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욕망, 정동의 흐름이 공동체를 감싸고
생태운동을 하는 공동체에서 J선배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저는 선배를 따라다니면서 주워듣고 따라하고 한 마디 한 마디를 곱씹었지요. J선배는 대부분의 질문에 대해 “공동체가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거나, “공동체의 관계망과 배치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등 다소 모호한 말을 하곤 했습니다. 내가 열정적으로 나서서 주체적으로 책임을 지고 사업을 해나가도 될까 말까인데, 공동체의 배치가 할 일을 알려준다는 식의 말이나 공동체가 모든 것을 다 할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의아했습니다. 그런 선배의 태도는 저의 자유롭고 무한한 상상력과 과잉된 실천의지를 제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조금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저도 공동체 생활을 조금씩 알아가고 어느새 그 안에서 형성된 관계망과 배치를 응시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말과 행동, 실천 등은 자유의 척도가 아닌 관계망과 배치의 척도에 입각해서 해야 한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치와 관계망 위로 무의식의 행렬이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처럼, 어떤 일관된 흐름이 우리를 미지의 곳으로 이끄는 것만 같았습니다.
토론하고, 회의하고, 워크숍을 하는 등의 일련의 행동 속에서 우리의 관계망과 배치는 성숙되어갔습니다. 어느 날 J선배가 공동체에 특별한 아이디어를 내놓았습니다. 대선으로 세상이 한창 시끄럽던 그 당시, 우리 공동체에서도 대통령 후보를 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보는 다름 아닌 자전거, 침뜸, 밥, 동물, 도롱뇽 등 생태 후보였습니다. 작은 아이디어였지만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공동체가 활기를 띠면서 갑자기 사랑, 욕망, 정동의 흐름이 강렬해졌습니다. 일종의 축제 같았습니다. 우리는 강렬한 온도, 밀도, 강도 속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한국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발언이 누군가로부터 나왔고, 우리는 거리로 나서야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릅니다. 만약 공동체의 관계망이 성숙되고 특이한 욕망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런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는 마이크와 피켓을 들고 동물가면을 쓰고 무대를 설치하고 구호를 외치고 그렇게 나섰습니다. 구호는 “지구를 살리자!”, “생명을 보호하자!”, “소수자와 연대하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런 슬로건은 우리의 공동체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만드는 사랑과 욕망의 자기원인과 강렬한 흐름을 느꼈기에, 우리는 당당하고 용감해질 수 있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값비싼 실패를 했습니다. 애초에 계획했던 자전거, 침뜸, 밥, 동물, 도롱뇽 등을 대통령 후보로 내놓겠다는 장대한 계획은 처음부터 무리한 기획이었습니다. 공동체가 설정했던 수많은 기획들은 바람처럼 사라졌고,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우리는 좌절했고, 우울했고, 침잠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를 이루었던 사람들은 모두 사랑과 욕망, 정동이 해낼 수 있는 일들이 참 많다는 값진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때의 배치와 관계망은 사라졌지만, 그 속에서 일구어낸 결실은 우리 내부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리 잡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사랑과 욕망의 흐름을 믿었고, 언제든 그 흐름에 몸을 싣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음을 확인하고서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날이 마치 어제 같습니다.
흐름은 특이한 사건의 원천
흐름(flux)은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해 제안된 이후로 생성과 창조, 불가역적인 변화를 설명하는 개념이 되었습니다. “역사는 흐른다.” “사랑은 움직인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다르다.” 이 모두가 흐름에 대한 설명입니다. 특히 역사의 진보를 설명할 때, 무의식의 행렬에 따라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 작동하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흐름 중에서 스피노자가 주목했던 것은 사랑, 욕망, 정동의 흐름이었습니다. 삶의 자기원인에 따라 움직이는 사랑, 정동, 욕망의 흐름이 우리를 감싸고 미지의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특히 스피노자는 사랑과 욕망이라는 삶의 자기원인에 따라 감정과 정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흐름이라는 생성과 창조의 순간을 인과관계의 구도로 그려보기를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사랑, 욕망, 정동이 원인과 결과와 같은 각각의 항들을 차지하면서 움직일 수 있을까요? 우리의 목덜미를 감싸는 사랑과 욕망을 내재성의 평면 위로 그려보겠다는 스피노자의 생각은 흥미로운 발상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일단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부엌이라는 공간으로 가보죠. 부엌에도 온갖 흐름이 난무합니다. 물의 흐름, 불의 흐름, 음식의 흐름, 쓰레기의 흐름. 무엇보다도 사랑, 욕망, 정동의 흐름이 그 흐름들 각각에 내재해 있겠지요. 펠릭스 가타리에 따르면, 부엌은 오페라의 공간과도 같습니다. 온갖 흐름이 교차하고 어우러져 화음을 이루는 오페라 말입니다. 엄마가 아이를 위해, 남편이 아내를 위해, 형이 동생을 위해 요리를 합니다. 더 맛있는 음식으로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레시피를 찾아보기도 하고, 재료를 정성껏 손질하고, 튀기고, 볶고, 구워냅니다. 부엌에서 각각의 흐름들은 색다르고 특이한 음식을 만드는 사건의 원천입니다. 그 요리 과정은 사랑과 욕망, 정동의 흐름을 따라 이루어집니다.

흐름은 특이한 사건, 유일무이한 사건을 생성시키는 과정적이고 진행형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특이성, 즉 유일무이성을 설명할 때 보통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특이성을 생각하는 게 가장 쉽습니다. 또한 특이성은 사건의 차원에서도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인생에 단 한 번뿐인 이 순간”이라는 실존적인 순간, 사건의 순간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특이한 사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사랑, 욕망, 정동의 흐름입니다. 즉 특이성은 존재의 차원에서도 설명될 수 있지만, 사건의 차원에서도 설명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건의 차원에서의 특이성을 생성하고 창조하는 원천에는 사랑, 정동, 욕망의 흐름이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특이성 개념은 단지 실존적 의미, 즉 유일무이한 존재로서의 의미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벌어지고 있는 사랑의 작동방식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는 야심찬 기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보조국사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떠올리게 합니다. ‘단 한 번의 깨달음이 지속된다’는 돈오가 유일무이한 존재로서의 특이성이라면, ‘매 순간마다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점수는 유일무이한 사건으로서의 특이성입니다. 예를 들어 원효대사가 해골 물을 시원하게 먹었다는 설화는 돈오의 순간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 이후 원효대사가 끊임없이 정진하고 노력했다는 점수의 과정은 간과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유일무이한 사건을 만들어내는 원천에는 사랑과 욕망, 정동의 흐름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기하학에서 지도 제작으로
스피노자는 일련의 흐름의 과정이 어떤 원인과 결과를 가지고 작동하는지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기하학이라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공리, 정의, 정리, 증명 등을 일목요연하게 번호를 붙이며 서술해나간 것입니다. 삶이 가진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세모, 네모, 원, 별표와 같이 다양하게 아로새겨지는 사랑, 욕망, 정동의 일련의 작동양상을 그려내고 이를 통해 관계의 미학, 관계의 윤리학을 정립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동의 기하학이 인과관계에 따라 작동하는 함수적 행렬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삶이 갖는 내재성의 구도를 신비주의, 영성주의가 아닌 방법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하나의 지혜이자 방법론으로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제가 최근에 한 출판사에서 마련한 강의를 취소한 적이 있습니다. 굉장히 이례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강의는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었지만, 강의와 별개로 그 출판사와 후속작업으로 진행할 또 다른 책의 원고를 약속한 분량만큼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강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머리가 아프고 우울하고 힘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체력이 떨어져서인 줄 알았는데, 나 자신의 정동이 생겨나게 된 배치를 살펴보니 그러한 정동의 이유가 분명히 있었지요. 출판사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자꾸 제가 가진 능력을 끌어내리는 슬픔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강의를 취소하고, 원고를 완성한 이후로 다시 일정을 잡았지요. 사실 정동의 흐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무의식의 행렬과도 같은 일련의 흐름에 자신도 모르게 휩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찬찬히 자신의 마음과 정동을 응시하다 보면 그 이유가 뚜렷이 보입니다. 어쩌면 스피노자의 정동의 흐름을 기하학적인 구도에 따라 설명될 여지도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모든 정동, 사랑, 욕망의 흐름이 과연 지적이고 이성적인 인과관계에 따라 작동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유아기에는 흐름의 사유가 삶을 지배합니다. 너와 나, 자아와 대상의 구분이 없는 0~2개월의 아동의 경우에는 아예 모든 것이 흐름이지요. 아동심리학자 대니얼 스턴이 ‘출현적 자아’라고 부른 이 시기는 어머니와 자신을 구분하지 않는 우주 되기의 합일의 상태입니다. 문제는 사물에 대한 분별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사물이나 타인에 대해 ‘~은 ~이다’라고 본질을 적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욕망, 정동의 흐름은 여전히 사물의 곁과 가장자리에만 위치합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컵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이 컵은 내 거다” 혹은 “컵은 물을 먹기 위한 손잡이가 달린 그릇이다”라는 표상이나 관념이 생기지만, 그 컵으로 물이나 음료를 마시는 것이 컵을 닦고 아끼고 정돈하고 관리해온 사람의 정동과 사랑, 돌봄을 통해서 가능했다는 점에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랑, 정동, 욕망, 돌봄의 과정을 드러내려면 스피노자처럼 원인과 결과에 대한 기하학적인 방법론을 통해서 이를 그려낼 필요가 느껴집니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기하학적인 방법론은 사물의 곁과 가장자리, 주변에 위치한 사랑, 돌봄, 욕망, 정동의 흐름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사물에 대해서 ‘~은 ~이다’라고 정의 내리고 단정하는 의미화의 논리와는 다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스피노자의 계승자 펠릭스 가타리는 사랑, 욕망, 정동의 흐름을 그려내는 지도 그리기(cartography)를 제안합니다. 기하학의 ‘~은 ~이다’라고 규정하는 방법론에서 벗어나 ‘~이거나 ~이거나’ 등의 ‘~그리고 ~그리고’ 등의 사유방식이 지도 그리기의 방법에 포함될 여지가 생깁니다. 즉 합리성이 배제한 잉여, 군더더기, 잔여 이미지로 남았던 영역들을 지도에 포함시키고자 했던 것이지요.
이를테면 저는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 일련의 과정과 기후변화의 관계에 대해 그 흐름을 그려보려는 야심찬 기획을 추진한 적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냉난방기가 기후변화 때문에 작동하면서도 동시에 기후변화를 초래한다는 역설에 직면하게 됩니다.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는 이런 상황은 인과관계를 한 마디로 단정해 설명할 수 없게 했습니다. 이처럼 스피노자의 기하학적 방법론이 상관관계와 인과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현대 사회를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가타리가 지도 그리기라는 새로운 방법을 제안한 것이겠지요. 하물며 “왜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은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본질 적시가 아니라, 더 복잡하고 난해한 양상과 작동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복잡하고 난해한 작동을 어떤 식으로든 설명하기 위해 기하학을 넘어서는 방식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가타리는 스피노자 사상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철학자입니다.
흐름과 공동체
어떤 마을이나 공동체, 협동조합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곳에 흐르는 정동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됩니다. 누군가 구워낸 머핀 하나, 혹은 과일청 한 병이 어디서 어디로 이동하는지, 어느 집에서 구입한 옥수수 한 상자가 비닐봉지에 나뉘어 몇 집으로 흩어지는지, 옥수수가 담겼던 봉지에 무엇이 담겨 되돌아오는지, 오늘 수제비누 만들기 모임에 참가한 사람은 누구누구인지, 모였다가 흩어지고 온 길을 다시 되짚어 돌아가는 흐름의 양상이 바로 그 공동체를 말해줍니다.
그런데 사랑, 욕망, 정동의 흐름이 왜 물질적인 것들, 이를테면 머핀이나 과일청, 옥수수 봉지, 수제비누의 흐름과 일치하는 걸까요? 늘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정동의 흐름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것이 바로 선물을 위시한 모든 물질적인 자원, 부,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외부에서 유입된 자원, 부, 에너지는 사랑, 욕망, 정동의 흐름에 실려 공동체 곳곳에 전달됩니다. 그것들은 단번에 없어지지 않고 공동체 내부를 강렬하게 흘러 다닙니다. 공동체나 마을, 협동조합에서는 외부의 자원, 부, 에너지를 받아들여 내부에 일자리를 만들고 시스템을 유지시키고 자기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데 그것을 온전히 다 사용합니다. 이윤을 남기거나 축적하는 데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과정은 기업에서 수입과 지출이 딱 맞아떨어져서 사라지는 국면으로 설명 가능하며 이를 이른바 ‘제로회계’라고 합니다.
마을이나 협동조합에서 특이한 욕망, 정동의 강렬한 흐름, 사랑과 돌봄의 목소리가 생겼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지점에 바로 자원과 에너지가 대량 투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돌봄을 필요로 하는 아이, 장애인, 소수자, 여성 등의 특이점이 바로 강렬한 정동의 흐름을 만들 뿐만 아니라, 그 특이점에 모든 자원-부-에너지의 흐름이 관통하게 됩니다. 바로 강렬한 정동의 흐름은 그것이 발생하는 순간, 모든 자원과 부의 흐름을 실어 보낸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그런 점에서 어떤 특이한 사랑과 정동이 공동체에서 나타났느냐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공동체가 어떤 것을 진정으로 원하느냐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마을, 공동체, 협동조합은 해방, 혁명, 자유, 평등 같은 그럴듯한 이념으로 모인 곳은 아닙니다. 술 한잔 기울이면서 육아와, 이웃과 마을 대소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한솥밥을 먹으면서 협동조합과 먹을거리 등을 얘기하는 조용한 일상이 펼쳐집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유일하게 우리 자신을 움직이는 것은 사랑과 돌봄, 정동의 흐름입니다. 미리 결정된 대의명분이나 기획보다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어떤 것에 끌리고, 어떤 것을 사랑하는지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자기원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마을, 공동체, 협동조합에서 주목받는 사람은 바로 사랑의 능력, 욕망의 능력, 정동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많이 보살피고, 많이 웃고, 많이 움직입니다.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역능(force)이 바로 욕망과 사랑의 능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사랑과 욕망의 흐름은 모두에게 고르게 있었지만, 그것을 더 강렬하고 밀도 있고 뜨겁게 느끼는 것은 순전히 그 사람의 변용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공동체에는 화려한 언변을 구사하는 사람도, 세련된 논리로 현혹하는 사상가도, 자신의 혁명적 이념에 따라 움직이
는 혁명가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 사이의 사랑과 욕망이 흐르고 순환하는 삶의 과정이 활동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가 가진 내재성의 평면 위로 흐르는 사랑과 욕망, 정동, 돌봄이 있기에, 강건하고 활력 있고 에너지가 넘칩니다. 그리고 사랑과 욕망의 자기원인과 생명과 자연의 자기원인이 함께 흐를 때 스피노자가 말한 영원성을 깨닫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에서 영원성을 맞이하는 순간은 바로 생명평화와 기쁨이 하나 되는 순간일 것입니다.
흐름을 해방시킬 것!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사랑, 욕망, 정동의 흐름을 유감없이 세상에 드러낼 수는 없을까요? 옆 사람, 이웃, 친구, 가족에게 자신이 사랑의 감정을 느꼈노라고 솔직히 말하는 것은 불가능할까요? 아무래도 쑥스럽다고 느끼는 사람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우리 중 대부분은 사랑, 정동, 욕망의 흐름에 따라 행동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흐름이 해방되는 순간을 상상하는 것은 어쩌면 힘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그런 강렬했던 순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불과 반세기 전 유럽 사회를 뒤흔들었던 68혁명이 바로 흐름을 해방시켰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상상력에 권력을!” “일하지 마라!” “금지를 금지하라!” 소수자, 대학생, 청년, 여성, 아이, 정신질환자, 성소수자 등이 이런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가득 메웠지요. 그런 섬광과 같은 순간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흐름이 해방되는 것은 강렬하면서도 부드럽게 사랑이 삶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 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왜 우리는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동물보호운동을 하기로 했어”라거나, “평화를 지키는 평화운동가가 되려고 해”라거나, “지구를 위해 환경운동을 시작하겠어” 하는 식으로, 사랑이 행동의 원칙이 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연애도 하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고, 육아도 하지 않는다고 훈계하듯 말하면서도, 그 젊은이들이 정말로 사랑하는 여행이나 반려동물, 게임, 네트워크형 관계망에 대해선 하찮게 생각하는 것일까요?
사랑의 종류나 방식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시대가 바뀌고, 가치가 변하고, 우리는 인간이 무엇을 사랑할 수 있는지 점점 더 많은 영역을 발견해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사랑이 갈수록 더 미세해져서 하나로 고정된 틀을 제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필요한 것은 각자의 사랑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과 정동의 흐름을 해방하여 “사랑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행동한다”라고 떳떳이 말하는 삶의 방식을 개척하는 것입니다.
흐름이 해방된다면, 사랑할수록 더 미세하게 달라지는 삶의 방식이 드디어 사회와 삶에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책임, 의무, 권리, 당위로서의 삶이 아니라 사랑, 욕망, 정동, 돌봄으로서의 삶이 전면에 나서게 될 것입니다. 상대에게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사랑할수록 서로의 미세한 차이가 더 많아져서 각자의 다양성이 화음이 되어 서로의 진동자를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관계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가 보여주었던 ‘특이성을 사랑하는 공통성’의 구도는 공통성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특이성을 통해서 얼마나 공동체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드느냐에 방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용기를 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아야겠습니다. 흐름을 해방하는 삶을 만들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