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사랑] ⑬ 사랑이 지금-여기를 바꾼다

“스피노자의 평행론을 단 하나의 화두로 요약하자면,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저기 저편을 향한 환상이 아니라, 지금-여기를 바꾸는 행동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행동은 우리를 지혜롭게 만들며, 우리 자신의 완고해지려는 마음과 고정되려는 삶, 경직되려는 신체를 부드럽게 녹여내고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아내와 처음 데이트를 한 날, 식사를 한 곳은 감자탕 집이었습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채식을 하고 있던 터라 약간 주저했지만, 이미 한 시간쯤 근처를 돌다 겨우 발견한 식당이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주문한 감자탕이 나오고 나서 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채식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꺼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되도록 국물이 묻지 않게 감자만 골라서 제 접시에 놓아주었습니다. 그렇게 차근차근 문제를 해결하려는 아내의 모습이 참 지혜로워 보였습니다. 그날부터 제 채식은 피치 못할 경우 고기국물은 용인하되 덩어리 고기를 먹지 않는 ‘비덩’으로 바뀌었지요.

사랑이 삶의 내재성을 바꾸는 능동적인 것이며, 상대방과의 차이를 풍부함과 다양함으로 만드는 지혜라는 사실을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사진 출처: CDD20

그리고 함께 사는 내내 사랑과 정동의 자기원인에 따라 움직이는 아내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아내는 저의 채식을 지원해주기 위해, 집에서는 고기를 요리하지 않되 밖에서 친구를 만날 때 가끔씩 육식을 하는 방식으로 식생활을 바꿨습니다. 그것은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감정과 정념에 따라 좌충우돌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런히 사랑의 이유를 찾고 그것에 따라 성실하고 꾸준히 행동하는 것이었지요. 그때 저는 사랑이 맹목적인 정념이 아니라, 자기원인을 가진 정동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 온전히 삶의 자기원인을 바꾸어나가는 것이라는 점을 깨달은 것이지요.

신혼 초 대학원에 다니고 있던 저는 낮과 밤이 완전히 바뀐 올빼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결혼 전부터 10년 넘게 유지해오던 생활방식이었지요. 그러다가 그런 생활패턴을 완전히 바꾸기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아내와 더 오래 얼굴을 맞대고 함께 삶과 일상을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지요. 저 역시도 삶의 자기원인을 성실히 바꾼 것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는 아내와 함께 커피 한 잔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에 하루를 정리하면서 아내와 함께 맥주를 마시며 도란도란 얘기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사랑이 삶의 내재성을 바꾸는 능동적인 것이며, 상대방과의 차이를 풍부함과 다양함으로 만드는 지혜라는 사실을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스피노자의 『에티카』의 전모를 조금씩 깨달은 것 같습니다. 사실 저에게는 『에티카』가 인생의 숙제였습니다. 고등학교 때 윤리선생님이 『에티카』를 소개해준 이후부터 수차례나 도전했지만, 그 사상의 전모를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요. 아주 천천히 삶을 살아가면서, 삶의 자기원인에 따라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에게 신체변용, 다시 말해 ‘되기(becoming)’는 능동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사랑과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흔히 혼란과 혼돈, 불안정성, 맹목성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삶의 내재성, 삶의 자기원인, 삶의 일관된 흐름을 만드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아내를 위해 커피를 내릴 때도, 빨래를 널 때도, 설거지할 때도 사랑과 정동의 자기원인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서 조금 더 따뜻하고 가지런하고 깨끗하고 부드럽게 만드는 지혜를 터득하곤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마실 커피이고, 입을 옷이고, 사용할 그릇이기 때문에 항상 정성을 다하고 싶다는 마음이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돌발적인 순간이나 일시적인 사건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자신의 신체, 삶, 행동을 변화시켜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지혜를 얻는 과정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랑은 저기 저편을 향한 환상이 아니라, 지금-여기를 바꾸는 행동이 아닐까 합니다. 그날 아내가 최대한 고깃국물이 묻지 않게 감자를 골라주며 저를 배려한 것도 사랑과 정동의 용기 있는 행동이며, 제가 아내를 위해 설거지를 깨끗하게 하려는 사랑과 정동의 부드러운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행동은 우리를 지혜롭게 만들며, 우리 자신의 완고해지려는 마음과 고정되려는 삶, 경직되려는 신체를 부드럽게 녹여내고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욕망과 정동의 지도 제작법

스피노자를 합리론자로 규정하려는 사람들은 스피노자가 논리 전개를 위해 사용한 기하학적 방법론을 그 근거로 들곤 합니다. 기하학이 사물을 가장 이상적으로 설명하고 계산합리성과 논증과 추론의 합리성이 가장 잘 들어맞기 때문이겠지요. 즉 스피노자는 필시 “삼각형 세 각의 합은 180도다”처럼 원인과 결과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인과론에 따라 논증을 전개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정작 스피노자가 사용한 인과론의 내용을 자세히 들어가 보면 의외의 결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피노자 이론이 합리적인 인과관계라고 제시한 원인의 항목부터가 아주 수상합니다. 왜냐하면 합리론자라면 지극히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할 법한 사랑과 욕망, 정동이 인과론의 원인으로 떡 하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삶의 자기원인으로 사랑, 욕망 같은 비합리적 동기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쯤 되면 스피노자를 합리론자로 보는 주장이 살짝 난망해집니다.

‘사랑은 무엇이다’라고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듯이, 스피노자의 이론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합리론처럼 사물의 본질로서 ‘~은 ~이다’라는 의미화의 논리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사랑과 욕망, 정동이라는 자기원인이 사물의 본질이 아닌 곁과 주변, 가장자리에서 서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을 적시해야 하는 인과론이 과연 성립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 듭니다. 스피노자는 삶, 사랑, 정동, 욕망을 하나의 의미로 단정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논리와 추론을 전개해나가는데, 그것은 삶이 살아지고 욕망이 발생되는 현실의 원리를 따릅니다. 결코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의미화=모델화=표상화’의 방법에 따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너의 사랑은 이런 것이야!”라고 딱 의미의 핵심을 규정할 수 없는 것이 삶이며, 사랑이며, 정동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스피노자를 합리론자라고 규정하는 통속적인 철학사에서의 논리는 군색하기 그지없습니다.

사실상 스피노자의 기하학적 방법론은 ‘사랑과 욕망의 지도 그리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계승자 펠릭스 가타리는 기하학이라는 인과론적 방법론 대신 ‘지도 그리기(cartography)’라는 말로 사랑과 욕망의 흐름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가타리의 지도 그리기 방법론은 스피노자의 기하학적 방법론이 갖고 있는 인과론, 합리론, 주지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경로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에티카』가 논증, 정리, 공리, 증명 등으로 가득하다 보니, 보는 이에 따라 지극히 논리적이고 인과론적인 책으로 오해될 여지는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합리성을 가장한 사랑과 욕망, 정동의 전략적 지도 제작의 방법이라는 것이 독서 과정에서 금방 느껴질 수밖에 없는 책이 『에티카』입니다. 그래서 관계의 윤리학과 미학, 즉 관계가 얼마나 풍부하고 다양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지도 제작법이 이 책에 들어가 있습니다.

평행론의 질문들

대학 시절, 친한 친구와 오해가 생긴 적이 있습니다. 나에게 모진 말을 했던 그 친구의 얼굴도 보기 싫었고 마음은 한없이 우울했습니다. 학교에 나가면 그 친구를 만날까 봐 자취방에 틀어박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습니다. 그 녀석이 왜 그런 식으로 말했는지, 왜 그때 나는 더 독한 말로 받아쳐 주지 못했는지, 평소에 그가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까지, 모든 기억을 깡그리 털어내어 하나하나 복기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생각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오히려 기억은 더 부풀려져 오해가 오해를 낳았습니다. 녀석이 아무리 무릎 꿇고 사과해도 절대 받아주지 않겠노라 다짐도 했습니다.

하루 종일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더니 배가 고파졌습니다. 일어나서 밥을 챙겨 먹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습니다. 슬슬 학교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동아리방에서 그 친구와 딱 마주쳤고, 그는 내 얼굴을 보자 무안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습니다. 밤새 했던 다짐과 달리 어쩐지 그 친구의 사과를 쿨하게 받아줄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이루어진 변화에 저도 놀랐습니다. 몸을 움직여 밥을 먹고, 걷고, 버스를 타고, 무엇보다 그 친구를 만나서 얼굴을 마주 대하고 눈빛을 보고 표정을 헤아리고 목소리를 들으면서 수만 가지 생각들이 한꺼번에 제 머리를 스쳐 지나갔던 것이지요. 집 안에 콕 박혀 있을 때의 생각과 집밖으로 나와서 움직일 때의 생각은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요?

스피노자의 평행론을 잘 살펴보면 꼼짝 안 할 때의 마음이 ‘감정’이라는 것과, 움직일 때의 마음이 ‘정동’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몸과 마음이 한 세트라면, 함께 움직여야 맞겠지요. 하지만 꼼짝 안 하고 있을 때 떠오르는 감정은 망상과도 같아서, 일시적이고 돌발적으로 찾아와 머릿속에서 공회전합니다. 저 역시 혼자 제 방에서 꼼짝 안 하고 있을 때 생각의 덩어리들이 뭉쳤다가 사라지고 공회전하고 가지를 뻗어가고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불교의 지관법(止觀法)은 ‘마음을 응시하는 마음’을 통해 망상을 일으키는 꼼짝 안 할 때의 마음을 정지와 멈춤 상태로 놓고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스피노자의 평행론은 마음의 지도 제작에서도 엄청난 혁명적인 선언을 하는 것만 같습니다. 움직일 때의 생각만이 정동, 무의식, 욕망의 자기원인에 따른 마음이라는 점을 선언하니까요.

혹시 주변에 망상증에 걸려 쩔쩔매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사랑과 욕망의 자기원인에 따라 움직이면서 생각했던 것 이외에는 결코 자신의 생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조언을 할 수 있겠지요. 결국 꼼짝 안 할 때의 생각을 멈추고, 움직일 때의 생각들, 즉 정동과 무의식의 흐름을 해방하는 것이 망상증을 치유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가타리의 말처럼 보통 사람들은 여러 가지에 미쳐 있는 사람이지만, 망상증에 걸린 사람은 하나에 미쳐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 다를 것입니다. 따라서 정동의 자기원인과 흐름에 따라 여러 가지에 미치는 것이 어쩌면 치유 방법일지 모릅니다.

우리 문명은 각종 미디어와 인터넷, SNS, 스마트폰 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천리를 보겠다는 온갖 도구들이 망상과 감정의 덩어리들이 생기게끔 유도하는 주범이지요. 그러나 삶의 자기원인, 정동의 흐름에 따라 생각해보면 덧없고 가식적이고 무망한 것들입니다. 결국 신체변용을 거치지 않는 생각들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 태도가 정동과 사랑의 자기원인에 따르는 삶의 방식이지요. 결국 『에티카』는 정동의 윤리학인 셈입니다.

결국 스피노자의 평행론을 단 하나의 화두로 요약하자면,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진 출처: CDD20

사례를 한 번 들어볼까요? 한 사람이 특정 지점까지 가려면, 말을 타고 한 시간을 간 후 자동차를 운전해서 한 시간을 더 가고, 자전거를 타고 또 한 시간을 가야 한다고 해보죠. 그는 말 되기, 자동차 되기, 자전거 되기로 신체를 차례로 변용해나갈 것입니다. 신체변용은 여러 양태로 드러나며 행렬을 그려 나갈 것입니다. 이때 이에 평행하게 정신의 속성에도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즉 승마법, 운전법, 경륜법 등의 공통관념이 형성되면서 평행궤도 위로 행렬을 그릴 것이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 신체의 ‘변용양태의 증가’가 정신 속의 속성의 증가, 즉 ‘공통관념의 증가’를 초래합니다. 이 모든 부분의 자기원인으로서의 신체변용, 즉 되기(becoming)는 사랑과 욕망의 다른 이름입니다. 결국 스피노자의 평행론을 단 하나의 화두로 요약하자면,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질문이 하나 떠오릅니다.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면 그 수많은 정보와 지식은 필요 없다는 얘기일까요? 경험하고 체험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는 얘기일까요? 초연결 사회, 집단지성의 사회, 다중지성의 사회에서 벌써 답답함을 느끼는 분들이 생길 수 있겠네요. 여기서 마음을 움직이는 마음, 마음을 응시하는 마음,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성에 대해 스피노자는 주저 없이 말하기 시작합니다.

욕망은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성이다

철학사에서 이성은 욕망을 철저히 배제해왔지요. 그 시작은 고대의 형이상학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플라톤은 『국가』라는 책에서, ‘이성이라는 마부가 끄는 쌍두마차’를 등장시킵니다. 이성이라는 마부는 정념이라는 맹목적인 흰 말과 욕망이라는 사나운 검은 말을 통제하면서 앞으로 달려갑니다. 이러한 플라톤의 사상은 근대로 이어지면서, 욕망을 맹목적인 정념이나 파괴적인 충동으로 폄하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전통은 근대철학에서도 여전해서 욕망을 빛이 아닌 어둠으로, 선이 아닌 악으로,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보는 것으로 나타나지요. 이처럼 욕망을 철저히 배제하려는 것이 바로 철학사를 관통하는 흐름입니다. 그러니 주류철학에서 욕망이란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성’이라는 스피노자의 말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지요.

혹시 뭔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스피노자는 욕망도 일종의 이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성은 이성이지만,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성’인 것이지요. 이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평행론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스피노자의 평행론은 신체로서의 욕망과 정신으로서의 이성이 평행을 달리는 색다른 구도를 그려냅니다. 욕망의 자기원인이 되는 질문, 즉 “네가 원하는 게 뭐냐?”라는 질문이 던져졌을 때, 이성 역시도 합리적 이유를 찾게 된다는 것이지요. 내가 뭘 원하는지 아는 것은, 곧 내 실천과 행동의 이유를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이성적인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그것은 감각적인 것, 신체적인 것, 정념적인 것을 복권하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스피노자는 자신을 ‘나폴리의 혁명가’로 묘사한 그림을 참 좋아했다지요. 그는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성, 즉 무의식, 욕망, 사랑, 정동의 지도를 그려 나가는 이단적인 노선, 혁명가만이 그려낼 수 있는 지도 그리기를 합니다. 결국 더 욕망할수록, 더 사랑할수록 공통관념으로서의 지혜가 더 많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목수가 되려고 한다면, 목수 매뉴얼, 도구 사용법, 설계, 기능, 돈 버는 법 등을 배우는 것보다 먼저 목수 일을 사랑하고 욕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욕망의 자기원인의 구도입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를 찾으려면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성’인 욕망의 자기원인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더욱이 ‘삶의 내재성’이라고 표현되었던 사랑과 욕망, 신체변용이라는 자기원인을 잘 들여다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성적인 것을 잘 들여다보면, 그 이성의 원칙이 되는 준거집단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준거이성에 대한 탐색은, 이탈리아 정치가이자 대안적인 정신의학의 선구자인 프랑코 바자리아(Franco Basaglia)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쉴 새 없이 일하며 자기계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성공한 개인을 롤모델로 삼거나 부유한 집단을 준거집단으로 삼습니다. 또한 자신이 남보다 더 똑똑해지고 싶어서 지식을 체득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들을 준거집단으로 삼을 것입니다. 특히 “그가 이성적이다”라는 규정 뒤에는 합리적 사유를 할 수 있는 정상인들의 준거집단을, 즉 소비와 문화생활, 중산층 이상의 소득을 영위하는 표준적인 집단을 준거로 삼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그런 준거이성의 빛깔 좋은 포장지를 뜯어내고, 자신의 욕망과 사랑의 흐름을 유일무이한 준거로 삼으라고 말합니다. 즉 무슨 일을 할 때 밖에서 준거를 찾기보다는 자신이 이 일을 얼마나 사랑하고 욕망하는지를 기준점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는, 스피노자를 ‘야만적 별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야만성 혹은 야성성은 삶의 자기원인으로서의 사랑과 욕망이 아주 특이한 것을 만들어내고 특이한 것에 의해 활성화되고 풍부해지기 때문에, 이성이 만들어낸 문명으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혹시 색다르고 특이한 무엇인가를 사랑해본 적이 있나요? 엄청난 활력과 에너지가 발생하지 않던가요? 그런 사랑과 욕망의 강렬한 흐름을 자신의 기준점으로 삼는 것은, 삶을 비루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사랑이라는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성’을 삶의 자기원인으로 삼는 것입니다. 스피노자의 야성적 사유는 세계를 재창조하는 원동력이며, 삶의 진정한 이유와 의미, 가치를 정립하는 윤리학의 전모입니다.

성평등의 실천은 우리에게 지혜로운 삶을 살도록 하는 생태적 지혜의 원천입니다.
사진 출처: CDD20

이제 스피노자의 평행론을 정리해볼 시간입니다. 욕망과 이성이 평행선을 달린다는 것은 결국 무슨 의미일까요? 이미 누군가 정해놓은 딱딱하고 경직된 책임, 의무, 당위, 믿음의 합리성으로 삶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욕망을 기반으로 만들어낸 별난 것, 특이한 것, 차이 나는 것을 통해 삶을 재창안하겠다는 것은 아닐까요? 스피노자는 사랑과 욕망이 많아질수록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많아진다는, 얼핏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논리로 평행론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평행론의 끝에는, 늘 가감 없이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는 결론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별난 것을 사랑할 때 우리는 활력과 풍부함, 다양성을 갖게 되며 결국 지혜가 성숙해가는 과정으로 지도를 그릴 수 있습니다.

결국 스피노자는 근대 이성의 별종적인 노선, 가장 비합리적이고 야만적이고 이단적인 노선을 창안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뜨거운 욕망이 차가운 이성을 만든다는 평행론의 역설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폐색과 의고주의, 쪼그라듦, 비루함에 사로잡히고, 문화, 향유, 소비, 삶의 형태 등 모든 것이 똑같아지는 현존 문명의 상황에 직면한 21세기는 아마도 스피노자의 야만적 별종의 노선을 가장 필요로 하는 시대일 것입니다. 우리는 스피노자의 평행론의 윤곽 너머로 미래를 응시할 작은 창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생태적 지혜와 아카데미의 차이점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생태적 지혜와 연결해 생각해볼 여지는 풍부합니다. 우선 생태적 지혜는 할머니의 지혜, 공유지에 싹튼 지혜, 연결망의 지혜라고도 불립니다. 반면 아카데미에서의 남성적 지식들은 분리와 격리, 분석, 잘게 쪼갬 등을 기본으로 하여 이상화된 데이터나 지식을 추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사실 근대 문명은 아카데미가 사유한 이상적인 평균상태를 구성하기 위해서 외부와 격리된 실험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실험실 유형의 모델을 모든 사회의 영역에 적용하지요. 공장, 학교, 시설, 감옥, 병원 등 근대적 규율모델은 바로 아카데미가 꿈꾸었던 ‘사회의 실험실화’의 다른 모습입니다.

반면 생태적 지혜는 삼림, 하천, 바다, 갯벌 등의 공유지와 여성들이 접촉하면서 만들어낸 집단지성, 아이디어, 노하우, 암묵지(暗默知, Tacit Knowledge) 같은 것입니다. 생태적 지혜는 종합, 전일성, 연결과 접촉 등의 원리로 구성됩니다. 생태적 지혜는 세계녹색당(Global Greens)의 아홉 가지 기본 원칙 중 하나로 자리할 정도로 생태운동의 기본 원칙이기도 합니다. 생태적 지혜는 살림과 돌봄의 과정에서 터득한 무정형적이고 비계산적이고 암묵적이고 비구조화된 지식체계를 특징으로 합니다. 이를테면 어머니들이 찌개를 끓일 때 소금을 ‘적당히’ 넣으라고 말하는 것도 생태적 지혜입니다. 그 간단하고도 모호한 단어 안에는 오랜 세월 축적된 경험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지요. 이처럼 여성들은 공유지로서의 삼림, 하천, 바다, 갯벌 등과의 접촉과 연결, 신체변용을 통해 저장, 종자, 요리, 발효, 식생, 재생, 되살림, 살림, 순환 등의 지혜를 만들어갔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혜는 우리 안의 여성성을 어떻게 성숙시킬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성평등의 실천은 우리에게 지혜로운 삶을 살도록 하는 생태적 지혜의 원천입니다. 하지만 근대 이성은 탈주술화의 과정을 통해 생태적 지혜를 철저히 배제했습니다. 생태적 지혜를 마법, 주문, 구습, 낡은 것, 몽상, 애니미즘 등으로 규정하고 철저히 짓밟아왔습니다.

우리는 스피노자의 평행론의 윤곽 너머로 미래를 응시할 작은 창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사진 출처 : CDD20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생태적 지혜의 기본적인 작동 방식을 담고 있다고 할 정도로 생태주의자들에게 수많은 영감과 아이디어, 단서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그것은 생태적 지혜로 가는 징검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범신론은 ‘신, 즉 자연’이라는 개념의 구도를 통해, 자연을 살아 있고 능동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것으로 바라봅니다. 스피노자는 생태적 연결망이 갖는 능동적인 속성을 ‘능산적 자연’으로, 생명·자연·사물·인간 등의 양태를 ‘소산적 자연’으로 보았습니다. 단어부터가 너무 어렵고 비호감을 주는군요. 조금 풀어 설명하자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나무 그 자체(소산적 자연)와 서로 연결되어 숲을 이룬 나무들(능산적 자연)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각각 떨어져 있는 가로수 100그루와 숲을 이룬 50그루의 나무 중 어느 쪽이 항상성이 강할까요? 물론 50그루의 나무로 이루어진 숲입니다. 50그루의 나무는 그저 산술적 합으로서의 나무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는 내부 환경을 능동적으로 조성하여 새, 벌레, 미생물, 버섯, 동물 등의 부수효과를 만들어내고 생산하고 창조합니다. 그런 점에서 자연생태계를 통해서 보면 스피노자의 ‘신, 즉 자연’의 구도나 소산적 자연, 능산적 자연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 마르크스가 원시적 축적기라고 규정했던 인클로저(enclosure), 즉 종획운동이 벌어집니다. 이는 공동체가 함께 공유하던 대지에 중산층 사람들이 구획을 긋고 양을 사육하면서 농민을 몰아내고 공유지로부터 여성을 분리시키려 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때 강, 숲, 늪 등의 공유지에 기대어 살아가던 많은 여성들은 마녀사냥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립니다. 약초를 사용하고, 종자를 관리하고, 음식을 보관하는 등의 생태적 지혜는, 마녀들의 비밀스러운 주문이나 주술, 의례로 간주되었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마녀사냥에 의해 희생된 여성들 중에는 스피노자의 외할머니도 있었습니다. 스피노자의 외할머니는 생태적 지혜로 충만한 사람이었으나, 마녀사냥의 피비린내 나는 시대적 상황에서 희생되어야 했던 비극적 인물이었습니다.1 이에 따라 스피노자는 종교가 갖는 맹목성을 넘어 생태적 지혜가 갖고 있는 풍부하고 충만한 자연관을 『에티카』에서 계승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배경이 있기에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생태적 지혜와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스피노자는 시대와 역사를 넘어선 인물로 평가되지만, 동시에 자신이 겪었던 시대적 상황을 사유의 도구인 개념을 통해 생태적 지혜를 가장 극한까지 전개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소박하고 담백하고 순수했지만, 누구보다 뜨거운 가슴과 열정을 가졌던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글은 단행본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스피노자와 함께 인생의 새 판 짜기』(사우, 2019)의 일부이며, 출판사와 협의 후 웹진 《생태적지혜》에 [스피노자의 사랑] 시리즈로 나누어 연재한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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