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이웃

바쁜 도시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좀 더 느린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 동네 건축가 부부의 시골살이 적응기.

사무실 한가운데 놓인 책상 앞에서 한참 고민 중이다. 출력해 놓은 사진을 만지작거리며 요리조리 배치해 본다. 잘 풀리지 않는다. 제목도 레이아웃도 머릿속에만 맴돌 뿐 나올 기미가 안 보인다. 관계자의 권유로 ‘00 건축상’에 응모하기로 한 마감이 내일이다. 햇살 맞으며 커피나 한잔하면 나아질까? 밖으로 나와 앉았다.

앞집 언니가 부르는 소리에 나무 울타리 쪽으로 갔더니 ‘호박전’ 한 접시 건네주신다. 텃밭에 방치된 누~런 호박을 보고 더 늦으면 썩는다는 언니의 말에 요리해 드시라 하였는데, 부지런한 언니가 그새 솜씨를 부려 ‘노란 호박전’을 한 것이다.

호박전 쭈~욱 찢어 한 잎 베어 무니 유년 시절 내 동네의 이웃들이 생각났다. 유독 ‘호박범벅’을 맛나게 하셨던 ‘연화 어머니’, 골목을 뛰어다니며 숨바꼭질하다 고소한 기름 냄새에 이끌려 들어가면 맛있는 ‘부추전’을 내어 주시던 ‘미영 어머니’, 때가 되면 함께 모여 김장하고 수육을 삶아 먹으며 삶을 나누던 일들이 당연시되던 그때의 ‘이웃’은 많은 일상을 공유했던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청년이 되어 도시생활을 할 때는 아파트에서 살아서인지 ‘이웃’과 특별한 관계 맺기 대신 적절한 거리두기를 하며 살았다. 그러다 “매일 같이 얼굴을 마주치는 이웃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곰곰이 생각하게 된 때가 5년 전이었다. 서울 아파트를 팔고 시골살이를 결정하면서 내 집을 포함한 단지를 계획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연령도 직업도 살아온 환경도 서로 다른 사람들의 주택을 계획한다는 것은 단순한 건축주의 라이프 스타일을 고려한 물리적 주택을 넘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실험하는 장으로 확장하는 것이었다.

유연한 관계성과 작은 공유에 대한 ‘건축지향점’을 담은 집 ‘어쩌다 이웃’. 사진제공 : 어쩌다 살롱
유연한 관계성과 작은 공유에 대한 ‘건축지향점’을 담은 집 ‘어쩌다 이웃’.
사진제공 : 어쩌다 살롱

이러한 고민을 바탕으로 유연한 관계성과 작은 공유에 대한 건축 지향점을 담은 ‘어쩌다 이웃’을 계획하였다. 지극히 사적인 주거 공간은 보장하되, 건물 그림자가 옆집에 최소한으로만 겹칠 수 있도록 배치하여 그림자로 인한 채광 손실을 최소화하였고, 마당, 풍경 등의 공유를 위해 담을 쌓지 않았다. 또한 고벽돌과 생울타리를 적절히 배치하여 대지 경계선의 ‘물리적 울타리’를 넘어서고자 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사는 법을 터득해 나가며 자연스레 서로에게 ‘이웃’으로 스며들었다. 누구든 자기식대로 맞추길 강요하면, 아무리 좋았던 사이도 어긋나기 마련이니, 서로 맞춰가기 위해 적절히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한계는 있었다. 옆집과 공사 초기부터 몇 가지 문제로 누적된 피로감은 서서히 적절한 거리두기로 이어져 어색한 사이가 되었고, 자연스레 나는 ‘어쩌다 이웃’보다 이웃 동네의 학부모들과 소통하는 일이 더 많아졌다. 나를 제외한 이웃들은 연배가 비슷하여 잘 어울리는 듯 보였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마저도 오래가지는 못한 듯했다.

최근 옆집이 이사하던 날, 이웃들이 모처럼 모였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멋쩍게 웃었다. 이웃과 일상을 담을 ‘사랑방’을 기대하며 계획한 ‘사무실(어쩌다 살롱)’은 그날에서야 제 역할을 했다. 크고 작은 오해가 낳은 서먹함, 한 집으로 인한 불편함 등을 서로 조금씩 쏟아내며 앞으로 자주 ‘소통의 시간’을 가지자며 아쉬워했다.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면서도,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생각으로 괴로워하는 현대인들이 적지 않다. 좀 더 멀리 떨어져서 각자의 삶에 충실한 것도 좋지만 가까이서 즐거움과 수고로움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나부터 이웃을 향한 분노와 불신을 거두고 염려와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호박전을 부쳐 나눠 먹는 오늘의 소소한 일상이 주는 기쁨. 이런 순간은 이웃과 더 오래 함께하는, 행복한 삶을 꿈꾸게 한다. 풀리지 않은 숙제가 해결된 듯 홀가분한 마음으로 책상에 놓인 사진을 정리한다.

어쩌다 살롱

어쩌다 만난 이웃들과 동네문화를 만들고자 재미난 궁리를 하는 동네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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