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 있는 탈성장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탈성장, 그리고 탈성장에 관한 경험에 대하여.

탈성장이란 무엇일까? 내 생각에는 나를 구성하는 요소 중에서 경제적 요소와 성장의 요소 이외의 것들을 발견하고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를 구성하는 요소로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정체성, 관계성, 지속성이 있을 것 같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 누구와 함께하는지에 대한 관계성, 그리고 나의 지속성이 그것이다. 경제적 요소, 성장의 요소는 이 중에서 지속성에 해당할 것이다. 물론 지속성 안에는 위기 또는 재난 관리의 요소도 있다.

그렇다면 정체성이란 무엇일까? 정체성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것이다. 나는 개체, 즉 생태학적으로 entity이며 이는 물질, 에너지, 정보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물질이며, 에너지이며, 정보이다. 나의 물질은 일반적으로 몸이라고 표현한다. 에너지는 氣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무의식이 작용하는 역동이기도 할 것이다. 또 생명력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미적 체험이나 사랑의 체험과 같은 것들도 에너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보는 앎이라고 일반적으로 표현한다.

그렇다면 나의 물질인 몸은 무엇일까? 이는 사실 쉽지 않은 질문이다. 내가 먹은 사과는 나인가, 즉 몸인가? 나의 배설물과 나의 몸에 붙어있는 먼지는 나인가? 즉, 나와 내가 아닌 몸의 경계는 뚜렷한 듯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명확하지 않다. 면역학으로 들어가 보면 이는 더욱 어렵다. 자가면역질환 등 많은 면역 질환은 몸 안에 있는 나와 나 아닌 남에 대한 인식의 오류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 안의 수많은 미생물은 나인가? 수많은 세포는 나인가? 세포 안의 수많은 물질은 나인가? 아니라는 것이 반야심경의 가장 유명한 구절 色卽是空의 의미이다.

하지만 몸은 나다. ‘몸’은 잊히는 경우가 많다. 보통 먹을 때, 배설할 때(자연식 화장실에서), 죽고 묻힐 때 ‘몸은 나’라는 성격을 깨닫는다. 이러한 깨달음이 우리 주변에 있는 탈성장의 계기일 것이다.

두 번째는 무의식적 역동이 생겨날 때일 것이다. 아무리 재벌이어도 우울증이 생겨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있다. 즉, 경제적 요소, 성장의 요소로는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이를 프로이드는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요즘 상담, 심리치료, 치유 등이 많이 회자된다. 이는 모두 탈성장의 계기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미적 체험이다. 경제적 요소, 성장의 요소는 미적 체험을 막는다. 〈박카이〉라는 희랍 비극에서는 이러한 미적 체험을 막다 보면 파멸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미적 체험을 쉽게는 ‘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흥은 경제적 요소, 성장의 요소가 망각될 때 발생한다. 술은 물질적으로 이러한 경제적 요소와 성장의 요소를 망각하는 한 방법일 것이다.

생태계라는 관계성이 없다면 우리의 몸은 지속 불가능할 것이다.
사진 출처 : Akil Mazum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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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계라는 관계성이 없다면 우리의 몸은 지속 불가능할 것이다.
사진 출처 : Akil Mazumder

네 번째는 사랑의 체험이다. 사랑의 체험은 보편적이면서도 궁극적이다. 사랑에 대한 가장 극적이면서도 역사적인 사례는 예수 이야기다. 요한복음서 제14장 34절과 35절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유대 율법이 다 필요 없다는 것이다. 예수의 메시지는 율법, 즉 도덕법칙에서 사랑이란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으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는 사랑을 하는 것이 제자의 표징이라고 했다. 그리고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서 누구라도,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복음서 제15장 33절)”. 이는 경제적 요소, 성장의 요소에 매여있는 한 사랑을 할 수 없고, 예수의 제자가 될 수도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맥락 때문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돈을 악마의 배설물이라고 한 것 같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바로 우리 주변에 있는 탈성장일 것이다.

다섯 번째는 앎의 체험이다. 앎은 내 안에 무언가가 가득 차 있을 때는 일어나지 않는다. 앎에 대한 사례로는 공자를 들 수 있을 것이다. 好學이라고 자신을 칭한 공자의 예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팔일편에 보면 “공자께서는 태묘에 들어가 매사를 물으셨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누가 추 땅 사람의 아들이 예를 안다고 하였는가? 태묘에 들어가 매사를 묻더라.’ 공자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였다. ‘그것이 바로 예이다.’” 공자의 말에 의하면 매사를 묻는 것이 예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도 모름을 아는 것이 참된 앎이라고 하고 있다. 앎은 물음에서, 모름에서, 비움에서 비롯한다. 경제적 요소, 성장의 요소는 물음에서, 모름에서, 비움에서 앎이 비롯한다. 앎은 어쩌면 궁극적인 탈성장의 체험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여섯 번째는 관계의 체험이다. 이는 모든 체험의 근본이 된다. 우리는 종속 영양 생물이기 때문에 독립 영양 생물인 식물이 한 광합성을 바탕으로 양분을 섭취한다. 생태계라는 관계성이 없다면 우리의 몸은 지속 불가능할 것이다. 이외에도 모든 정체성의 체험은 ‘관계성’에 바탕을 둔다. 관계성에 대한 자각에는 석가모니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쌍윳다 니까야의 절반의 경(Upaḍḍhasutta, S45:2)을 살펴보면 “언젠가 붓다는 사캬족이 사는 사가라 마을에 머물고 있다. 그때 아난다가 붓다에게 물었다. ‘대덕이시여,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로서는 좋은 친구를 사귀고 좋은 벗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이 거룩한 도의 절반은 이미 성취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어떠한지요?’ 붓다의 제자들은 스승이 가르친 것을 자기 자신을 통해 생각해 보고, 깨달은 바가 있으면 붓다에게 물어 판단을 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오늘도 아난다는 평소 스승이 말했던 ‘선한 벗의 중요함’에 대해 생각한 바를 여쭈면서 가르침을 구하였다. ‘아난다여, 그렇지 않다. 그런 생각은 옳지 않다. 아난다여, 우리들이 좋은 친구를 갖고 참다운 벗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이 거룩한 도의 절반이 아니라 진실로 그 전부를 이룬 것이다.’”라고 쓰여있다. 좋은 친구를 갖고 참다운 벗들과 함께 있는 것이 거룩한 도의 절반이 아니라 그 전부라는 깨달음은 중요한 관계 체험이다. 석가모니가 말한 緣起의 내용도 이와 같은 관계성의 체험이다.

일곱 번째는 재난 관리에 대한 체험이다. 재난은 크게 전쟁과 자연재해가 있을 것이다. 전쟁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평화를 마음속으로 품어야 한다. 자연재해도 언제나 가능하다. 요새는 많은 자연재해가 기후변화로 인해 발생한다. IPCC 보고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이상의 체험들이 우리 일상 속에 있는 탈성장에 대한 경험들일 것이다. 산책하고,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 책을 보고, 음식을 먹으며 친구들과 가족들과 함께하는 것 그리고 우리 일상이 경제적 강박과 두려움으로부터 회복되는 것이 바로 탈성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김영준

법학, 생태학, 철학을 바탕으로 사회를 엮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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