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은 전환의 시간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

자본중심주의가 초래한 지금의 위기 상황을 되짚어 보면, 지역사회의 관계망이 해체된 자리에 물신주의가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기 앞에서 문명의 전환을 꾀해야 하고, 그 전환 운동은 지역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지역은 지금 위기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 모든 통과의 시간은 파이프라인과 같이 A에서 B까지의 직선이 아니라 장애물을 만나 쓰러지고 다시 돌아서 지도를 그리듯 나가는 나선형의 모습이다. 그래서 통과는 도착지가 아니라 과정이면서, 혼돈의 시대에서는 전환을 향한 파국적 돌파의 동사(動詞)가 되어야 한다.

급속한 고령화, 축소 사회로 향하는 저출산, 돌봄망 해체, 자발적 경쟁과 고립, 풍요 속 불평등, 되먹임되는 기후재난의 디스토피아를 향한 파편화된 일상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탈출구가 될 지역을 앞에 놓고 두 개의 질문을 해야 한다. “다가온 재난 상황에서 지역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역에서의 삶이란 무엇인가?” 그런 다음 과거에서 미래를 향한 지역 운동의 고백(告白)이 필요하다. ‘오래된 미래’의 지혜처럼 과거는 미래를 안내하는 지도고 돌아봄은 도약의 디딤돌이기 때문이다. 돌아보는 것과 내다보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림1.

지나온 시공간으로 지역과 근대사회를 돌아보면 지금 겪고 있는 문명사적 위기는 지역의 해체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근대 시민의 특징이 된 고립, 경쟁, 소진은 근대자본주의 형성과 함께 대도시·대공장으로 지역의 노동력과 자원이 종속되고 삶의 가치가 물질로 집중되고 기대어 사는 돌봄관계가 해체되면서부터다. 기후위기와 사회위기가 되먹임되는 지금과 같은 재난적 상황은 한 생명으로 지역에서 살아가는 인간-인간/인간-비인간의 순환관계가 파편화되고 지역의 생태계가 성장을 위한 도구가 된 데서 비롯된다. [그림1] 이때부터 시민들은 물질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신(神)이라는 신념으로 무장한 채 무한경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깊은 최면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그림 2

‘모든 생명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지구(우주)의 역사가 보여주듯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해도, 이 생명 살림의 깨달음은 굳어진 신념과 깊은 최면상태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위기와 대안을 설득하기 어렵다. 대신에 물질과 마음이, 나와 우리가, 인간과 자연이, 시장과 호혜가, 서울과 지방이 기우뚱한 균형으로 더불어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지역에서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역사의 무대에서 역할을 끝낸 자본주의중심사회를 횡단하고 도약하는 전환의 삶의 경험은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중심사회로 해체된 지역을 회복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지역은 모든 생명은 반복적으로 순환되고, 복잡하게 얽힌 상태로 중복되고 교차 되면서, 역동적으로 환경에 의해 생성되고, 보상 없이 호혜적으로 증여된다는 근본적인 삶의 가치를 품고 있다. [그림2] 개헌, 정치, 종교, 생태경제, 생태철학, 생명사상, 미래학 등 모든 전환 운동이 지역을 강조한다. 차이가 있지만 지역을 관통한다.

앞에 했던 두 가지 질문은 향수를 쫓는 복원이 아니라 재구성을 염원한다. 자연, 사회, 기술환경으로 얽혀진 문화에 영향을 받는 지역의 재구성은 구조화된 사회에서 탈주하는 비연속적인 재발명이다. 비연속적이지만 지역이 가진 변하지 않는 근본적인 가치를 지향하면서 라투르가 말한 행위자들로 구성돼서 구조화되고 다시 재구성되는 차이 나는 반복의 과정이다. [그림3] 그래서 우리는 반복되는 재구성 고리 안에서 지역을 돌아보고 내다봐야 한다.

그림 3

지역운동과 마을공동체운동을 돌아보고 내다보고

공동체(共同體) 지역, 공생체(共生體) 지역

몇년 전 양평군 공동체정책수립을 위한 FGI에서 공동체에 대한 두 개의 정의를 발견했다. 하나는 개인에 앞서는 전일적 공동체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으로부터 연결된 다원적 성격을 가진 일원적 공동체였다. 기성세대와 청년세대의 차이였다. 기성세대의 공동체는 자라면서 학습한 정보와 경험에서 공동체는 언제나 개인보다 우선하고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개인은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근대과학으로부터의 분절적 사고다. 청년세대의 공동체는 한 생명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다양한 개인으로부터 구성되는 사회는 다시 개인의 욕망에 영향을 주는 부즉불리(不卽不離)의 관계를 갖는다. 누군가는 ‘사회적 성화’라고 했던 관계다. 달라진 환경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분리된 사고로는 각기 다른 경험으로 형성된 개인들의 욕망을 사회화할 수 없을뿐더러 공동체의 불편함을 일으킨다. 그래서 공동체(共同體)와 다르게 차이를 인정하면서 서로의 이익을 주며 더불어 살아가는 공생체(共生體)가 제안된다.

트렌드 조사 및 예측기관인 WSGN은 이제 사람들은 ‘의도대로 살고, 역동적으로 일하고, 회복을 위해 쉬고, 몰입적으로 놀자’를 요구한다고 했다. 개인의 욕망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욕망을 거세하고는 주체와 당사자성이 회복되기 어렵다. 지역의 비전과 문제,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서, 전환을 위해서 개체로 구성된 커뮤니티(강만길 교수의 포용적 개인주의와 리 베이니와 배리윌먼의 새로운 사회운영시스템 네트워크 개인주의)라는 달라진 공생체의 특징을 고려해야 한다.

()의 활동과 양()의 활동의 조화

지역사업 특히 행정과의 협업이나 공모사업을 돌아보면 성과만을 위해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숫자로 평가되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결과 중심 활동이 대다수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아니면 인정되지 않았고 의미를 두지 않으려 했다. 게다가 짧은 사업 기간을 따라가는 속도는 부정하고 싶어도 효율화의 기제를 작동시켰다. 성과는 필요하다. 하지만 양의 활동 성과를 지지해 주는 음의 활동과 조화되어야 제대로 작동된다. 음의 활동은 보이지 않는 숨겨진 활동이다. 음의 활동인 경청하고 성찰하며 포용하고 신뢰하는 태도가 없다면 양의 활동은 왜곡되고 흩어질 수밖에 없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 저자 슈머허 정신으로 설립된 ‘슈마허 칼리지’의 숨겨진 커리큘럼처럼 공식적인 활동과 함께 비공식적인 활동이 지역에 있어야 한다. 공식적인 교육, 회의, 업무 등과 다른 비공식적인 숨겨진 활동으로 나와 서로를 감각 할 때 비로써 지역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서로의 삶에 관심과 존중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이럴 때만 서로를 신뢰하고 안심할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된다.

뿌리가 되는 음의 활동은 또한 영성의 시간이기도 하다. 순례, 명상, 몸살림, 농사짓기 등은 영성을 위해 닫힌 시간이고 인문학습과 대화는 영성을 위한 열린 시간이다. 연찬과 인문학습을 지켜온 강화진 강산마을교육공동체 10년은 ‘음의 활동‘이 무엇인지 의미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된다.

필요조건인 자치와 충분조건인 지원

주민이 제안하고 결정하고 실행하는 자치는 지역을 있게 하는 필요조건이다. 여기서 행정의 지원은 지역 자치의 충분조건이다. 자치가 되지 않는 지원은 성립될 수 없다. 하지만 지역 현실은 거꾸로 지원이 있어야 사업을 하는 식으로 어느 순간 지원이 필요조건이 되었다. “어떻게 잘못된 명제가 성립되었을까?” 지역에 유령처럼 떠다니는 주민을 대상화하고 계몽하려 하는 전문가주의, 경험주의, 모델주의 등이 주요 원인이다. 전문가들은 자신의 주관적 경험이나 시공간이 다른 한 번의 성공모델을 가지고 지역과 주민을 재단한다. 이런 경우 성공모델의 틀에 지역을 맞춰 지역문화와 주민들이 재단된다. 지역문화로 형성된 고유성을 구습으로 밀어내고 최신 유행에 맞춰 지역을 일반화시킨다.

전문가주의, 경험주의, 모델주의에서 벗어나 주민자치의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기결정과 책임으로 실험해볼 수 있는 기회와 관용이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스튜어트십(Stewardship)을 발휘해서 주민들 스스로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충실한 집사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럴 때 충분조건이 되는 지원도 자기 빛을 발할 수 있다.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 매어 쓸 수는 없다. 지역 활동에서 주민의 당사자성과 주체성을 회복시키지 못하는 지원은 독이 된다.

다가온 전환의 실현지가 될 지역의 재발명

경제·문화·생활양식의 재구성

문명을 바꾼 몇 번의 전환과정을 살펴볼 때 전환은 기후변화 등의 무위(無爲)의 영향과 함께 인위(人爲: 기술과 제도)로 새로운 경제, 문화, 생활양식을 재구성할 때 탄생 되었다. 몇 세대에 걸쳐 구조화된 경제, 문화, 생활양식이 재구성되는 순간은 거대한 사건으로 등장할 것 같지만 오히려 동심원을 일으킬 수 있는 단순한 사건이 촉발제가 될 수 있다. 그러려면 힘주어 “문명 전환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기보다는 부드럽게 “당신은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질문하는 게 낫다. 그리고 고립, 경쟁, 불안이 되풀이되는 삶을 탈주하는 길을 안내하고 온몸으로 감각할 수 있는 경험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지역은 자본주의중심사회에서 전환된 경제, 문화, 생활양식을 경험할 수 있는 실험지이면서 실현지다. 지역의 실험이 자본주의중심사회로 소모된 삶을 위로하고 보상할 때 지역에서 전국으로 불붙듯 번져나가 전환의 강력한 추진체가 될 수 있다.

자본주의중심경제의 보완제가 아닌 대체재로서 생활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 분배, 소비하는 사회적경제(협동조합)는 지역순환경제와 만나 지역에서 계획되고 확충되어야 한다. “문화 또는 문명은 지식과 신앙, 예술, 도덕, 관습 및 인간이 사회구성원으로서 습득한 다른 모든 능력과 습관을 포함하는 복합적 총체”라고 한 인류학자 타일러(E.B Tylor) 말처럼 시공간으로 새겨진 삶의 무늬가 되는 문화는 자기다움의 고유성을 지닌 지역을 무대로 ‘정신과 영혼을’, ‘몸과 마음’을 계발하고 공유해야 한다. 구매와 소비로 훼손된 물질로 기울어진 삶은 자연 속에서 정신과 물질이 조화된 풍요로운 지역 생활로 바뀌어야 한다. 영성의 시간으로 소개한 순례, 명상, 인문학습, 대화 등의 숨겨진 활동이 경제·문화·생활양식의 재구성을 촉진한다. 전환운동에 지역 생협, 돌봄, 의료, 교육, 예술, 취향 등의 협동조합과 커뮤니티가 필요하고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는 제3의 공간과 이벤트. 축제, 프리마켓 등의 제3의 시간이 필요하다.

지역은 장소애(Sense of Place)와 장소감(Topophilia)으로 연결되어 있고 삶의 밀도가 높아 변화의 잠재성과 현실성이 높다. 작은 사건들이 마주치고 재배치되면서 동시에 전환되기가 이루어질 수 있는 강렬한 역동성이 있다.

예술의 상상력

활력을 잃어버린 지역에서 예술가들은 지역의 고유성에 꿈꾸는 세계를 융합해서 지역을 재창조할 수 있다. 사진 출처 : W W

활력을 잃어버린 지역에서 예술가들은 지역의 고유성에 꿈꾸는 세계를 융합해서 지역을 재창조할 수 있다. 예술가들은 아무렇지 않게 인구가 줄고, 고령화되고, 쇠락에 익숙한 지역을 매력적이고 활력이 살아나는 지역으로 재창조할 수 있다. “이래야만 한다!”는 단정적인 질서에 매이지 않고 평등하고 무차별적으로 경계를 허무는 초 맥락적 능력이 있다. 똑같은 것을 질색하며 충돌을 즐긴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발상으로 지역을 재창조해 나갈 수 있다.

경험하는 것처럼 모든 일은 계획만으로 명료하게 전개되지 않는다. 지역을 재활성화하는 일도 계획되지 않은 우연한 사건들로 시작된다. 예술은 어떤 맥락으로부터 생겨나는지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성공 뒤에 따라 붙는 ‘우연찮게’, ‘생각지도 못하게’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는 증거다. 예술의 다른 상상력이 가져온 우연한 사건이다. 지역에는 예술가가 필요하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인구 5천 명의 일본 시코쿠섬 도쿠시마현의 산촌마을 카미야마는 국내외 예술가를 초대하는 ‘아티스트 인 레즈던스(Artist in Residence)’로 25년째 지역 회복의 에너지를 만들고 있다. 1999년을 시작으로 매년 3명씩 초대된 예술가들이 2개월 동안 마을과 소통하며 만든 작품은 마을의 볼거리이기도 하지만 예술이 하는 일은 다른 곳에서 더 빛났다. ‘아티스트 인 레즈던스(Artist in Residence)’를 운영하는 비영리법인 그린밸리가 ‘카미야마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시에 지역의 새로운 비전인 푸드허브 프로젝트와 창업허브를 운영하는 것이나 대도시에 본사를 둔 위성사무실의 젊은 직원들과 다양한 관계 인구가 지역으로 들어오고, 카미야마 맞춤 스타트업 등으로 그만의 고유한 생태계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예술로 마을이 열리고 환대와 공명의 장(場)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눈치채야 한다. 다케우치 그린밸리 사무국장도 주저 없이 카미야마 진화의 주된 기반을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Artist in Residence)’로 소개한다. 이렇게 카미야마는 예술의 영향력으로 주거, 사람, 일, 순환구조, 안심할 수 있는 생활, 관계 만들기 6개 분야에서 전방위적인 프로젝트를 실험 중이다.

보이지 않는 예술은 경계 없이 확장되고 지역은 예술의 잠재력으로 경제와 창업, 관광, 축제, 교육, 돌봄 등 지역에 필요한 일들을 제대로 세울 수 있다. 보이지 않게 지역을 재창조하는 예술가를 지역으로 지역 초대하고 환대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재난의 되먹임과 지역돌봄의 되먹임

파국적 상황이 다가옴을 실감하면서 재난에 적응하는 것도, 재난을 돌파할 수 있는 대안도 지역돌봄에 있다.

1995년, 규모 7.2의 고베 대지진 당시 미처 정부가 대응하지 못한 상황에서 고베 생협조합원들이 먼저 물품을 공급하고 교통망이 끊긴 곳에는 자전거로 구호물자를 배달한 사례, 또 2005년에 사망 및 실종자만 2,500명을 넘긴 카트리나 태풍이 뉴올리언즈를 덮쳤을 때, 위기 시스템의 견고성을 자랑하는 미국조차 재난관리시스템이 작동되지 않아 재난 구호와 이후 회복을 사회연대와 시민성을 앞세운 지역주민 조직들이 이끈 사례. 코로나19 팬데믹에서 지역조직들이 부족한 마스크를 만들고 나눠준 사례. 이 밖에도 위급한 상황에서 빛을 발한 시민참여 사례들이 재난 시 지역에서 작동되는 돌봄 관계의 잠재성과 현실성을 증명한다.

그림 4

이제 일상이 된 기후재난은 되먹임 되어 증폭되며 연쇄 사슬처럼 온열질환, 폭염사, 정전 등 사회재난을 일으킨다. 기후재난 되먹임 과정을 지역돌봄 되먹임 과정으로 늦추거나 멈출 수 있다. [그림4] 지역에서의 제한 없고 경계 없는 포괄적 돌봄은 인간인간의 서로돌봄과 인간자연의 순환돌봄으로 기후재난의 방파제 역할을 한다. 재난 예방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고 폐허가 된 재난지역에서 다시 살아갈 힘이 될 수 있다.

건강한 거버넌스를 위한 시민력

수평적이고 참여적인 특징을 갖는 협치는 행정의 효율성과 시민 자치능력을 높이는 의미 있는 정책이다. 하지만 지역에서 협치의 현실은 예산 배분, 부족한 사업 경험, 짧은 사업 기간, 의사결정의 비효율성, 책임감 부재 등 행정과 주민 양자(兩者)의 문제가 꼬여서 수직적으로 행정에 종속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시민들의 자치능력을 높일 수 있는 교육과 경험 부족이기도 하지만 사실 지방정부와 시민단체 사이 힘의 불균형이 더 큰 문제다. 협치는 의미가 아니라 테이블에 앉은 양쪽의 힘의 균형에서 나온다. 지금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진 테이블을 바로잡을 힘은 지방정부가 가진 예산의 힘에 대응하는 주민단체의 영향력에 있다.

건강한 협치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주민들의 직접 참여를 보장하는 제도와 함께 내적으로 자치능력과 책임감을 키워야 한다. 능력과 책임감을 보여줘야 행정과 주민들의 신뢰와 지지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주민단체가 협치 테이블에서 발휘할 힘이 된다. 이러한 건강한 협치가 지역에 맞게 기후 위기, 인구 감소, 고령화 등에 실용적인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할 시민의회를 구성하거나 읍면동 자치제도로 주민들이 직접 행정계획을 세우고 실현할 수 있다.

발밑을 보자

계속되는 산불, 이상기온으로 생태계 혼란, 지역 간 격차, 이중 노동, 청년과 노년 빈곤, 높은 자살률 등 기후와 불평등의 악순환으로 생명의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출구 없는 디스토피아를 떠올릴 수도 있겠으나, 탄생의 역설은 죽임 앞에서 살아가려는 생명의 본능을 자극해 문명 전환을 촉발할 가능성을 불러올 수 있다. 다만 전환의 비등점에 다다른 시스템을 전환할 1℃ 사건이 필요하다. 1℃가 세계의 변화를 가져온다. 고체화된 세계에서 기체화된 세계로 질적 차원 변화다. 1℃ 변화를 변방인 지역에서 고민해야 한다.

누군가는 해답을 찾지 못할 때나 흔들릴 때 근본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생명의 위기감으로 생명 가치인 다양성, 순환성, 관계성, 영성을 지역에서 다시 찾아야 한다. 지역은 생명을 돌볼 수 있는 유일한 터전이다. 늦지 않게 생명의 가치로 지역을 재구성하는 전환의 사건을 실험해야 한다. 광장의 100℃보다 지역의 1℃로 사건의 사건을 불붙여 가야 한다.

지역에서 작은 모멘텀을 만들 수 있는 미시적인 1℃ 사건을 시작하자.

○ 지역에서 1℃를 위해 대화를 시작하자. 더 나은 삶을 이야기하자.

○ 지역에서 1℃를 위해 연결하자. 생명과 평화의 최소공배수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자.

○ 지역에서 1℃를 위해 꿈꿀 수 있는 서사를 만들자. 서사를 실험하자.

○ 지역에서 1℃를 위해 예술을 초대하자.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일상의 이벤트를 만들자.

○ 지역에서 1℃를 위해 밥을 먹자. 따듯한 밥 한 끼로 함께 살아있음을 느끼자.

디스토피아가 발밑에 와있더라도 내 삶이 내 세계가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꺾이지 말고 내 삶을 바꿀 가능성을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 지역만이 지금 여기서 도약할 수 있는 희망과 잠재성과 현실성을 가지고 있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논문 『짓기 길들이기 사유하기』는 ‘지역에 거주한다는 것은 단지 그 지역에 거주한다는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자기 본래대로 진가를 발휘하며 만개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내고 돌보는 것을 의미한다. 생활하는 것은 우선 살리는 것이고 이는 더 오래된 의미로는 무엇이라도 그 자신이 될 수 있도록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역에 거주한다는 것은 사물들을 돌보아 존재하게 하거나 그 자체가 되게끔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내가 살고 싶은 지역이 이 안에 있다.

제6차 평창오대산평화포럼 발표문을 본지에 재수록합니다.

이무열

지역브랜딩 디자이너. (사)밝은마을_전환스튜디오 와월당·臥月堂 대표로 달에 누워 구름을 보는 삶을 꿈꾼다. 『지역의 발명』, 『예술로 지역활력』 책을 내고는 근대산업문명이 일으킨 기후변화와 불평등시대에 ‘지역이 답이다’라는 생각으로 지역발명을 위한 연구와 실천을 하며 곧 지역브랜딩학교 ‘윤슬’을 시작할 계획이다.

댓글 2

답글 취소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