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오랜만에 은사님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은사님께서 다른 날과 달리 힘없는 목소리로 “건강하게 잘 지내렴, 내가 많이 아프다”라고 말씀하셨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말기 암이고 겨우 한두 달 정도의 시한부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저는 방황하고, 주저하고, 배회하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은사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무언가를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제가 드릴 말씀은 사실상 없었습니다. 전화를 해서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나? 아니면 삶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나? 그 어떤 것도 답이 아닌 듯 했습니다. 그래서 몇 번이나 통화버튼을 누르려다 말고 그랬지요. 나중에 들어보니, 은사님은 마지막으로 가장 친한 친구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 친구에게 “살아갈 자신이 없다. 뒷일을 잘 부탁한다”라고 마지막 말을 남기셨다고 합니다. 그 다음 날 긴 잠과 같은 침묵의 길, 죽음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이 글을 쓰기 불과 두어 달 전의 일이고, 저는 아직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합니다.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끝이 있다는 것은 그저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숙제로 다가옵니다.
흔히 사람들은 말합니다. “내려놓아라!” 저는 아직까지 내려놓는다는 것의 의미를 잘 모릅니다. 내려놓는다는 말은 어찌 보면 인생이란 게 덧없고 부질없고 무망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인생에 대해 아예 생각을 하지 않는 게 나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삶이 유한하다고 느끼는 것은 자신의 삶의 좌표에 큰 변화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한때 눈에 병이 생겨 한동안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두루뭉술한 색깔의 덩어리로 인식되었습니다. 작은 돌부리에도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고, 거리에 나가면 위험한 일투성이였습니다. 그때 저의 소원은 책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철학사 책을 앞에 놓고 하루에도 몇 번이고 샤워를 하고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시력의 한계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시력이 회복되어 지금은 잘 보이게 되었지만, 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깨달았던 시기였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유한한지도 알게 되었지요. 나의 신체의 한계를 느낀다는 것은 함부로 살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매 순간에 충실하게 되지요. 유한하다는 것, 그로부터 저는 저 자신의 색다른 사랑의 행동이 시작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스피노자가 말했던 특이성(singularity)이라는 개념이 그것입니다.
스피노자가 말한 사랑의 개념들
스피노자는 사랑을 신적 속성으로 봅니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는 능동적인 힘처럼 사랑도 세상을 재창조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지요. 스피노자의 신은 하늘 저편에 있으면서 세상을 관할하는 유능한 신이 아니라, 세상만물에 내재하고 깃들어 있는 신입니다. 이러한 범신론적인 사유는 당대에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사물, 식물, 광물, 자연, 생명, 인간 등에 신적 속성이 내재해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신이 세상을 초월하여 멀리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만물 그 자체이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신은 도처에 이미 존재하는 현실의 작동원리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세상에 하나뿐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이라 부르고, 가톨릭에서는 하늘에 계시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이라고 부르지요, 그런데 영어 단어 ‘God’의 번역의 모태가 되었던 것이 바로 구한말 동학에서의 ‘한울님’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한울님의 어원은, 장일순 선생의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녹색평론, 2016)에 따르면 해월 최시형 선생의 ‘한 알’ 사상에서 유래한다는군요. 즉 씨앗 한 알에 깃들어 있는 신이 그 원형이었던 것입니다. 초월적인 신의 형상에서 완벽히 벗어난 내재적인 신으로서의 좁쌀 한 알이었던 셈입니다. 스피노자의 사상과 묘하게 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스피노자에게 사랑은 신적 속성임과 동시에 신체변용(affection)이기도 합니다. 여기서의 신체변용은 사랑을 함으로써 신체가 변용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아이와 대화를 할 때 나도 모르게 몸을 낮추어 아이의 눈높이에서 소통하려는 것도 사랑이라는 신체변용의 일종입니다. 몸을 낮추는 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능동적으로 이루어지는 행동입니다. 이러한 신체의 능동적인 변용이 갖고 있는 모습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되기’의 움직임과 흐름을 만들어냅니다. 노숙인 되기, 아이 되기, 여성 되기, 장애인 되기 등의 ‘되기’의 신체변용은 바로 사랑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것은 살짝 미소를 띠는 행동, 걸음을 멈추고 길을 비켜주는 행동, 박수를 쳐주는 아주 사소한 행동으로도 발현됩니다. 되기는 완성되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잠깐 나타났다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기에, 매 순간 우리는 되기의 과정 중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아직 우리의 몸으로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몸이 변용되어 색다른 몸으로 재탄생할 가능성은 도처에 존재합니다. 특히 공동체와의 접속은 사랑을 촉발해 춤추는 몸, 노래하는 몸, 이야기하는 몸을 만들어내지요. 그런 점에서 사랑이 신체변용이라는 것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몸의 사용설명서를 제공해주는 셈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스피노자에게는 사랑이 자기보존 욕구, 즉 코나투스(conatus)이기도 합니다. 사물, 동물, 인간, 미생물 등은 자기보존의 욕구를 자기원인으로 합니다. 생명, 우주, 자연이 자기를 보존하려는 힘을 갖고 스스로를 구성하고 생산할 때, 그것이 곧 사랑의 능력인 셈입니다.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와해시키고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결정하고 보존하고 자기생산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상대방과 자신의 신체를 파괴하는 것에서 오는 사랑은 전제부터 성립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증오와 폭력이지요. 사랑은 스스로의 결정력을 높이고, 자존감을 고무하고, 자신을 보존하고 생산하는 힘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우주, 자연, 생명, 사물의 자기원인으로도 깃들어 있습니다.
유한자로부터의 사랑
스피노자의 사상은 단순하고 담백하고 소박하기까지 합니다. 더불어 모든 것을 설명하겠다는 과도한 자신감을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의 사랑 개념은 인격신처럼 세상을 유능하게 관할하는 것도 아니고, 수난과 희생 이후에 오는 것도 아니고, 기적처럼 등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에 내재하고 있지만, 세상 모든 것에 보편적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스피노자의 사랑은 호수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돌멩이 하나처럼 우리 삶의 자기원인으로 동심원을 그립니다. 그리고 그 돌멩이의 파동과 입자는 자기를 보존하고 자율적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모든 생명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한 지속되는 사랑, 그것은 사랑으로서의 삶이 지속되는 한 영원하다는 약속과도 같은 것입니다. 분명 스피노자는 순수, 겸양, 소박을 초월적인 신의 것으로 두지 않고, 삶의 내재적인 것으로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스스로가 가장 먼저 그러한 내재적인 신, 범신론적인 신에 입각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것은 개인도 수행을 하면 신이 될 수 있다는 영지주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기 이전에 사물, 생명, 식물, 광물에도 신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 범신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소중하고 유일무이하고 특이한 것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펼쳐집니다.

어쩌면 마치 종교적인 사랑이나 인류애처럼 거대하고 완벽한 무언가로 느껴질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스피노자의 사랑은 무한한 우주와 자연에 대한 깨달음이나 존재의 유한함에 대한 깨달음과 같이 도(道)를 터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작은 것들에 깃들어 있지요. 예를 들면 친구에게 받은 선물을 어루만지고 친구를 생각할 때조차 사랑은 그 선물에 서식하고 있습니다. 고양이의 갸르릉 소리에 감응하고 쓰다듬을 때도 사랑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옆 사람에게서 색다른 면을 발견하는 순간에도 사랑은 서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초월적 신이 아니라 삶에 내재된 것입니다. 그래서 도처에서 발흥하고 생산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온 우주와 자연에 사랑이 깃들어 있고,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도처에 사랑이 서식하고 있으므로, 그래서 사랑을 하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은 자신의 끝과 폐지와 유한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유한성을 깨닫는 것을 강조합니다. 존재의 끝이나 유한성을 모른 채 ‘그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는 속인(Das Man)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끝과 유한성을 인식한 현존재(Dasein)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요. 그것은 사랑이 끝과 유한성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유한하기 때문에 이 사랑은 단 한 번밖에 오지 않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가슴 절절한 사랑이 가능하고, 끝이 있기 때문에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사랑이라는 되기(becoming)의 흐름을 바라보지 못하고 철저히 ‘이기(being)’, 즉 존재(Sein)의 전통에 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한하다는 것이 특이한 것으로 변용되어 나타날 사건의 가능성이나 잠재성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것은 주어져 있는 것, 미리 전제된 존재로 등장합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의 사이, 다시 말하면 ‘지금 이 사람이 유일무이한 존재다’라는 ‘유일무이한 존재로서의 특이성’과 ‘이 순간은 단 한 번뿐인 시간이다’라는 ‘유일무이한 사건으로서의 특이성’ 사이의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사이에 과정적이고 진행형적인 사랑의 흐름, 즉 ‘되기를 통해 다시 특이해지는 과정’이 있음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또한 사랑은 유한하지만, 그것이 진행되는 과정은 무한하게 전개될 수 있습니다. 즉 접속하고 연결되는 과정, 접촉하고 교감하는 과정을 통해 유한한 것들이 점점 무한한 능력으로까지 성숙해가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75억 인류가 마치 1인 가구처럼 각기 흩어져 산다면 75억 개의 가능성만이 존재하겠지요. 하지만 서로 연결되고 접속하고 사랑과 되기의 과정을 거치면 변용의 가능성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서너 명 단위였다가 100명, 1000명, 만 명 이상의 대규모 무리로 묶이기도 하고, 한 번 만들어진 무리가 해체됐다가 다른 조합을 이루기도 하면서 셀 수 없이 많은 조합이 계속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뜻 보기에도 거의 무한에 가까운 가능성입니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유한에서 무한으로의 이행’에 대해 독일 철학자 헤겔이 많이 탐을 냈다고 합니다. 헤겔은 절대적이고 무한한 신의 영역으로 유한한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비밀열쇠를 스피노자가 갖고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사상은 헤겔에 의해 참담한 왜곡이 이루어집니다. 사랑이라는 신체변용을 뺀 무한은 관념 속 문제가 되어버립니다. 그는 사랑이나 변용 없이도 변증법이라는 관념의 자기운동을 통해 절대정신에 도달하고 무한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관념론 사상을 설파합니다. 그래서 헤겔을 골방철학자 혹은 변신론자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그런 관념론 사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철저히 몸의 변용, 즉 사랑에 입각한 유한에서의 무한으로의 이행입니다. 그래서 무한이 만약 있다 하더라도 ‘유한자의 무한결속’으로서의 공동체 내부의 관계 방식으로만 존재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연결, 접속, 변용, 사랑 없이는 공동체의 무한한 시너지가 생기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자유인은 죽음이 아닌 삶을 성찰한다 !
은사님의 장례식장으로 향했습니다. 늘 그랬던 모습 그대로 활짝 웃고 계신 그분의 영정사진을 보고, 저는 집에 있는 아내와 가족을 먼저 떠올렸습니다. 이 한 번뿐인 삶을 얼마나 충실하게 살고 있는지 가늠해보게 되었지요. 특히 가장 가깝게 사랑의 감정을 나누는 가족들이 혹시 서로가 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비루하게만 대하지는 않았는지, 일상에 파묻혀 서로의 존재를 망각하지는 않았는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끝이 있다는 것이 더 절실한 사랑을 만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은사님의 장례식은 그것을 깨닫게 해준 시간이었습니다. 그가 방학만 되면 가족들과 함께 훌쩍 여행길에 오르곤 하던 게 떠올라, 채 눈물을 닦지 못한 가족들에게 건넬 위로의 말을 애써 찾아냈습니다. 그분은 허무를 남긴 것이 아니라, 삶에 더욱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숙제를 남겼습니다.
무엇이 최선일까요? 바로 사랑과 욕망, 정동이 최선이 아닐까요? 지위도 명예도 이름도 없이 그저 우주의 먼지와도 같은 존재가 된 그분에게 삶이라는 소풍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해맑게 웃고 있는 영정사진 위로 사랑이라는 숙제를 풀고자 발버둥 치던 작은 아이의 모습이 겹쳐졌습니다.
장례식을 다녀온 이후, 저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입술이 타들어가고, 심장이 마구 뛰곤 했습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펼쳐보았습니다. 삶에 대한 긍정, 욕망과 사랑, 정동에 대한 그의 긍정이 삶을 살아가려는 절박한 사람들에게는 이정표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죽음 또한 두려움이나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유한함을 알리는 좌표 같다는 생각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관심, 사랑에 대한 희망과 열정이 가능하다는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삶이 유한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의미로도 읽히지만, 사실은 사랑과 욕망의 긍정과 생성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진정한 삶의 좌표라는 생각도 떠올랐습니다.
『에티카』가 전제하고 있는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은 어떤 의미일까요? 저는 한참 동안을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매사에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라는 자기계발의 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체제나 현존 자본주의 문명을 긍정하자는 것도 아니었지요.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과 자연의 에너지와 힘에 대한 긍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삶이 지닌 생명력과 활력에 대한 긍정이었습니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일갈합니다. “자유인은 죽음을 사유하지 않는다. 그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라고 말이지요. 우리의 유한함에 대한 인식은 죽음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수용이 아니라, 더 특이해지고 더 다채롭고 풍부한 삶을 살아가려는 삶의 욕망과 열망을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에게는 유한성이 바로 특이성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내려놓은 사람의 과제

어릴 적부터 생활기록부에 ‘주의가 산만하다’는 평가가 빠진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뒤도 보고, 옆도 보고, 앞도 보는 삶이 좋습니다. 그저 앞에 있을 끝만을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 가장자리, 미래와 과거, 현재를 넘나들며, 상상력을 발휘하고 사랑의 미소를 보내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저에게는 스피노자라는 특이점이 비로소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삶의 좌표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내려놓으라’고 말합니다. 욕심을 내려놓고,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은 초탈한 삶을 살라는 의미이지요. 하지만 내려놓았다고 해서 금욕, 우울, 침잠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았기 때문에 작은 생명력, 욕망, 활력, 정동 등에도 기뻐하고 삶의 의미와 재미를 찾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작은 만남과 마주침, 사랑의 사건이 갖는 응시와 발견이기도 합니다. 이제 사랑과 욕망을 자기원인으로 가진 사람, 내려놓은 사람, 유한성을 응시하고 최선을 다하려는 사람들이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즉 내려놓은 사람이 나서서 공동체의 판을 짜고 새로 배치해서 다가올 사람들을 위한 환대와 돌봄의 장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려놓은 사람이 먼저 사랑의 사건을 일으킬 판, 배치, 구도를 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직접 나서서 할 수도 있지만, 미래세대에게 많은 기회와 계기를 주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는 삶을 재창안해야 할 시기입니다. 내려놓은 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시작점으로 삼아 사랑의 사건의 순간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스피노자의 사랑의 구도는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실존주의 사상이 말하는 것처럼 내려놓는 것은 종결이 아니라, 내려놓는 삶의 작동에 대해 생각해야 할 출발점입니다. 이제 내려놓는다는 것은 종결 지점이 아니라 시작점입니다. 유한성에 대한 응시는 완결이 아니며, 사랑의 사건을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이렇듯 유한한 세상이지만 사랑과 변용을 통해 보면 다른 삶, 다른 생각, 다른 세상은 언제든 가능합니다. 또한 그것은 사랑을 자기원인으로 하는 영원성의 약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