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솔한 몸] ③ 약봉지

신체 기관 일부가 외주화된 몸. 매일 인공적인 힘과 뒤엉켰던 몸. 그런 시간을 고스란히 축적한 몸. 뇌세포를 잃을 정도로 큰 충격이 가해졌음에도 여전히 유지되는 끈질긴 몸. 그가 살아남은 이유를 언니 몸에 쌓인 역사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아이의 순진한 눈과 그 앞에 누워있는 언니의 텅 빈 눈이 교차했다.
사진 출처: Jayden Sim

방 한편에 비디오테이프가 놓여 있었다. 언니가 사고당하기 전, 가족이 오랜만에 모였을 때 어린 시절 모습이 궁금하다며 챙겨간 것이었다. 하지만 끝내 비디오테이프를 보지 못했다. 의식이 없는 언니에게 영상을 틀어줬다. 영상 속엔 젊은 엄마가 첫사랑을 애지중지 키우는 모습이 가득했다. 그가 직접 봤으면 애틋했을 장면들이다. 영상 속 아이는 어쩐지 갸륵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아이의 순진한 눈과 그 앞에 누워있는 언니의 텅 빈 눈이 교차했다. 그러다 한 장면이 재생됐다. 낮잠에서 깬 여섯 살 아이가 어딘가 답답한 듯 찬물을 벌컥 들이켰다. 다시금 깨달았다. 언니는 오랜 시간 동안 불편한 몸을 어르고 달래 왔단 사실을 말이다.

영상 기록은 그 시절을 마지막으로 끊겼다. 그가 일곱 살 때 일이다. 눈이 사시로 변하고 시력이 나빠졌다. 사시를 교정하는 수술을 받았지만, 이후에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 눈 운동하는 학원까지 등록했다. 학원에선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말했다. 다시 다른 병원을 찾았을 때, 시신경에 문제가 발견됐다. 엄마는 진료를 예약할 정신도 없이 무작정 언니를 데리고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향했다. 그곳 안과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검사를 받았다. 검사를 진행했던 각 분야 의사가 한자리에 모여 언니의 눈을 두고 의논했다. 그들은 ‘레버시신경병’이라 진단 내렸다. 유전자 돌연변이로 서서히 시력을 잃는 병이다. 관련 검사를 할 수 있는 더 큰 병원으로 안내받았다. 그곳에선 시신경이 아닌 뇌를 확인해 보자고 했다.

MRI실에서 뇌 사진을 찍었다. 검사를 진행하던 의료진들이 도중에 엄마를 안으로 불렀다. 전화기를 건네 줬는데, 그 너머엔 의사가 있었다. 그가 말했다. “어머니 사진 속에 하얀색 보이시죠? 이게 뭐냐면…. 전부 종양이에요.” 엄마는 말문이 턱 막혔다. 아이의 작은 머리통엔 종양이 가득 차 있었다. 자그마치 가로 8cm, 세로 6cm 크기다. 시력이 급속도로 나빠졌던 이유는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던 종양이 커질 대로 커져 시신경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수술이 시급했다. 소식을 들은 의료진들이 뛰어왔다. 어렸던 언니는 자신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몰랐다. 잘 몰랐다지만 나쁜 일이 생겼다는 걸 직감했을 테다. 무서웠지만 무섭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의 표정을 헤아려 꾹 참고 또 참았을 그이다. 용기를 내서 눈을 딱 감고 바쁜 의료진에게 온몸을 맡겼으리라.

대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언니는 눈부시게 발전한 의료 과학과 유능한 의사의 손끝에서 생명을 다시 얻었다. 나는 언니보다 어렸기에 기억이 없다. 그럼에도 한 모습만은 선명하다. 기억 속 모자를 눌러쓴 언니가 넓은 병원 로비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입가엔 미소가 살포시 피어올랐다. 그땐 그가 다 나은 줄 알고 따라 웃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 시릴 만큼 맑아서 완전히 속았다. 목숨은 건졌지만, 그는 완쾌할 수 없었다. 종양이 뇌하수체까지 번져 있었다. 살리려면 그곳을 도려내야 했다. 뇌하수체는 호르몬을 분비하고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성장·대사·생식·수분·체온 조절 등 신체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 언니는 수술 이후 몸을 유지하는 모든 호르몬을 약과 주사로 주입 받았다. 밥을 먹듯 하루 세 번 꼬박 약을 챙겨 먹었다. 스테로이드 약으로 유지되는 그 몸은 유리처럼 예민했다. 작은 변화에도 몸의 균형이 쉽게 깨졌다. 수수께끼 같은 몸의 예측 불가능성은 언제나 인위적인 약을 이겼다.

동시에 우리 가족은 지금 언니 숨이 붙어 있는 까닭이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뇌가 죽었다고 했다. 생명을 유지하는 뇌간까지 새까맣다고 했다. 그러다 뇌간이 다시 회복됐다. 이미 신체 기관 일부가 외주화된 몸. 매일 인공적인 힘과 뒤엉켰던 몸. 그런 시간을 고스란히 축적한 몸. 뇌세포를 잃을 정도로 큰 충격이 가해졌음에도 여전히 유지되는 끈질긴 몸. 그가 살아남은 이유를 언니 몸에 쌓인 역사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

요즘도 그는 하루 세 번 약을 먹고, 매일 주사를 맞는다. 다만, 종류가 두 배로 늘었다. 그에게 줄 약봉지 11개를 뜯는다. 뜨거운 물에 모두 털어 넣고 녹인다. 온도를 조절하며 물을 200ml로 맞춘다. 뱃줄을 꺾어 공기를 차단한다. 입구에 바늘이 없는 대형 주사기를 연결한다. 줄을 다시 세우며 약물을 몸 안으로 천천히 흘려보낸다. 언니는 그걸 알아채고 순간 다르게 움직인다. 반응을 보이자 문득 그가 입으로 약을 삼키던 때가 생각난다. 늘 맨입에 머금은 뒤 여유롭게 물을 넘겼다. 약이 혀에 닿는 시간이 길어 쓸까 봐 표정을 살피곤 했다. 이젠 쓴 약 맛을 감내하지 않아도 될 테지. 언니 손을 대신해 약봉지를 찢는 심정을 달래는 유일한 위로다.

솔빈

그 순간, 녹색이 보인다.

댓글 1

  1. “..유전자 돌연변이로 서서히 시력을 잃는 병이다. 관련 검사를 할 수 있는 더 큰 병원으로 안내받았다. 그곳에선 시신경이 아닌 뇌를 확인해 보자고 했다..”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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