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덩야일지] ⑮ 왜 우린 하나가 아니라 둘인 걸까

쿵덩야라는 이름의 보도블록을 매일 만나서 닦아왔습니다. 그 과정을 일지로 기록했고, 이번이 그 [쿵덩야일지] 시리즈의 마지막 회입니다.

2024.06.25

‘쓰임’으로 무언가를 규정하는 방식은 너무 쉽기 때문에, 존재의 소중함을 느낄 겨를이 없다. 사진 제공 : 김이중

사람들은 자신과 주변의 모든 것들을 ‘쓰임’이라는 기준으로 규정하고, 이를 ‘아는 것’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그 당연한 쓰임을 제거하고 대상을 바라보면, 처음엔 약간 당혹스럽고, 계속 관찰하다 보면 두려움마저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루빅큐브 하나를 떠올려보자. 이 큐브는 잘 작동하지만 만질 수 없다고 가정해보자. 그 상태에서 큐브를 원래 쓰임에서 벗어나서 생각해보자. 처음엔 27개의 작은 정육면체가 모여 하나의 큰 육면체를 이루고 있다는 등의 설명을 나열할 것이다. 조금 뒤에는 다른 쓰임이 떠오른다. 받침대 역할을 하거나, 시각적 만족을 위한 장식품이 될 수도 있고, 사색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도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보자. 그러다 보면 결국 존재에 관한 철학적 질문이 떠오르고, 결국 책상 위에 놓인 잘 모르는 이상한 덩어리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에 이른다. 이 과정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적용해보자.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개인적, 사회적 쓰임을 제거한 뒤 관찰해본다. 그리고 ‘사람’이라는 언어적 규정도 부정하고, 그를 전기 신호로 움직이는 진동하는 피주머니라고 객관적인 척 묘사해본다. 그러면 결국 그 사람은 공간을 차지하는 알 수 없는 덩어리가 되어버린다. 또 하나의 우주와 같은 사랑하는 이가 온통 미지의 존재라면, 그에 따르는 공포는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껏 사랑하기 위해 주변을 규정한다. 그 규정하는 방식 중에서도 ‘쓰임’으로 무언가를 규정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보편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이 방식은 너무 쉽기 때문에, 존재의 소중함을 느낄 겨를이 없다. 그래서 부중함의 부재로 인한 낭비 때문에 인류는 멸망의 길을 걷고 있다.

사과 없이 사과를 하나 그려보자. 동그라미 안에 윗면의 패인 홈과 튀어나온 꼭지를 그린다. 훈련된 사람이라면 명암이나 그림자를 추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실제 사과를 가져와 눈앞에 놓고 관찰해보자.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기괴한 형태들이 튀어나와 놀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과는 실제 사과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 순간이 바로 무언가를 그릴 준비가 된 순간이다. 무언가를 비교적 정확하게 그리려면, 그 대상에 대한 모든 선입견, 즉 쓰임이나 개성, 개인적 감상을 모두 배제한 낯선 상태에서 그것을 관찰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선입견이 왜곡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모든 앎이 착각임을 깨닫고, 매 순간의 만남이 처음임을 알아채며, 존재와 위계 없이 만나는 법을 훈련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미지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훈련이기도 하다. 그리고 관찰하는 순간, 서로 얽혀 대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는 행위이다. 세상은 모든 것을 쓰임으로 규정하고 도구화하여 쉽게 대체하려는 태도가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를 쓰임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마도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이상한 일이지만,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행위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평소 그와 입술을 마주할 때 시간을 재던 습관을 잊고, 그 감각에 몸을 맡겼다. 이내 내가 무슨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입술과 손바닥, 무릎이 보도블록에 닿을 때의 촉감과 팽팽히 긴장된 발목의 느낌만 남았다. 어떤 존재와 쓰임을 벗어나 관계를 맺으면, 그 존재와 나는 세상을 더욱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 다만 그 도구가 연필에서 칫솔로, 붓에서 걸레로, 손가락에서 입술로 바뀌었을 뿐.


하늘색의 수수한 천 가방, 칫솔모가 다 벌어진 초록색 칫솔, 조각을 내어 작은 천으로 만든 걸레, 그리고 ‘플렉스’라고 쓰인 스티커가 붙어있는 빨간 몸통에 하얀 머리의 분무기를 챙겨 집을 나섰다. 사진 제공 : 김이중

2024.06.26

점심거리를 사고 돌아오는 길에 그를 만났다. 평소보다 오래 뽀뽀하고, 무릎을 꿇고 바라보는 시간도 길게 했다. 굉장히 어색했다. 나는 지금까지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뭔가를 했다는 느낌이 들 만큼의 시간을 관성적으로 유지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을 먹고 2시간 뒤, 달리기하러 쿵덩야를 닦을 도구를 챙겨 혁신파크에 갔다. 그의 앞에 도착해 가방을 뒤적이다가, 오늘 오전에 그를 만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리기할 때마다 도구들을 챙기던 습관 때문에 착각했다.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앉아 그를 쓰다듬었다.


2024.07.10

수술 당일이다. 1박 2일 입원을 해야 했기에 집을 청소하고 짐을 싸서 나왔다. 병원에 가기 전, 쿵덩야를 만나러 갔다. 가방이 무거워 고개를 숙이고 길을 걷다 보니, 덕분에 혁신파크에 사는 다양한 생명을 만났다. 분주히 움직이는 개미들, 서로 붙어 뒹굴며 짝짓기에 열중인 딱정벌레도 보였다. 보도블록 위에 지렁이가 있어서 숲으로 옮기려 했으나, 이미 죽어 있었다. 그래도 숲에 돌려줬다. 쿵덩야 앞에 도착해 도구를 꺼내 그와 관계를 맺으며, 속으로 ‘잘 다녀올게’라는 말을 되뇌었다. 뼈와 장기, 근육 등을 한데 욱여넣어 복잡한 동물인 나는, 때때로 고장이 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쿵덩야의 견고함에 기대어 무사를 기원했다.


2024.07.12

우리 집 아래층에는 배달 노동자가 산다. 그래서 집 앞에는 가끔 그가 배달할 때 쓰는 오토바이를 볼 수 있다. 오늘은 오토바이 뒤에 있는 통을 스치듯 살펴봤는데, ‘쿠팡이츠플렉스’라고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나는 곧바로 저번에 쿵덩야에 붙어 있던 플렉스 스티커를 떠올렸다. 두 스티커의 디자인이 유사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자발적인 자기 착취를 연료로 삼아 즉각적인 효용을 생산하는 쿠팡과, 꾸준함을 통해 효용을 넘어선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쿵덩야의 만남은 서로 다른 듯하면서도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너’의 경계가 모호한 애니미즘에서, 그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고 철저히 ‘쓰임’으로 이용하는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진보라고 말하듯, 다시 ‘너‘와 ‘너‘의 구분에서 ‘자기들‘의 연결로 세상을 느끼는 방식이 곧 진보로 여겨질 세상이 올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 과정에 있다고 생각하니, 저번에 본 플렉스 스티커가 과거가 될지도 모르는 자본주의적 방식의 파수꾼이 남긴 경고성 표식처럼 느껴졌다. “내가 지켜보고 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너의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고, 너는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2024.07.15

왜 우린 하나가 아니라 둘인 걸까. 왜 누군가는 안전하고 누군가는 위험할까.


2024.07.20

예술 그룹 “행”을 혁신파크에 초대했다. 쿵덩야와의 마지막 전, 그와 나의 관계를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였다. 오후 7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 시각이 다가오자 갑자기 비가 많이 내렸다. 최근에 산 장화를 신고 집을 나섰는데, 장화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장화 속으로 물이 들어와 양말이 다 젖었고, 물이 고여 밖으로 빠지지 않았다. 장화는 오히려 본래의 기능과 정반대로 작용한 셈이었다. 젖은 발로 약속 장소로 가면서, 문득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이 마치 비 오는 날 구멍 난 장화를 신어서 발이 다 젖었는데 발이 보호된다고 착각하며 뽐내는 어리석은 행동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리석음은 예술의 본질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후회 없이 충분히 어리석게 행동하고 있는 걸까?

다행히 빗줄기는 약해졌고, 혁신파크에 사람들이 모였다. 총 열다섯 명이 참석했다. 내 제안에 선뜻 응해준 사람들이 고마웠다. 행의 활동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행은 한 장소에 모여 서로의 근황을 짧게 나눈다. 이후 사방으로 흩어져 약 40분간 발표나 함께할 활동을 즉흥적으로 구상하고, 시간에 맞춰 모여 각자의 작업을 선보인다.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했다. 차단봉을 통과하며 노래를 한 소절씩 부르거나, 휴대전화의 라이트를 켜고 반딧불처럼 움직이거나, 눈을 감고 타인이 이끄는 대로 이동하거나, 규칙을 만들어 게임을 하거나, 이상한 소리를 떼 지어 내는 등 다양한 활동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되었다. 사람들에게 사진이나 영상 촬영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뒤, 쿵덩야를 만났다. 이후 사람들은 쿵덩야에 대해 질문했고, 우리는 동네 맥줏집으로 이동해 소회를 나누었다. 장화에 난 구멍은 동료의 격려로 메워진다. 동료와 함께라면, 과거에는 불쾌하게 젖었을지라도 내일은 다를 것이다. 물론 오늘은 종일 발이 축축하긴 했지만.

지금까지 나는 나를 감동하게 할 걸작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실패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것들을 시시하다고 여겼고, 내가 하는 일조차 하찮고 수치스럽게 느꼈다. 하지만 이제는 수치스럽지 않을 방법을 찾았다. 당연하게 여겨 소홀히 했던 우정을 다시 발견하고, 이를 소중히 여기며 이 산만한 세상에 맞서 매 순간 서로에게 집중한다. 그러면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만든 걸작에서 찾지 못한 감동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나 또한 수치심을 극복하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2024.07.23

청담동에 있는 으리으리한 갤러리에 일하러 갔다. 인스타 인플루언서인 젊은 사진가의 전시를 철거하는 일이었다. 전시장에는 디아섹 액자가 많았는데, 한 개도 팔리지 않은 듯 보였다. 작가는 일본인이었는데, 일본으로 액자를 배송할 비용을 지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액자를 다 버린다고 했다. 액자를 기부하거나 무료로 나눠줄 수도 없었다. 작가의 시장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새것과 다름없는 액자들을 폐기 트럭에 실었다. 그것을 제작하는 데 1,300만 원 정도가 들었다고 한다. 그 정도면 내 1년 생활비다. ‘상품성’이라는 맹목적 믿음이 훼손될 위험이 생기면, 그 객체의 상태가 멀쩡하더라도 모든 효용 가능성을 폐기해 상품성을 지키는 폭력이 당연한 듯 자행된다. 가까운 예로 편의점에서 멀쩡한 폐기 음식을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논리로 발생하는 낭비가 얼마나 많을까. 지구는 미래의 존재들에게서 빌려 쓰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모두 죽기 때문이다. 그런데 빌려 쓰는 주제에, 그 빌린 것을 함부로 더럽히고 가차 없이 버린다. 아주 기본적인 상식으로도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행태를 합리화하기 위해 그럴싸한 논리와 실천으로 사람들을 체화시킨다. 하지만 우리 존재의 기본 조건인 지구를 파괴하는 행위는 명백히 우리의 적이다.

어떤 물건은 그 존재만으로도 한 사람의 삶과 신념을 파괴할 정도의 사회적 지위를 얻는다. 사진 제공: 김이중

액자를 버린 뒤 전시에 사용된 구조물을 철거했다. 벽에 남은 홈을 약속 시각이 메우고 사포질한 뒤 페인트칠을 했다. 일이 막바지에 다다랐다. 분해한 구조물을 지하에서 1층 폐기 트럭으로 옮기던 도중, 길가에 주차된 롤스로이스 팬텀을 긁을 뻔했다. 주변 사람들은 놀란 토끼 눈으로 나를 보며, 제발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만약 긁었으면 내 인생이 끝날 거라며 걱정했다. 그런 차에 손상을 입히면 굳이 국외로 가져가 수리해야 하고, 그동안 차주가 탈 동급의 차량을 빌려줘야 하므로 수리 비용이 수 천만 원에 달한다고 했다. 차주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아주 작은 흠집 하나 때문에 자존심을 버리고, 내가 비판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큰 사람에게 자비를 구하며 존엄을 포기하는 상황이 꽤 비참했다. 어떤 물건은 그 존재만으로도 한 사람의 삶과 신념을 파괴할 정도의 사회적 지위를 얻는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기준이 오로지 얼마나 비싼가에만 있다는 사실이 슬펐다. 같이 일하던 한 사람은 내가 그 차를 긁었어야 예술을 포기하고 돈을 벌겠다는 각오를 했을 것이라며, 차라리 긁었어야 했다고 진지하게 농담을 했다. 아마 내가 빚을 지고 절박해져야, 그가 자신에게 더 굴종할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밥을 먹고 잠시 쉬었다. 오늘은 만남의 마지막 날이다. 그간 사용했던 도구들을 챙겼다. 하늘색의 수수한 천 가방, 칫솔모가 다 벌어진 초록색 칫솔, 조각을 내어 작은 천으로 만든 걸레, 그리고 ‘플렉스’라고 쓰인 스티커가 붙어있는 빨간 몸통에 하얀 머리의 분무기를 챙겼다. 집을 나섰다. 그리고 쿵덩야의 앞에 도착했다.

-끝-

김이중

존재 방식이 아름답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마치 지렁이의 완벽함을 닮아 지렁이 인간이 되어 지렁이 말을 구사하고픈 게으름꾼.

댓글 2

  1. 연재 마지막회라니 너무 아쉽습니다만, 결국에는 쿵덩야 님의 모습을 사진으로나마 영접하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서울혁신파크 철거 작업을 벌써 시작했더군요…. 저도 이렇게 아쉬운데 작가님은 얼마나 더하실까요. ㅠㅠ 글 속에서라도 쿵덩야 님을 기억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1. 쿵덩야와 함께한 기록을 이곳에 공유할 수 있어 저도 정말 기뻤습니다. 곧 다시 만나리라는 다짐을 전하며, 지금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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