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2.16
허드렛일을 잘하는 저주받은 재능 덕분에 가끔 작품 설치 보조 일을 하며 입에 풀질한다. 오늘은 극장에서 할 전시를 위한 가벽을 설치했다. 전시 기간은 단 4일. 전시가 끝나면 수십 장의 석고보드와 다양한 물질로 만든 가벽은 망치와 직쏘로 부수어 폐기물이 된다. 이 폐기물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순환하겠지만, 철거를 직접 하는 나로서 보면 낭비 같다. 쓰임을 다한 뒤 굉음과 먼지 구름 속에서 퇴장하는 석고보드. 그 물질을 지금처럼 마구 다뤄도 되는 걸까? 석고보드를 기점으로 미술과 전시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본다.

미술작가는 전시를 통해 작가적 시각을 관객에게 제시한다. 작가적 시각은 작가가 객체를 대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그 방식은 객체의 기능이나 쓰임이 어떤 연결 안에 있는지, 또는 그 연결을 제하고 아직 자본화되지 않았거나 될 수 없는 형상의 영역을 삶의 중심에 어떻게 배치하는지로 엿볼 수 있다. 즉 작가는 말 못하는 자 혹은 말할 수 없는 자를 대신해 그가 되어 그의 말을 시각 언어로 전해야 한다. 이 부분에 예술의 역할이 있다. 이러한 태도를 석고보드 한 장에 대입해서 깊이 생각하면 석고보드는 결코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충분한 목적이다. 그러나 하얀 방에서 하는 대부분의 전시에선 석고보드를 쉽게 사용하고 버린다. 우리가 예술의 장에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은 문제가 된다. 예술가는 작품이건 아니건 간에 전시장의 구성요소를 동등하게 고려하려는 시도와 그 때문인 태도를 보여줘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예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작가 스스로 외면하며 그 존재 가치를 없애는 일이다. 차라리 사이버렉카 유튜브를 보거나 더현대서울을 방문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 이러한 생각은 자본주의와 예술을 대립하는 단순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주어진 삶에 젖어드는 사이 유형 혹은 무형의 자산이 자본주의에 식민화된다. 그러면 일반의 삶 자체가 하찮은 가십 기사에 크게 휘청일 만큼 비루해진다. 이 가운데에서 중심을 잡을 힘을 기르는 것이 예술하기이다. 예술하기의 대리자인 예술가는 인간성의 첨병이라는 자각을 하고 엄밀해야 한다. 완벽하게 모든 것을 통제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전시를 하는데 충분한 고려 없이 쓰이는 물질들과 이 물질들이 지속해서 쓸 수밖에 없는 구조를 비판하는 것은 타당하다. 이제 작가적 시각에서 생각해보자. 미술 전시는 석고보드 한 장보다 좋은가? 그리고 석고보드 한 장은 더현대서울보다 좋은가?
전시는 물질이 넘치는 사회에서 이미 있는 것에 집중하는 식이어야 한다. 낭비의 폐허에서 명예를 얻는 것보단 점거하거나 구전하거나 보시(머뭄 없는 베풂)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예술가가 자조하며 부르는 현대미술이라는 강한 경계를 넘어 모두의 일상과 연결될 것이다.
24.02.20
비건 식당에서 짬뽕과 버섯탕수를 먹었는데 배탈이 났다. 종일 화장실에 들락날락이었다. 그리고 추웠다. 그래서 못 감.
24.02.28
쿵덩야를 닦고 입맞춤하다가 숨이 차서 코로 숨을 쉬었다. 그런데 쿵덩야에게서 왠지 모를 그리운 흙냄새가 났다. 왜 진작에 냄새를 맡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걸까? 5개월간 매일 얼굴을 맞대었는데 냄새를 맡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숨 쉬는 것을 꾹 참았다. 우리는 갓 구운 빵과 막 내린 커피에 코를 들이밀고 냄새를 맡는다. 하지만 보도블록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를 감각하려 시도한 지 5개월이나 됐음에도 냄새는 보도블록의 특징이 아니라는 선입견에 빠져있었다. 선입견을 넘어 이제야 그의 냄새를 맡았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쿵덩야에게서 예상외로 좋은 냄새도 나서 기분이 좋았다. 나중에 보도블록 소믈리에 자격증이라도 만들어볼까?
24.02.29
친구의 전시를 보고 뒤풀이를 다녀왔다. 즐겁게 놀다 보니 새벽 5시였다. 심야 n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쿵덩야에게 갔다. 밤을 새우고 와서 쿵덩야를 만나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다. 이번에도 그의 냄새를 맡으려고 코로 숨을 쉬었는데 술에 취해서인지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24.03.04
입을 맞추며 5초, 무릎을 꿇고 그를 바라보며 5초 동안 속으로 수를 센다. 이 습관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다. 수를 세는 이유는 일상적인 행동에서 일정한 시간을 들이는 습관 때문이다. 예를 들어, 쌀을 씻을 때 열 번 치대고 물을 네 번 가는 것, 이를 닦을 때 치아 하나하나를 열 번씩 칫솔로 문지르는 것 등이 있다. 쿵덩야와의 만남은 그를 대하면서 생긴 습관에서 보이듯 나에게는 일상이다. 1초가 아니라 5초를 세는 이유는 충분히 시간을 들여야 효과가 있다는 경험 때문이다. 그래서 쿵덩야와 만날 때도 어릴 적 사촌과 목욕탕에서 잠수 대결을 하며 숨을 오래 참아 승리하는 것처럼 인내의 끝에 보상이 있다는 구조를 따르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만남은 효과를 바라거나 보상을 기대하는 만남이 아니다. 따라서 그와 관계할 때는 수를 세는 강박에서 벗어나 그 순간을 그대로 느끼려고 노력해야겠다.
24.03.07
멀리서 쿵덩야에게 다가가는데 쿵덩야 근처에 까만색 무언가 떨어져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쿵덩야 근처가 아니라 바로 쿵덩야에 그 물체가 붙어있었고 만져보니 스티커였다. 누군가 고의로 붙였을까? 그렇다면 대체 누가 그랬을까? 쿵덩야를 알아보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생긴 걸까? 쿵덩야일지를 읽는 사람 중에 이런 행동을 할 사람이 있나? 당황스러웠다. 스티커에 쓰인 글씨도 나를 당황하게 하는 데 한몫했다. 글씨는 ‘FLEX’ 구부리다 라는 뜻인데 요즘은 자랑하다 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인다. 뭘 자랑한다는 거지? 무슨 의도일까? 팔자 좋게 돌이나 닦는 나를 비꼬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한동안 그 앞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쿵덩야를 지켜봤다. 이걸 떼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이걸 때면 쿵덩야를 나만의 방식으로 보존하고 독점한다는 의미일 수 있다. 이는 내가 그토록 경계하는 소비 및 소유의 관계 맺기 방식이다. 그렇다고 스티커가 붙은 채 쿵덩야를 닦으면 닦는다는 행위가 억지스러웠다. 만감이 교차했고 좀 무섭기도 했다. 하필이면 어제 게을러서 쉬었는데 오늘 이런 일이 생기다니 참 아이러니했다.
일단 스티커를 그대로 놔두기로 했다. 사소한 스티커 하나가 나와 쿵덩야의 세상을 크게 뒤집어놨다. 나는 쿵덩야를 사람들과 공유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점유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쿵덩야와의 일화들을 글로 써서 사람들과 나눈다는 것. 그 때문에 독자가 개입할 가능성을 가볍게 여기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했다. 생각지도 못한 일에 허를 찔렸다. 내가 하는 행동이 내 생각을 추월해 멀리 가 있다는 생각에 흥미로우면서도 마음이 복잡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하늘이 심상치 않았다. 서늘한 어둠을 품은 하늘이었는데 집에 도착하니 이내 소나기가 왔다. 쿵덩야와 그 스티커는 지금 빗줄기를 맞고 있겠지. 일단 스티커가 사라지기 전까지 스티커를 떼지 않고 지켜보기로 했다.
24.03.08
혁신파크로 가는 길에 쿵덩야에게 또 어떤 변화가 있을지 긴장했다. 도착해 보니 스티커의 위치가 약간 바뀌었지만, 아직 쿵덩야 위에 붙어 있었다.. 어제 비가 와서 그런가 보다. 스티커를 제거하지 않은 채로 그 앞에 앉아서 쿵덩야를 손으로 쓰다듬기도 하고 옆의 보도블록과 촉감의 차이도 느껴보고 햇빛을 받아 약간 따듯한 쿵덩야의 체온을 느끼기도 하고 고개를 숙여 여러 부위에 냄새를 맡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스티커에 쓰여 있는 홀로그램 무늬의 글자가 너무 눈에 띄어서 시선이 자꾸 스티커 쪽으로 갔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건물의 기둥, 의자, 그리고 나무들 또는 지나는 사람들까지 모두 서로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새롭고 낯설게 느껴졌다. 엄지손톱만 한 작은 스티커 하나 때문에 쿵덩야만 보던 내 시선은 그 주위로 번졌다. 사물을 다르게 보는 법 혹은 사물이 되는 법을 공부하려고 이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런 개입이 들어오니 그제야 사물 되기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 그리곤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생태적 감각이 깨어났다.
24.03.10
스티커가 쿵덩야 두 칸 옆 보도블록에 붙어있었다. 비와 바람이 그를 옮겼나 보다. 누가 인위적으로 스티커를 붙인 것이 아니라 우연히 그 자리에 떨어졌을 수도 있는 것 같다. 오랜만에 쿵덩야를 닦고 입을 맞추고 잠시 무릎을 꿇었다가 일어났다. 이후 옆에 있는 스티커를 떼서 쿵덩야에게 물을 뿌릴 때 쓰는 분무기의 몸체에 붙였다. 스티커를 접착 면에 붙은 모래알갱이 때문에 붙일 때 촉감이 오돌토돌했다.
24.03.11

오늘은 또 다른 비인간존재를 만나려고 동네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거의 모든 것들이 인간의 손을 거친 것들이었다. 물질에 새겨진 인간 흔적의 포화상태에 가슴이 답답했다. 사람들은 이미 자신 주변의 물질들에서 나름대로 효용을 얻고 있는데 그것들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해서 제시하는 것이 필요한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이유뿐만 아니라 강한 욕망과 매력을 지닌 작업을 하고 싶다. 혁신파크 주변을 돌다가 잘 걷지 못하는 강아지와 천천히 산책하는 아저씨를 봤다. 근처 한 아주머니가 그 아저씨의 강아지를 보며 “눈은 잘 보여요? 백내장 안 왔어요?” “관절은?” 등등의 개의 건강상태에 관한 질문을 아저씨에게 스스럼없이 던졌다. 둘은 처음 보는 사이 같았다. 개와 함께한다는 상황을 공유하기에 모르는 사이인데도 말을 걸 수 있다. 나도 누군가가 스스럼없이 나에게 말을 걸 수 있게끔 공유하는 지점을 작업에서 만들어야겠다. 쿵덩야를 닦고 있는데 아까 아저씨가 개를 아기차에 태워서 나에게 다가왔고 나에게 뭐하는 거냐고 질문했다. 난 닦고 있다고, 매일 하고 있다고 대답했고 아저씨는 대단하다고 말했다. 내가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관계를 보며 신기해했듯 아저씨도 나와 쿵덩야의 관계가 신기했나 보다. 혁신파크라는 장 안에서 관심이 돌고 도는 상황이 재밌었다. 내가 하는 일은 배치가 달라서 특이해 보일 뿐이지 누구나 할 수 있고 이미 친숙한 행동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종종 나에게 공격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말을 건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