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에게 친구란?
하루에 세 시간 스마트폰을 하고, 두 시간 TV를 보고, 여덟 시간이나 컴퓨터에 매달리는 삶, 대부분의 현대인이 그러하고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수많은 미디어를 통해 온갖 정보들을 접하고 있지만, 정작 친구들의 소식은 SNS로 겨우 알고, 인간관계 속에서 가성비가 천연덕스럽게 자리 잡고, 심지어 전화보다 카톡으로 대화하기를 선호하는 것이 오늘날의 모습입니다.
얼마 전 저는 몇 년째 만나지 못하고 SNS로만 대화하던 대학 친구들을 큰맘 먹고 연구실로 초대했습니다. 처음에는 달라진 모습에 서로 서먹하기도 하고 너무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사생활을 묻기가 부담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대학 때 마음으로 돌아가서 새벽 3시까지 술잔을 부딪치며 젊은 시절 못지않은 뜨거운 공감의 시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정보량으로 보자면 SNS를 통해 듣는 편이 더 많겠지만, 술잔을 앞에 두고 천천히 조금씩 얘기하는 것보다 더 생생하지는 않겠지요.
그날 밤, 저는 ‘스피노자가 현대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그는 네덜란드 헤이그 인근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몇 명의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살았습니다. 낮에는 렌즈 세공 일을 하고 밤에는 연구와 집필을 하는 생활을 했겠지요. 검소하고 소박하고 담백한 성격 때문이기도 하고, 종교적인 이유로 은둔자처럼 살아야 하는 운명 탓이기도 했을 겁니다. 책에서는 스피노자의 친구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자세히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그 친구들과의 소중하고 긴밀한 정동, 사랑, 욕망의 관계 속에서 책이 나올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범신론자로 낙인찍혀 파문당한 스피노자가 평화롭고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도 친구들이 근접거리에서 보호해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와 그의 친구들이 만든 공동체의 힘이 그의 삶을 구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관계의 윤리학에서의 정보

사진 출처: willea26
이러한 스피노자의 삶은 은둔의 삶, 검소하고 담백한 삶,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정보값을 한없이 낮춘 삶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런 스피노자의 삶을 두고 사람들은 은둔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은둔이라 불릴 정도로 우리 생활의 정보값을 낮추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외부로부터의 작은 마주침도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느껴지지 않을까요? 지나가던 강아지 한 마리, 노파, 꽃, 새… 모든 것이 아주 획기적인 사건이 되지 않을까요?
현대인은 수많은 정보를 접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건의 온라인 기사를 읽고, 스마트폰에는 미처 읽을 새도 없는 수십 개의 새로운 메시지들이 단톡방에 쌓여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그저 흘려보냅니다. 스쳐 지나가고 소비되고 향유되는 가십거리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어떤 정보도 신체변용, 즉 설레고 떨리고 감동하고 기쁨과 슬픔을 유발하는 데는 이르지 못합니다. 여기서 외부로부터의 정보의 양을 낮춘 은둔자에게는 하나하나의 정보가 새로운 현실과의 마주침이며 자신의 삶을 심원하게 변화시킬 모티프가 될 것입니다.
정보의 양을 줄임으로써 앎이 가능하다고 보는 관점이 지혜의 노선이라면, 정보의 양을 늘림으로써 앎이 가능하다는 노선이 계몽주의, 정보주의 노선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느끼고 감각하고 변용하지 않은 정보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그것을 진정한 앎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한 정보는 인생을 바꿀 사건이 아니라, 그냥 건너뛰는 비루한 것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큽니다.
이를테면 주말에 우리가 책을 읽기 위해서는, 옆에서 끓고 있는 주전자 소리와 소음을 일으키는 텔레비전 소리, 아이들의 오고 가는 기척 등에 대해 측방경계를 하면서도, 책이라는 작은 세계로 범위를 한정시켜야 합니다. 이렇듯 범위한정 기술은 현상학 같은 학문에서도 언급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수많은 정보가 아니라, 우리를 감동시키고 신체를 변용시킬 하나의 사건입니다.
정보의 양을 극도로 낮춘다고 해서 그 삶이 단순하고 비루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오히려 가장 근접거리에 있고 늘 마주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 있는 정보, 사건으로서의 정보, 삶을 바꾸는 정보가 유통되니까요. 그리고 그 살아 있는 정보는 냄새, 색채, 음향, 몸짓, 표정, 맛 등의 정보값이 더 많다고 할 수 있겠지요. 여기서 관계의 윤리, 관계의 미학의 입장에서 삶을 바꾸는 정보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지금 내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의 표정 하나, 말투 하나에 집중할 것입니다. 그래서 미세한 변화에도 예민하게 감응하겠지요. 한 사람이 기쁨을 표현하는 방식에도 수백 가지 방식이 있다는 것을,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관계가 깊어질수록 알게 되겠지요. 하지만 그것을 단지 ‘기쁘다’, ‘조금 기쁘다’, ‘매우 기쁘다’라고 단 몇 단계로만 표현한다면, 과연 우리는 복잡하고 미세한 사랑, 정동, 욕망에 대해 감응하고 느끼고 이에 변용할 수 있을까요?
스피노자는 몇몇 친구들과의 관계를 성숙시켜 삶의 자기원인으로서의 정동과 사랑, 욕망이 흐를 수 있는 관계의 미학, 관계의 윤리학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온전히 『에티카』에 담아냈습니다. 그래서 스피노자가 긴 칼을 차고 말을 올라타 살육의 현장으로 달려가려 했을 때, 친구들이 스피노자를 붙잡고 애원하면서 설득했을 터이지요. 사실상 스피노자는 그 친구들의 말을 들은 덕분에 『에티카』의 후반부를 집필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에티카』의 후반부가 마치 혁명문건 같다는 평가가 나오는 건지도 모릅니다. 어찌 보면 친구들의 사랑과 욕망이 곧 혁명이라고 스피노자의 입을 빌려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스피노자는 비록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는 않았지만, 『에티카』 후반부에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후대의 사람들이 ‘자유인의 해방전략’이라고 말하는 사랑, 욕망, 정동의 전략적 지도 그리기를 수행합니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삶은 자신의 작은 마을에서 친구들과 생긴 사소한 일들에서 출발하여, 지금 우리 시대에도 혁명이 가능하다는 지점으로 놀랍도록 눈부시게 도약하고 이행합니다. 그것은 국지적인 영역에서의 작은 파동과 진동, 울림이 전체 역사와 사회의 균열과 파열로 나아가도록 만드는 삶과 생명의 지평입니다. 그 점에서 스피노자의 그러한 작업은 자신의 사랑과 욕망의 자기원인이 생명과 자연, 우주의 자기원인과 일치하는 지점, 즉 영원성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입니다.
의자에서 벗어나 움직여라!
신체변용에서의 양태의 증가와 공통관념의 속성의 증가가 평행을 이룬다는 평행론은 솔직히 난독증을 일으키기 쉽습니다. 하지만 말 되기, 자전거 되기, 자동차 되기가 평행하게 승마법, 경륜법, 운전법을 만든다는 구절을 보면 약간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는 테제로 요약되는 이 구절에 대해 언젠가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청중석에서 갑자기 “사랑에 눈멀 수도 있다고요. 사랑은 위험해요. 사랑은 맹목적이에요”라는 말이 터져 나왔습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사랑과 욕망에 대한 의심과 회의의 눈빛과 목소리를 사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사랑과 욕망의 현주소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스피노자가 가리키는 사랑의 모양새는 조금 더 복잡합니다. 스피노자의 평행론을 더 파고들면, 신체변용, 즉 사랑을 거치지 않은 지식이나 정보는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는 신체변용으로부터 분리되어 객관적 진리를 추구하던 기존 철학의 전통과는 다른 궤도를 그려나갑니다. 즉 앎이라는 문제는, 나와 별개로 존재하는 수많은 진리를 내가 얼마나 많이 수용하고 취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지혜를 나의 신체변용을 통해 얼마나 사랑하고 욕망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이는 곧 사랑, 욕망, 변용, 접촉, 접속으로부터 분리된 객관적 지식과 앎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낀 만큼 더 지혜로워지고, 사랑한 만큼 더 지혜로워지고, 욕망한 만큼 더 지혜로워지게 됩니다.
주류철학에 몸담고 객관적 진리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반역적이고 이단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학교 교육을 통해 이제까지 우리는 “객관적 진리는 정동과 욕망, 사랑의 자기원인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분리되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즉 공부를 하려면 몸을 오락가락 움직이지 않고 책상과 의자에 딱 고정시켜 움직이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인데, 반대로 스피노자는 몸을 움직이려는 욕망에 따라야 앎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즉 꼼짝 안 할 때의 생각이 아니라, 움직일 때의 생각이 진짜 앎이라는 것입니다. 화가가 되기 위해 그림 그리는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색채와 형상, 재료에 대한 애정과 더불어 그림을 사랑하는 욕망이 더 중요합니다. 화가가 된다는 것은, 그림에 대한 욕망과 사랑이 더 많아지고 근질근질해서 결국 몸을 움직여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그림쟁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파란 화면의 떨림처럼 정보를 대할 것!

스피노자는 안경알을 세공하는 장인이었습니다. 당시 안경알 세공일은 꽤 앞선 기술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같은 첨단기술 사회에서는 기술발전이 공동체의 손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고도화되고 있지만, 당시는 도제조합이라는 공동체가 기술을 철저히 통제하던 상황이었습니다. 도제조합은 자본주의가 아직 태동하기 전인 근대 초기에 생산과 제작을 담당하고 자유도시의 전통을 만들었던 장인조합입니다. 오늘날 협동조합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제조합에서는 장인과 도제의 관계를 통해 숙련노동이 전수되었고, 기술은 조합이라는 공동체에 의해 철저히 관리되었지요. 놀라운 것은, 당시 도제조합은 기술이 고도화되면 인간을 배제한다는 점을 직관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술발전을 의도적으로 지체시키거나 선택적으로 취하는 등 기술을 제어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스피노자 또한 도제조합의 일원이며 숙련기술을 체득한 결과 장인 지위를 얻은 신분이었기에, 기술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그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 있었습니다. 그의 실천적이고 지적인 배경은 바로 장인, 협동조합, 공동체의 눈으로 지식과 정보, 기술을 사고할 수 있는 경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접촉하고 실천하고 느끼고 사랑하지 않고서도 인터넷에서 정보를 취득할 수 있기에 그것을 앎이라고 착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스피노자의 사상은 답답하게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정보를 섭렵하지만 그중에서 자신이 느끼고 감각하고 삶을 바꿀 만큼 획기적인 정보는 거의 없는 시대, 친구와 만나지 않고도 SNS를 통해 친구를 안다고 착각하는 시대, 인터넷 서핑이나 몇 기가 혹은 몇 테라의 다운로드를 통해서 포만감을 느끼는 시대, 정보의 원천이 된 현장의 맥락과 감수성, 상황, 신체변용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취향에 맞지 않으면 가차 없이 건너뛰면 되는 시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내 인생을 바꾸고, 나를 꿈꾸게 하고, 나를 떨리게 했던 정보는 아마 하이텔이나 유니텔이 있었던 386 시대에서나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의 구도는, 정보를 접하는 우리의 태도가 어쩌면 전화 음이 울리면서 모니터에 파란 화면이 떴던 그 시대의 떨림 또는 설렘과 같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합니다. 이러한 질문에 응답하려면, 도제조합의 전통을 되살려 인생을 바꾸는 정보와의 접속 순간을 창조해내야 하지 않을까요?
첨단기술 사회에서의 생태적 지혜
스피노자가 추구한 생태적 지혜의 노선은 어쩌면 생명과 삶이 던지는 놀라운 문제 제기일 수 있습니다. 물음표, 호기심, 문제의식, 질문이 많아질수록 더 지혜로워지는 셈입니다. 적어도 세상을 뻔한 것으로 보지 않으려면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반면 객관적 진리론에 입각한 정보와 지식은 일정한 상황이나 문제 속에 답이 있기 마련이라고 보는 관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 자율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답을 제시하는 전문가들에게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생명이라면 갖고 있기 마련인 야성적인 질문의 능력, 호기심, 물음표 등이 대부분 사라져버리고, 대답으로서의 정보들을 체득하고 외우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정보주의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전문가만이 “문제의 핵심과 본질은 이것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문제 제기는 답이 없을 수도 있고, 여러 개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삶, 사랑, 실존의 질문이라면 특히 그렇지요.
우리는 일상에서 무수히 많은 가전제품을 사용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모르고 그저 외양적인 작동에만 주목합니다. 그래서 가전제품의 작동 원리를 잘 알고 있는 전문가에게 더 의존하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어릴 적 라디오나 간단한 가전제품을 고칠 줄 알았습니다. 고치는 과정에서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터득했지요. 그러나 요즘 매뉴얼조차도 외울 수 없는 가전제품의 등장은 저를 위축시킵니다. 특히 컴퓨터로 작업을 하고, 정보를 찾고, 평생의 작업이 담긴 하드디스크를 떠받들며,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삶을 살고 있음에도, 갑자기 컴퓨터 부팅이 안 되면 당장 ‘멘붕’에 빠지고 맙니다. 이처럼 우리는 날로 발전하는 기술을 제어할 지혜를 갖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답을 제시하는 전문가들에게 환호하고, 스스로 지혜를 통해 문제를 제기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지식과 정보가 공동체와 삶으로부터 벗어나 최첨단화된 요즘 우리는 공동체의 생태적 지혜로부터도 너무 멀리 와 있습니다. 특히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연예인 뉴스, 소비에 대한 찬양과 향유, 전문가들의 취향 등에 관한 정보는 사람들의 삶을 풍부하게도 윤택하게도 만들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수많은 지식과 정보를 소비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정보생태계의 다양성과 풍부함, 탄력성, ‘차이를 낳는 차이’로서의 정보의 긍정적인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도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삶의 지혜, 문제 제기와 질문들의 야성적 능력, 정동과 욕망의 질문들로부터 분리된 지식과 정보들은 오히려 우리를 더 위생적이고 탈색된 관계로 인도함으로써 더 고독하고 외롭고 소외된 현대인을 양산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스피노자의 지혜의 노선에 더 주목하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헤겔, 변용 없는 관념의 자기운동
기술진보와 역사발전은 끝이 없을 것만 같습니다. 특히 사랑의 무한성을 말하면 왠지 신체의 가능성과 잠재성이 극대화되어 우주로 뻗어나가는 것을 상상하게 됩니다. 스피노자의 무한성의 개념은 이후 철학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거론되었습니다. 특히 독일 철학자 헤겔은 스피노자의 『에티카』 1부에 나오는 무한성에 대한 테마가 무척 탐이 났던 모양입니다. 무한성 개념을 자신의 철학에 슬쩍 끌어옵니다. 하지만 그의 커닝은 다소 비뚤어진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스피노자의 무한성 개념은 신체변용과 삶의 내재성을 거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개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접속, 접촉, 변용 등으로부터 무한성을 분리합니다. 그 결과 스피노자식의 범신론이 아닌 변신론이라는 이상야릇한 이론이 되었지요.
헤겔의 변신론에 따르면, 정신은 구체적인 상황, 인물, 사건과의 접속, 접촉, 변용을 거치지 않고 반성이라는 관념의 자기운동을 통해 절대이성으로 도달할 수 있습니다. 헤겔은 여기서 정/반/합이라는 관념의 사고실험을 동원하지요. 느끼고 사랑하고 욕망하고 감각하지 않고도 생각만으로 철학자가 절대이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관념적일 수밖에 없지요. 마치 골방에서 우주의 진리를 알았다며, ‘한 소식’하고 해탈했다며, 내 안에 우주만물이 있다며 거리에 나선 미친 철학자를 떠올려보게 됩니다. 그래서 헤겔을 두고 절대적 관념론자라고 말하나 봅니다. 이처럼 오만한 관념의 유희는 스피노자의 사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스피노자에게 정신은 신체변용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전개되거나 성숙하거나 발전할 수 없습니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참을 참이라고 생각할 능력과, 거짓을 참이라고 생각할 능력은 같은가?” 참을 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삶을 통해 진리를 깨닫는 능력입니다. 참을 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으며, 엄청난 떨림과 울림에 공명하고, 밤잠을 설치게 되고, 외치고 말하고 쓰지 않고서는 배겨낼 수 없는 상태이며, 이것이 삶을 변화시키는 진리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반면 거짓을 참이라고 생각하는 능력은 이와 다릅니다. 그저 관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관념의 허상을 만들어내는 상태이지요. 마치 자신이 만든 관념에 스스로 속아버리는 허언증의 상태가 그것입니다. 앞서 얘기했던 움직일 때의 마음이 참을 참이라고 보는 능력으로서의 정동이라고 한다면, 꼼짝 안 할 때의 마음은 거짓을 참이라고 보는 능력으로서의 감정이나 망상, 환상입니다. 헤겔은 거짓을 참으로 보는 능력과 참을 참으로 보는 능력을 혼동했을 뿐만 아니라, 거짓을 참으로 보는 능력을 극대화함으로써 관념이 관념을 낳는 질서의 가능성을 통해 세상을 설명합니다.
물론 헤겔의 변신론은 자본주의와 근대국가의 진보적 세계관에 심원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근대국가주의의 성립과 발전의 지적 토대를 헤겔이 제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헤겔은 철저히 국가주의를 기반으로 주권체제인 국가 이성의 완성과 발전을 추구했습니다. 그에 반해 스피노자는 이러한 국가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다중(multitude)이라는 국가의 반대편에 있는 주체성의 사유를 전개시켰습니다. 다중은 단순히 많은 수의 일반인을 지칭하는 ‘대중’과 다르고, 동일한 목적의식을 가진 ‘민중’과도 구분되는 개념으로, 다극적이고 다중심적이고 다실체적인 삶의 내재성을 가지고, 군주에게 종속되지 않은 자율적인 주체성입니다. 스피노자는 헤겔의 국가이성 논의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중의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성’, 즉 사랑과 욕망의 흐름에 대해 발언했던 것입니다.
성장이 불가능해진 시대에 다시 읽는 스피노자
자본주의가 가진 성장의 무지막지한 추동력의 근저에는 유한이 무한으로 직접 이행할 수 있다는 헤겔주의의 변신론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그 반대편에 위치해 있습니다. 유한이 접속, 접촉, 변용을 거쳐야 무한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노선에 입각해 있는 것이지요. 유한한 자원이나 부, 에너지가 무한으로 이행하는 이유는 사랑, 욕망, 정동이라는 삶의 자기원인이 만들어낸 시너지효과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은 철저히 공동체적 관계망의 성숙의 노선에 있습니다. 즉 헤겔의 변신론이 성장(growths)의 화신이라면,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공동체의 성숙의 노선, 즉 발전(development)의 노선에 기반하고 있는 셈이지요.
여기서 발전의 노선과 성장의 노선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할 수도 있습니다. 발전은 공동체와 지역사회의 관계망의 성숙과 그것의 시너지를 추구하는 질적이고 내포적이고 관여적인 방향성으로 향합니다. 스피노자에게는 그런 점에서 ‘유한자의 무한결속’을 통해서만이 무한성으로의 이행이 가능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발전노선을 의미합니다. 즉 공동체의 관계망이 성숙해서 그 내부에서 무한한 시너지가 발생하는 것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골목상권이 살아 있을 때, 이발소 주인이 만 원을 들고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구멍가게 주인이 만 원을 목욕탕에 가서 쓰고, 다시 목욕탕 주인이 만 원을 가지고 철물점에 가고, 철물점 주인이 만 원을 주고 안경을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부에서 결속과 접촉의 경우의 수가 무한히 순환하는 상황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때 만 원은 단순히 지폐 한 장이 아니라 엄청난 시너지 효과, 승수효과를 담은 만 원이 되겠지요.
반면 성장노선은 양적이고 실물적이고 외양적인 방향성을 가집니다. 예를 들면 골목상권에서 만 원이 대형마트를 통해 외부로 빠져나가면 그것은 딱 만 원의 가치밖에 갖지 못합니다. 끊임없이 부동산과 주식 가격이 오를 것이고, GDP는 더 커질 것이라는 전망 속에서 움직이는 자본주의 경제의 형태가 성장의 경제입니다. 이 과정에서 성공주의, 승리주의가 신화처럼 전개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계발에 몰두하도록 만들지요. 이렇게 헤겔의 변신론은 근대자본주의와 근대국가의 영구적인 성장과 진보를 관념의 자기운동을 통해 생각함으로써, 그가 바라던 근대성을 완성하고자 합니다. 반면 스피노자는 ‘탈근대 시대의 예수’라고도 불릴 정도로 탈근대 사회의 전망과 방향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먼 회귀의 여행 끝에서 다시 생태적 지혜가 복권되었지요.
마르크스의 스피노자에 대한 불철저한 계승
19세기 독일의 혁명이론가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13)는 스피노자를 재해석합니다. 그는 『독일 이데올로기』와 『경제학철학수고』에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의 감성적 실천으로서의 노동이 소외되고 있음을 주장합니다. 이러한 소외된 노동의 상황은 인간다움을 잃게 하는 원천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유인의 연합’으로서의 공산주의가 잃어버린 전인성을 회복하게 할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여기서 마르크스의 ‘감성적 실천’이라는 대목이 바로 스피노자를 수용하여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즉 스피노자의 신체변용 개념이 마르크스에게 감성적 실천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헤겔의 변신론 노선에서 벗어나 접촉, 접속, 변용을 통한 감성적인 변화를 복권해낸 셈입니다.
또한 초기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 테제』에서 “철학자들은 세계를 이리저리 해석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하면서 실천철학의 노선을 개방합니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급진적인 테제는, 인간 본성으로서의 사랑과 우정, 믿음을 말하는 인간학적 유물론자 포이어바흐가 인간이 갖고 있는 유적 본성(보다 실천적이고 살아 움직이는 측면)을 간과했다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감성적 실천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인간을 사유하기 시작하지요. 이쯤 되면 경이로운 변화가 시작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마르크스가 단숨에 감성적 실천을 통해 스피노자의 신체변용의 능동성을 언급하면서 스피노자의 계승자를 자처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러나 그는 곧 방향을 잃고 맙니다. 감성적 실천을 사랑, 욕망, 정동이 아니라, 과학적인 측면이나 계급투쟁이라는 측면에 천착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신체변용으로서의 사랑, 욕망, 정동이 갖는 능동적인 측면은 대부분 사상됩니다. 안타깝게도 초기 마르크스가 이루어낸 색다른 지평의 개방은 계속 이어지지 못합니다. 스피노자의 사유는 마르크스에 의해 전유되지만, 곧 마르크스에 의해 도구화되고 맙니다. 게다가 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마르크스의 사상을 속류화하려는 다양한 시도 가운데 가장 직접적인 시도는, 바로 좌파 버전의 성장주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른바 『공산당 선언』에서 언급된 역사발전의 두 계기, 즉 계급투쟁의 계기와 생산력의 발전에 의한 생산관계의 변화라는 이중적인 구도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품고 있던 생산력의 발전이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은 헤겔이 주장하는 성장주의나 자본주의적 진보와 하등의 차이가 없는 사고를 보여줍니다. 그러한 잔재가 지금도 여전히 성장을 기반으로 한 일자리와 복지 문제를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진보진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스피노자를 복권하면서도 다시 헤겔로 돌아가는 우를 범하고 맙니다.
스피노자의 진정한 계승자, 바렐라의 구성주의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나면 칠레의 인지생물학자인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Varela, 1946~2001)가 마르크스와는 전혀 다른 노선으로 스피노자의 변용 개념을 복권시킵니다. ‘앎=삶=함’이라는 구성주의의 구도를 통해서 스피노자의 생태적 지혜의 노선을 풍부화한 것입니다. 즉 ‘안다’는 것은 그렇게 ‘산다’는 것이고, 그렇게 ‘한다’는 것이라는 얘기지요. 바렐라는 그의 스승 움베르토 마투라나(Humberto Maturana, 1928~)와 함께 쓴 『앎의 나무』라는 책에서 앎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는, 앎은 생명의 외부에서 정보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 내부의 자기원인에 의해 가능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자신이 아는 것만 알 수 있다”라는 역설적인 테제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지요.

바렐라의 획기적인 측면은 구성주의의 지평을 개방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구성주의는 객관적 진리론이나 실재론과 달리, 우리가 각각 세계, 인식, 앎을 스스로 구성해낸다는 사상입니다.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1000명의 사람이 모여 공동체를 만든다면 그 공동체는 몇 개인가?” 보통 한 개의 공동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1000개 혹은 그 이상의 공동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구성주의입니다. 즉 각자가 구성한 앎과 세계는 각각 다르고 다양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들뢰즈도 “한 사람의 죽음은 하나의 세계의 소멸과도 같다”라는 아포리즘을 남겼다고 합니다. 바렐라의 구성주의는 스피노자의 특이성, 유일무이성, 단독성이라는 생명에 대한 사상의 직접적인 계승 작업인 셈입니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와 같이 “책상은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기 때문에 실재다”라는 방식으로 객관적 진리를 주장하는 유물론의 전통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차이와 다양성의 질서가 바렐라에 의해서 개방됩니다. 마르크스는 스피노자의 변용 개념을 감성적 실천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였지만, 그것이 세계와 앎을 구성하는 근원이라고 바라보지 않음으로써 스피노자를 소극적으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반면 바렐라는 스피노자의 변용 개념을 ‘앎=함=삶’의 구도로 재해석함으로써 스피노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마르크스와 바렐라 두 사람은 각기 ‘유물론적인 실재론’과 ‘비실재론으로서의 구성주의’의 양편에 서서 스피노자의 두 극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스피노자주의라는 역사적 노선은 더욱더 진화하고 성숙하게 됩니다. 스피노자의 신체변용 노선은 분명 마르크스의 객관적 진리론보다는 바렐라의 ‘앎=함=삶’의 노선에 손을 들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