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철학의 시간] 열한 번째 – 인연과 죽음
2024.6.25

이 사진을 누가 찍어준 지 아세요? 선님에게 메세지가 한 통 왔다. 그제야 내가 왜 유희 님의 장례식에 발길을 옮겼는지 알 수 있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이런 인연이 있었구나. 잊고 있었지만서도.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 좁은 판과 배치의 생태계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인연을 맺고, 또 맺어가고 있는 걸까. 그리고 돌아보게 되는 것은, 나는, 우리는 그 인연들을 소중히 여기고 대접하고 있을까. 낯이 익어 발걸음을 옮겼던 이 장례식에서 나는 지난날의 한 인연을 나도 모르게 다시 만나고 있었다.
오늘은 죽음이 밀려오는 날인 게지. 4년 전 오늘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님이 돌아가셨던 게 떠올랐다. 비가 오는 날, 싱숭생숭한 기분을 안고 돌아왔다. 그 마음이 남아 선생님이 만드신 연구소에서 몇 년을 일했다. 기일마다 삼각산 금선사에 동료들과 함께 찾아뵈었던 날의 기억이 선선하게 남아있다. 뜻을 이어가고자 한다는 그 때의 다짐이, 아직 내게 잘 남아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참 아이러니한 것 같아. 죽음을 내 삶으로 끌고 들어온다고 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 죽은 사람도 산 사람을 더욱더 살려야 해. 내가 안 살면 그 누구도 못 살려.” 호님의 인터뷰에서 가장 남았던 말, 우리가 인연과 죽음을 마주해 할 수 있는 건 사는 일뿐이다. 신 샘의 책을 읽어가다 머물고 있는 장을 옮긴다.
“은사님의 장례식장으로 향했습니다. 늘 그랬던 모습 그대로 활짝 웃고 계신 그분의 영정사진을 보고, 저는 아내와 가족을 먼저 떠올렸습니다. 이 한 번뿐인 삶을 얼마나 충실하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지요. 특히 가장 가깝게 사랑의 감정을 나누는 가족들을 너무 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비루하게만 대하지는 않았는지, 일상에 파묻혀 서로의 존재를 망각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았습니다. 끝이 있다는 것이 더 절실한 사랑을 만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은사님의 장례식은 그것을 깨닫게 해준 시간이었습니다. 그분은 허무를 남긴 것이 아니라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숙제를 남겼습니다.“ 신승철,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128p, 2019 중
[신승철학의 시간] 열두 번째 – 추모축제를 준비하는 길
2024.6.26
오늘은 추모제 준비모임의 마지막 회의 날! 회의록을 보니 어느덧 열 번이나 옹기종기 모여왔다. 회의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 길, 이 즐거웠던 여정에 대해서 순간이나마 적어보려 한다.
시작은 단순했고 우연이었다. 어느 날 신 샘 기일이 다가오길래 저희 추모제 같은 거 안 여나요? 하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한 번 열어볼까요 준비모임을 가지게 됐다.
첫 회의 날은 4월 16일, 세월호 10주기 날이었다. 안산시민공원에서의 추모제를 마치고 모임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슬픔과 거리두기 어려웠던 날이지만, 유독 싱글벙글했던 여러 분 덕에 회의를 마칠 때 찍었던 사진에는 방긋 웃는 모습이 찍혔다. 그 회의에서 신 샘이 좋아했더라는 글귀를 따라 추모제를 추모(축)제로 열기로 했다.
함께할 사람 여기여기 붙어라 하고 공고를 띄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 분이 함께해 주셨다. 그리고 여러 아이디어들이 덧붙여져 단순한 추모제를 넘어 철학자 신승철의 개념어를 잇는 학술제로, 그리고 그를 기리고 그리는 공연과 전시를 함께 여는 축제를 구성하게 됐다.
어느 날이었나, 경님이 그랬다. 당신은 이 추모축제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기적 같다고. 어디선가 신 샘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손길이 자꾸 나타나는 게 참 고맙다고. 이게 신 샘이 그렇게 입이 닳도록 말했던 모두의 주체성 생산이지 싶다고.
그렇게 추모축제에는 여럿의 정성이 깃들었다. 따뜻한 포스터부터 현수막 대신의 조각보, 여러 시각예술들, 신 샘의 개념어 발표들과, 이 자리를 위해 작곡한 추모곡과 공연들까지. 더불어 내어주신 영등포산업선교회라는 의미 깊은 공간에서, 떡에 콤부차에 토마토에 참외까지 곳곳에서 보내주신 먹거리와, 손수 나서주신 채식밥상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출판사들에선 신 샘이 쓰신 책을 추모축제에 보태라고 십 수 권을 보내주셨다.
이제 추모축제만 남았다. 언젠가 이 시간을 회상하면, 추모축제의 제목으로 정했던 “지금, 여기, 가까이”의 의미를 여실히 깨닫는 시간이었다고 돌아보게 될 것 같다. 모든 것은 이런 정성들로 여실히 빚어지는구나. 참 많이 배운다.
[신승철학의 시간] 열세 번째 – 기억의 속성, 유한자의 무한결속
2024.6.30
하루 새 추모축제를 기다리던 마음에서 그 시간을 그리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눈에 선한 순간이 많았다. 함께한 그 순간들이 참 좋았다.
애도의 방법에 정답이란 없겠지만 홀로 여한을 반복하고 쌓아가는 것보다, 함께 많이 울고 또 웃는 것이 더 좋은 것 같다. 울다가, 웃다가, 다시 울다가, 다시 울다가 그 차이나는 반복이 참 좋았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기억의 속성이라는 것이 본래 유한하고, 우리가 가진 기억은 다 하나의 조각이라는 것. 그렇기에 어제와 같이 저마다의 기억의 조각들을 꺼내어 놓고 퍼즐처럼 맞추어가는 함께-기억이 중요한 게 아닐까. 그걸 유한자의 무한결속이라도 부를 수도 있겠다.
리추얼은, 떠난 사람 보다 남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제 처음 얼굴을 뵌 조합원이 열 명은 되는 것 같다. 신 샘 덕에 이리 귀한 인연들을 만나가는 것이 어찌나 감사한지, 그리고 행복한지. 추모축제를 준비하는 과정은 단언컨대 참 즐거웠다. 물론 우여곡절이야 어디든 있지마는, 회의를 마치고 집 가는 길에 춤추면서 돌아간 기억이 제일 선명하다.

어제의 추모축제에서 연주했던 Andata가 난 늘 슬픈 곡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힘이 느껴졌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이어서 같이 써클댄스를 추는데, 맞잡은 손에 담겨 오는 힘이 참 좋았다. 생태적 슬픔은 사랑의 에너지라는 말이 이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내 사진첩에 신 샘과 같이 찍은 사진은 한 장 뿐이었다. 예절 그게 뭐라고 그래서 신 샘과 맞담배도 안 폈다. 가끔 부담되어서 전화도 일부러 안 받았다. 늘 이런 아쉬움과 후회가 남아있었는데, 어제 함께한 우리의 이야기에서 좀 풀려가는 걸 느꼈다. 이제 여한은 없고 추억만이 있을 것 같다. 함께한 나날들이 다 좋았다.
[신승철학의 시간] 열네 번째 – 웃음과 울음의 연결고리, 분자혁명
2024.7.4.
뭔가 어색하다. 왜인지 귀한 사람들이 연일 떠나가고, 그 실낱같은 인연의 아쉬움과 소중함이 밀려온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더 많은 슬픔을 만나게 되는 것일까.
신 샘의 묘역을 찾아가는 길은 소풍 같았다. 다같이 도시락을 싸서 좋아하는 노래를 돌려들으며 이런저런 수다를 시간가는 줄 모르고 나누는. 그 웃음소리가 참 좋았다.

사진제공 : 윤석
날씨가 너무나 화창한 가운데, 어쩌다 틀어버린 추모곡을 들으며 추모가 시작되었다. 똥또동또동 전주에서는 모두 웃었는데 노래가 마칠 적이 되니 경건해졌다. 이사하면서 찾은 다람쥐 신 샘이 숨겨놓은 담배 한 갑을 뜯어 향 대신 피우고, 정성껏 부친 전을 늘여놓고, 긴 침묵 속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한 마디가 이어졌다. 형 너무했어, 그래도 힘 좀 보태줘. 소장님 밥을 못 해줘서 미안해요, 대신 사람들에게 밥 해줄게요. 하는 말들이 기억에 남는다.
그 눈물도 참 좋았다. 웃음과 울음의 연결고리를 잘 반복하는 것이 귀하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의 추모축제에서 모두가 느낀 힘과 감동이 있을 텐데, 그 힘의 속성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이 힘이 일순간으로 휘발되지 않고, 사계절처럼 차이나는 반복으로 순환하려면 어때야 할까. 이 순간들을 소중히 잘 살려가고 싶다.
용인에 있는 묘역에는 비문이 이렇게 적혀 있다.
“떡갈나무 혁명을 만들어가는 도토리 한 알. 투쟁하면서 사랑하기, 걸으면서 묻기, 돌보면서 함께하기를 실천하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모두에게 분자혁명의 시작점이 될 것을 제안하다.”
[신승철학의 시] 마지막 –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2024.7.11.

사진제공 : 윤석
시간은 흘러간다. 때로는 이 흘러감이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웃는지 우는지 개의치 않고 제 갈 길을 가니까. 그러나, 그랬기에 우리는 흘려보낼 것들을 흘려보내고 남길 것들을 남겨둘 수 있는 것 같다.
애도는 기억하는 것일까, 망각하는 것일까. 추모축제를 준비하는 내내 머릿속에 있었던 난제다. 누군가를 그리는 일, 흩어져 가는 기억의 편린들을 회상하고 붙잡아 두는 일은 애도다. 누군가를 잘 보내고, 미련과 회한을 흘려보내어 그가 남긴/그와 남은 생을 살아가는 일도 애도다. 그렇다면 애도는 기억과 망각 사이에 있는 것이려나.
신승철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삼일 뒤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처음 상복을 입고 상제가 됐다. 그 짧디 짧은 삼일의 시간 속에서 죽음과 애도에 대해 되지도 않는 생각을 했다. 고작, 삼일 만으로는 인연을 풀 수 없다. 애도에 완성은 없겠지만, 미완으로 남았다는 것은 알았다. 비록 삼년상이 지금은 고전 설화가 되었지만, 생태적 지혜가 있다면 거기에 있겠다 싶다. 사람 마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혜가 보이는 시간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삼 년은 이 애도의 수행을 계속해보려 한다. 누군가를 온전히 떠나보내는 데는 꼭 그와 맺은 인연의 시간만큼이 걸린다는데, 그 기억과 망각의 여정을 마음을 열고 임하고 싶다. 상중이라 해서 마냥 슬픈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이번에서 느꼈듯이, 그 기억과 망각의 과정에는 여러 얼굴의 기쁨과 웃음, 새로운 인연과 만남이 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본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
“예상치도 못하고 기억에 없던 사건이 생성되는 순산을 반(反)기억 생성의 순간이라고 합니다. 의외의 돌발적인 상황이나 아주 우발적이고 예상에 전혀 없던 순간이 사건의 지평으로 존재하는 것이지요. (중략) 반기억 순간은 매번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 몇 번 찾아올까 말까 하지요. 그러한 사건은 삶을 요동치게 합니다. 삶의 궤도를 완전히 바꾸어냅니다. 완전히 다른 삶이 열리는 계기인 것이지요. (중략) 그러한 반기억 생성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이를 자신의 삶을 변형하고 이행하게 하는 사건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질적이고 색다른 현실을 보고도 못 본 척하고 넘겨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심원하게 변형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응시하고 직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신승철(2021), 『묘한 철학』, 224-22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