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본·문화연구 -브라이언 마수미 『가상계』 제9장 「지나치게 파란」 독후기

2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문화연구’라는 말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문화연구를 표방한 사람들은 과학·기술·자본이 사람들의 일상에 깊이 스며드는 양상을 세세히 설명하였다. 그들은 그러한 일상이 곧 자기의 일상이라는 자각을 하고 있었던 듯하다. 또한 그들은 앞서 말한 양상으로부터 한발 물러나 그러한 양상이 펼쳐지는 세계를 관조하는 태도를 견지하고자 한 듯하다. 문화연구라는 말을 넘어 문화산업, 나아가 문화기술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그러한 사용에 대한 저항이 급속히 낮아지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2000년을 전후한 시기의 문화연구를 돌아보는 것은 유익한 지적 긴장을 유발하는 행위일 수 있을 듯하다.

가상계
브라이언 마수미 저, 『가상계; 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assemblage)』 (갈무리, 2011년)

2002년, 듀크 대학교 출판부는, Post-Contemporary Interventions [지금과 그 다음 사이에 끼어들기]라는 기획의 한 부분으로, 브라이언 마수미의 원고를 스탠리 유진 피쉬와 프레드릭 제임슨이 편집한 책 Parables for the Virtual : Movement, Affect, Sensation [가상계우화 : 운동, 정동, 감각]을 펴냈다. 이 책은 2011년 『가상계; 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assemblage)』라는 제목을 달고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에는, 원서본 제목에 들어가 있던 ‘Parables[우화]’라는 단어가 빠진 대신, ‘얽기[assemblage(아쌍블라주)]라는 단어가 들어갔다. 이 번역본의 서문에는 “구체적으로 행하지 않아야 구체적이다” 라는 부제목이 붙어있다. 이 책과 그 한국어 번역본의 서지정보는 다음과 같다.

Massumi, Brian , Fish, Stanley Eugene (EDT) , Jameson, Fredric (EDT), Parables for the Virtual : Movement, Affect, Sensation (Post-Contemporary Interventions), Duke University Press, 2002.04.09.〕

브라이언 마수미(지음), 조성훈(옮김), 『가상계; 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assemblage)』, 아우또노미아총서 28, 갈무리, 2011.07.30.

아래의 글은, 위의 책의 마지막 장인, 제9장 「지나치게-파란; 확장된 경험주의를 위한 색-패치」1의 독후기이다.

고착되어 있지 않은 기억 혹은 기록들의 관계맺음

“회상된 시나트라는 옛날의 푸른 눈이 아니다” 사진 출처 : Capitol Records

‘매력적인 파란 눈의 사나이’라는 평가를 받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햇빛 찬란한 어느 오후, 그가 대로를 활보하고 있을 때, 그를 스쳐 지나간 어떤 사람이 “어! 눈동자가 회색이잖아?” 라고 외쳤다고 하자. 이때, 사람들은 찬란한 햇살 때문에 그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회색으로 보인 것으로 상황을 정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황 정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사태도 일어난다. 1999년 5월 29일, 『몬트리올 가제트 Montreal Gazette』의 헤드라인은 “회상된 시나트라는 옛날의 푸른 눈이 아니다”였다고 한다.(「-파란」, 367쪽.) 이 기사 제목은 『아가씨와 건달들』, 『지상에서 영원으로』 등의 영화와 『마이웨이』, 『뉴욕 뉴욕 Theme From New York, New York』 그리고 영화 『조커』(2019)에 들어가 있는 『그것이 인생 아니겠나That’s Life2 등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예술가 프랜시스 앨버트 “프랭크” 시나트라(Francis Albert “Frank” Sinatra, 1915~1998)가 별세한 후에 나온 것이다. 청년기의 시나트라는 그야말로 ‘매력적인 파란 눈의 사나이’였던 듯하다. 그러나, 지금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그의 사진들이나 영상들3 속에서 그의 눈동자는 때로는 회색인 것으로 보인다. 누구나 그러하듯, 그리고 예술가였던 그의 경우에는 더더욱, 눈동자의 색깔은 처한 환경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보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회상된 시나트라는 옛날의 푸른 눈이 아니다” 라고 한 『몬트리올 가제트』의 헤드라인이, 시나트라의 눈 색깔은 푸른색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강요하는 듯, 유별나게 전체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거기에는 헤드라인을 작성한 기자의 개인적 감성이 잔뜩 묻어있을 수도 있고, 기자가 그저 오랜 시간 시나트라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 스테레오 타입을 나름 시의적절하게 사용한 것일 수도 있다.

마수미는 시나트라의 눈 색깔을 예로 들어 기억이 색채 항등성(color constancy)에 끼치는 영향을 이야기한다. 색채 항등성은 조명과 같은 빛의 강도나 분포가 변해도 주관적인 색채 지각기관은 물체의 색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현상을 말한다고 한다. (「-파란」, 361쪽) 이를 뒤집어 말하면, 조명과 같은 빛의 강도나 분포의 변화에 따라 색채 지각은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빛뿐이 아닐 것이다. 보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고 하면 무책임하거나 극단적인 걸까? 마수미는 색채 항등성에 회의적 시각을 가진 듯하다. 그러나 정작 마수미가 중시한 것은 세계가 고착된 실체성을 가지면서 실재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믿음과 그러한 믿음이 동요하고 있는 현실 같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비-유클리드적인 설명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세계를 살아가듯, 많은 사람들은 세계가 고착된 실체성을 가지면서 실재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소박한’ 믿음 속에 건전한 삶을 지향하지만, 그러한 삶의 건전성을 밑거름으로 하면서 발달한 과학과 기술은 이미 19세기 말에, 세계가 고착된 실체성을 갖고 실재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그 믿음을 무너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21세기 현재에 들어서서도, 그 믿음에서 벗어난 주장을 하는 사람은 대중의 동의를 얻기 어렵다. 마수미는 세계 전체가 심각한 인식의 불균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본 듯하다. 뿐만 아니라 마수미는 자본이 이 인식의 불균형을 바로잡기보다는, 때로는 이 믿음을 이용하고 때로는 이 믿음을 깨는 파격을 보여주면서 지배를 관철하고 이윤을 추구한다고 본 듯하다. 그러므로 마수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시나트라는 주시하는 눈의 지나치게-파란을 그의 떨리는 목소리의 ‘지나치게-감미로운’과 연결했다. 그런 다음에 그는 목소리의 지나치게-감미로운을 그가 미묘하게 자아내는 제스처의 지나치게-부드러운과 연결했다. 그는 몸의 움직임과 성욕을 자극하는 멜로디를 매끄럽게 이음으로써 질들(qualities)을 연결한다. 그러한 상호연계는 언어로 된 가사 내용을 감각적으로 반복했던 질들의 구문을 구성했다. 그 연기에서 비롯된 지각된 전체 질은 로맨스를 의미했다―다시, 그것은 로맨스를 의미했으며 전 세계로 퍼진 특이한 감동을 표현했다. 바로 마이웨이(My Way)이다. 단어와 제스처를 통해 무대 밖 세상을 순환하는 하나의 방식이 표현되었다. …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시나트라 신비의 일부를 이루었다. 시나트라가 연기했던 육화된 질들간의 연결은, 원래는(그 당시에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순환 질서에 따라) 조심스럽게 분리되어 있어야 할 문맥들, 가령 흑과 백, 대통령의 섹스, 로맨스와 부패, 정치와 조직범죄 등을 연결하는 놀라운 방식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 (「-파란」, 429~430쪽)

한때 미국 내에서 하얀 흑인이라 할 만한 사회적 위치에 갇혀있었던 이탈리아계의 자손인 시나트라의 파란 눈이라는 생체의 이미지[육화된 질]를 자본이 세계에 관한 이미 무너진 인식을 활용하여 섹스 어필의 상징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심는 데에서 시작하여, 그 육화된 질은 과거에는 예술가들의 사회적 집단과 격리되어 있었던 권력 집단의 질과 교환되는 데 이른다고 마수미는 정리한 듯하다. 이러한 질의 교환을 마수미는 예술이라고 보는 듯한데, 위에 사례로 든 경우는 예술이 자본에 종속된 경우라 할 수 있겠지만, 마수미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 듯하다. 마수미는, 2002년 전후한 시기에도 세계가 고착된 실체성을 가지면서 실재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믿음이 확고하다고 보면서도, 시나트라의 전성기였던 20세기 중반에 이미 그 믿음이 동요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벌어진 틈을 자본이 파고들고 있었음을 시사한 듯하다.

그런 현실의 와중에서, 마수미는 세계가 고착되어 있지 않은 기억 혹은 기록의 관계 맺음의 흐름 즉 가상계임을 재차 강조한다. 그는 이미 색채 항등성에 회의를 표하였고, 정동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도 세계가 가상계임을 재차 주장한다. 그는 정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주어진 어떤 문맥의 관점에서 볼 때, 정동은 그 문맥 속에서 진행 중인 특유한 상호작용이 준-인과적으로 열림으로써, “새로운 어떤 것”, 즉 그 상호작용의 역동 속에서, 때때로 눈에 띄는 효과를 내며 포괄적인 질적 변화로 표현되는 도착 혹은 난입을 감지하는 능력이다.”(393쪽)

마수미의 이러한 글에 의하면 정동은 ‘명멸하는 사건들이 이루는 맥락[문맥] 속에서 진행 중인 상호작용을 감지하는 능력’이다.

마수미는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상황과 맥락의 핵심적인 구별은 질적 활동 개념(정동과 정서)과 관련하여 용어상의 이중성을 필요로 한다. 또한 수용성의 개념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전반적으로 맥락 속에서 등록하는 새로운 어떤 것에 대한 비개인적 경험을 “감각”이라는 용어로 나타내는 것은 보류하라. 구성 요소들, 또는 실제 맥락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회고적으로 경험된 부분들의 결정은 “지각”이라고 부르자 지각은 구조적이거나 상호적(상호 정의에서 주체적-객체적)이다. 감각은 다사다난 혹은 과정적이다. 지각은 외부지시적(알고 있는 주체에 대해 외부적인 것으로 파악된 부분-대-부분의 인지된 연결들에 속하는 것)이다. 감각은 자기-지시적이다. 즉 그것은 그 자신과 맥락의 관계에 속하며(변화), 주체적인 것과 객체적인 것(주체적-객체적이라기보다 “자율적인”)의 구조적인 짝짓기를 포괄한다.”(「-파란」, 393쪽, 주28)

마수미는 감각에 관계맺음[구조적 짝짓기]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사진: Benjamin Wedemeyer

마수미는 감각에 관계맺음[구조적 짝짓기]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 셈이다. 그렇다면 감각[인식]이 관계맺음이고 세계이며, 관계의 ‘당사자’들은 고착되어 있지 않은 것들이고 고체성을 가지지 않은 것으로, 사건을 체험한 기억 혹은 기록들이 그것에 상당히 부합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마수미는 윌리엄 제임스의 주장을 끌어와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려 한다.

“제임스는…관계성은 이미 세계 내에 있으며, 의식적으로 등록되기 이전에 이미 육체의 활동 속에 물질적으로 등록되기 이전에 이미 육체의 활동 속에 물질적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그의 유명한 말, 즉 우리는 두려워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도망가기 때문에 두려워한다는 말의 의미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을 겪어 가면서, 이미 그 안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가운데 의식적이 된다. 우리의 인식은 전개되고 있는 관계에 이미 진행 중인 참여 속에 있다. 그것은 우리가 도망가기를 멈춘 후에만 볼 수 있게 된 후에만 나온다. 참여는 재인지에 앞선다.”(「-파란」, 400쪽)

마치 마수미의 주장을 제임스가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듯하다. 마수미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의 얼개를 사용하여, 인식 행위라고 할 수 있는 것과 여러 존재들이 만남 속에 관계를 맺으며 빚어내는 세계 생성 변화 사이에 선후관계를 논하기보다는 그들 사이의 뒤집힘과 엮임에 주목할 것을 권한 듯하다.

철학과 예술은 과학의 북엔드

마수미는 관계맺음에 철학을 끼워넣는다.

“궁금(wonder). 여기가 바로 철학이 들어오는 지점이다. 철학이란 바로 이 모든 세계를 궁금해하는 일에 바친 활동이다. 우리 모두가 효율성과 수익성이라는 테크노-바닷속에 있을 때 허우적거리며, 철학은 힘겹게 버티며 그 일을 수행한다. 그래서 철학의 시작은 부수적인 것(accompaniment)부터다. 즉 관계로 이루어진 유사-인과성의 지각된 효과들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놀에서 출발한다. 혹은 파란 것의 ‘지나치게-’로부터 시작한다. 특히 전체-장 효과들로 파악된 것들. 그것이 철학자의 첫 번째 종착지, 그 공정 라인의 출발 지점이다. 철학은 거기서부터, 베르그송이 언급했듯이 ‘지각의 흐름에 거슬러’, 관계성 ‘그 자체’로, 가상계를 향해 나아간다. 철학은 탈문맥화 노동이다. 철학은 그 문맥에 따른 표현으로부터 특이성을 증류한다. 그것은 그 실제적인 항들로부터 관계를 추출한다. 관계를 증류하고 나면 철학은 계속해서 그 특이성을 그와 유사한 다른 문맥상의 표현으로부터 증류시킨 탈문맥화된 특이성에 연결시킨다. 철학의 두 번째 종착지, 그 도착 지점은 바로 특이성 간의 연결이다. 철학은 가상적 연결(virtual connection), 즉 (육체적, 객관적, 물리적) 연결(links) 없는 순수 연계(linkage)를 창조한다. 그 처리 과정 라인은 횡단-상황적 연계, 또는 정동의 생산을 위해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했던 ‘점조성(consistency)’이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철학적 개념은 하나의 대상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점조성만을 가진다. 즉 순수 함께-모임(pure holding-together)만을 가진다. 모인 것(the held)은 빼고.” (「-파란」, 414쪽)

요컨대 철학은 세계에 대해 궁금해하며, 그러는 가운데 유독 관계가 부각되게 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탈문맥화도 하는데, 여기에서는 말하지 않았으나, 마수미는 맥락이 자본이 주도하는 압박이 맥락의 성격을 결정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철학하는 자가 가진 궁금함은 의도하지 않은 탈압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마수미의 생각인 듯하며, 그런 경향성은 관계 맺음이 점조성[정합성]이라는 성격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게 하여준다고 보는 듯하다. 정합성은 주관:대상=1:1 식의 기준에 입각한 인식 설명과 대조하여 볼 때 그 성격이 더 선명하게 드러날 듯하다.

마수미는 반역사를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여러 역사’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듯하다.

“문맥의 실체성으로 가면서 역으로 흐르는 철학은 반역사(antihistory)이다. 그것은 역사로 파고들어 흐르고 그 안에 담기지만, 결코 나머지를 배제하지 않는 횡단-상황적 잠재의 긍정이다. 그것의 대상-이-아님은 역사를 통해 계속 흐르고 역사를 갱신하는 자기-능동적, 연결적 잠재의 미결정적 초과이다. 그러한 잠재적-주입의 횡단연결적 흐름이 없으면 역사는 단지 자신의 맨 사실을 반복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저 자신의 반복 질서 속에서 질적 자기-차이를 내는 관계의 원천을 잃어버릴 것이다.” (「-파란」, 415쪽)

개체성과 현재성에 매몰된 시대와 세대는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주목하지 않는 것은 불온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이는 그런 시대 혹은 세대의 역사관에서도 보이는 듯하다. 그들은 역사를 이미 확정되어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는 듯하다. 현재적 문제에 직면하고 투쟁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다보니, 현재와의 대화로서 역사를 보고 거기에서 교훈을 얻으려 하는 것을 반동적이거나 퇴영적인 태도로 인식하는 경우가 생기는 듯하다. 그러나 ‘연결적 잠재의 미결정적 초과’라는 말에 주목하여보면, 역사는 현재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연결성에 주목한 마수미는 그 연결성을 선명히 인식할 계기가 되어주는 철학도들의 온갖 굼금해 함의 또다른 이름이 역사적 상상력이라고 말한 셈이다.

관계 맺음을 선명히 하는 것과 철학을 연결시킨 마수미가 이에 다시 정치를 연결시키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전체적 자기-조직화 효과를 창출하기 위해 철학이 제공하는 자기-차이의 재정위를 이용하는 활동을 한마디로 말해, 정치라고 한다.” (「-파란」, 420쪽) “정치란 다른 수단들에 의해 계속된 철학이다. 교정, 즉 변화에 대한 탐색적 정치는 다른 수단들에 의해 추구되는 철학이다.” (「-파란」, 420~421쪽) 가까이는 1968년부터, 철학과 정치는 긴밀히 연결된 것으로 있어 왔다. 그런데 2002년에 마수미가 철학과 정치를 엮는 말을 일부러 한 것은, 그 시기에 철학과 정치를 분리하고자 하는 흐름이 그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서 심각하게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인듯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마수미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굳이 글로 남긴 까닭을 설명하기 어색하다.

이렇듯 연결 되어있는 것들을 조각조각 나누어 분할 통치하려는 듯한 수상함이 이미 폐부 깊숙이 들어차는 상황 속에서, 마수미는 자본이 그런 분할과 분열을 도보한다고 보면서, 그에 맞서는 책략을 나름대로 보여주려 한 듯하다. 이 책략에 동원되는 무력은 철학과 예술 특히 철학이다; “과학의 처리 과정은 재인식 가능성에서 재생산 가능성에 이르기까지 쓸모 있게 지속한다. 철학의 처리 과정은 부수적인 것(실제적 질적 표현)에서부터 관계성(특이성 간의 가상적 연결)에 이르기까지 쓸모없이 지속한다. 예술의 처리 과정은 실제의 질적 표현을 고수하면서, 실제적 운동들을 봉합하는 방식으로 질에서 질로 지속한다(끝이 없거나 이접적인, 전염되거나 느낌이 안 좋을 수 있는 구성으로), 철학과 예술은 과학의 북엔드(bookend)다. 따라서 과학의 반대편 종착지에서 작동한다. 예술과 철학 양자는 과학과는 달리 특이성의 다사다난한 표현과 관계한다. 철학은 특이성을 가상적으로 표현하는 것(virtually expressing)으로 현시한다.(잉여-제공 관계, 또는 상황). 예술은 특이성을 실제적으로 표현된 것(actually expressed)으로 재현한다(문맥의 초과 또는 잔여). 그들은 모두가 특이한 것을 질적으로 변형되는 운동으로, 즉 객관화가 아니라 ‘정동적인’ 것으로 현시한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현시한다. 철학은 정동을 사유-감각된 것으로 현시하고, 예술은 감각적으로 실행된 것으로 현시한다.”(「-파란」, 424쪽) 철학과 예술이 상반된 방향에서 ‘막아주는 것[북엔드]’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이미 펼쳐진 세계를 설명하는 과학은 어떤 새로운 것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새로움에 대한 억압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마수미는 우려하는 듯하였다. 본래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설명보다는 앞일의 예측을 본령으로 하는 과학의 입장에서는 마수미의 과학에 대한 이해에 억울함을 느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과학이라는 말 자리에 기술이라는 말을 넣어보면, ‘철학과 예술은 과학의 북엔드’라는 말은 자본의 잠행과 폭주에 대한 적절한 우려로 읽을 수 있다.

과학·자본·문화연구

The band Jefferson Airplane playing at the 1967 KFRC Fantasy Fair and Magic Mountain Music Festival in Marin County, California, United States.
사진 출처 : wikipedia

마수미는 글의 끝부분에 다다라 자신을 문화연구 종사자라고 스스로 칭하기로 하는 듯하다; “확장된 지금까지 언급되지 않은 한 가지 처리 계열이 있다. 관계성에서 표현된 질에 이르는 계열이 그것이다. … 그 처리 계열은, 어떤 점에서 철학, 과학, 그리고 예술 간의 상호 간섭, 싸움, 그리고 교섭의 조정자(arbiter)로 복무하면서, 자신의 운동으로부터 정치적 효과를 끄집어내야 할 입장에 처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예술과 철학의 정치적 중립을 그 자신의 최종 종착지로 간주함으로써, 그들 모두와 차별화될 것이다. … 그것이 다른 정치적 운동과 구별되는 것은 대학이나 박물관, 갤러리, 두뇌집단, 연구센터와 같은 문화적 제도 내의 그 토대일 것이다. … 이 처리 계열은 문화연구일 수도 있다.”(「-파란」, 435쪽) 2002년은 1968년으로부터 30년 넘게 떨어진 시점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히피 공동체가 일어났던 1967년의 ‘사랑의 여름(Summer of Love)’으로부터도 그러하고, 1969년의 우드스톡 페스티벌(Woodstock Music & Art Fair)로부터도 그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런 계기를 체험한 세대와 그 계승자들은 북미 대륙에서 ‘대학이나 박물관, 갤러리, 두뇌집단, 연구센터와 같은 문화적 제도 내’에 자리 잡고 문화연구를 표방하고 있었다. 마수미의 글이 풍기는 분위기를 보면, 그들은 그리고 마수미 자신은 조정자 내지는 중재자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그러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마수미는 그러한 자신의 처지에 자조(自嘲)하는 태도를 숨기지 않은 듯하다. 대기가 날로 오염되어 가고 있음에도 그 대기를 숨 쉬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현실, 기술을 앞세운 자본을 관조하면서도 자본의 늪에서 발을 완전히 빼지 못하는 현실. 두 현실은 얼개가 유사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마수미는 ‘공생’을 내세워 자신의 역할을 평가절상하려 한다.

“이 글은 지식 실천의 생태학을 언급하면서 시작했다. 이제 분명해지는 것은 이것이 일종의 정치 생태학이라는 사실이다. 정치 생태학의 “대상”은 과정적으로 독특하면서 상이하게 갈라지는 삶의 여러 형태의 함께-도래하기 또는 함께-속하기이다. 그 “대상”은 바로 자연-문화 연속체의 전 과정을 따르는, 공생이다. 문화연구의 사심 없음은 문화 연구로 하여금 흔히 말하는 공생을 옹호하는 특권적 위치에 자리하게 한다. 만일에 문화연구가 자신만의 과정적 잠재를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공생-관리에 정동적으로 참여하는 정치 생태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이 사심 없는 그러나 정치적 위험-감수 역할에 정동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상태를 두고 들뢰즈는 ‘중재자(intercessor)’라고 불렀다.” (「-파란」, 439쪽)

이어서 마수미는 ‘도덕과 반대되는’ 윤리학과 자신의 자리매김을 결부시켜 자신을 정당화한다.

“정동적으로 가담하는, 강렬한 방식에 함께-속하기 위해, 포괄적이고, 판단 없이 접근하는 정치적 지식-실천이 바로 윤리학이다―도덕과는 반대이다. 정치 생태학은 도덕 관념 없는 집단적 윤리학이다. 윤리학은 함께-하기의 관리이며, 흔히 말하는 친교를 위한 보살핌이다.” (「-파란」, 440쪽)

윤리학과 도덕의 구분도 쉽지 않고 정치 생태학의 정의도 어렵지만, 세계가 관계 맺음을 기반으로 하는 가상계라면, 거기에서 공생과 친교를 위한 보살핌에 힘쓰는 자는 귀한 대접을 받을 듯하다.

거의 끝부분에 마수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윤리학에는 오로지 단 하나의 보편적 원리가 있다. 즉 처리 계열 어디에도 타자에게 ‘꺼져버려’라고 말할 수 있는 신이-부여한 ‘권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파란」, 441쪽)

강한 힘의 흐름으로부터 꺼져버리라는 명령을 들은 부적응자의 푸념처럼 들릴 수도 있는 이 말은 크고 무거운 의미를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강한 힘의 흐름도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모두가 합의하여 내쳐버린 어느 미미한 하나는, 이제 다시는 세계에 나타나지 못할, 일회적이어서 소중한 개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21세기의 인류는 이미 19세기 말에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폐기한 세계관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기며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들을 전심전력으로 억압할 기세이며, 그러는 사이 자본의 중심에 은거한 힘은 가상계인 세계를 인정하고 거기에 최적화된 이윤 추구의 얼개를 계속 가다듬어가고 있다. 마수미의 꽤 긴 이야기는, 이런 현실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2020년대에도 유익해 보인다.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