 놓여 날 수 있는 길이다. 또한 외부의 변화대로 내부를 수용하고 적응하는 균형 잡힌 길이기도 하다. 이는 수많은 현인들이 오랜 전통 속에서 가리켰던 지혜이기도 하다. 그 중 21세기의 저명한 영적 지도자로 평가받는 에크하르트 톨레의 책에는 ‘Yes to Now’8라는 구문이 나온다. ‘Yes to life’라는 제목의 책을 썼던 프랭클과는 대비된다.

톨레는 특히 자아의식이 가공해낸 심리적 시간관념을 비판한다. 시간관념은 말그대로 관념일 뿐, 실존주의가 말하는 실존에 더 가까운 것은 지금 이 순간에 느껴지는 살아있음이다.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생각’이라는 작용은, 자아가 인간의 마음을 장악하여 헛된 것을 추구하게 하고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데 곧잘 악용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을 인생의 부분으로 환원하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톨레는 말한다. 다행히도 프랭클과 톨레의 가르침은 하나로 모아진다. 톨레가 인간의 생각능력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프랭클은 의미를 찾는 것에 있어 영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영성’이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하고 있기도 하고, 의미를 찾는 대상이자 주체를 ‘자아’ 바깥에 두기를 권하고 있는 것이다.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의 노력은 ‘나 자신’이라는 자그마한 ‘에고’를 벗어나 자신의 마음 전체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이어지고, 그리하여 깨어있는 마음으로 다른 존재와 연결되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 의미의 풍요로움(meaningful)과 마음의 풍족함(mindful)이 합쳐져 의식 있는 한 존재를 충만하게 만든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 내면이나 정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잊으면 읽을수록 – 스스로 봉사할 이유를 찾거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통해 – 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소위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는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 자아 초월의 부수적인 결과로써만 얻어진다는 말이다.”

Virtor E. Frankl,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시형 옮김, (파주: 청아), 2020.

따라서 나는 시간에 한해서 프랭클과 톨레의 가르침을 합칠 수 있는 태도 모델을 제시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풀과 같은 시간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우주는 시간 속에서 자신을 키워왔고, 지구 안에서 인간을 진화시켰다. 고로 우주의 시간은 소우주라 불리는 모든 사람 안에서 인생(人生)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들과 달리 인간은 시간을 인식하는 능력을 가졌고 한 방향으로 흐르는 타임라인 위 수직으로 존재한 채, 인식을 다른 방향으로 기울일 수 있다. ‘시계 시간(clock time)’과 함께 존재하는 ‘마음 시간(mind time)’은 그러나, 그 기울기가 과도해짐으로써 그 존재를 괴롭게 만들 수 있다.

“매일, 매시간, 매분은 그 다음 날, 시간 혹은 분 쪽을 향하여 이를 테면 기울어져 있었다. (···) 시간은 빠르고 유용하게 흘러갔으며 보다 유용하게 쓰이면 쓰일수록 빨리 지나갔고, 그 뒤에는 내 역사라고 하는 기념물들과 찌꺼기 더미가 남았다.”

Michel Tournier, 방드로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1995, 272.

그러한 시간 감각과 존재 방식에서는 이러한 고통이 펼쳐진다. 괴로운 순간은 길고 행복한 순간은 짧다.

“시간은 너무 길거나 너무 짧게 느껴졌다.”

Hermann Hesse, 수레바퀴 아래서, 이순학 옮김, (더클래식), 2014. 176.

그러므로 특히 현대인은 앞뒤로 기울어진 시간의 축을 바로 세울 필요가 있다. 이것을 오늘날 ‘마음챙김’이라고 부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를 돌아보다가도 다시 지금으로 돌아오기. 미래를 계획했다가도 다시 지금으로 돌아오기. 바람에 의해 흔들리지만 중심을 잡고 햇빛을 향해 나아가며 한 존재를 살아가는 풀과 같은 모양새다. 우주의 타임라인을 타고 인생이라는 시간여행을 하는 우리 인간에게 나는 프랭클의 책을 읽고 이렇게 조언하고 싶다. 시련에는 의미두기를, 고통에는 깨어있기를, 죽음에는 살아있기를!


  1. 조천호 박사 “이런 정신 상태로 기후위기 막기 힘들다” 뉴스펭귄, 2021년 8월 12일 수정, 2021년 8월 19일 접속.

  2. “우리 동네는 홍수 피해로부터 안전할까?” 그린피스, 2020년 9월 3일 수정, 2021년 8월 19일 접속.

  3. Virtor E. Frankl, “ON THE MEANING AND VALUE OF LIFE 1” in Yes to life: n spite of everything (Boston: Beacon Press, 2020), 24.

  4. 프랭클에게 있어서 ‘의미’란 문제해결적 사고와 종합적 형태인식의 중간 지점에 있는 것이다. 또한 개인에게 있어 세상에 대해 갖는 가능성이자 존재 이유를 뜻한다.

  5. Diane Ackerman, 휴먼 에이지 중 “인류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김명남 옮김, 파주: 문학동네, 2017.

  6. Jonathan Haidt, 바른 마음, 왕수민 옮김, (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14.

  7. 개역개정 마태복음 6장 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8. Eckhart Tolle, A new earth : awakening to your life’s purpose, (NY: Penguin Books), 204.

배선우

그동안 썼던 별명들은 한때의 나를 잘 설명해줬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또 다른 나.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격언을 실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의미를 추구하며, 세계를 사랑하고 싶습니다. 당분간은 지구를 횡단하며 ‘생활철학자’라는 직함으로, 살고 싶은 길, 살아가야 할 길을 궁리하려고 합니다. 잘 살기 위해 책을 읽고, 주로 서평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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