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턱대고 비건] ⑬ 할머니와 문어

할머니의 104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차려진 생신상 위 문어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저 존재가 할머니보다 존중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너 인마, 내가 죽으면 제사상에 고기 안 올려줄 거 아니냐? 큰일이네, 하하.”

할머니의 104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는 말린 물살이를 뜯으며 묘한 농담을 내게 던졌다. 태어남과 아직 살아있음을 축하하는 생신상 앞에서 죽음 이후의 제사상을 이야기하는 건 언뜻 불경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께 언제 죽음이 찾아와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래서 아버지도 문득 본인의 죽음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미지의 두려움을 ‘영혼이 미각을 느낀다’는 식의 익숙한 감각으로 끌어내려 낙천적으로 넘기려 했을지 모른다. 아니면 본인의 제사상에 오를 고기를 내가 기꺼이 먹어줬으면 좋겠다는, ‘골고루 먹어야 건강하지’라는 통념을 농담으로 포장해 비건인 나에게 전달하며 내 건강을 걱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신상 앞에는 수많은 죽음의 잔재가 차려졌다. 우리 가족은 친척들을 대접한다며 장어, 전어, 소, 돼지, 문어를 산더미처럼 준비했다. 양이 얼마나 많은지, 동시에 네 곳에 불을 켜고 조리하다 전력 과부하로 차단기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만큼 가족들은 나를 제외하곤 육식을 한다. ‘고기 좋아하는 집안’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다.

생일을 특별히 여기고 챙기는 사람이 많다. 생일을 축하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살아간다는 것은 곧 다른 존재들의 죽음 위에, 또 더 많은 죽음을 쌓아 올릴 것이라는 예고이기도 하다. 우리는 생명을 죽여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다른 생명을 죽일 뿐만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사건으로부터 고통을 겪기도 하고, 자신을 스스로 괴롭히기도 한다. 고통이 나쁜 것이라면, 고통이 없는 것 즉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더 좋은 것은 아닐까? 반출생주의는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다. 존재가 겪는 쾌락을 좋은 것. 고통을 나쁜 것이라고 보고 비존재 상태의 고통이 없음을 좋은 것, 쾌락이 없음을 나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면 좋음의 총량이 비존재가 더 크기 때문이다. 심지어 쇼펜하우어는 “삶은 비존재의 축복받은 고요를 방해하는 이로울 것이 없는 사건일 수 있다”라고 말했다.

당장 존재를 멈추자는 말은 아니다. 아무리 비관적인 사람이라도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최소한의 낙관을 담고 있으며, 그 낙관이 우리를 미래로 이끈다. 그러나 그 낙관 속에서도 인간도 다른 비인간 존재가 그렇듯 자연의 순환 속에서 존재하며 다른 존재들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그리고 그 고통이 어떤 방식으로 가해지고 있는지를 아는 것, 나아가 그것을 줄이거나 없앨 수 있다면 마땅히 그렇게 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공장식 축산을 통한 고통의 양산과 대량 학살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죄악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만큼 그 규모가 국가를 초월해 세계적이다. 고기를 위해 사육되는 동물들은 인간에 의해 좁은 감옥에 갇혀 자신의 똥오줌 위에서 살며, 각종 항생제와 성장호르몬을 주입 당한다. 수명의 20분의 1, 인간으로 치면 4~5살밖에 안 된 나이에 산 채로 목이 잘리고 피부가 벗겨지고 사지가 절단된다. 도살장에 들어서며 먼저 죽는 동료를 보고 어떻게든 도망치려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면, ‘인도적인 도살’이라는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알 수 있다. 그런 삶을 강요받는 존재에게 태어남은 과연 축복일까?

탄생을 축하하는 날에서 죽은 생명을 생각한다.
사진 출처: Sigmund

할머니의 생신상에는 두툼하게 썰어놓은 소의 살과 돼지의 살, 그리고 문어, 장어들이 있다. 가족들은 그들을 구워 먹는 데 열중한다. 비인간 동물은, 맛이 있다. 사회에서 이런저런 일로 치이다가 집에 돌아와서 치킨을 시켜 먹다 보면 내가 식탁 위의 치킨이 아니라는 것, 나는 생태계 지배종인 인간에 속한다는 사실에서 작은 위안을 얻는다. 또 편한 사람과 만나 왁자지껄한 대화에 동물을 먹으면서 술 한 잔 곁들이면 인간끼리의 유대를 쌓을 수 있어 즐겁다고 한다. 그러나 난 이러한 이유를 아무리 많이 열거해도 그들을 먹을 수 없다. 적어도 신경계가 없어 고통을 느끼지 않으리라고 추측하는 식물로 식사하는 것이 나에겐 합리적인 선택이다. 다시 생일상으로 돌아온다. 사람들이 먹는 데 열중하는, 이미 비존재가 되어 상 위에 놓인 과거의 생명들을 바라본다. 우리가 먹는 존재의 삶과 죽음을 외면한다면, 생일을 즐기는 것은 과연 옳은 모습일까?

식탁 위에 놓인 문어가 눈에 들어온다.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왜 식탁 위에 오른 것은 문어이고, 할머니는 아닌가? 인간 대부분은 노쇠하며 여러 기능을 상실한 채 생을 마감한다. 인지 능력을 잃어 논리적인 사고나 대화를 이어가지 못하고, 근육량이 줄어들어 걷거나 움직이기 어려워지며, 배뇨와 배변을 조절하기도 힘들어진다. 음식을 씹고 삼키는 일조차 점차 힘겨워진다. 노화는 우리가 ‘정상’이라 부르는 상태에서 서서히 멀어져 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노인을 여전히 하나의 삶의 주체로 인정하며 존중하려 노력한다. 그는 여전히 욕구를 지니고, 고통과 쾌락을 느끼며,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온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가 고통받고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 고통을 덜어주려 애쓴다. 그렇다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나 죽음이 임박한 사람, 인지력이 없는 태아보다 인지 능력과 신체적 건강 면에서 더 나은 상태에 있는 비인간 동물들은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고기가 되는가?

문어는 타종과 교감하고, 성교하며, 자식을 돌보고, 배고픔과 위험을 감지하며 삶을 영위하는 존재다. 그들 역시 살아가려는 본능과,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려는 욕구를 지닌 삶의 주체다. 그런 문어를 단지 인간과 외형이 다르다는 이유로 끓는 물에 산 채로 넣거나 잔인하게 죽여 생신상에 올리면서, 바로 옆의 할머니는 정중하게 모신다. 이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문어와 할머니 모두 삶의 의지를 지닌 존재들이다. 그 의지의 정도가 현저히 다르다고 말할 근거가 없다면, 문어 역시 할머니처럼 존중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할머니를 문어처럼 대하는 행위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범죄라면, 문어를 그렇게 다루는 일 역시 정당화될 수 없다. 반대로 문어를 할머니처럼 존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윤리적 선택이다.

최근에 한 기사를 읽었다. 어떤 사람이 인터넷 개인방송 중 문어를 살아 있는 채로 먹으려다, 문어의 빨판이 얼굴에 들러붙었고, 그것을 억지로 떼어내려다 얼굴의 살점이 뭉텅이로 뜯겨 나갔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문어를 산 채로 먹었다’는 사실에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면서도, ‘사람의 살점이 뜯겼다’는 말에는 소름 끼치며 얼굴을 찡그린다. 나 역시 그랬다. 그 반응 속에서, 내 안에 깊이 뿌리내린 인간 중심주의를 다시 확인했고, 그 무의식적인 사고방식을 반성했다. 인간이라면 끊임없이 생각하고,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요즘처럼 속도가 중요해진 시대에는, 깊이 생각하다가는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팽배하다. 돈을 냈으니 생각할 필요 없다는 식의 빠른 효용 획득이 똑똑한 삶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가 눈앞에서 누리는 ‘빠르고, 편리하고, 깨끗한 것’들이 많아질수록, 보이지 않는 곳에는 ‘느리고, 불편하며, 더러운 것’들이 그만큼 쌓인다. 우리가 외면한 그 더러움이 결국 부패하여 우리 삶을 덮칠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변화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그 부패의 일부가 될 것이다.

김이중

존재 방식이 아름답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마치 지렁이의 완벽함을 닮아 지렁이 인간이 되어 지렁이 말을 구사하고픈 게으름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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