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엔 비비르(buen vivir)를 만난 김에 피은(避隱)도 생각해 보자 – 기후 위기 속에서 『삼국유사』 「피은」‘영재가 도적을 만나다’ 읽어보기

부엔 비비르는, 자본주의・개발・성장을 성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느낌을 공유하는 태도라고 할 수도 있고, 성장을 당연시하는 생각・행동・관습을 성찰하는 다양한 태도들이 어우러질 수 있는 장(場)이라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옛 안데스 사람들이 가졌었다는 ‘공동체 안에서 긴밀한 관계를 통해 이루는 충만한 삶’에 관한 ‘느낌들’에 기대어 생성된 것이다. 이런 ‘느낌들’은 고대의 다른 정치제에서도 공유되었던 것 같다.

‘공동체 안에서 긴밀한 관계를 통해 이루는 충만한 삶’에 관한 느낌

buen vivir(부엔 비비르). 스페인어다. 한국어로 직역하면 ‘좋은 생활’이다. 문자 그대로인 ‘좋은 생활’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겠지만, 이 말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남아메리카에서 재정의되어, 자본주의・개발・성장과 관련하여 형성되어 있는 이야기들과 체제에 대한 성찰과 대안을 함축하고 있는 말로 쓰인다. 에드아르도 구니다스에 의하면 “부엔 비비르의 기원은 안데스 일부 토속 집단의 다양한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오늘날과 유사한 의미로 처음 쓰기 시작한 때는 1990년대이며 특히 페루에서 관련된 언급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훗날 볼리비아와 에콰도르에서 부엔 비비르는 더 중요한 가치를 가지게 됐다.”

유럽 사람들이 식민지로 삼기 이전의 볼리비아에는, 그 땅에 약탈하러 간 유럽 사람들에게는 낮선 정치체들이 있었다고 한다. 아이마라(aymara) 공동체라는 것이 그런 정치체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그 정치체에 속한 사람들은 ‘공동체 안에서 긴밀한 관계를 통해 이루는 충만한 삶’에 관한 느낌을 공유했다고 하는데 이를 수마 카마냐(suma qamaña)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정치체 안에서는 구성원 사이의 관계가 긴밀하였다고 하고, 이에 따라 정치체의 영역[아이유(ayllu)] 안에서는 모든 생명체뿐만 아니라 환경을 이루는 모든 요소에게까지 확장 적용되는 ‘공동체’ 의식이 공유되었다고 한다. 한편 유럽 사람들이 식민지로 삼기 이전의 에콰도르에 있었던 어떤 정치체에 속한 사람들은 수막 카세이(sumac kawsay)라는 느낌을 공유했었다고 한다. 이 느낌은 ‘사회뿐 아니라 생태계를 포함한 폭넓은 공동체에서 이뤄지는 복지 체계’에 관한 실감이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복지는 물질적인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부에 비비르를 정의한다면 “자본주의・개발・성장을 성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느낌을 공유하는 태도”라고 할 수도 있을 듯하다. 
사진 출처. Shane Rounce
부에 비비르를 정의한다면 “자본주의・개발・성장을 성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느낌을 공유하는 태도”라고 할 수도 있을 듯하다.
사진 출처. Shane Rounce

이런 공동체 이런 느낌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낯선 것‘이어야’하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포르투갈 사람들이나 스페인 사람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남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떠나온 유럽에도 이런 느낌을 공유하는 정치제가 산재하였을 것이다. 항해에 나섰던 유럽 사람들도 대부분 그런 정치체에서 나고 자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런 정치체 속에서 생로병사를 거치기를 거부하거나 그런 생로병사를 거칠 기회를 박탈당한 후, 항해에 나섰을 것이다.

그들이 남아메리카에 도착하여 만난 사람들이 앞서 말한 수마 카마냐나 수막 카세이 같은 느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때 유럽 사람들과 남아메리카 사람들 사이에는 공통점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그들이 떠나온 유럽에도 그런 느낌을 공유하는 공동체들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전하여지고 있는 이야기들에 따르면, 그때 그곳에서 유럽 사람들은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을 더 많이 보려 하였던 듯하다. 이런 시각이 있었기에 대상화와 상품화가 가능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지나친 억측일까? 어쨌든 배를 타고 온 유럽 사람들은 남아메리카의 물질과 사람과 문화를 학살하고 노예화하고 약탈하고 말살하였다. 이에 따라 원래 남아메리카에 있었던 정치체들은 아마도 해체되었을 것이고, 수마 카마냐나 수막 카세이같은 느낌들은 엷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느낌들이 부엔 비비르라는 이름으로 복권되었다고 한다.

다시 수마 카마냐나 수막 카세이같은 느낌들을 정리하여 제시하여보면 다음과 같다.

• 공동체 안에서 긴밀한 관계를 통해 이루는 충만한 삶
• 모든 생명체뿐만 아니라 환경을 이루는 모든 요소에게까지 확장 적용되는 ‘공동체’ 의식이 공유된다는 느낌
• 사회뿐 아니라 생태계를 포함한 폭넓은 공동체에서 이뤄지는 복지 체계

자본주의・개발・성장을 성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느낌을 공유하는 태도

그런데 부엔 비비르는 수마 카마냐나 수막 카세이 같은 느낌들의 복권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990년대에 페루를 비롯한 남아메리카에서 퍼져나갈 때, 부엔 비비르는 다음과 같은 정책과 생각과 태도를 함축하고 있었다고 한다.

• 개발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비판
• 자본주의 이후 다른 형태의 개발을 주장하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복잡한 비판
• 탈성장 개념에 가까운 ‘개발 자체에 대한 대안’[이는 산업화의 필요성, 진보의 신화, 자연과 사회를 갈라놓는 이중성 등의 아이디어에 의심을 품지않는 ‘대안적 개발’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 부엔 비비르는 모든 국가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한 가지 방법의 ‘개발 단계’가 있다는 아이디어(투자, 생산하는 만큼 성장한다는 믿음)를 거부하며, 역사적 과정의 다양성을 옹호한다. 진보 또는 그 파생어들의 개념(특히 성장)이나 복지가 물질 소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생각 역시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복지가 물질 소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고방식이 우선 눈에 뜨인다. 이는 소비를 통해서 생산시설을 돌리고 고용이 유지되어야 복지가 기본적으로 가능하다는 사고방식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같다. 부엔 비비르는 이런 사고방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엔 비비르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 사고방식은 ‘저출생이 사회를 위기에 빠뜨린다’는 사고방식과 별개의 것이 아닌 듯하다. 일정한 인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고방식은 사람을 노동자인 동시에 소비자로 보며, 소비가 있어야 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가 유지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며, 결국은 자원의 낭비를 초래하게 된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저출생을 우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면서도, 좀 이상한 일이다. 자본주의를 중심에 놓은 체제를 승인하는 사람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기후환경 위기를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좀 이상한 일이다.

역사적 과정의 다양성을 옹호한다는 부엔 비비르의 특성은 수마 카마냐나 수막 카세이같은 느낌들과도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양쪽 다 인정하는 존재의 폭을 최대화하는 경향, 달리 말하자면 사람뿐만 아니라 생물 무생물 등 존재하는 모든 것을 대화하고 교류할 수 있는 상대로 인정하려는 경향이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이 사고방식은 부엔 비비르에서 두드러지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사고방식이 없다면 존재들은 원자화 파편화될 것이고, 세계는 그런 원자 혹은 파편들 사이의 무한경쟁의 장이 될 것 같다. 무한경쟁은 개발・성장과 친화적인 것 같다. 그러니 부엔 비비르와 수마 카마냐나 수막 카세이 같은 느낌들 사이에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1990년대 이후 남아메리카에서 발생한 ‘자본주의・개발・성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성찰하려는 태도’는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가졌던 수마 카마냐나 수막 카세이같은 느낌들과도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느낌들은 가급적 모든 존재들과 함께 하고 교류할 수 있을 듯한 느낌이다. 이런 느낌들은 사물을 쉽게 대상화 도구화하기 어렵게 한다. 그러므로 이런 느낌을 가진 사람이라면 대상화와 도구화에 이어지는 자본주의・개발・성장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런 전후 사정을 고려하여 부에 비비르를 정의한다면 “자본주의・개발・성장을 성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느낌을 공유하는 태도”라고 할 수도 있을 듯하다.

성장을 당연시하는 생각・행동・관습을 성찰하는 다양한 태도들이 어우러질 수 있는 장

이제 다시 새삼스럽게 비교하여 보면, 수마 카마냐나 수막 카세이 같은 느낌들과 1990년대에 페루를 비롯한 남아메리카에서 퍼져나간 부엔 비비르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부엔 비비르는 자본주의・개발・성장이 당연시된 후 또 상당한 시간이 지나 그것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에 비하면 ‘느낌들’에서는 자본주의・개발・성장 따위에 대한 반작용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는 접어두더라도, 개발과 성장에, 저 ‘느낌들’이 친화적이었던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다음 설명은 이 ‘느낌들’의 전통과 이어져 있다고 보아야 더 잘 설명될 수 있는 부엔 비비르의 특성을 서술한 것 같다. “부엔 비비르는 …… 상호문화적 맥락에서 바라보고, 심지어 도전을 부추긴다. 예를 들어 서구 지식의 맥락에서는 인간 외의 생태계를 포함한 확장된 공동체의 이상을 이해하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고, 일부 토속적 관점은 스스로의 남성 우월주의를 극복하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일례로 제3세대 인권(삶의 질이나 건강)에 기반을 둔 환경 정의는 특히 인간의 평가에 기대지 않는 자연의 권리에 대해 생태적으로 정의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이 서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나오는 상호문화성에 관하여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상호문화주의는 1990년대 후반에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대안적 담론으로 등장하였다. 다문화주의와 마찬가지로 상호문화주의는 자민족중심적인 동화주의나 배타주의에서 강조되는 단일 정체성을 비판하고, 상이한 문화들의 관계에서 모든 문화가 하나의 주체이자 동등한 권리를 가짐을 전제한다. 그러나 다문화주의가 다양성의 인정에 초점을 두어 다양한 문화의 병렬적 공존을 긍정한다면, 상호문화주의는 상이한 문화들 사이에 상호 작용이 없는 병존을 극복되어야 할 문제로 간주한다.” 이 설명으로부터 유추하여 보면, 상호문화성은 상이한 문화들 사이의 상호 작용을 지향하는 경향이라 할 수 있다.

남아메리카는 내지인에서 미국의 경제적 지배의 협력자[collaborator] 혹은 마름[supervisor of a tenant farm]으로 위상이 변경된 이베리아 반도 출신의 유럽인과 강제로 끌려와서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과 대륙의 주인에서 피지배인으로 위상이 변경된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각각 다른 문화들 사이의 상호 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잠재하여있던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적어도 문화적인 면에서는, 미약하나마, 문화들 사이의 상호 작용의 창조적 결과물이 만들어졌다. 남아메리카의 다양한 음악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문화적 환경이 이러한 동시에 자본주의의 충격을 완충 없이 받고 있었던 1990년대의 남아메리카에서, 부엔 비비르는 생성되어갔던 것이다.

앞에서도 정리한 바와 같이, 부엔 비비르는 자본주의・개발・성장이 당연시되는 문화에 대한 문제제기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문제제기가 1990년대 남아메리카에서 생성되는 데에는, 앞에서 예를 들어 설명했던 바와 같은, 남아메리카 문화에 잠재하여있던 상호문화성이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보아야, 부엔 비비르에 대한 에드아르도 구니데스의 다음과 같은 설명들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1) “어떠한 경우든 부엔 비비르는 성장에 대한 토론을 사회와 환경적 충만에 대한 토론으로 대체한다.”
(2) “탈성장과 달리 부엔 비비르는 상호문화 관점으로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한 현대의 세계관을 바꾼다는 더 야심찬 목적을 따른다.”
(3) “부엔 비비르는 서구 전통의 사고에 기초한다,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원천은 자연의 권리를 옹호하는 환경주의와 가부장적 중심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돌봄의 윤리를 주장하는 신페미니즘이다.”
(4) “부엔 비비르는 서로 다른 입장이 개발과 일반적인 근대성에 대한 비판에서 만나는 공통의 플랫폼 또는 분야로 해석되어야 한다.”

‘(1)’과 같은 면은 앞서 말한 ‘느낌들’에 이미 내재하였다가,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문화가 만나는 과정에서 증폭되다가, 음악 등 예술 방면에서 발현된 상호문화성이 부엔 비비르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2)’는 부엔 비비르가, 경제적 차원에서는 탈성장과 논리를 공유하지만, 상호문화성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탈성장보다는 더 포괄적이고 차원 높은 정치적 기획과 접목될 수 있는 것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3)’은 부엔 비비르가 서구 전통을 연원으로 하는 환경주의와 여성주의의 의제를 자신의 의제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 의제, 예컨대 자연 권리 옹호와 돌봄 등을 상대적으로 더 섬세하게 다룰 수 있는 태도라는 주장으로 보인다. ‘(4)’는 부엔 비비르가, 상호문화성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개발・성장 따위에 대한 비판을 한 방향으로만 경직되게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비판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제대로 작동할 수 있게 하여주는 장(場)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설명들을 종합하면, 부엔 비비르를 “성장을 당연시하는 생각・행동・관습을 성찰하는 다양한 태도들이 어우러질 수 있는 장”이라는 설명을 만들어 볼 수 있을 듯하다.

받아들이기 몹시 어려운 뉴노멀에 적응하기를 거부하고 숨어들기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e북), 저자 일연, 번역 신태영, (한국인문고전연구소, 2012)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e북), 저자 일연, 번역 신태영, (한국인문고전연구소, 2012)

『삼국유사』 「피은(避隱)」에 ‘영재가 도적을 만나다[永才遇賊]’ 라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신라 원성왕 때 나이가 90대에 이른 승려 영재(永才)가 은거하러 가던 차에 도둑떼를 만난다. 도둑들은 영재에게 노래를 청하고, 영재는 청을 받아들여, 나중에 「우적가(遇賊歌)」라는 제목이 붙여지는, 향가를 만들어 부른다. 도둑들이 이 노래에 감동하여 비단 2단을 주자 영재는 웃으면서 이를 사양하며 말한다. “재물이 지옥으로 가는 근본임을 알고 이제 깊은 산 속으로 피해 여생을 마치려 하는데, 어찌 이런 것을 받겠는가?” 감동한 도둑들은 영재의 제자가 되어 함께 지리산에 숨어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

피은(避隱). ‘피하다’와 ‘숨다’로 풀 수 있다. 이야기를 보면 90대 승려 영재는 재물을 피하여 지리산에 숨는다. 영재는 재물이 지옥으로 가는 근본이라고 생각하였다. 영재는 지옥에 가지 않으려고 재물을 피하였다. 재물을 거부하며 그것을 지옥으로 가는 근본으로 규정하는 영재를 보고 도둑들은 생활방식을 크게 바꾸기로 하고, 영재와 함께 지리산에 숨는다.

영재의 향가 공연에 대한 보답으로 도적들은 재물[비단 2단]을 주려 하였다. 그때 비단은 그 자체로도 쓸모가 있는 것이었겠지만, 믿음직한 교환 수단이기도 하였을 것 같다. 비단을 주려 하였다는 것은, 무엇이든 그냥 빼앗는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던 도둑들로서는 ‘정상인’처럼 행동함으로써, 대단히 세게 선심을 쓰려 한 것이었다. 영재와 도둑들은 재물로 하는 보답이 정상이 된 시대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영재가 재물을 거부한 것은 당대의 정상성[normality]을 거부한 것인 셈이다. 이 정상성은 지배적인 것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규범, 이를테면 뉴노멀(new nomal)이었던 듯하다, 어쨌든 이 정상성은 오래된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이에 대하여, 영재는 거부의 의지를 보였고, 도적들은 우연한 계기를 맞아, 노래에 대한 보답으로 비단을 주는 등, 모처럼 큰마음 먹고 정상성을 일회적으로라도 수용하여 보려다가, 영제의 거부에 동참하는 방향으로 전회(轉回)하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영재는 적응자였다가 적응 거부자가 된 듯하다. 널리 알려진 싱어-송라이터(Singer-Songwriter)였던 점을 고려하면, 그는 거의 90년 동안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던 그가 90이 넘어 지리산에 숨는다. 이는, 그저 유교 불교 노장사상과 각 지역 종교들을 망라하는 아시아 사상들 공통의 출처진퇴(出處進退) 즉 현실로 나가 활동하거나 현실과 거리를 두고 처사(處士)로 지내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생활방식의 일환으로 보기보다는, 가치의 급변에 따른 영재의 결단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듯싶다. 그는, 재물로 대표되는, 받아들이기 몹시 어려운 뉴노멀과 맞닥뜨린 것 아닐까? 도적들은 그 뉴노멀의 후폭풍에 가장 큰 타격을 받고 부적응자가 되었음에도, 마치 자기에게 큰 불이익을 주는 결정을 할 정당에 투표하는 ‘계급 배반 투표’의 집행자들처럼, 재물에 집착하다 못해 재물을 약탈하는 삶을 살다가, 지리산으로 숨어들어가는 싱어-송라이터와의 만남이라는 우연을 계기로 부적응자에서 적응 거부자로 변신하였다고 볼 수 있다.

재물이라는 뉴노멀이 자리잡기 전, 영재의 삶은 그리고 도둑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혹시 ‘공동체 안에서 긴밀한 관계를 통해 이루는 충만한 삶’에 관한 느낌을 이웃들과 공유하는 삶 아니었을까? 상상의 나래를 조금 과감하게 펼쳐보면, 남북국시대 경주 사람들의 삶과 이베리아 반도 사람들의 이주 이전의 안데스 사람들의 삶은 많이 유사하였을 듯싶다. 남북국시대 경주 사람인 영재는 재물이 뉴노멀이 되는 급변사태를 접하여 그것을 성찰하고 그 뉴노멀에 적응하기를 거부한 것 같다. 안데스 원주민들과 주인이었다가 마름이 된 이베리아 반도 사람들과 아프리카에서 강제 연행된 사람들의 후손이 뒤섞여 있는 남아메리카 사람들은 자본주의・개발・성장이라는 뉴노멀을 마냥 유지하지 않고, 안데스 원주민들의 ‘느낌들’을 다시 불러내서 그 뉴노멀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 같다.

영재는 재물이라는 뉴노멀을 거부하고 지리산에 숨어드는 것을 선택하였다. 도둑들도 그에 동조하였다. 그들 모두 재물을 따르는 것이 오래 발휘할 수 있는 재능[영재(永才)]이 아니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긴밀한 관계를 통해 이루는 충만한 삶’에 관한 느낌을 이웃들과 공유하는 삶에 적응하는 재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을는지도 모른다. 이에 비하여, 남아메리카 사람들은 안데스 원주민들의 ‘느낌들’을 불러내서 거기에 의지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음에 안도감을 느끼며 자본주의・개발・성장이라는 뉴노멀과 헤어질 결심하고 있는 것 같다.

숨지 않은 자들은 계속해서 재물을 기준으로 살아야 하였을 것이고 그 결과는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하고 소비자를 재생산하기 위하여 출산을 장려하여 모두가 자기도 모르게 에너지와 자원을 고갈시키는 주범이 되어가는 오늘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남아메리카 사람들이 자본주의・개발・성장이라는 뉴노멀과 헤어질 결심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다. 그러나 이 뉴노멀을 고수하는 결과는 역시 에너지와 자원의 고갈 그리고 불평등의 심화일 것이다.

영재의 피은이 비겁해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영재의 시대에는 피해서 숨어들 수 있는 ‘남은 땅[여지(餘地)]’이 있었다. 그렇기에 영재의 선택은, 그 시대를 기준으로 했을 때, 비겁한 것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남아메리카 사람들의 헤어질 결심이 몽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도 옛 안데스 사람들이 공유하였던 ‘느낌들’과 유사한 느낌들을 오랜 시간 공유하였던 조상들의 자손임을 상기해 볼 것을 권해볼 만하다.

그나저나, 지리산이라는 숨을 땅을 생각할 수 있었던 영재와 비교할 때, 지금 여기의 우리는 옴치고 뛸 여지를 좀처럼 찾기 어려운 현실에 처하여 있다는 것을 느끼면, 답답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겠다. 인구가 줄어들면 각자에게 허락되는 여지가 좀 늘어날 듯하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인구가 감소하면 소비가 감소하고 이어서 산업이 멈추고 무너지게 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반전시킬 설득의 힘이 나에게 부족하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또 답답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겠다.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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