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사랑] ㉑ 증오의 해독제는 사랑

배제와 차별 같은 미시파시즘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이미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좌우하는 배치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욕망의 부드러운 흐름은 이처럼 겉으로는 강고해 보이는 미시파시즘의 질서를 눈 녹듯 녹아내리게 만들어, 슬픔의 무능력을 사랑과 욕망의 능력으로 점차 바꾸어냅니다.

증오에 직면한 스피노자

스피노자가 살던 시대는 저물어가는 중세였지만 아직은 종교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유럽은 마녀사냥으로 들끓고 있었습니다. 갈릴레이 역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중얼거렸던 것이 스피노자가 태어나기 불과 7년 전의 일이었으니,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겠지요?

스피노자 일가는 종교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나 비교적 자유로운 네덜란드로 도망쳐왔지만, 여전히 위험은 상존했습니다. 그런 시대적 배경에서 스피노자가 범신론을 펼쳤으니, 이는 많은 신앙인들의 분노와 증오를 불러일으킬 법합니다. 그래서 호시탐탐 스피노자를 노리는 이들이 있었겠지요.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평소 스피노자를 증오하던 한 광신도가 그의 배를 칼로 찔렀습니다. 하지만 외투가 두꺼웠기에 칼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갔고, 다행히 스피노자는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웬만한 사람이었다면 그 사건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못했겠지만, 스피노자는 예외였습니다. 오히려 그는 칼자국이 난 외투를 잘 보이는 벽에 걸어두었고,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왜 인간은 예속을 영예로 여기고 거기에 헌신하는가?” 자신을 해치려던 광신도에게서 예속된 자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지요. 이는 억압을 욕망하는 마조히즘에 대한 최초의 철학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왜 인간은 예속을 영예로 여기고 거기에 헌신하는가?” 그림: 루트비히 홀바인, 1936년 도이체 라이히스포스트에 실린 전보 폴더 의 앞면 표지

스피노자의 이러한 질문을 훗날 빌헬름 라이히가 이어받아 『파시즘의 대중심리』(그린비, 2006)에서 파시즘의 작동 방식에 대한 통찰을 역사적으로 선도해 낸 바 있습니다. 당시 1차 대전 후 독일의 파쇼에 대해서 자발적인 충성을 맹세하던 대중의 등장은 스피노자 시대의 예속을 영예로 여기던 마조히즘과 매우 유사합니다. 사실 스피노자가 살던 17세기는 근대국가가 막 시작된 시기였기 때문에 아직 국가주의, 마초제국주의, 파시즘 등이 만연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당시 공화정을 버리고 군주제로 회귀하자고 외치는 무리들과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광신도를 보면서, 억압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을 욕망하는 기괴한 심상의 일면을 보았습니다. 이 사건들은 이후 정동의 기하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스피노자는 사랑을 통해 증오가 변화하면 더 큰 사랑이 될 것이라는 전망, 즉 자유와 해방의 사회의 도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시골 마을에 은둔하면서 세상을 조용히 응시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교실에서의 왕따, 이주민에 대한 차별,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여성에 대한 차별, 약자에 대한 갑질 등등 이 사회 도처에 서식하는 심각한 미시파시즘의 상황에 대해서, 만약 스피노자가 살아 있다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요? 그는 사랑에는 사랑으로, 증오에는 증오로밖에 조절될 수 없다는 말도 합니다. 어쩌면 총에는 총으로, 칼에는 칼로 보복해야 한다는 말로 오해할 만한 대목입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이를 그저 하나의 논증으로 사용할 뿐 결코 여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증오는 그 자체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사랑의 능력이 부재한 백지 상태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사랑이 부드럽게 감싸안아서 사랑의 흐름을 관통해야 비로소 해독되고 변용될 수 있습니다.

훗날 스피노자의 사상을 계승한 들뢰즈와 가타리는 미시파시즘에 대한 해독제로서 ‘사랑과 욕망의 미시정치’라는 대안을 제시합니다. 즉 증오와 차별, 배제가 발생되었던 집단과 조직, 시스템이 있다면, 그 예속과 무능력의 배치에 사랑과 욕망을 유통시켜 사랑의 힘으로 재배치하는 미시정치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차이에서 차별로

2018년 제주도에 500여 명의 예멘 난민들이 들어오자, 온라인은 물론 오프라인에서도 연일 분리와 배제의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이는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입니다. 난민들이 정치문제와 종교문제, 그리고 국제정치 상황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고향으로부터 무려 8000킬로미터나 떨어진 머나먼 한국까지 밀려온 데는 그만큼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난민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응하거나, 민족 혹은 자국민이라는 낡은 프레임을 통해 난민을 배제하려는 국가주의를 발호하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난민 혐오를 부추기는 가짜뉴스들이 그 실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럽 사회에서도 이미 수년 전부터 난민들에 대해 위험천만한 미시파시즘적인 상황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고립주의, 분리주의, 폐쇄경제의 파시즘의 논리가 지금 현대 사회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단지 아우슈비츠 가스실이 없다는 것이 파시즘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난민이라는 소수자를 증오하고 분리하려는 이기적인 발상은, 결국 이 사회의 모든 소수자를 철저히 배제하는 행동의 시작점입니다. 난민 다음은 누구일까요? 성소수자? 장애인? 노인? 여성…?

들뢰즈와 가타리는 차이의 논리와 차별의 논리를 구분합니다. 차이는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의 수평적인 연결 접속에 따라 배열됩니다. 반면 차별의 논리는 ‘~ 또는 ~’, ‘~이냐 아니면 ~이냐’로 전개됩니다. 즉 흑인, 백인, 소수인종이 어우러진 다문화사회에서는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의 논리에 따라 서로 관계를 맺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분리차별의 논리인 ‘흑인이냐, 백인이냐’라는 식별의 눈이 자리 잡게 되는 순간, 차별의 논리가 등장합니다. 국가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 등은 다문화사회, 즉 코스모폴리탄 시대를 거스르는 반동적인 미시파시즘에 다름 아닙니다. 성별, 연령, 학력, 인종, 장애 여부, 사상 등과 무관하게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과정이 바로 민주주의 사회의 토대입니다. 차별의 논리는 배제, 분리, 증오, 폭력, 혐오발화 등으로 금세 증식합니다. 이러한 차별의 논리를 압도하는 차이와 다양성의 논리를 만들려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피노자 이론에 근거해 미시파시즘의 작동 방식을 해석해 보면, 예속과 무능력이라는 슬픔에 기반한 초월적 권력에 대한 열망, 즉 예속과 억압에 대한 욕망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반면 민주사회는 다양한 욕망이 긍정되고 상승하는 기쁨의 정동에 기반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결국 스피노자의 진단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즉 역능을 상실한 사람들의 절규와 아우성이 바로 슬픔에 기반한 초월적 권력이라는 괴물을 만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증오의 해독제로 사랑과 욕망을 말합니다. 기쁨과 사랑의 용기 있는 행동이 슬픔의 무능함을 극복하는 길이며, 사랑과 욕망의 힘으로 공동체와 사회를 바꾸는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주 시민들의 사랑의 행동은, 한국 사회의 배치를 재배치하는 욕망의 미시정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출처: Aaaatu

제주도에 들어온 예멘 난민 아이들과 함께한 미술치료사가 있습니다. 그는 난민 아이들에게 하얀색 도화지에 자신의 마음을 그려보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폭압적 권력에 쫓겨나 도망쳐온 자신의 슬픔의 정동을 감옥에 갇힌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그 아이들의 마음의 지도를 그리면서, 그 도주한 자의 표현양식이 현재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과 변용으로 나아가도록 이끕니다. 뿐만 아니라 난민들을 자신의 집에서 쉴 수 있도록 받아준 제주 시민들의 용기 있는 행동들이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난민과 함께 한솥밥을 먹으며, 그들이 어떤 음식을 좋아할까, 어떤 음악이 그들을 기쁘게 할까, 고민하면서 배려하는 제주 시민들의 사랑의 행동은, 한국 사회의 배치를 재배치하는 욕망의 미시정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욕망의 미시정치야말로 스피노자가 구상했던 자유인의 해방 전략 중 하나일 것입니다.

파시즘의 해독제, 소수자 되기

한 도서관에서 ‘소수자 되기’에 대해 강연할 때였습니다. 청중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앞날이 창창한 어린 학생들도 많은데, 이왕이면 성공 쪽으로 향해야지 왜 약자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거죠?” 저는 그분에게 소수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단지 일방적으로 약자를 돌본다는 의미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소수자는 약자라기보다는 이 사회를 풍부하게 해주는 특이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집에 돌아와 곰곰이 그 질문을 복기하면서, 아직도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것은 공리주의라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공리주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말하지만, 소수자의 배제와 희생을 정당화하는 사상입니다. 되도록 많은 사람이 잘 사는 방향을 선택하되, 유사시에는 소수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내용이지요. 기성세대들은 결국 공리주의 덕분에 모든 사람이 잘 살게 되지 않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소수자 한 사람을 배제하는 순간, 소수의 다수에 대한 지배를 용인하는 것으로 전도된다는 점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한 나라의 위대함과 도덕적 진보는 그 나라에서 동물이 받는 대우를 보면 가늠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해 있는 동물이라는 소수자가 행복한 나라라면, 당연히 인간도 그만큼 행복할 거라는 말입니다. 결국 소수자는 하나의 특이점으로서 전체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차별은 도미노처럼 전염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사랑도 도미노처럼 전염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수자 되기입니다. 소수자 되기는 국지적인 영역에서의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인 것처럼 하나의 특이점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작은 사랑이 만들어내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에 주목하는 것이지요. 내 앞에 있는 생명, 소수자, 장애인, 여성 등에 대한 보이지 않는 사랑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는 믿음이 소수자 되기에는 담겨 있습니다.

한 명의 소수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미세한 변화에도 민감해진다는 것입니다. 그가 불편하지 않고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세심하게 신경 쓰고 항상 눈과 귀를 열어둘 때 나 자신도 더 풍부하고 다양해집니다. 이를테면 아이가 울고 있을 때, 아이의 표정이나 몸짓, 말, 행동 등을 세심하게 살펴서 아이가 우는 이유를 파악하고 그 해결 방법을 찾을 것입니다. 그렇듯 소수자 되기는 세상을 감지하는 미세한 주름이 점점 더 촘촘해져서 아주 섬세한 다양성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반면 미시파시즘은 대의명분, 피, 남성, 활력, 인종 등을 통해서 마초제국주의가 만든 증오와 혐오발화, 공리주의적 원리에 따라 작동합니다. 아이가 울 때 밖으로 내쫓겠다는 엄한 아버지의 반응이 미시파시즘의 방향성일 겁니다. 하지만 소수자 되기의 부드러운 사랑의 힘은 남성성 속에 숨어있는 여성성을 되살려내서 여성되기 쪽으로 우리의 등을 살포시 밀어줍니다. 여성되기가 모든 소수자 되기의 최초의 관문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소수자 되기는 인종, 민족, 국가를 통해 세상을 바꾼다는 망상에서 벗어나 소수자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는 작은 변화를 추구하도록 만듭니다.

분명 미시파시즘에는 스피노자가 말했던 마조히즘의 논리, 슬픔의 초월적 권력의 논리, 증오의 논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욕망의 부드러운 흐름은 이처럼 겉으로는 강고해 보이는 미시파시즘의 질서를 눈 녹듯 녹아내리게 만들어, 슬픔의 무능력을 사랑과 욕망의 능력으로 점차 바꾸어냅니다. 어떤 사람은, 스피노자가 사랑과 욕망의 능력을 마치 동화와 같이 낙관했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소수자 되기는 사랑이 만들어낼 작은 변화의 전염효과를 말합니다. 즉 세상을 바꾸는 것은 거대한 물리적 힘들 간의 충돌이나 갈등이 아니라, 사랑과 욕망이 만든 작은 변화가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심대한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사랑의 영구적인 승리는 바로 소수자 되기가 수많은 곳에서 격발되는 그런 시대를 예감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되기는 차별과 배제의 질서를 넘어선다

선진국이라고 하는 제1세계에서는 “잘 살되, 이 체제와 시스템을 벗어나지 마라”는 메시지로 가득합니다. 제3세계 난민들이 수백만 명씩 제1세계로 유입되어 난민수용소는 물론 길거리며 공원을 가득 메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평화롭고 안전한 삶, 미디어가 내보내는 달콤한 메시지들, 육류와 주류 등의 풍성함이 가득한 것이 현실입니다. 10년의 긴 가뭄으로 인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나라가 되어버린 시리아는 결국 증오와 폭력의 물결과 주권 체제의 붕괴로 인해 수백만 명의 난민들이 제1세계로 향하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최근 가뭄과 기후변화로 고통받는 멕시코의 상황은,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분리주의를 정당화하는 배경이 됩니다.

지금 제1세계에서는 풍요와 안전이 아름답게 미디어를 가득 채우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에서 13억 명이 굶주리고 매년 600만 명이 기아로 사망하는 것이 엄혹한 현실입니다. 이 정도라면 경사도가 심한 기울어진 운동장입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가뭄과 기근, 빈곤, 기아 등이 바로 이웃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도 절대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언제 우리 차례가 올지 모르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살겠다고 도망쳐 나온 난민들을 마치 외계인이나 좀비, 폭도, 범죄집단처럼 매도하는 것이 미시파시즘의 논리입니다. 그들에게도 어제까지만 해도 고단한 몸을 누일 집이 있었고, 작은 돈이지만 저축을 했고, 가족과 외식하는 등의 일상을 살았던 사람이라는 점은 철저히 가려집니다. 길거리에서 잠든 난민들을 눈엣가시처럼 느끼는 것이 미시파시즘입니다.

간혹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아파트 주차장에서 노숙인이 자고 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 테요?” 아마 관리실에 전화를 걸거나, 경찰서에 전화를 걸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겁니다. 사실 제1세계가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난민들의 삶의 내재성에 대해 귀를 기울이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어쩌면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나서 마실 나온 토요일 오후처럼 느긋하고 평화롭고 행복했던 삶에 대한 기억을 난민들도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은 난민들의 삶의 내재성을 파괴하고 마치 물을 잃은 물고기의 상황으로 던져놓습니다. 그리고 엄마고양이를 찾아 울어대는 아깽이들처럼 거리에서 방황하고 주저하고 가지도 오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삶의 내재성은 철저히 파괴되고 맙니다.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1942~)은 난민의 존재를 배제된 자, 추방된 자, 생명만 유지하는 자, 즉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고 규정합니다. 분명 생명을 유지하고 있지만 권리가 전혀 없고, 삶의 내재성이 사라진 상태에 직면한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몇 년 전 독일에서 난민들의 아우토반 점거시위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모토는 “식후 푸딩을 맛있는 걸로 달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웬 복에 겨운 소리냐며 온갖 혐오발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무권리 상태인 난민에게는 점심 식사 메뉴가 유일하게 누릴 수 있는 권리일지도 모릅니다. 난민들의 상황을 더 절박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파시즘의 배제, 분리, 차별, 증오의 논리입니다. 전 세계는 갈수록 살 길을 찾아 탈출한 난민들을 박대하는 상황입니다. 파시스트들의 생각 속에는 이미 가스실이 작동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러한 배제와 차별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이미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좌우하는 배치가 되고 있습니다. 일선 교사들은 학교에서 왕따가 끊이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합니다. 또한 많은 여성들이 자신들을 향한 혐오 발언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탐색합니다. 이러한 미시파시즘의 심상과 언어들의 배후에는 전 세계적 차원에서의 분리 차별이 숨어 있습니다. 제3세계와 난민을 철저히 배제하는 배치는 암암리에 우리의 삶 속에 파고듭니다. 스피노자가 말한 슬픔과 증오의 정동을 가진 미시파시스트, 마초, 국가주의자들이 억압과 차별을 욕망하며, 증오와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스피노자가 겪었던 상황, 다시 말해 광신도에게 테러를 당했던 사건은 오래전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스피노자의 자유와 해방의 사상이 우리 시대에 더 절실한 이유입니다.

증오의 해독제는 사랑의 용기 있는 행동

들뢰즈와 가타리의 ‘되기’ 개념은 사랑의 힘을 통해 위계와 차별, 지층을 넘어서고 횡단하는 흐름입니다. 신분이나 지위를 초월한 사랑을 다룬 영화도 많습니다. 그만큼 혁명적인 결단이 필요한 사랑만이 위대한 되기인 것은 아닙니다. 그 이전에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작은 배려와 마음의 변화, 신체변용 등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겠지요. 인종, 성별, 지역, 신분 등의 경계를 넘어서 사랑은 우리를 미지의 곳으로 인도합니다. 그것은 아주 작은 계기로만 존재하거나 혹은 아주 짧은 순간에 스치듯 지나갔다 하더라도 우리 몸과 마음에 흔적을 남깁니다. 길을 가다가 맞은편 유모차에게 길을 비켜주거나, 지하철에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거나,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 작은 행동들이 모여 삶의 내재성을 구성합니다. 삶의 내재성은, 사랑의 알 수 없는 힘이 이끄는 무의식의 행렬을 온전히 삶의 자기원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피노자는 주저 없이 “사랑이 곧 혁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진출: Shawn Rain

그러나 우리는 작은 단서와 특이점에 대해서 예민하게 신체를 변용할 능력을 잃어버렸고, 현 상태를 유지하고 지키는 데 급급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성공만을 향하고 있다 보니, 밑바닥에서 들끓고 있는 사랑과 욕망의 특이점인 소수자를 배제하고 삶의 내재성으로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제 우리가 가진 능력, 즉 사랑과 욕망의 능력을 신뢰하고 이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용기 있는 행동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스피노자는 주저 없이 “사랑이 곧 혁명”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사랑과 욕망, 정동의 혁명가입니다.

되기는 경직된 질서, 고정관념, 고정된 틀에 변화의 활력을 줍니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심원한 변화의 과정에 놓여 있을 수 있습니다. 언젠가 저는 한 토론회에 참가해서 공유(公有), 공유(共有), 사유(私有)의 삼분절이 어우러져 작동하는 사회상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지금은 공동체의 이득, 공공의 이득, 사적 이득보다는 공(空)과 무(無)를 생각해야 할 때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자발적 가난과 빈 그릇 운동, 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서 제 3세계, 생명, 소수자에게 나누는 노력이 필요한 시기이지요. 어찌 보면 우리 사회는 그동안 잘사는 것만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해와 이득에 조금이라도 손상이 가면 득달같이 문제 제기를 하고 항의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자신의 욕망을 소수자를 향해, 낮은 곳을 향해 움직여야 할 때일지도 모릅니다. 이를 통해서 소수자의 사랑이 바로 우리를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할 원천이라고 보았던, 스피노자의 사상을 현실화해야 할 것입니다.

이 글은 단행본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스피노자와 함께 인생의 새 판 짜기』(사우, 2019)의 일부이며, 출판사와 협의 후 웹진 《생태적지혜》에 [스피노자의 사랑] 시리즈로 나누어 연재한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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