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소수자를 발견하고 긍정하다 – 『모랫말 아이들』 독후기

황석영은 소설집 『모랫말 아이들』에 자신의 어린 시절 풍경을 그려놓았다. 거기에는 풍경뿐만 아니라 소설의 화자 수남이 뜻하지 아니하게 발견하고 교감하는 여러 존재들이 등장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의미있을 수 있는 상상을 하게 하여 준다.

1945년에서 1953년 사이, 어린이 황석영이 겪은 모랫말이라는 소우주

『모랫말 아이들』1은 황석영이 글을 쓰고, 김세현이 그림을 그린 소설집이다. 이 소설집이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책으로 엮어져 나온 것은 2012년이지만, 2001년에 이미 황석영이 “자신의 유년 시절을 이야기해주려는 마음으로” 썼던 소설들을 책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소설들의 화자인 수남은 1945년에서 1953년 사이를 살았던 어린이 황석영이 투영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수남의 가족은 만주로부터 영등포로 이주하였는데, 아버지가 사업을 한다면서 세상을 떠도는 사이, 어머니는 수남과 그의 누나들로 이루어진 가족을 건사하면서, 안양천변 제방 밑에서 이른바 200채 주택으로 이주한 것이 보여주듯, 이주와 정착에 어느 정도 성공하다가, 무서운 전쟁을 겪기도 한다. 그 사이 수남은 초등학교 학생이 되었고, 열 명 이상의 사람들과 오래 기억되는 만남을 한 듯하다. 종이책 163면 즉 소설들이 모두 끝난 다음 면에는 풍경화가 하나 들어가 있는데, 거기에는 1949년 쯤 갈산 정상에서 용왕산 쪽을 바라보았다면 볼 수 있었을 듯한 풍경이 담겨져 있었다. 풍경 속에서는 안양천이 한강으로 흘러들고 있고, 안양천 제방 동쪽 바깥의 벌판에는 조선피혁이나 영등포 철도 공작창으로 보이는 건물이 도드라져 있으며, 커다란 공장이나 관공서는 아니지만 제법 번듯하여 보이는 집들이 늘어서 있는가 하면, 제방 안쪽 비만 조금 많이 오면 물에 쓸려갈 듯한 위치에도 집이 하나 있다. 소설들을 다 읽고 마지막에 보게 되는 이 풍경은 화자에게 의미있는 장소들을 꾸역꾸역 넣어서 만들어놓은 소우주 같았다.

한편 모랫말이라는 지명은 지금 영등포구 도영로 41에 있는 모랫말 어르신복지센터라는 이름에 그 흔적을 새겨놓았다. 그 센터와 신도림역 사이에 가로놓인 도림천에 넓고 고운 모래밭이 펼쳐져 있었다고 하고, 한양과 제물포를 오가는 사람들은 그 모래밭을 지나 도림천을 건넜다고 한다. 그렇지만 모랫말이 그곳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1945년 무렵에는 여의도 샛강의 모래밭이 신길역을 넘어 영등포여자고등학교 근처까지 꽤 넓게 펼쳐져 있었고, 안양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역이 영등포구의 상당 부분을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래밭이 꽤 넓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사정이 지금의 영등포구의 상당 부분을 모랫말이라고 부르게 하였던 듯하다.

슬픔의 자리매김

황석영 『모랫말 아이들』 (문학동네, 2013)

이 책에 대해 강의했던 동화작가 강영란 님이 소감을 물었을 때, 나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너무 슬펐어요. 아무도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어요.” 태금이 누나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소설 「잡초」의 주인공인 태금이 누나는 어느 먼 지역에서 영등포로 와서 수남 일가의 가정부가 되었다가, 노동운동을 하는 노동자의 연인이 되고 자신도 방직공장의 노동자가 되었다가, 1950년 초여름 부터 1951년 봄까지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흐르는 사이, 이전의 씩씩하고 사랑스럽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 영등포에 나타난 사람이다. 그가 어떤 삶을 꿈꾸었는지 소설에 또렷이 나와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소설 속의 그는 누구든 그를 보면 잘 살기를 응원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다시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그를 불쌍해 하면서도 ‘미친 년’이라고 하였다. 사람에게는 그를 도와줄 길이 보이지 않았던 듯하다. 늙고 병든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말년의 소일거리였던, 「친이 할머니」의 주인공 친이 할머니는 어떤 삶을 살아오다가 수남을 쥐 공급자로 만나게 되었을까? 그 할머니도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을 것 같았다. 태금이 누나와 친이 할머니뿐만 아니라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들뿐만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금씩은 이지러진 삶을 살다 가는 게 아닌가? 모두가 결국은 죽는 것처럼, 모든 삶이 조금씩은 이지러져 있기 마련임에도, 유독 소설집 하나를 읽고서 등장인물들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였다고 생각하며 슬퍼하는 것은, 한 사람으로서는 좀 모자라는 짓이며, 사회에 그런 정서를 퍼뜨리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살림살이들을 더 어렵게 만드는 나쁜 짓이라는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반성을 하다가 문득 대자대비라는 말이 떠올랐다. 대자대비(大慈大悲). 문자 그대로 풀자면 ‘가장 크게 사랑하는 마음과 가장 크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 정도 되겠다. 사랑과 불쌍히 여김이 같다는 뜻일까? 사전에 따르면, 자(慈, Metta)는 친구라는 말로 다른 중생들과의 동질성, 평등성을 가리키는 말이며, 비(悲, Karuna)는 동일한 감정, 우정을 의미한다고 한다.2 사전의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대자대비를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대하는 마음’이라 할 수도 있을 듯 하다. 불교에서는 대자대비라는 말 못지않게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말도 중히 쓰는데, 여기에서의 동체가 곧 한 몸을 뜻하니, 동체대비라는 말에 의거하여 대자대비라는 말의 뜻을 풀어도 결과는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대하는 마음’ 정도의 말풀이가 될 듯하다.

무한긍정의 시대 아니 무한긍정을 강요하는 시대에 슬픔을 퍼뜨리는 것은 불온한 짓일 듯하다. 더구나, ‘어른들을 위한’ 이라는 단서가 붙어있긴 하지만, 엄연히 동화인 이야기 속의 어린이의 정서 속에서 유독 슬픔에 집중하는 것은, 동화 읽기의 전형(典型)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슬픔없는 마음 또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앞서 보았듯, 함께 슬퍼함을 통해 비로소 타자와 공감할 수 있다는 듯이 주장하는 종교도 있다.

슬픔이 해롭기는 하다. 깊은 슬픔은 몸을 해쳐 사람을 더 빠르게 죽음에 이르게 한다. 누군가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은 아주 조금 슬프다. 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또한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을 느끼는 것은 무척 슬플 수 있다. 한편 모두가 어느 정도는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이지러진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은 어떠한가? 누군가는 이런 생각을 비겁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서 위안을 얻으며 “나만 그런 게 아니네”라고 마음 속으로 말하는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신경림의 시 「파장(罷場)」3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라고 한 첫 번째 줄이 떠올랐던 것이다. 두 번째 줄 이후에 보이는 ‘못난 놈’들의 행태는 누구도 따라하고 싶지 않을 듯하다. 그렇지만 그런 행태에 해당하는 행위를 평생 단 한 번도 ‘저지른’ 적이 없다고 단언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 또한 그런 행위를 한 적이 있노라고 감히 입 밖에 내지는 못할 듯하다.

무한긍정을 강요하는 시대 속에서, 나와 남의 불완전성을 발견하는 데에서 일어나는 슬픔을 자리매김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그런 와중에, 앞서 본 대자대비나 동체대비 같은 말들은 슬픔이 서로 공감하고 서로 동등하게 대할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소설집 속 소설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적어도 한 명의 독자의 마음 속에서, 서로 공감하고 서로 동등하게 대할 수 있는 힘이 되어줄 듯한 슬픔을 자아낸 듯하다.

모두가 소수자

그렇지만 그렇다고해서 그 등장인물들이 소설 속에서 내내 슬픔에 빠져있었던 것은 아닌 듯 싶다. 소설 속에서 수남이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중심에서는 멀어보이는 모랫말이라는 주변의 소우주에서조차, 끝내 중심에는 발을 들여볼 수 없을 듯한 사람들임에도, 나름의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첫 번째 소설 「꼼배 다리」에서 모랫말 사람들은 주인공 춘근의 부인의 죽음에 대하여 예의조차 차려주지 않았으나, 춘근은 모랫말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징검다리를 샛강에 만들어 놓고 마을을 떠났다. 오른쪽 팔목이 호미처럼 구부러져 있었기 때문에 모랫말 아이들은 춘근을 꼼배라고 불렀다. 어른들이 그리 부르는 것을 듣고 아이들도 그리 불렀을 것이겠지만, 그런 호칭은 모랫말 사람들이 춘근을 어떻게 대하였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징검다리는 무엇이었을까? 빌어먹기라도 할 수 있도록 눈감아 준 모랫말 사람들에 대해 지불한 밥값이었을까? 「꼼배 다리」를 읽고 나면 춘근이 징검다리를 놓은 이유를 좀 더 여러 갈래로 추정하여볼 수 있다.

춘근은 장애인이다. 그의 생업은 ‘빌어먹는 일’이라고 할만한 것이었다. 「도깨비 사냥」에 등장하는 화부는 술에 취한 채 시신을 태우는 일을 한다. 여기저기에서 발견되는 시신을 관청에 가져다주면 일정한 보상을 해 주는 사업이 휴전 후에도 지속되었다고 하니, 화부가 태운 시신들은 아마도 그런 시신들이었을 듯하고, 나서서 그런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깊은 밤 그의 작업장에서 도깨비 사냥이라는 ‘모험’을 하러 온 아이들을 맞딱드렸을 때, 무척 성가셨을 것임에도, 그가 보인 반응은 그리 고압적이거나 험악하지 않았다. “다 안다, 알어. 세상 일에 공짜가 어딨어. 자, 이놈들아 어서들 가지 못해?” 하면서 아이들을 돌려보냈지만, 그는 아이들과의 짧은 대화에 전쟁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는 이야기를 한 조각 담아주었다. 「삼봉이 아저씨」에 등장하는 삼봉이 아저씨는 “아이들의 말대로” 한쪽 눈이 없는 깨꾸였으며, 상여꾸미는 일을 하였다. 그는, 수남이 상둣도가에 틈입(闖入)한 것을 알았으면서도, 수남이 놀라지 않도록 배려해주고 대화 상대가 되어준다.

춘근과 삼봉 그리고 「지붕 위의 전투」와 「낮선 사람」에 등장하는 상이 군인들은 장애인이다. 「금단추」의 귀남은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서양 사람인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게 하여주는 외모의 어린이다. 「내 애인」의 영화는 어머니가 미군을 상대로 하는 매매춘에 종사하고 있다. 그들이 원치 않았음에도, 귀남과 영화는 별난 사람이 되어있는 존재들이었다. 「친이 할머니」 속 친이 할머니는 중국인이고, 「남매」 속의 남매에게는 부모가 없으며, 「잡초」의 태금이 누나는 고향을 떠나 홀로 서야 했던 많은 사람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미친 년’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공통점은 소수자라 할 수 있다.

수남은 그들이 소수자임을 발견하고 드러내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각각과 교감하는 모습일 보여준다. 작가 황석영은 어린이 황석영이 전란을 헤치고 살아나온 과정을 자녀들에게 보여주려고 이 소설집을 썼을 수도 있다. 작가는 자신이 통일운동을 하다가 해외를 떠돌고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그에 따른 어려움을 겪었을 자녀들에게 자신의 성장과정을 보여주고 싶어서 이 소설들을 썼을런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한 어린이가 소수자들을 발견하고 그들과 교감하는 모습을 보는 독자도 있을 것만 같다.

작가 황석영은 어린이 황석영이 전란을 헤치고 살아나온 과정을 자녀들에게 보여주려고 이 소설집을 썼을 수도 있다.
사진출처 : Aman Shrivastava

이에 더하여, 어떤 독자는 소설 속 소수자들의 모습에서 소수자들의 삶이 빌어먹는 일로 지속 가능했다고 이해할 것만 같다. 화부와 삼봉은 세상 사람 대부분이 피하는 일을 하건만, 그들이 얻는 것은 세상이 떨어뜨려주는 부스러기에 불과해 보인다. 춘근은 모랫말 사람들이 눈감아준 덕에 빌어먹고 살 수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최소한의 존엄마저 허락하지 않은 듯하다. 어린이들 또한 어른들처럼 춘근을 대하였다. 춘근이 놓고 떠나 징검다리를 보았을 때, 인간의 예의를 지킨 쪽은 오히려 춘근이었다는 생각을 한 독자도 있을 것이다. 모든 등장인물 심지어 친이와 친이 할머니조차도 무언의 교감을 통해서라도 수남의 마음 속에 지우고 싶지 않은 기억을 남겼다고 보는 독자도 있을 듯하다.

그런데, 사람들 각각은 모두 나름대로 소수자 아닌가? 너무나도 건강한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장애인이 되는 것은 희귀한 일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 고아가 되며, 가족 없이 홀몸이 되는 경우도 많다. ‘정상가족’을 극도로 존중했던 시대에도 환과고독(鰥寡孤獨) 즉 홀아비[鰥]· 과부[寡]·고아[孤]·독신자[獨]들의 삶을 보살피려 하였고 그 이전에 그들을 소수자로 분류하였다. 그러다가, 모두를 노동자로 동원하여야 하는 사회로 접어들면서, 소수자들에 대한 배려가 옛 풍습이 되어갔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러한 추정이 맞다면, 소설 속 수남이 미약하나마 소수자들과 교감한 것은 세계가 그런 방향 즉 소수자들과 교감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것을 미리 알리는 조짐 같은 것으로 볼 수도 있을 듯했다.

한편, 빌어먹는 일은 소수자들의 삶만을 지속 가능하게 하여주는 것일까? 사람들 모두는 서로 빌어먹으며 삶을 지속하는 것이 아닐까? 이는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하고 정밀한 기계 같은 세계 속에 사는 사람에게는 가혹한 질문일 수 있으므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재촉할만한 것이 아닐 수 있다.

20세기 중엽, 어린이 황석영 혹은 소설 속의 수남이 또래의 벗들과 헤집고 다녔던 모랫말에, 21세기 초, 강 건너 홍대로부터 2호선 전철을 타고 몇몇 예술가들이 흘러들어왔다. 그때 그들은 작은 공장들 사이 버려지다시피 한 공간들을 각자 자기만의 장소로 바꾸면서 함께 하였다고 한다. 그때 예술가들은, 서로에게서 자기 같은 모습을 보면서, 자기가 유독 이상한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아서 마음 편해 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만든 장소의 환금성(換金性)이 치솟으면서 그 마음 편함도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던 듯하지만, 짧게나마 그 마음 편함은 지속되었을 듯하다. 그런 편안함을 느꼈을 예술가들을 생각하면서, 앞서 인용하였던 신경림의 시 「파장(罷場)」의 첫째 줄에 나오는 ‘못난 놈들’ 그리고 춘근과 화부와 삼봉 등등 소설 속 주인공들의 빌어먹는 삶을 동시에 연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 빌어먹는 삶은 타자의 선택에 나의 안위와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삶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삶은 누구도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의 삶에 그런 면이 조금씩은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의문을 이 소설집 『모랫말 아이들』은 몇몇 독자들에게라도 던져주었을 듯하다.


  1. 황석영 (글), 김세현 (그림), 『모랫말 아이들』, 문학동네, 2012.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자대비’ (집필 : 정성준)

  3. 1970년에 발간된 『창작과 비평』 18호에 실린 시라고 한다.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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