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을 추첨으로 뽑아보자고?” – 『선거인가, 추첨인가? : 추첨의 역사』 발간에 부쳐

이 글은 2022년 8월 발간 예정인『선거인가, 추첨인가? : 추첨의 역사』(올리버 다울렌 지음/이지문 역, 북코리아)의 역자 서문이다. 시민들에게 기본 권력을 배분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대의 민주주의를 대신할 새로운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로서 추첨 민주주의를 소개한다.

『추첨의 정치적 잠재력: 공직의 무작위 선택에 관한 연구』라는 원제를 처음 접하는 많은 이들은 곧바로 이런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아니, 정치적 공직을 추첨을 통해 선출하자고?”

우리는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라는 환상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민주주의에서의 공직, 특히 정치적 공직 선출에서 ‘추첨’은 오히려 민주주의의 원형이라고 불리는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의 핵심이었으며, 오늘날처럼 대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봉착한 상황에서 대체가 아닌 보완으로서 ‘추첨’을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도입하는 것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역자는 2011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추첨 민주주의’(한국 민주주의의 질적 고양을 위한 추첨제 도입 방안 연구)를 주제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지난 10여 년간 『추첨 민주주의 이론과 실제』, 『추첨 민주주의 강의』, 『추첨 시민 의회』(공저)와 『추첨 민주주의』(공역), 『민주주의 구하기』(역서)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우리 사회에 ‘추첨 민주주의’를 알리기 위한 연구 성과물을 선보였다.

이번에 역서로 내놓는 이 책은 고대 아테네와 중세 이탈리아 도시 공화국의 추첨 사례를 넘어서서 17~18세기 영국, 미국, 프랑스에서의 추첨제 실행 및 제안 등을 포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중세의 구이치아르디니, 마키아벨리와 근대의 해링턴, 루소, 몽테스키외 등 당대 정치 사상가들의 추첨 제안 및 논의 역시 개괄하고 있다. 이처럼 광범위한 자료들을 중심으로 관련 문헌 등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그 역사를 정리하였다는 점에서 추첨제 연구의 중요한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 역자 역시 박사 논문을 준비할 때 가장 많이 도움을 받았던 책이기에 오래 전부터 역서로 출간하고자 마음먹었으나 ‘추첨’이라는 주제 자체가 여전히 생소할 뿐 아니라 외국의 추첨 역사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어 국내 독자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을 수 있고, 내용 자체가 번역하기에 그리 쉽지 않다 보니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어왔었다. 그럼에도 이번에 이리 출간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국내에서도 추첨에 기반을 둔 시민의회에 대한 학문적 관심뿐만 아니라 운동으로서의 맹아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역자의 저서와 역서를 포함해 추첨을 상세히 다루는 두 권의 의미 있는 역서들이 있기는 하지만 추첨의 역사를 제대로 보여주는 이 책을 통해 학문과 운동 양 측면에서 좀 더 추첨제를 진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이 책은 “추첨을 통해 무작위로 선출된 공직자들이 정치 공동체에 어떤 이점들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규명하는 직접적인 목표를 가지고 시작”하면서, 추첨이라는 주제에 대한 담론을 넓히는 데 기여하고 있지만 어떤 특정한 계획을 옹호하지도 않고, 실제로 독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오늘날 추첨 재도입이 반드시 좋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추첨이 현재 정치문화의 일반적인 부분이 아니며 추첨에 기반을 둔 제도가 정치 영역에서 실제로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지식도 부족한 상황에서 저자의 기여는 추첨의 정치적 가치를 이해하기 위한 원칙적이고 정보에 입각한 틀이 확립될 수 있도록 어느 정도의 이론적, 역사적 기초가 필요하다는 전제에 충실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기에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추첨에 대한 지지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하더라도 민주주의에 대해서, 오늘날 한국의 대의민주주의에 대해서, 그리고 정치 엘리트 중심의 선거 정치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하고 그 고민을 풀어나가는 데 있어 이 책의 중심 주제인 ‘추첨을 통한 정치적 공직의 선택’의 다양한 방식 중 어느 하나라도 고려해본다면 그것으로도 출간의 의미는 있을 것이다.

역자가 지난 10여 년 추첨 민주주의-이 말 자체도 2011년 손우정 박사와 공동으로 미국 하원을 추첨으로 대체하자는, 원제를 그대로 번역하면 ‘시민의회’ 정도 될 법한 책을 역서 출간하면서 추첨을 정면으로 내세우자는 의미로 ‘추첨 민주주의’로 하면서 사용하였다-라는 여전한 그 관심의 황무지에서 이렇게 지속적으로 추첨 민주주의라는 싹을 틔우고자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이유에서다. “이 사회의 절대 다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의 카리스마, 한 사람의 현란한 말솜씨가 아닌 절대 다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TV 오락 프로그램에서 개그맨이 한 말이다. 이 말이 와닿은 것은 정치를 엘리트의 전유물로 인식하고, 선거일에 투표하고 ‘인증샷’을 올리는 것으로 민주주의를 인식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로는 시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떠들어대지만 ‘위한’ 정치도 없을뿐더러 왜 시민과 ‘함께’하는 정치에 대해 진보 보수를 떠나 제대로 그 제도화에 대해 고민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정치인을, 정당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추첨 민주주의는 시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보다 다양한 공간을 통해 숙의를 통한 자기 통치술을 키워나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유용한 한 방안이다.

추첨 민주주의를 통한 정치 참여가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확신한다. 
사진 출처: Wilhei
추첨 민주주의를 통한 정치 참여가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확신한다.
사진 출처: Wilhei

역자는 박사 학위 논문에서는 국회의원, 지방의원을 추첨으로 대체하자는 결론으로 마무리 하였지만 학문과 달리 운동은 현실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추첨 민주주의 차원에서의 양원제를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지방자치가 도입되지 않은 읍면동 차원에서의 추첨에 기반을 둔 시민의회를 시작으로 기초 및 광역지방의회와 양립하는 기초지방 및 광역지방 시민의회, 그리고 궁극적으로 국회와 함께 작동하는 국가 시민의회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 또한 이런 상설 시민의회가 아니라 하더라도 당장 시도해볼 수 있는 것이 2년도 남기지 않은 다음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혁을 캐나다 2개 주에서 시도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던 선거구마다 두 명씩 추첨을 통해 구성한 선거개혁 시민의회 방식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기후 위기 대응 역시 영국과 프랑스에서처럼 국가 차원의 시민의회 방식도 가능할 것이다. ‘기본소득’,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화두가 아니었던 이 단어가 정치권의 대세로 자리 잡았다. 경제적인 면에서 ‘기본소득’이라면 역자는 정치적인 면에서 ‘기본권력’을 제안한다. 단순히 투표권이 아니라 다양한 시민의회를 통해 자기통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본권력’이다.

『추첨 민주주의』 옮긴이의 글처럼 “우리는 추첨 민주주의에 쏟아지는 조롱과 냉소도 지금은 상식이 된 보통 선거권과 같은 운명을 걷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처럼 추첨 민주주의를 통한 정치 참여가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확신한다.

역자는 추첨 민주주의에서 나아가 최근에는 ‘시민의회’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추첨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주는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하는 것과 함께, 추첨은 하나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시민의회’가 적절하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역자가 정의하는 ‘시민의회’의 3대 요소는 바로 구성은 추첨, 작동은 숙의, 그리고 기능은 일정 권한 부여이다. 추첨으로 구성하고 일정 기간 숙의할 수 있도록 하고, 그렇게 내린 결정이 최종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국민이나 주민투표의 대상이 되거나 국회나 지방의회에서 찬반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권한이 부여되어야 진정한 ‘시민의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우리 사회의 이러한 시민의회 방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지문

연세대학교 연구교수로 추첨민주주의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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