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판 미소지니’의 무속신화 -〈광청아기 이야기〉를 읽고

이 글은, 한국의 옛 이야기 광청아기 이야기를 읽으며, 그 속에서 탈성장·저성장 시대가 요청하는 대안적 공동체를 지탱하여줄 수 있는 행동방식·가치·규범을 찾아보려 한 작업의 결과 내지는 잔여물이다. 광청아기 이야기에서 자기객관화를 주저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 제주도 출륙금지령이 빚어낸 비극

제주도 동김녕 마을 송씨 집안에는 그 집안이 모시는 무속적 조상인 광청아기의 내력을 풀이하는 서사무가인 ‘광청애기본풀이’가 전해 내려왔다고 한다.1 이 무가는 많은 연구를 거쳐 ‘광청아기’라는 이야기가 되어, 지금은 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한국 옛이야기에 들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제주도 동김녕 마을 송씨 집안의 송동지 영감은 서울로 진상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광청고을 허정승 댁에 하룻밤 유숙하게 된다. 밤이 깊어도 잠이 오지 않아 마당에 나섰다가, 허정승의 딸 광청아기와 하룻밤을 보낸다. 다시 진상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허정승 댁에 들러 보니, 광청아기의 배가 불러 있었다. 제주와 육지 사람들의 왕래가 금지되던 때인지라, 송동지 영감은 광청아기를 놓아둔 채 홀로 몰래 빠져나온다. 광청아기는 송동지 영감을 찾아 제주로 가는 배가 떠나는 영암까지 따라온다. 그러나 발판을 디디고 배에 오르다가 사공이 발판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그만 물에 빠져 죽고 만다. 제주로 돌아오던 송동지는 뇌리에 자꾸 물에 빠져 죽은 아기씨 모습이 언뜻언뜻 스쳐 지나가 이상하게 여긴다. 동김녕에 도착하자 송동지를 기다리던 딸이 별안간 머리를 풀어헤치고 부모도 몰라본 채 물에 뛰어들려 하였다. 송동지 영감이 딸을 붙잡고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딸이 “나는 광청고을 광청아기 궁녀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광청아기의 혼령이 자기 딸에게 내린 것을 알게 된 송동지는 광청아기의 원혼을 풀어 주려고 신의성방(제주도 무당)을 부른다. 신의성방은 용왕국에 빠진 광청아기의 혼을 건져 올린다. 그리고 송동지 영감의 셋째 아들을 광청아기의 양자로 삼아 그 한 맺힌 마음을 풀어 주는 굿을 행한다. 그 후 송동지 영감 집은 삽시에 거부가 되고 셋째 아들은 무과에 급제하니, 송씨 집안에서는 광청아기를 일월조상으로 위하였다.”2

조선시대 특히 조선 후기에는 ‘출륙금지령’이라는 것이 있어 제주와 육지의 왕래가 자유롭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야기 속 송동지가, 자기는 공무로 제주와 육지 사이를 오가면서도, 광청아기를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로써 조금 설명된다.

한편, 10세기경에 편찬되었다는 《송고승전(宋高僧傳)》에는 중 의상(義湘)을 사모한 선묘(善妙)라는 여인이 바다에 몸을 던져 용(龍)으로 변하여 중국에서 신라로 혼자 돌아가는 의상의 뱃길을 지켰다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게다가, 경북 영주 부석사에 부석(浮石)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선묘 용이 변화했던 바위라고 전하기도 하고 해서, 선묘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한국에서 꽤 널리 알려져 있던 이야기이다. 그래서인지 선묘 이야기가 광청아기 이야기의 원형이라고 보는 연구자들이 많은 듯하다. 이러한 연구 경향 때문인지, “외지의 여인이 남성을 따라 들어와 죽음을 매개로 남성을 수호하는 영적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기본 서사라고 설명한 연구도 있었다.3 이 이야기에 대하여, “원혼을 위하면 도리어 수호신이 되어 준다4”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 이야기에 대하여, “한국인의 조상숭배 관념이 반드시 혈연적 유대 관념에 의해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혈연성이 없다 하더라도 조상신으로 관념될 수 있음을 알게 해준다”5라는 평가도 있다.

조상 아닌 조상신

김헌선은 위에서 언급한 설명과 평가들을 더 상세하게 보완했다.6

김헌선은 이 이야기를 육지와 제주도 간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던 시기에 두 지역의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소통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이라고 보았다. 김헌선은 이 이야기가 한 집안이 내세우기 부끄러운 면모를 종교 의례를 통하여 공개함으로써 그것을 역사화한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 이야기와 유사한 조상 이야기들이 여럿 전하는 것을 보면, 제주 역사 속에 유사한 경우가 꽤 있었던 듯하다.7

김헌선은 앞서 언급한 의상과 선묘 이야기와 이 이야기를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남성 주인공은 외진 곳 또는 특정한 문명의 주변부에 속하는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반면에 여성 주인공은 문명의 중심부이거나 육지부에 속하는 인물이다. 서로 거리가 멀고 바다를 무대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가까이 할 수 없는 관계이지만 연인 관계로 맺어지면서 깊은 교유를 하게 되는 공통점이 있다. 여성은 죽음에 이르거나 죽음에 이르게 된 사정이 있게 된다. 바다를 통해 되돌아오는 남성 주인공에게 일정한 도움을 주는 존재로 부활하는 특성도 있다. 여성의 죽음과 변신이 바다 경로를 이동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점도 역시 남다른 사연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이 남성을 도와서 남성의 입신양명에 일조하는 것의 결말 역시 긴요한 특징이다. …… 뚜렷한 서사적 공통점은 여성이 자신을 희생하여 남성을 구하고, 용이나 관음보살로 변하는 등 용신신앙과 관음신앙을 공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또 여성이 용이나 뱀으로 변화할 때 매개가 되는 것이 바다에 버려진 상자라는 모티브를 핵심적인 내용으로 삼고 있다.”8

무속신앙에서 죽은 이의 옷을 상자에 담아두고 조상으로 섬기는 관습이 있으면 이를 ‘말명상자’라고 한다.
사진 출처 : micheile henderson

이 글을 시작하면서 제시하였던 이 이야기의 요약과는 달리, 광청아기가 송동지를 뒤늦게 찾아나서는 모습을 “아기씨가 흰비단 홑저고리에 대홍대단 홑단치마를 둘러 입고 대바구니를 옆에 차고, 영암 덕진다리 베진고달또로 내려왔다”9는 내용이 원본에 들어있다고 하면서 이 내용을 강조하는 설명10도 있는데, 이는 무속신앙에서 죽은 이의 옷을 상자에 담아두고 조상으로 섬기는 관습, 그리고 상자에 담겨 버림을 받는 주인공이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신격으로 좌정하게 된다는, 널리 퍼져있는 신화소에 관하여 이미 알고 있는 연구자가 할 수 있었던 설명이며, 바로 위 인용문 속의 대바구니는 곧 ‘바다에 버려진 상자’라고 볼 수 있겠다.

김헌선은 이를 ‘말명상자’라고 한다. 대체로 말명이 조상신을 뜻하니 말명상자는 조상신을 모신[태운] 상자가 되겠다. 송동지와 광청아기의 교제는 조상신이 말명상자에 담겨 어딘가를 떠돌게 되는 과정의 첫 단추인 셈이다. 교제는 제주 기혼남이 가족[자기의 아이와 아이를 가진 여자]의 살인자가 되게 하였고, 광양 미혼녀가 피살자가 되어 말명상자 상태로 바다에 버려졌다가 살인자 집안의 조상신이 되는 과정의 첫 단추인 셈이다. 김헌선은 ‘여성의 애정을 해소’하는 것에서 출발한 이 교제가 원한(怨恨)을 쌓아갔다고 본 듯하다. 쌓인 원한의 힘은 곧 한국 무교 신격이 가진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김헌선은 “광청아기가 송동지를 따라나서면서 자기 몸에 맞게 옷을 만들어서 옷감을 넣은 상자가 원본에 있었다”고 하면서, “이 상자는 선묘가 마련한 의상의 법복을 담은 옷상자와 같다”고 하였다. 그는 이것을 죽음 암시로 보았으며 옷상자를 말명상자로 보았다. 그는 무속신앙에 죽은 이의 옷을 상자에 담아두고 조상으로 섬기는 관습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나아가 그는 상자에 담겨 버림을 받는 존재가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신격으로 좌정하게 되는 이야기가 이미 널리 퍼져있었음도 상기시킨다.

김헌선에 의하면, 송동지 집안과 혈연을 맺을 수 없게 된 광청아기의 원혼을 태운 말명상자는 이동하여 새로운 곳에 가서 자리하고 이 말명상자를 맞이하는 쪽에서는 일련의 사단을 겪는다. 이질적인 신앙이 신이한 힘을 드러낸 것이다. 송동지 영감의 막내딸이 겪는 고난은 이러한 말명상자의 신앙적 영험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김헌선은 송동지 집안이 광청아기의 원혼을 달래고 조상신으로 받드는 과정을 ‘말명상자를 매개로 하는 신앙적 안정화 작업’이라고 한다. 말명상자로 담겨온 조상이 혈족적으로 깊은 관련이 없다고 하더라도 조상으로 자리하게 되면서 신앙적 대상이 되도록 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김헌선은 이 이야기가 한 집안이 내세우기 부끄러운 면모를 종교 의례를 통하여 공개함으로써 그것을 역사화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는데, 송동지 집안이 삽시간에 거부가 되었다고 하면서 그것이 이 새로운 조상을 섬긴 것과 관련된다고 한 원본의 내용은 부끄러움의 역사화가 욕망과 연루되는 방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겠다.

자기객관화

김헌선의 설명을 보면서, 광청아기를 손말명과 비교하지 않은 까닭이 궁금했다. 손말명은 한반도의 전설에서 나타나는 처녀귀신(處女鬼神)이며, 손각시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한이 되어 악귀로 화하여 주로 자기 또래의 혼기에 차 있는 처녀에게 붙어 괴롭히고 해를 입힌다. 특히 왕신은 집안을 망치기까지 하여 특별히 가신으로 모시기도 한다.11 이걸 보면 광청아기는 분명 처녀귀신이다. 이런 성명에 비하면 김헌선의 설명은 지나치게 복잡해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설명이 복잡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광청아기는, 출륙금지령이 아직 삼엄하였던 조선 후기에, 제주 기혼남과 광양12 미혼녀가 사귀어서 일어났던 일을 묘사한 것으로 정리하여 볼 수 있다. 원본에서나 요약본에서나 이들은 각각 뭐라도 되는 사람들인 양 묘사되어 있지만, 둘 다 한양 사람은 아니다. 한편, 한양의 시선에 따르면 광양은 유배지로 쓸 만할 정도로 오지였지만, 제주의 시선에 따르면 착취자들의 본진인 육지임이 분명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제주남과 광양녀 사이의 정치는 조선 후기 그냥 남녀 사이의 정치와 같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한편, 출륙금지령이 조건으로 주어진 상태에서, 제주 기혼남과 그와 성교하여 임신한 광양 미혼녀 사이의 정치는 더 복잡한 계산을 요하였을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출륙금지령의 공포에 휩싸여 살아야 하였던 제주남들이 ‘눈물을 머금고’ 살해 유기한 육지녀의 귀신을 살해 주동자의 집안의 수호자로 섬기기로 하는 정치 과정은 더욱더 복잡미묘하였을 듯하다. 이런 사정에, 송씨 집안[家內]을 위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家外] 여성의 희생과 신격화[조상신화]와 부끄러움을 역사화하려는 송씨 집안 사람들의 욕망이 겹쳐있으니, 광청아기는 그저 자기를 해친 자를 해꼬지하는 데 집중한다는 손각시만으로 보기는 어려울 듯 하였다. 이런 검토의 과정은 광청아기 이야기가 조밀한 정치적 갈등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김헌선의 설명을 보면서, 광청아기가 조상신이 된 것을 화물숭배와 유사한 것으로 볼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화물숭배[cargo cult]는 죽은 조상들이 배나 비행기에 특별한 화물을 가지고 실어 올 것이라고 믿으면서 기다리는 풍습이다. 뉴기니 동쪽 지역과 피지 사이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이 제2차 세계 대전 때 미군·일본군의 비행기가 화물을 싣고 오는 것을 목격한 뒤 이런 풍습이 고착화되었다고 한다.13

중앙의 착취에 질려있었다던 제주 사람들에게도 중앙 등 외부로부터 재화와 문화를 들여와야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므로, 바깥의 존재 특히 사람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존재 자체에 공포를 느끼거나 경멸감을 강하게 가지는 현상이 발생하였을 수 있다.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여자가 성교를 원했고, 임신과 출산을 하게 되더라도 모녀와 함께 제주도에 돌아갈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남자는 여자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그리고 여자가 임신을 하자 뱃사람과 공모하여 여자를 죽이면서도 마치 방관 만 하는듯한 태도를 취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여자를 신격화하였다. 이러한 행동 전반을 화물숭배의 경우와 비교하여보면 이해에 도움이 될 듯하다. 화물의 주인인 미국이나 일본이 커다란 힘을 가졌다면, 원한을 품은 광청아기의 귀신에게는, 원한이 가지는 힘과 별도로, 육지여자이기 때문에 가지는 힘이 있었을 것이고, 마치 화물숭배에 등장하는 섬사람들이 화물을 숭배하듯, 제주 사람들은 육지여자 광청아기를 조상신으로 떠받들기까지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원한의 힘만을 강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김헌선의 설명도, 전반적으로 이야기가 가진 긍정적이면서 생산적인 면을 찾아내고자하는 경향성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광청아기 이야기에 대한 설명에서 어린이에게 줄 수 있는 교훈이나 어른들에게 권할 바람직한 행동방침은 확연히 제시하지 않았다.

〈광청아기 이야기〉는 출륙금지령의 공포에 휩싸여 살아야 하였던 제주남들이 ‘눈물을 머금고’ 살해 유기한 육지녀의 이야기로서 조선판 ‘미소지니’의 무속신화이다.
사진출처 : luizclas

만약 누군가가 이 이야기 속 등장인물 즉 송동지나 광청아기 가운데 하나를 모범으로 하여 따라 배우며 정치를 한다면, 그 정치는 퇴행적인 것이 될 듯하다. 그런 정치를 지금 여기에서 꺼내들 수나 있겠냐고 힐난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 만난 송동지와 광청아기의 행태, 광청아기의 원혼을 집안의 수호신으로 만든 송씨 집안 사람들이 가졌음직한 마음가짐 등을 지금도 별 자기성찰 없이 애호하고 답습하는 이들이 없다고 단언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인 듯하다. 김헌선이 광청아기 이야기에서 교훈이나 행동방침을 찾는 모습을 강하게 보이지 않은 것은 그가 그만큼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결국 지금 여기에서 광청아기 이야기는, 반면교사로 작동할 때 더 유익할 수 있을 듯 싶었다. 지금 여기에서 사람들은 가속화하는 변화에 대처하여야 하는데, 기존의 규범으로부터 일탈한 것을 스스로 소화하지 못하다가 비명횡사하여 원귀가 된 광청아기나, 철저히 기존의 규범과 역학에 따르면서 광청아기를 죽게 내버려두고 뒤늦게 광청아기를 신격화한 송동지는 그런 변화에 대응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시사하지는 않는 것 같다. 광청아기의 신격화 과정도, 여성에게 사회적으로 형성된 여성성을 강요한 강력한 예 즉 사회적 후천적 여성성을 여성에게 강요하는 것[미소지니(misogyny)]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생각들과 더불어 떠오른 단어는 자기객관화였다. 자기객관화는 아직 사전에 등록되지 않은 말인 듯하다. 어떤 정치운동가는 이 말을 자기가 만들었다고 하며 즐겨 사용하고 있는데, 그때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볼 수 있을 듯하였다. “생각 속에서 자신을 객체 즉 대상의 위치에 놓아봄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자기가 바라는 자신 그리고 남들이 보는 자신 간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14 비록 아직 사전에 등록되지는 않았지만, 자기객관화는 쓸모있는 말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광청아기와 송동지의 시대는 자기객관화와는 다른 태도가 칭찬받던 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때는 관계 속에서 자기를 적절히 자리매김하는 것이 먼저 칭찬받았다. 그때는 일단 ‘자기’보다 관계가 중요했다. 그때, 비록 당대의 지배 집단이 중시한 것들이었지만, 부자(父子)·군신(君臣)·부부(夫婦)·장유(長幼)·붕우(朋友) 등의 관계는 꽤 많은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중요한 인간관계들로 인식되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인지 사람됨의 덕목으로 꼽히는 것들도 대개 이 관계들과 관련된 것들이었던 듯하다. 이야기 속에서 광청아기는 이들 관계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적극적으로 행동했고, 송동지는 이에 소극적으로 협조하였다. 이후 당대의 가치관이 가하는 압박을 이기지 못한 송동지는 광청아기의 피살을 방관하였고, 광청아기도 죽임을 당하기까지 당대의 가치관으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다가 살해 음모에 속절없이 당하였다.

광청아기가 죽은 후 송동지는 그를 송씨 집안의 조상신 반열에 올렸다. 그 일은 숨기고 싶은 부끄러움을 굿을 통해 드러내는 역사화의 과정이었다. 그 과정 덕에 광청아기의 사연은 무당이 부르는 노래가 되었고, 지금 여기에서 그 노래는 문자화를 거쳐 디지털 컨텐츠가 되었다. 역사화의 과정에 수반된 효과의 가치가 꽤 높았던 셈이다. 이에 비하면 광청아기가 이루어낸 것들의 가치는 더 높게 평가하여야 할 듯하다. 만약 광청아기가 원혼이 되어 송동지 딸의 몸에 들지 않았다면, 송동지가 위에 말한 역사화를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광청아기는 여자에게 정절을 강요한 관습의 압박, 그 관습이 결과적으로 그의 내면에 고이게 하였던 원(寃), 배신자에게 당한 죽음이 남긴 한(恨)을 자신의 신격화로 반전시킨 힘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광청아기에게도 자기객관화의 계기는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을 듯 싶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광청아기가 살았을 것으로 가상해볼 수 있는 시대인 조선 후기의 도의문화·정치문화가 부자·군신·부부·장유·붕우 등의 관계 그리고 그 각각과 관련하여 권장되는 성격[character] 혹은 역할[role] 혹은 덕목[virtue] 정도로 사람들의 윤리적·정치적 상상력의 범위를 한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기의 도의문화·정치문화 속에서 광청아기는 인륜적 관계 즉 가족관계와 관련하여 권장되는 역할에서 일탈하려다가 뜬금없이 죽음을 당했으면서도, 원혼이 되어 송동지 딸의 몸에 들어 살인자 송동지로 하여금 자신을 송동지 집안의 수호신으로 인정하도록 만든 셈인 것이다. 그런데, 파란만장해 보이기도 하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결국은 가족관계 기반 상상력의 한계 내에서 전개된 것 또한 사실이다.

지금 여기에서 사람들은, 실제로는 광청아기가 사로잡혀 있었던 관계와 비슷한 것 속에서 살지 못한다. 그런 관계는 이미 너무나 많이 변형되어 머지않아 명목만 남아있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지금 사람들이 이미 사라져버린 관계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사고의 관성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 듯하다. 추석 연휴에, 옛날처럼 성묘하고 차례를 지내는 것이 아니면서도, 제사음식을 조금씩 사서 먹어보는 것이 그런 관성의 가벼운 예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전세제도가 일반화되어 있어서 상당히 안정적인 주거생활을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전세가 빠르게 월세로 바뀌어가는 변화를 보며 충격과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반면에 성장과정에서 전세제도를 접하고 이해할 기회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부동산 가격의 상승만을 보며 성장하였기에 전세제도를 유지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잠재적 주택 투기자로 보는 등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자. 이때 양자에게 자기객관화는 모두 필요하다 하겠다. 전세제도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가진 사람들은 지금 부동산 시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빠른 변화 속에 자기의 아름다운 추억을 놓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그는 추억은 추억일 뿐 지금 전세제도는, 절대악은 아닐지라도, 상당히 심각한 경제적 문제의 불씨가 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전세제도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접할 경험을 할 필요가 없이 성장하다가 전세제도가 갭투기에 활용되는 것과 전세제도를 아름답게 추억하는 사람들이 평소에 선량해 보이던 노인들임을 알고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 있다면, 다소 번거롭겠지만 검색을 통하여 전세의 역사를 찾아 읽어볼만 할 것이다. 그러면 그는 단시간 안에 전세 추억자들이 심하게 역사지체현상을 겪고 있으며 그런 만큼 시장을 교란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사악한 자들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될 가능성이 상당히 큰 듯하다. 이렇게 하고나면 양자는 더 이상 이전처럼 서로를 싫어하지는 않게 될 듯하다. 이 예는 상당히 무거워서 바꾸기 쉽지 않은 사고관성들의 예이다.

그런데 위에 든 예는, 자본주의적 생산·소비관계의 한 단면을 둘러싼 오해와 갈등이 상호 자기객관화를 통하여 많이 완화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사례를 보면 자기객관화를 시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이고 그 효과는 대단히 희망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자기객관화조차 현실에서는 쉽게 되지 않는 듯하다. 이런 상황에 처한 오늘의 사람들이, 자기객관화가 광청아기도 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며, 지금 여기의 사람들도 대부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임을 알고 나면, 나쁜 의미에서지만 외로움은 덜하여질 것만 같다. 어쨌든, 광청아기 이야기 읽기는 훌륭한 가치나 행동방침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어주지는 않았지만, 자기객관화를 새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1. [네이버 지식백과] 광청애기본풀이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 편 / 집필: 정진희)

  2. [네이버 지식백과] 광청애기본풀이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 편 / 집필: 정진희), 광청아기(광청아기본풀이) (문화원형백과 새롭게 펼쳐지는 신화의 나라, 2004.,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에서 더 상세한 이야기를 볼 수 있다.

  3. [네이버 지식백과] 광청애기본풀이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 편 / 집필: 정진희)

  4. [네이버 지식백과] 광청아기본풀이 [─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집필: 현용준), 광청아기본풀이 (국어국문학자료사전)

  5. [네이버 지식백과] 광청애기본풀이 (한국민속신앙사전 무속신앙 편 / 집필: 이수자)

  6. [네이버 지식백과] 광청아기 (한국민속신앙사전 가정신앙 편 / 집필: 김헌선)

  7. [네이버 지식백과] 광청아기 (한국민속신앙사전 가정신앙 편 / 집필: 김헌선)

  8. [네이버 지식백과] 광청아기 (한국민속신앙사전 가정신앙 편 / 집필: 김헌선)

  9. [네이버 지식백과] 광청아기 (한국민속신앙사전 가정신앙 편 / 집필: 김헌선)

  10. [네이버 지식백과] 광청아기 (한국민속신앙사전 가정신앙 편 / 집필: 김헌선)

  11. [위키백과] ‘손말명’

  12. 광청이 곧 광양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도 지금처럼 광양이 제주와 연결되는 항구 가운데 하나였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이야기 속 광청을 광양이라고 추정하였다.

  13. [위키백과] ‘화물숭배’

  14. 인터넷을 뒤져보니, 국민대학교 교수 김옥희 씨의 저서 《인간관계론》에 보이는 자기객관화 설명이라는 것이 여기저기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자기객관화란 자신을 객체로 알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자기가 바라는 자신, 남들이 보는 자신 간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해 개방적이어서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를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해 개방적이어서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를 지니게 된다.” 자기객관화에 대한 설명을 이 경우 이외에는 찾을 수 없었다.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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