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턱대고 비건] ④ 논비건 h와 1박 2일 여행

비건인 저는 친구들을 만날 때 항상 먹을 것을 준비해서 갑니다. 문득 사전 준비 없이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면 어떤 상황이 생길지 궁금해졌고 친구와 1박 2일 무계획 여행을 떠났습니다.

비건을 나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그간 사귀어왔던 내 오랜 친구들 대부분은 고기를 먹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채식 초기에는 친구 만나서 밥 먹는 게 번거로운 일이었다. 지금은 친구들에게 수고를 끼치기 싫어서 약속이 있을 때마다 내가 먹을 음식을 챙겨서 간다. 그러다 문득 먹을 것에 관한 사전 준비 없이 친구와 여행을 떠나면 어떤 상황이 생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12년지기 친구와 시간을 맞춰 1박 2일로 여행을 떠났다.

채식을 하는 나는 친구들과 약속이 있을 때마다 먹을 음식을 챙겨서 나간다. 그러다 문득 먹을 것에 관한 사전 준비 없이 친구와 여행을 떠나면 어떤 상황이 생길지 궁금해졌다. 
사진 출처 : DS stories
채식을 하는 나는 친구들과 약속이 있을 때마다 먹을 음식을 챙겨서 나간다. 그러다 문득 먹을 것에 관한 사전 준비 없이 친구와 여행을 떠나면 어떤 상황이 생길지 궁금해졌다.
사진 출처 : DS stories

바다로 갈까? 산으로 갈까?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며 친구를 만들어 볼까? 여러 가지 계획이 있었는데 기상청의 날씨 예보가 계속 달라지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행 당일에 만나서 행선지를 결정하기로 했다. 여행 당일 h의 집에 도착해서 조금 쉬며 어디로 갈지 고민했다. 그러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출발하자! 해서 어쩌다 눈에 들어온 눈썹칼을 땅에 던져 칼끝이 향하는 방향으로 내비 없이 차를 몰아 출발했다. 출발하면서 h가 차 안에 비치된 노래방 기계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난 차 안에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내 모습을 행인들이 볼까 봐 쑥스럽고 어색해서 실없이 웃었다.

출발한 지 30분, 특공대에서 독도법을 숙달한 h가 나침반 보는 법을 까먹어 우왕좌왕하는 동안 가야 할 방향을 잃고 말았다. 우리는 다음 이동 방법으로 특이한 차를 따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노래에 집중하다 보니 차량을 놓치기 일쑤였고 이렇게 된 거 시원하게 노래나 부르자 해서 고속도로를 찾았다.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전 편의점에서 캔맥주 4캔을 사서 조수석에서 홀짝였다. 술기운이 살짝 오르다 보니 어느새 조금 전까지의 부끄러움은 사라지고 고음을 내지르며 열창하는 내가 있었다. 운전하는 h의 눈꺼풀이 고음을 부를 때 살며시 감기길래 잠시 죽음의 공포를 느꼈지만 유쾌하게 여행을 만끽했다. 중간에 망향휴게소에 들러 치즈가루를 뺀 회오리감자를 사 먹었다.

h는 이 여행을 기념하고 싶다며 휴게소 잡화점에 들러 하얀색 강아지 한 마리를 입양했다. 스위치를 켜면 짤막한 다리를 버둥거리며 쾌활하게 짖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항상 손님을 반기는 그 강아지 인형을 누가 살까 평소 궁금했는데 그게 바로 자신이라며 h는 왠지 뿌듯해했다. 우리는 그 강아지에게 망향휴게소의 ‘향’자를 따와 향식이라는 이름을 주고 여행의 동료로 삼았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달렸는데 표지판에 대전이 보였다. 마침 친구가 대전에서 공부하고 있어 친구도 볼 겸 그곳에서 놀기로 했다. 산도 바다도 휴양지도 관광지도 아닌 대전이라니, 우리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즉흥성이 주는 우연과 낯섦에 괜히 설레었다. 대전에 진입하니 성심당이 우리를 반겼다. 근처에 주차하고 성심당에서 빵 구경을 했다. 비건 빵이 몇 종류 있어서 반가웠다. 대전 거리 구경을 하다가 국밥집에 들어갔다. 난 종업원분께 간장 비빔 막국수에 들기름과 간장만 들어가느냐고 여쭌 뒤 음식을 시켰다. 육수를 컵에 따라주시길래 사양하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는데 먹다 보니 혀가 니글거렸다. 보아하니 비빔국수에도 육수가 들어가 있었다. 이번처럼 육수를 많이 먹은 건 1년 반 만에 처음이었는데 이 불쾌한 니글거림이 혀에 남아 종일 이어졌다.

식사를 마치고 대형마트에 들러 장을 봤다. 과거와는 다르게 요즈음은 비건 즉석식품이 많아져서 안주를 해결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 여행이 흥미로워지려면 오지에서 먹을 것을 찾느라 고생했어야 하는데 어이없게도 대도시에 오는 바람에 이야깃거리가 줄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몸을 씻고 나는 만두 라면을, h는 회 한 접시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h는 나와 만나면 술자리를 즐기면서 본인의 안주를 혼자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술자리 분위기의 장점과 혼술의 장점을 두루 취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이후 불로소득이나 세계론 등의 잡다한 이야기로 열띤 토론을 하다 보니 새벽 3시에 잠이 들었다.

11시 반에 숙소에서 나왔다. 만나기로 한 다른 친구를 기다리며 친구의 학교 근처에 있는 국립 중앙과학관을 관람했다. 난 논산에서 자라서 어릴 적 소풍 갈 때마다 국립 중앙과학관을 갔는데 성인이 되어서 다시 오니 감회가 남달랐다. 십수 년 전 꼬맹이일 때 봤던 과학체험기구가 그대로 있어서 아주 반가웠다. 오랫동안 한자리에 있는 기구의 모습을 보며 안도감을 느낌과 동시에 그 기구와는 다르게 재개발, 2년짜리 전세 계약 등으로 계속 떠돌았고 앞으로도 떠돌 예정인 나는 어디에서 안도와 안정을 얻어야 할까 생각했다.

여행 중 소비와 소비점수
여행 중 소비와 소비점수

관람을 마치고 친구를 만나 셋이서 놀았다. 친구는 국외에 있다가 전날 입국해서 오늘 대전에 왔다고 했다. 대전에 뜬금없이 와서 전날 입국한 친구와 생각지도 못한 공간에서 대화하고 있는 상황이 우스워 괜스레 미소가 흘러나왔다. 대전 친구와 헤어지고 친구가 추천한 물총국수를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내가 먹을 수 있는 메뉴가 없어서 옆에서 구경만 하려고 했는데 1인 1 주문이라 결국 h도 물총국수를 먹지 못하고 그대로 식당에서 나온 뒤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9시쯤 집에 도착해 현미밥에 두부를 넣고 들기름과 간장에 비벼 먹었다.

난 비건 이전에는 평양냉면을 좋아했다. 친구들과 강북평랭회라는 모임을 조직해서 회동할 정도로 육수를 즐겨 먹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원치 않게 먹은 육수는 과거와는 다르게 정말 불쾌했다. 윤리적인 이유를 생각하기 이전에 그냥 몸이 거부해서 역했다. 실수로 육수를 먹은 일, 물총국수를 먹지 못한 일 등 이번 여행에선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다. 스스로 자처한 불편함과 어려움이라 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조금 더 꼼꼼히 물어보고 대비를 철저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태도가 좋은지는 의문이다. 그 어려움 뒤에 숨어있는 사회적 구조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적극 발언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자처했기 때문에 불편함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좋다면 과연 누구에게 좋을까? 나의 행복은 내 적의 이익이다.

김이중

존재 방식이 아름답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마치 지렁이의 완벽함을 닮아 지렁이 인간이 되어 지렁이 말을 구사하고픈 게으름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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