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사랑] ㉖ 우주의 먼지와도 같은 사랑

스피노자의 삶은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진실한 삶, 즉 ‘투명한 삶’의 의미를 보여준다. ‘먼지와도 같은 사랑’이란 작은 친절과 보이지 않는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그들을 말한다. 소비적 욕망이 아니라 사랑과 정동이야 말로 공동체를 지탱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사랑과 돌봄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 ‘순수한 선물’ 같은 것이며, 이런 태도가 삶을 더 단단하고 의미 있게 만든다. 스피노자가 말한 특이성도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도 결국 보일 듯 말 듯 먼지같이 작은 생명을 향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증여로서의 사랑을 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다.

투명인간(이름 모를 누군가) 되기

스피노자는 『에티카』를 완성하고 정치론과 민주주의에 대해 정리하던 중 폐병을 앓게 됩니다. 그리고 2년 후인 1677년 2월 21일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지요. ‘스피노자의 죽음’이라는 개념의 구도는 역설입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가 생각한 자유인은 죽음을 성찰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 그 자체만을 온전히 성찰하고 드러내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아무런 소유물도 없었고, 병마에 시달려 가냘픈 몸만이 있었습니다. 스피노자는 임종을 지켜준 의사 로데빅 마이어와 친구들을, 평생 투명한 안경알을 응시했을 그 눈으로 바라보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하루 전만 해도 하숙집 주인과 함께 닭고기수프를 먹으며 농담도 할 정도였지만, 급속히 건강이 나빠져서 달려온 친구들의 안타까움과 탄식, 슬픔 속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친구들은 그가 남긴 원고를 모아 『유고』를 발간했고, 서한들을 모아 『서한집』을 발간했습니다. 그 서한에는 세 번이나 약혼했다 세 번 파혼한 여성에게 받은 애절한 사랑의 편지와, 라이프니츠와 교류했던 편지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거의 자취를 남기지 않은 삶, 유리안경알보다 투명한 삶의 진실을 남겼습니다.

우리 시대에 우주의 먼지처럼 투명인간이기를 자처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주변에 잘난 사람이 수없이 많고, SNS를 통해 뽐내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우리 시대에 말이지요. 어쩌면 시대와 거꾸로 가고 있는 그 사람들은, 스피노자처럼 투명한 삶의 진실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사회의 주변부와 가장자리를 서성거리는 인물들, 그들은 비정규직 노동자, 실업자, 소수자, 청소부, 경비원, 뭇 생명의 모습으로 투명한 삶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공동체, 마을, 협동조합 등에서 경청하면서 박수를 치고 강렬도를 전달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길냥이들에게 몰래 밥을 주는 사람일 수도 있고,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몰래 쌀을 기부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펜이 없어 쩔쩔매는 사람에게 볼펜을 건네는 사람일 수도 있고, 만원 지하철에서 옆 사람에게 손잡이 잡을 공간을 슬며시 마련해주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스피노자의 안경알 세공일처럼 투명한 삶의 진실을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투명인간들입니다.

순수증여와 내 안의 자연과 생명

들뢰즈와 가타리는 되기의 궁극, 즉 사랑의 궁극에 대해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이는 우주의 먼지가 되는 사랑의 심연에 대한 서술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다른 이들을 향한 보이지 않는 감정, 애정, 정서, 변용과 같은 것들이며, 지극히 비물질적인 정동이라는 점에서 약간은 수긍할 수 있는 여지가 생깁니다. 스피노자의 삶과 죽음은 바로 이러한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를 보여주는 사례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 사람들의 삶과 사랑, 욕망도 이러한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싫어했던 예전 직장 상사를 우연히 만났는데, 그 사람의 “미안해, 정말 미안해”라는 한 마디에 그만 눈물과 감격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지요. 평생을 사랑했던 사람에게 “사랑해” 한 마디를 담은 편지를 보내는 것은 또 어떨까요? 그리고 이 사랑조차도 사라지고 우주, 생명, 자연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사랑해” 그 한 마디를 던지는 임종의 순간은 또 어떨까요?

자연과 생명은 대가, 보상, 이름, 명분도 없이 주고 또 줍니다. 그래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도 하고, 아미타불이라고도 하고, 순수증여라고도 합니다. 우리 안에도 자연과 생명을 닮은 사랑과 욕망, 정동이 내재해 있습니다. 그래서 지극히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지는 선물을 사회, 공동체, 마을에 건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마르셀 모스가 쓴 『증여론』(한길사, 2002)에는 사랑, 정성, 인격 등을 담아 선물을 주고받는 원주민 공동체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정말 이상하기만 합니다. 못 줘서 안달하는 공동체니까요. 그러나 그 책을 읽다 보면 우리 안의 자연과 생명의 능력인 사랑과 욕망, 정동이 갖는 무한한 상상력의 일부를 느끼게 됩니다. 자연과 생명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선물을 주듯이 소수자, 생명, 자연, 공동체에게 선물을 건네주는 증여의 잠재성의 지평이 열립니다. 이에 따라 스피노자의 사랑, 욕망, 변용, 정동의 능력 중 일부가 바로 증여와 순수증여가 아닐까 하는 상상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들뢰즈와 가타리가 왜 사랑의 궁극을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라고 했는가에 대한 설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 주변에는 따뜻한 말, 심리적 지지나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거나, 혹은 내 고민에 빠져 미처 그들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지요. 소중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 존재도 참 많지요. 어머니 혹은 아내처럼 말이지요. 지금까지 그런 이들을 그저 자신의 성공을 위해 이용하거나 지나쳐야 할 풍경으로 간주해왔던 것이 도구적 이성이 지배하던 문명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투명인간과 같은 그 이름 없는 사람들이 보여준 투명한 삶의 진실에 눈떠야 할 것 같습니다. 왜 그 사람들을 친구가 아니라, 고객으로, 환자로, 청중으로만 간주했던가요? 자신의 모든 것을 주는 자연과 생명, 나무, 흙, 공기를 그저 이용 대상으로만 보았던 문명의 논리가 거기에도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데카르트의 도구적 이성을 넘어서 스피노자의 내재적 이성으로 이행하면, 자연, 생명, 공기, 나무, 흙, 그리고 우리 주변의 친구들에게 사랑과 욕망을 전달해주면서 영원성에 도달하는 그런 삶의 지평이 열립니다.

우리는 그동안 받기만 해왔습니다. 우리는 너무 염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는 일에 너무 소홀했습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당장 바꾸자고 제안하는 사람이 바로 스피노자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의 윤리와 미학

만지고 비비고 쓰다듬고 보살피는 일련의 일들은 보이지 않는 정동이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사랑을 전달하고 떠나는 존재다. 사진출처 : Javid Hashimov

최근 연구실에 아픈 아기고양이가 또 한 마리 들어왔습니다. 연구실 부근에 살던 길냥이가 낳은 고양이인데, 너무 아파서 버린 모양입니다. 먼저 떠난 제 형제 곁에서 까무룩 죽어가고 있던 어린 고양이를 구조해서 병원에 데려갔습니다. 안압이 너무 높아져 검게 튀어나온 한쪽 눈을 적출하고 어린 것은 애꾸가 되었지요. 우리는 이 아깽이에게 또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눈이 하나뿐이니 보고 또 보면서 살라고 말이지요. 작년 이맘때는 모모가 아픈 몸으로 들어왔지만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지요.

지금 아내는 옆방에서 또봄이를 돌보고 있습니다. 아내가 하는, 만지고 비비고 쓰다듬고 보살피는 일련의 일들은 보이지 않는 정동입니다. 가끔 문을 열어 들여다보면 아깽이는 아무 걱정 없이 발라당하면서 곤하게 자고 있더군요. 아내는 녀석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는 교감과 사랑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 느낄 수도 없고, 보이지도, 지각되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또 다른 사랑의 준비동작과도 같다는 느낌도 들고, 아깽이의 행동과 정서에 보이지 않게 아로새겨져 튼튼하고 건강하게 자라날 밑거름이라는 생각도 들고, 더 크게는 생명평화를 위한 작은 실천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단정할 수조차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의 생명과 자연에 대한 선행과 작은 실천은 공동체를 풍부하게 만드는 밑거름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이것을 의미화할 수도, 규정할 수도 없기에 난처합니다. 그저 삶 자체가 보여주는 투명한 진실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지요.

여기서 인간은 재산, 얼굴, 이름, 명예 등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랑을 전달하고 홀연히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라는 점을 느낍니다. 스피노자가 신체와 삶, 사랑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지각 불가능한 영역에서의 논의로 수렴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의 윤리와 미학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를테면 생명에 대한 태도와 윤리적 소비, 삶의 방식, 심지어 공기에 대한 태도마저도 중요해진 상황입니다.

중년이 된 저에게는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들과 선배들, 은사님들이 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친구들과 얘기하다 보면 “그 친구가 전에 이런 얘기를 했지”라고 운을 떼서 돌아가면서 하나의 스토리가 완성되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음을 짓습니다. 마치 죽음과 삶의 경계를 횡단하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있는 것처럼 사랑, 욕망, 정동의 기억과 추억의 이야기들이 오갑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사랑과 정동이 친구들 사이에서 형성되면 죽은 친구가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게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갑니다. 마치 소풍 같은 것이 삶과 죽음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 사회에는 이름이 없고, 얼굴이 없고, 언어가 없는 소수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에 대한 보이지 않는 사랑이 어쩌면 우리 자신의 실존과 삶의 의미를 찾게 해주는 경로일지도 모릅니다. 아이를 돌보느라 집안에 고립되어 있던 엄마들, 여성의 권리를 위해 나선 사람들, 생명에 대한 사랑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사람들, 자연을 지키기 위해 거리에 나선 사람들, 성소수자와 함께 퍼레이드를 하는 사람들,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 난민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는 사람들 등 소수자와 생명, 자연에 대한 사랑은 영원성의 지평을 엽니다. 다시 말해 생명과 자연의 자기원인과 우리 안의 사랑과 욕망의 자기원인이 일치하도록 만드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일치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그 자체가 영원성임을 깨닫습니다. 이러한 영원성의 개념은 사랑의 순간과 지속이 영구혁명 과정임을 의미합니다. 결국 소수자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삶을 강건하고 영원하도록 만드는 비밀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스피노자의 영원성 개념은 이런 점에서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어려운 개념의 구도를 갖고 있지요.

특이성 생산 = 실존주의를 넘어선 실존

스피노자의 특이성 개념은 굉장히 심오합니다. 특이성은 바로 세상에서 유일무이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주 특이하기 때문에 딱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실존적인 유한성을 담고 있다는 말이며, 삶의 좌표에서 정동의 기하학을 만드는 사건성으로 나타난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어떤 사람은 ‘특이성=유한성=사건성=실존’이라고 간단하게 요약해버리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갖고 있는 삶의 진실은 난해하게만 느껴집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유일무이하고 특이하며 유한하고 특이한 사건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실존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특이성을 고집스럽게 탐색했던 들뢰즈의 철학에 담긴 의미조차도 이미 스피노자가 선취하고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모두가 유한하고 특이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점에 대한 지적은, 결국 삶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생명의 유일무이성에 대한 경외로 나타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가타리는 여기서 한 발 나아가서 특이성 생산을 말합니다. 특이성이 그냥 주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생산하고 만들어야 할 사건인 것입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특이성 개념은 유일무이한 존재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유일무이한 순간으로서의 사건의 의미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도는 바로 스피노자가 그려낸 특이성 개념의 전모입니다. 들뢰즈가 존재로서의 특이성에 치중했다면, 가타리는 사건으로서의 특이성에 치중한 경향이 있습니다. 들뢰즈가 생명사상에 가깝다면 가타리는 생태사상에 가깝습니다.

가타리의 특이성 생산은 섬광과 같은 메시지를 줍니다. 즉 자신의 유한성을 깨달은 사람이 공동체의 판을 깔아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특이성과 유한성을 깨달은 사람이 나서서 미래세대가 춤추고 노래할 수 있도록 판과 구도를 깔아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특이성 생산’인 셈입니다.

스피노자의 특이성 개념을 더욱 혁신적으로 전진 배치한 사람이 가타리입니다. 스피노자의 특이하고 유한한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생성의 철학은 개인의 삶을 조명하는 심미적인 철학이 아니라, 관계망과 배치를 밝히는 철학, 더 나아가 공동체의 구성과 재건의 원동력을 밝히는 의미좌표, 관계성좌가 됩니다. 여기서 스피노자의 특이성 개념이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지가 살짝 드러납니다.

스피노자의 특이성 개념은 자취와 흔적을 많이 남기는 삶의 방식이 아니라, 자취를 더 적게 남기면서도 자신의 삶의 안간힘과 정동의 흐름을 그려내는 예술작품과 같은 삶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특이성은 자랑이나 뽐내기, 내세우기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적 욕망과 생명에너지로서의 욕망이 구분됩니다. 단지 자신의 특이체질적인 면을 즐기기 위해서 소비하고 소모하고 놀려는 생각은 지구에 더 많은 탄소발자국, 생태발자국, 물발자국 등을 남길 뿐, 스피노자의 특이성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스피노자는 삶의 투명한 진실로서의 사랑, 욕망, 정동이 춤추고 노래하고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소비, 미디어, 첨단기술로 귀결되는 통속적인 욕망이 아니라 지각 불가능한 영역,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향하는 생명 에너지로서의 욕망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생명에너지로서의 욕망 개념을 통해서 스피노자가 제시한 특이성 개념의 일관된 방향성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입니다. 스피노자의 특이성은 아마도 자취를 적게, 또는 아예 남기지 않는 작은 실천이 아닐까 합니다.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

스피노자의 삶과 죽음은 ‘투명성’의 진실을 보여주며, 오늘날에도 이름 없는 작은 친절과 증여 속에서 그 의미가 이어진다. 사진출처 : Serge Ottaviani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신 즉 자연이 지닌 질서를 이해하는 사람은, 신을 사랑할 수 있을 뿐 결코 복종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신은 인격신이나 지복을 빌어야 하는 신이 아니라, 우리 안의 보이지 않는 사랑, 욕망, 정동 등입니다. 그것은 신체가 갖고 있는 잠재적인 능력이며, 우리 안의 자연과 생명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지극히 신체적인 측면에서 사랑을 말하면서도, 지고한 사랑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범신론의 매력에 빠져들수록 우리는 신체와 욕망을 억압하지 않고도 사랑의 지고지순한 지평으로 나아가는 방법에 눈뜨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우리 자신은 아직 모른다”라고 했던 스피노자의 아포리즘의 비밀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홀연히 사랑을 남기고 떠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참 많습니다. 그들은 이미 사랑과 욕망의 궁극이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라는 신체변용 중 하나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것을 형이상학이나 신학, 신비주의, 영성주의로만 치부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신체, 사물, 생명, 자연, 우주에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의

c 궁극을 깨닫기 위해서 작은 생명 하나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우주 되기와 같은 지평으로 나아갈 여지가 생깁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체가 갖고 있는 사랑과 변용을 지각 불가능한 지평, 즉 우주의 먼지의 지평으로 나아가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스피노자와 함께 작은 여행을 했습니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개념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여행 가이드가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뜨거운 정동, 사랑, 욕망이 그리는 지도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미로와 같은 정리, 공리, 증명 등에서 사랑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작은 스피노자의 개념상자 속에서 우리 신체와 사랑, 욕망이 갖고 있는 잠재성을 하나씩 발견하고 기뻐하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도 결코 정답이 아닙니다. 스피노자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인류의 숙제, 사랑의 숙제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스피노자와 함께 아이도 되고, 동물도 되고, 우주의 먼지도 되어보았습니다. 미지의 세계가 열리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는 더듬더듬 미래로 향합니다. 생각이라는 단어와 묘하게 닮은 ‘달팽이의 촉수’는 문지를수록 지혜로워진다고 했던가요? 우리의 신체는 접촉하고 변용될수록 지혜로워집니다. 저는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는 스피노자의 평행론이 가진 비밀의 아주 일부만을 이 책에서 드러내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스피노자를 바라보는 유일한 창은 아닙니다. 누구나 스피노자의 깊고 넓은 소금 강 위에서 유영하듯 세상을 재창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라는 스피노자의 아포리즘을 풀기 위해 긴 시간 동안 사색했던 결과를 이 책에서 말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그 아포리즘은 우리를 미래진행형적인 삶의 여정으로 이끕니다. 그리고 스피노자처럼 미래가 다가와 말을 거는 것을, 어느덧 느끼게 됩니다.

끝.

이 글은 단행본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스피노자와 함께 인생의 새 판 짜기』(사우, 2019)의 일부이며, 출판사와 협의 후 웹진 《생태적지혜》에 [스피노자의 사랑] 시리즈로 나누어 연재한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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