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덩야 일지] ⑧ 빠름을 가장 느린 방식으로 향유하기

서울혁신파크에 있는 보도블록 하나에 쿵덩야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매일 만나서 닦고 있습니다. 그 과정을 일지로 기록합니다.

23.11.30

집에서 모은 똥을 발효시키기 위해 똥통을 들고 아는 작가님의 밭으로 향했다. 오가는 대중교통 안에서 조르주 바타이유 해설집을 읽었다. 내용 중 바타이유의 저서 『저주의 몫』 부분의 ‘소비의 경제’에 관한 설명이 재밌었다. 지구의 생명체는 태양으로부터 오는 대량의 에너지로 생존하고 성장한다. 무한한 성장은 불가능하므로 성장이 한계에 이르면 과잉상태가 되는데, 이러한 과잉은 태양 빛이 대가 없이 공급되기 때문에 불가피하다. 과잉은 압력을 유발한다. 이 압력은 확장 혹은 소비 두 가지 방식으로 해소된다. 그러나 확장은 공간의 부족 때문에 한계가 명확하다. 확장의 한계에 다다랐는데도 압력이 계속된다면 죽음과 같은 방식으로 강제로 압력을 해소할 공간을 만들게 된다. 세계대전은 확장의 한계치에 다다랐음에도 계속 축적되는 압력을 죽음이라는 방식으로 파괴한 사례 중 하나다. 바타이유는 전쟁이라는 비극이 생기기 전에 비생산적 방식으로 미리 과잉을 소비해야 한다고 했다.

바타이유에 의하면, 지구적 규모의 비극적 파괴를 피하려면 인간은 비생산적 소비를 통해 과잉을 지혜롭게 해소해야 한다.
사진 출처 : Pixabay

바타이유는 소비를 일하고 먹는 등의 ‘생산적 소비’와 예술, 성적 탐닉, 도박 등의 ‘비생산적 소비’로 구분한다. 비생산적 소비는 축적과 성장이 아닌 소모와 상실의 소비다. 당장 먹고 살기도 빠듯한 현실에서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고 노후 대비해야 할 판에 무슨 비생산적 소비냐 할 수도 있겠다. 개인적 차원에선 빈곤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지구적 측면에선 앞서 말했듯 태양 때문인 과잉상태가 필연적이다. 그래서 지구적 규모의 비극적 파괴를 피하려면 인간은 비생산적 소비를 통해 과잉을 지혜롭게 해소해야 한다. 책의 이름이 『저주의 몫』인 이유도 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적인 일에 이바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쁜 것 혹은 하찮은 것 혹은 죄라고 낙인찍힌 예술과 섹스 도박 같은 유희에 위상을 높이기 위함인 것 같다. 축적과 성장만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과잉을 파괴적으로 해소하는 경우가 많다. 세상에 혐오가 만연한 이유도 그럴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내가 욕심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를 바타이유의 생각에 빗대어 말하자면 과잉상태가 되기 전에 유희적 방식으로 주어진 에너지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내 삶은 쿵덩야 덕분에 평화롭다.

23.12.03

혁신파크에 갔다. 폐쇄가 2년 늦춰진다는 벽보가 곳곳에 붙어있었다. 어렴풋이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상황이 변하니 멍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야 한다. 막연하지만, 1년을 지속해야겠다. 혁신파크는 2년 더 개방하지만, 그곳이 삶의 터전이던 일부 노동자들의 고용승계는 되지 않는다고 한다.

23.12.08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는 여자아이 둘이 쿵덩야 주변에서 낄낄대며 뛰놀고 있었다. 그 모습을 할머니 두 분이 벤치에 앉아 지켜보고 있었다. 난 쿵덩야를 칫솔질했고 이내 주위의 시선을 독점했다. 할머니 한 분은 내가 뭘 하는지 궁금한 듯 나에게 접근했는데 난 마침 쿵덩야에 입을 맞췄다. 할머니는 깜짝 놀라셨고 옆에서 뛰놀던 아이는 흠칫 하며 큰 소리로 “저 아저씨 뭐해”라고 말했다. 궁금한 것을 스스럼없이 표현하는 당돌함에 난 왠지 웃음이 나왔다. 이후 쿵덩야 주변 의자에 앉아 카페 「쓸」 에서 사온 초콜릿 쿠키를 먹고 책을 읽으며 한동안 쿵덩야와 그를 지나는 주변 사람들을 지켜봤다. 내가 쿵덩야와 함께한 시간을 다른 사람도 느낄 수 있을까? 사람들은 그저 지나치지만, 쿵덩야는 셀 수 없이 많은 것들과 부딪히며 이 세상에서 그의 역할을 다 하고 있다. 약 한 시간가량이 지나자 휴대전화를 보며 천천히 걷는 젊은 남자가 쿵덩야를 한 번 밟았다. 이 사람은 한동안 혁신파크 주변을 돌았는데 그 경로가 보도블록 하나 정도의 차이 안에서 일정해서 신기했다. 이후 흰색 운동화를 신은 60대 아저씨와 흰 털이 난 작은 강아지가 쿵덩야를 밟았다. 2시간 동안 쿵덩야의 곁에 있었는데 아직 아까 뿌렸던 물이 마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젖어있는 모습에 시선을 두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23.12.10

날씨가 좋아서 오랜만에 달리기를 하러 혁신파크에 갔다. 친구가 추천한 달리기 앱을 처음으로 사용해 봤다. 그 앱을 켜고 달리면 자신을 ‘런저씨’라고 소개하는 어떤 남성이 동기부여를 하는 말을 계속 듣게 된다. 난 날 알지도 못하는 어떤 이가 무작정 나를 응원하는 말을 듣는 게 어느 순간부터 짜증이 나서 런저씨가 말을 할 때마다 툴툴대며 혼잣말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런저씨가 싫었다. 그래서 달리는 동안 ‘런저씨 죽이기’라는 단편영화 하나를 구상했다. 그가 너무 미워 눈물이 날 지경인 어떤 사람의 삶에 대한 영화다. 1시간 10분을 달렸다. 운동화를 세탁소에 맡겨서 단화를 신고 뛰었는데 다 뛰고 나니 관절이 아프고 엄지발가락에 물집이 생겼다. 이후 쿵덩야에게 갔다.

23.12.13

게으르게 하루를 보내다가 밤이 되어서야 쿵덩야를 만났다. 누군가에게 반했을 때 그 사람만 선명하게 보이고 주변은 흐리게 보인다는 흔한 표현처럼 오늘은 쿵덩야가 그렇게 보였다. 그래서 오히려 배경이 된 다른 존재들을 생각했다. 만약 쿵덩야와의 만남이 일 년이 된다면, 이후에는 혁신파크에 있는 모든 보도블록을 하루에 하나씩 닦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쿵덩야에 쌓인 눈과 솔잎을 치우고 닦았다. 12월이었다. 사진출처 : Arūnas Naujokas

23.12.19

종일 집에서 놀다가 늦은 밤에 집을 나섰다. 이제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나 보다. 눈이 내렸다. 쿵덩야에 쌓인 눈과 솔잎을 치우고 닦았다. 저번에 관찰하기엔 쿵덩야에 물을 뿌리면 마르는데 적어도 4시간 이상 걸리는 것 같았다. 물을 뿌리고 걸레로 물기를 제거한다고 해도 남은 물이 얼면 사람들이 다니기 위험하지 않을까? 그의 몸에 입술을 댔는데 살짝 따가울 정도로 아팠다.

23.12.21

노동자의 생산력을 손실 없이 일터로 보내기 위해, 물자 운송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보도블록이나 도로, 에스컬레이터 같은 기반 시설을 만든다. 보도블록 하나에도 사회를 움직이는 거대한 기획이 있다. 보도블록을 이용해서 빠르고 수월하게 이동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당연함은 당연한 방식으로 우리를 제약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제약을 통해 사회적 속도를 학습하게 된다. 하지만 이 속도는 때론 버겁다. 그리고 어떤 이는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며 마음에 병을 키우기도 한다. 그러나 상식이라고 부르는 기준에 비판 없이 순응하는 것을 멈추는 방법을 깨닫는다면, 사회적 기준과는 상관없이 나 혹은 다른 존재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힘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바로 예술하기이다. 나와 쿵덩야의 경우처럼 빠름을 위한 발명품을 가장 느린 방식으로 향유하는 것은 마음의 힘을 기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23.12.22

나는 과거 쿵덩야와 같은 보도블록들을 종(Species)이라고 표현했다. 보통 종이라는 말은 생명이 있는 존재를 분류할 때 쓴다. 내가 쿵덩야에 종이라는 말을 쓴 것은 과소평가하는 사물의 지위를 높이기 위함이지 생물학적 분류 체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물의 지위가 재배치를 통해 진지하게 고려된다면, 그 사물을 창조하고 쓰임을 부여하고 이용하는 인간은 더 위대한 존재가 되는 것일까? 도구를 만드는 인간은 자신이 동물을 초월한, 지구적 순환에서 벗어난 존재인 양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게 상식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지구와의 연결을 느끼기 힘들다. 쿵덩야와의 만남은 존재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모든 것과의 연결성을 끊임없이 상기하려는 노력이다. 보도블록이라는 이름 밖에서, 네모 반듯하게 잘려서 누군가 밟고 지나가게끔 규정된 쓰임을 넘어서서, 작은 돌 알갱이가 압축된 집합이라는 물리적 특성을 넘어서서 그 자체를 느끼는 법을 훈련한다. 이 활동을 심화하면 쿵덩야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과 비인간동물, 사물을 동등하게 고려하게끔 가르침을 주는 훌륭한 스승이 될 것 같다. 이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단순한 위계 구도를 넘어선다.

23.12.24

쿵덩야와의 만남은 존재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모든 것과의 연결성을 끊임없이 상기하려는 노력이다.
사진 출처 : fabiangieske

쿵덩야와 나는 적이 될 수 있나? 서로 이익을 침해하거나 생존을 방해하는, 제거해야 할 대상을 우리는 적이라 부른다. 쿵덩야는 나를 해할 수 있을까? 혁신파크를 달리다 넘어졌을 때 쿵덩야에 머리를 크게 부딪친다면 쿵덩야를 미워할 수 있겠으나 이는 벼락 맞을 확률보다 더 낮은 확률일 것이다. 쿵덩야를 중심에 두고 생기는 인간 혹은 비인간동물과의 관계라면 갈등이 생길 수 있다. 예로 내가 쿵덩야에 너무나 매혹된 나머지 먹지도 자지도 않고 건강을 해친다면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쿵덩야를 없애고 싶을 수도 있다. 다른 존재를 거치지 않고 쿵덩야와 나 일대일의 관계에서 적이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없다면 다른 비슷한 종류의 관계는 가능할까? 이를테면 경쟁자 같은 것 말이다. 경쟁은 보통 공동의 목표 안에서 우열을 가릴 때 사용하는 말이다. 만약 쿵덩야와 내가 서로 존재하기를 목표로 한다면 경쟁자이자 동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그저 존재하기는 만으론 범위가 너무 넓기에 경쟁이 가능한 조건 하나를 붙여서 ‘해로움 없이 존재하기’라고 한다면 나는 쿵덩야에 크게 뒤처지고 있다. 너무나 크게 뒤처지기 때문에 경쟁보단 쿵덩야 자체가 목표이자 본보기인 것 같다. 이런 생각이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쿵덩야는 인간의 방식으로 의사표시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익과 생존, 목표 같은 말도 생명이 있는 존재들 사이의 관계를 묘사할 때 사용하기 때문에 표현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 그래도 인간의 인지상의 한계 안에서 쿵덩야의 이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 누구보다 쿵덩야와 이상하게 관계하고 있는 내가 대변하는 그의 이익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쿵덩야를 경유한 나의 이익이 되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나 한 명의 깨달음을 뛰어넘는 영역이 있을 것이라는 낙관으로 계속 이 활동을 이어가고 있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상상력을 쥐어짤수록 내 역할이나 자아가 강해진다. 활동을 지속하면서 그런 느낌이 더 커지는데 난 어떻게 해야 할까?

김이중

존재 방식이 아름답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마치 지렁이의 완벽함을 닮아 지렁이 인간이 되어 지렁이 말을 구사하고픈 게으름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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