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사랑] ⑯ 비밀의 발견, 사랑할수록 달라지는 우리

감정은 우리가 순간적으로 느끼는 기분이고, 정동은 그 감정을 행동으로 옮기는 에너지입니다. 스피노자는 정동이 단순히 느끼는 것을 넘어, 몸을 움직이고 행동을 통해 삶을 더 풍요롭고 나아지게 만드는 힘이라고 보았습니다. 정동은 반복적인 사랑과 돌봄을 통해 유한한 조건에서도 무한한 가능성을 창출하는 강력한 원천입니다. 정동이 부족할 때 사람들은 고독과 단절을 느끼지만, 서로를 돌보고 사랑하며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정동을 통해 약자와 연결되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정동은 사랑과 돌봄의 실천을 통해 삶을 풍요롭게 하고, 공동체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힘입니다.

감정과 정동은 어떻게 다를까?

“강의를 망쳐버렸어!” 저는 털썩 그야말로 땅에 몸을 떨어뜨리듯이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그러고는 연달아 담배를 피우고, 먹고, 자고, 우울해하고,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방에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밖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학기의 마지막 강의라서 방심했는데, 그날따라 집중을 하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다가 학생들에게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겨우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와서, 자책을 하며 혼자 생난리를 쳤지요. 저의 마음속에는 감정 덩어리, 망상 덩어리, 온갖 잡념 덩어리가 공회전을 했습니다. 저는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면서 자는 것도 아니고, 쉬는 것도 아니고, 그냥 누워 있었을 뿐입니다. 돌발적이고 일시적인 감정의 기복에 따라 혼자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실성한 사람처럼 굴었습니다. 그날 저는 감정생활, 내면생활, 사생활이라도 있다는 듯 서재 문을 걸어 잠갔지요.

얼마 후 우당탕 문이 열렸습니다. “내 이럴 줄 알았어!”라고 외마디 소리가 들렸지요. 아내의 손에는 걸레가 들려 있었습니다. “책장 다 닦고, 먼지 털고 깨끗이 해놔! 어서!” 명령인지, 지령인지 칙령인지가 저에게 떨어졌습니다. 저는 굼뜬 몸을 이끌고 책장을 정리하고, 걸레로 닦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참 동안 책을 정리하고 닦다 보니 아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책을 정돈할수록 마음도 가지런히 정돈되었고, 책상이며, 가구를 닦으면서 일관된 방향으로 저의 생각이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자 저는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개키는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생각의 정체가 뭔지 참 궁금했지요.

나중에 스피노자를 뒤져보다가 그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일시적으로 다가와 마음에서 공회전하는 생각이 ‘감정’이고, 그 감정 중에서도 자기원인에 따라 움직이는 생각이 ‘정동’이라는 점을 말이지요. 감정은 꼼짝 안 할 때의 기분이라면, 정동은 감정 중에서도 움직일 때의 감정이라는 점을 알았지요. 칸트는 산책을 하면서 철학을 했다지요, 스피노자 역시 안경알 세공을 하면서 철학을 했다고 합니다. 스피노자가 제시한 철학이라는 것이 몸을 움직이면서 생각하는 것, 그중에서도 돌보고 살피고 살림하고 모시고 되살리면서 하는 생각이 일관되고 가지런하고 정돈된 생각이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저는 서재의 방문 잠금장치를 아예 없앴습니다. 아내와 대화하고 함께 살림을 하면서 드는 생각만을 저의 삶에 배치하자는 의도였습니다.

감정노동과 정동노동의 분열

겉으로 친절해야 하는 감정노동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백화점 점원, 텔레마케터, 카페 아르바이트생, 보험회사 외판원, 회사의 부하직원 등등 우리 주변에는 고달픈 감정노동자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은 갑(甲)질에 속수무책이며, 성희롱과 성추행에 노출되기 십상이며, 자신의 밥줄을 쥔 고객에게 심지어 무릎을 꿇기도 합니다. 영원한 을(乙)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일상을 보면, 감정이라는 것이 삶을 소진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 역시도 감정노동자였던 적이 있습니다.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온갖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전전했거든요. 예식장에서 서빙을 하면서 하객들의 심부름을 하기도 했고, 삼류극장에서 표를 팔거나 청소를 하기도 했고, 경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주차장에 들어오는 자동차에 연신 경계를 했던 적도 있습니다. 만약 고객이 작은 불만을 표시하기만 해도, 혹시 잘리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습니다. 그래서 그 불만이 아무리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해도 겉으로는 친절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그런 감정노동에 돌보고 아끼고 보살피려는 마음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즉 감정노동 내부에 사랑할수록 사랑이 증폭되고 관계가 성숙되는 정동노동의 과정이 숨어 있었지요. 이를테면 예식장에서 물건을 찾아달라고 하면 저는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의 마음에 공감했기 때문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물건을 찾으려 했습니다. 완전히 위생적이고 기능적이고 탈색된 관계로만 대했던 것은 아닌 거죠. 그것은 나와 그것(it)의 관계로 포장된 나와 너의 관계였습니다. 물론 돌보고 아끼고 보살피는 정동노동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살림과 보살핌의 영역에 있는 정동노동은 오랫동안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꿈틀대는 생명과 대지의 약속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경제와 살림의 분열, 감정노동과 정동노동의 분열, 젠더 불평등 같은 상황에서 정동노동이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정동노동이 기존의 돌봄과 보살핌의 영역에서 멀어지고 기능적이고 위생적인 형태로만 남아서 갈수록 평가절하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특히 정동노동이 가부장제로부터 억압받아온 여성들의 고정된 성역할이라는 낙인 때문에, 최근 젠더문제에 있어서 매우 민감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분명한 점은, 정동노동 없이 우리의 삶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구든 말이지요. 스피노자는 “정동은 곧 사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할수록 사랑이 더 증폭된다”라는 말도 했습니다. 아마 남성들이 이 구절을 더 새겨들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정동이 필요하지만 대부분 정동에 무능한 존재들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남성들은 ‘여성되기’가 필요하고, 여성들은 더 ‘여성되기’를 해야 한다는 가타리의 말이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군요. 어쩌면 스피노자의 정동의 기하학은 바로 정동노동의 긍정성과 생산성으로부터 삶의 내재성이 구성된다는 구도라는 점에서, 현재의 정동노동과 감정노동의 분열에 해독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스피노자가 살았던 시대에는 정동노동과 감정노동의 분열, 살림과 경제의 분열이 요즘처럼 심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스피노자의 안경알 세공은 기나긴 숙련 과정이 필요한 장인-도제 수업의 전통 속에 있습니다. 스승과 제자의 긴밀한 협업이 곧 교육과정이 되는 형태였지요. 도제적인 관계 속에서 장인은 정동과 노동과 교육, 인성, 삶, 살림 등이 일치되는 상태를 향해 기술숙련을 고도로 조직하는 방향성을 갖습니다. 즉 정동노동이 갖고 있는 기하학적인 구도를 고도로 조직화하여 기술 속에 녹아들게 만든 것이 바로 도제조합, 요즘 말로는 협동조합의 전통이었습니다. 그러한 스피노자의 지적 배경과 사회적·역사적 배치를 고려할 때, 정동노동을 어떻게 성숙시킬 것인가에 대한 영감과 단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정동의 기하학은 오늘날 살림의 철학으로 재탄생할 여지가 충분합니다.

사랑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정동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 자연, 물건과도 연결되어 삶을 더 아름답고 의미 있게 만든다. 사진출처 : wikipedia

오늘날 많은 철학자들이 스피노자의 정동 개념을 현대화하고자 합니다. 대표적인 철학자가 펠릭스 가타리입니다. 스피노자에게 정동은 사랑이면서 살림이고 흐름, 욕망이었다면, 가타리는 이 중 욕망 개념을 맨 앞에 둡니다. 삶을 살아가려는 의지로서의 욕망인 것이지요. 그리고 여기에 삶과 정동의 가장 큰 특성인 ‘반복’ 개념을 더해 ‘욕망하는 기계’라는 개념을 고안합니다. 여기서 ‘욕망=정동’이고 ‘기계=반복’의 구도를 보여줍니다. 결국 욕망, 정동, 돌봄의 반복이 삶의 내재성을 구축하는 비밀입니다. 정동의 반복, 살림의 반복 등은 강건한 실존을 구성하는 원천인 것이지요. 그리고 욕망하는 기계는 각각의 욕망하는 기계들이 어우러져 만든 네트워크 사회로 진입하면서 정동자본주의를 구성하게 됩니다.

이러한 정동자본주의의 양상은 실제 사회에서 플랫폼자본주의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플랫폼이라는 일종의 유통기업이 판을 깔아놓으면 개인이 그곳에 진입해 꿈꾸고 욕망하고 접속하고 인기를 누리고 돈을 씁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행위는 결국 플랫폼만 살찌우고 돈을 벌게 해줄 뿐입니다. 나 스스로를 돌보고 보살피고 즐기는 일상적인 행위가 나도 모르게 자본을 살찌우는 데 기여하게 됩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노는 일상의 기록들이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기업가치를 높이는 데 이용되고, 우리가 궁금한 것을 검색하는 행위가 구글 같은 검색엔진을 살찌우는 것처럼 말이지요. 정동자본주의는 정동노동이라는 비물질적인 노동으로 유지되고 이를 질적으로 착취하는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정동노동의 오래된 약속이었던 살림의 영역이 그야말로 상업화하고 자본화된 셈입니다.

저는 한 토론회에서 “사랑이 유한한가? 무한한가?”라는 다소 상투적인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정동자본주의라는 현재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태곳적 약속이었던 무한한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무한하다는 쪽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에 대한 신뢰는 영원한 것일까요? 물론 한 학생이 자원, 시간, 여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랑은 무한으로, 심지어 우주로 뻗어나갈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해서 좌중을 웃게 했지요. 여기서 저는 스피노자의 무한성 개념을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정동을 일으키는 신체변용과 접촉은 유한한 개체를 무한으로 이끄는 원동력이라는 생각은 스피노자의 ‘유한에서 무한으로의 이행’의 구도라지요. 마치 이것은 유한한 자원으로 제시된 병뚜껑, 종잇조각, 깡통, 나뭇가지, 신발 끈 등을 가지고 새로운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과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유한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무한한 변이와 무한한 신체변용, 우주로 뻗어나갈 사랑은 바로 이 한정된 장소, 인물, 사물 속에서 강렬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여기-가까이에 있는 유한한 사람들과의 사랑과 정동이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번은 심심해서 『주역周易』을 살펴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마치 무한한 경우의 수의 세계와 접속한 것만 같았지요. 주자와 같은 선비들은 황제에게 올릴 상소문을 쓴 후, 『주역』으로 점괘를 보고 상소문을 올릴지 말지를 결정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운명을 경우의 수로 놓고 생각한다는 것으로, 당시에는 분명 혁신적인 삶의 태도였음에 분명합니다. 문제는 ‘경우의 수로 나온 점괘를 벗어날 수 없다’는, 이른바 운명이라는 폐쇄된 유한의 감옥으로 가둔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무한에서 유한으로의 이행입니다.

반면 스피노자는 유한 속에 내재한 잠재성을 통해 무한으로 향하는 반대의 길을 걸어갑니다. 이는 『주역』과 정반대의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스피노자의 이러한 태도를 이론적으로 잘 구현해낸 철학자가 쥘 들뢰즈입니다. 들뢰즈는 노마드이론을 펼치는데, 여기서 노마드는 ‘제자리에서 여행하는 법’인 국지적 절대성입니다. 즉 “국지적인 영역에 있는 사람들의 깊이와 잠재성을 통해 새로움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국지적 절대성의 과제는, 국지적인 영역인 지금-여기-가까이에 무한한 잠재성이 내재한 삶과 신체가 있으며, 이를 어떻게 하면 촉매하고 고무하여 색다름을 생산하고 창조할 것인가입니다. 새로움을 찾아 전 세계를 여행하지 않고도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깊이와 잠재성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유한에서 무한으로의 이행’이라는 철학적 의미를 훌륭하게 현대화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은 사랑이 유한한지, 아니면 무한한지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다만 그러한 질문에 담긴 화두가 저를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것만 같습니다. 그 토론회에서도 두 입장은 팽팽한 평행선을 달렸습니다. 스피노자는 유한한 인간에게 사랑만이 무한을 약속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누군가 옆에서 “아멘!” 하고 외칠지도 모르겠네요. ‘무한을 약속한다’는 말이 그동안 종교가 설파해온 메시지와 다르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겠군요. 무신론자로 낙인 찍혀 파문을 당했던 스피노자인데도 말이지요. 그러나 사랑이 무한성과 영원성을 약속한다는 점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제의식입니다. 그래서 스피노자가 무신론자가 아니라 범신론자인지도 모르겠네요. 삶, 신체, 시간, 장소, 자원 등이 유한하지만, 우리는 아직 우리의 몸으로 무엇을 할지도 알지 못합니다. 더불어 우리의 시간으로 무엇을 할지도 알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장소로 무엇을 할지도 모르고, 다만 그 유한성 속에 잠재되어 있는 우주로까지 뻗어나갈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정동의 소외가 유행인가?

최근 젊은이들의 소비 트렌드인 언텍트(untact) 마케팅은, 판매자와 소비자의 만남(contact) 자체도 사라진(un) 비대면 방식의 위생적인 소비생활을 의미합니다. 얼마 전 혼밥과 혼술이라는 말이 유행하더니, 요즘 트렌드는 무인편의점이나 무인계산대 등 ‘혼자 쇼핑’이라고 합니다. 소비마저도 누구 눈치 보지 않고 혼자서 부담 없이 하고 싶어하는 심리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정동이 귀찮고 촌스러운 것이 되어버린 시대입니다. 정동 대신 위생적이고 탈색된 관계, 공동체보다는 우주선 유형의 삶이 더 최신 트렌드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정동노동과 살림 역시 자동화된 가전제품이 알아서 척척해주고, 고독과 소외, 외로움마저도 인공지능이나 미디어가 해결해주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쯤 되면 관계와 정동의 윤리학을 창안한 스피노자는 정말 옛날 사람으로 치부되고 말겠네요. “쿨하지 않으면 지는 거다”,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이 대세다”라고 미디어에서 주입식 교육을 하는 것만 같습니다. 인간관계조차도 가성비를 따지는 시대가 되었나 봅니다.

스피노자에게 정동 개념은 삶의 내재성을 구축하는 핵심적인 개념입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의 일상과 삶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정동입니다. 배고픈 나를 위해 한 끼 밥을 차려먹는 마음으로 길냥이에게 사료를 주고, 지구와 나와의 관계를 생각해 일회용품을 덜 쓰고, 뒤에 사용할 사람을 위해 공중화장실을 깨끗하게 사용하는 것이 정동입니다. 엄청난 노력과 배려가 필요하다기보다 나 자신의 삶을 조금 더 윤리적이고 미학적으로 만드는 과정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정동으로부터 분리된 위생적이고 탈색된 관계는 결국 내 삶의 내재성을 해체하는 결과를 낳게 될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누가 시켜서 혹은 법적 제재를 받을 것이 두려워 규칙(법)을 따르는 차원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에, 나 자신의 삶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그러한 방식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죠. 그런 것이 삶의 내재성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자유로우면서도 미학적인 삶이죠.

하지만 정동의 소외 현상은 점점 우리를 갉아먹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결국 우리의 삶을 고독, 소외, 무위, 불안, 위기 등으로 몰아넣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특히 스피노자가 말한 정동의 기하학의 구도에 따라 공동체적 관계망이 없는 도시의 외로운 개인들에게 삶을 풍부하고 다양하고 충만하게 만들 소재가 무엇일까도 의문이 듭니다. 스피노자는 관계의 미학, 관계의 지도 제작, 관계의 윤리학을 그려냅니다. 그런데 관계 자체가 배제된 상황이라면 스피노자의 철학이 갖고 있는 장점도 사라지게 됩니다. 대신 향유, 소비, 가십거리, 잉여, 정보, 미디어 등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인 것은 1인 가구 중에서도 자신에 대한 정동노동, 돌봄, 살림, 보살핌 등에 능숙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 주변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매일 자취방에서 채식 도시락을 손수 싸서 등교하는 제자도 있고, 매달 한 번씩 지인들을 초대해 따뜻한 밥상을 대접하며 특정한 주제를 놓고 대화의 시간을 갖는 비혼족 후배도 있습니다. 어쩌면 신인류라고 할 수 있는 1인 가구의 살림살이는 스피노자의 정동의 기하학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곱씹게 하는 사례입니다. 사실 저도 20대에는 혼자 자취를 했지만, 미디어와 인터넷 등에 둘러싸여 사적인 내면생활, 감정생활 등에 매몰된 채 저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정동노동이나 살림에 대해서는 상당히 무지했습니다.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나서야 그것이 무엇이고 어디에서 나오는지 조금씩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인지 그러한 정동의 소외 상황을 그저 ‘생활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사람’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정동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동과 사랑이 바로 삶의 내재성의 평면을 풍부하게 만드는 원천인 것이지요.

위생적이고 탈색된 삶, 정동이 소외된 삶의 해독제도 역시 사랑입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해본 사람은 상대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가리키는 바에 대해 미세하게 반응할 줄 알고, 그럴수록 자신에 대해서도 더 강렬하게 정동을 그려낼 능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은 사랑과 욕망, 정동의 능력, 즉 스피노자가 말한 역능뿐인 것 같습니다. 물론 인간뿐 아니라 동물, 식물, 기계, 물건, 장소, 시간 등에 대한 사랑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색다른 정동의 지도 제작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동이 약속하는 넓은 대지를 포기한 채 작은 섬 하나에 올라앉아 둥둥 떠다닐 순 없는 노릇입니다. 나 자신을 만들고, 우리 이웃을 만들고, 우리 사회를 만들어낸 정동의 오래된 약속을 통해 미래를 생각하게 됩니다. 작은 씨앗에 움튼 새싹에도 분명 정동의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한 생명의 오래된 꿈은 언택트 마케팅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할 테니까요.

정동을 재창안한 소수자 되기

세계 각지에서 온 이주민들이 가지고 온 다양한 문화는 우리 사회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더 큰 다양성을 품을 수 있게 한다.
사진출처 : wikimedia

들뢰즈와 가타리가 함께 창안한 ‘소수자 되기’는 스피노자의 정동 개념을 현대화하고 혁신한 개념입니다. 정동의 흐름이 성공주의, 승리주의, 성장주의의 논리처럼 위를 향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소수자에 대한 사랑을 통해 아래를 향해 내려간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소수자 되기는 오늘날의 민중적 사유의 기반을 복원해냅니다. 더욱이 스피노자의 정동의 기하학은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말한 대로 자기관리, 자기통치, 자기계발처럼 자기배려를 통한 주체 형성의 방법론이 아닙니다. 소수자라는 특이점을 통과하면서 강렬해지는 정동의 흐름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의 관계 이전에 타자로, 이방인으로, 외부로 간주되었던 생명과 자연과의 관계가 더 중요합니다.펠릭스 가타리는 “우리 시대에는 어쩌면 소수자를 발명해야 한다”라고 역설했습니다. 정동과 사랑의 강렬한 흐름을 만들기 위해 소수자를 더 많이 만들어내고 창안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아래에, 저변에, 밑바닥에 있는 사람의 마음과 삶의 내재성에 접속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소수자라는 특이점에 보이지 않는 사랑과 욕망, 정동의 흐름을 통과시켰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것은 동정이나 연민이 아닙니다. 소수자가 단지 사회적 약자와 양적 소수, 피해자를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랑과 정동의 흐름이 소수자라는 특이점을 통과하면서, 더 강렬하고 다채롭고 풍부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고, 그 과정적이고 진행형 자체 속에서 정동의 강도, 밀도, 온도, 속도가 더 강렬해지는 경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다문화교육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미국의 다문화교육학자 뱅크스(J. Banks)는 “다문화교육이 소수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은 최악의 편견”이라고 지적하면서 “다문화교육은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복지 프로그램이 아니라 상호이해를 위한 모두의 교육”임을 강조합니다. 타문화의 사람들, 즉 소수자들을 배려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사회가 다 함께 풍부해지고 다양해지는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더 중요한 것은 사랑할수록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아이와 동물과 노인과 장애인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더 미세한 그들의 삶의 잠재성과 접속하여 더 미세해지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이를테면 EBS 지식채널e 〈오늘의 급식〉 편에서 ‘다른 문화의 친구들이 존중받는 것을 경험하고 배운 아이들이 소풍날 무슬림 친구를 위해 김밥 속 햄을 빼주었’던 것처럼, 소수자와 접속하고 사랑하게 됨으로써 삶의 미세한 부분에서 미학적인 인간이 될 수 있겠지요. 스피노자가 그려낸 관계의 미학, 관계의 윤리학, 정동의 지도 제작을 더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흑인도 되고, 아이도 되고, 왼손잡이도 되고, 장애인도 되고, 여성도 되고, 성소수자도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삶의 내재성의 평면에 네모, 세모, 별표, 동그라미 같은 정동의 그림들이 기하학과 같이 아로새겨질 것입니다. 이에 따라 우리의 생각의 경로나 행동의 경로는 더 다양해지고, 신체변용의 잠재성은 더 증폭될 것입니다.

최근 제 일상의 파편, 시간의 수평선 위에 그려진 입자가속기를 하나 소개해볼까 합니다. 바로 저를 들뜨게 하고, 강렬한 정동으로 인해 뭔가 해줄 수밖에 없게 만드는 네 마리 고양이입니다. 특히 모모라는 고양이는 아기 때부터 아주 아픈 상태로 들어온 녀석입니다. 녀석이 들어온 후 몇 달 동안 우리 연구실은 비상 상황이었습니다. 태풍이 상륙한 다음의 기후 상황실과도 같았지요. 특히 아내는 아픈 아기 고양이를 치료하고 돌보느라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했습니다. 모모가 먹고 싸고 울고 뛰어다니는 모든 행동이 ‘어디 아픈 건 아냐?’ 혹은 ‘모모, 왜 그러는 거니?’하며 발을 동동거리는 혼돈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저와 아내의 정동을 더 강렬하게 만드는, 그야말로 입자가속기였지요. 엄청난 온도, 밀도, 속도, 강도를 자랑하는 입자가속기는 바로 정동을 더 미세하고 섬세하게 만드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모모가 어느 정도 건강을 되찾은 다음에는 어느새 세상의 더 미세한 부분들에서 정동의 지도 그리기를 다시 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나가는 길냥이, 옆집 베란다의 화분, 깨진 보도블록, 거리에서 본 풀 한 포기 등을 통해 더 미세한 정동의 그림을 우리 삶의 내재성의 평면 위로 그리게 됩니다. 그것이 모모가 우리에게 준 선물이었습니다. 어쩌면 정동의 오래된 약속은 소수자 되기의 약속, 생명평화의 약속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은 단행본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스피노자와 함께 인생의 새 판 짜기』(사우, 2019)의 일부이며, 출판사와 협의 후 웹진 《생태적지혜》에 [스피노자의 사랑] 시리즈로 나누어 연재한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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