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성장 전환에서의 토지개혁과 토지공유제

탈성장 전환사회를 위해서는 농업 중심의 사회로의 이행과 수많은 농가치를 실현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유명무실화 되어가고 있는 경자유전 원칙을 넘어 토지공유제라는 획기적인 정책으로 이행을 논의하기 시작해야 한다.

1. 서문 : 커먼즈로서의 토지

한국 사회에서 최근에 벌어진 부동산가격의 무지막지한 상승은 모든 사람을 얼어붙게 만든다. 거기에는 하룻밤 새 몇 억이 올랐다느니 하면서 선망하고 부러워하는 성장주의, 개발주의적 맥락 하에서의 상대적 빈곤과 불평등, 불공정의 현실에 기반한 일상의 편린(片鱗)들도 있다. 또한 영끌을 해서라도 부동산 시장의 막차를 타보려고 하는 청년세대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을 가지고 지대이득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이름의 기득권자들의 모습도 있다. 저성장 시대임에도 부동산가격의 상승과 공공개발의 부수적인 이득은 날이 갈수록 눈덩이와 같이 커지고 있다. 이는 사회부정의와 불평등, 빈곤, 계급갈등 등의 문제를 남긴다. 부동산은 사회계급의 상승을 위한 위치재(位置財, Positional Goods)로 자리 잡았고, 이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격차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부동산이라고 지칭되었던 건물이나 토지는 자연의 일부이다. 이것을 지적하며 헝가리 경제학자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에서 이렇게 말한다.

“토지는 인간의 삶에 안정성을 가져다준다. 토지는 인간의 삶의 터전이며, 그의 육체적 안전의 조건이며, 계절도 아름다운 경치도 모두 거기에 담겨 있다. 토지가 없이 삶을 영위한다는 말은 차라리 손발 없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상상하는 것보다 더 황당한 일이다. 그런데 토지를 인간에서 떼어내고 사회 전체를 부동산 시장의 작동 조건을 충족하는 방식으로 조직하는 것이야말로 시장경제라는 유토피아적 아이디어의 절대적 핵심이다.”1

인류 역사에 있어 토지는 인간의 문화의 번영과 삶의 양식의 형성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반면 현대인들은 토지로부터 벗어나 상실감, 소외, 무위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토지를 잃은 사람들은 뿌리내림의 장소성으로부터 벗어난 고향 잃은 사람이자 무의식이 고아인 바로 현대인 자신들이다. 이는 자본주의가 성립되면서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분리시켜낸 결과 나타난 현상들이며, 이를 폴라니는 자본주의 성립기에 정착된 허구상품이라 지목한다. 폴라니의 경우에는 허구상품으로서 노동, 토지, 화폐라는 세 가지 개념을 얘기한다. 인간의 노동이 생명활동으로부터 분리되어 임금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자연으로부터 토지가 분리되어 지대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미래의 구매력으로부터 화폐가 분리되어 이자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허구상품인 것이다. 이중에서도 특히 토지는 만인을 위한 커먼즈(Commons)로서 이제까지 인간사회와 공동체에게 다양한 기여와 도움을 주어왔기 때문에, 이를 부동산시장을 통해 사고팔면서 사적 소유의 형태로 이행하는 것은 문명 전반을 사탄의 멧돌((Satanic mills)과도 같은 자기조정시장에 갈아 넣는 결과를 낳는다.

커먼즈로서의 자연과 대지는 어떤 이득을 주었는가? 커먼즈로서의 자연에 대한 역사적 사건은 1215년 6월 15일에 공표된 영국의 존 왕 시기의 《마그나카르타 선언(the Great Charter of Freedoms)》으로부터 시작된다. 마그나카르타 선언은 삼림헌장 이후에 전쟁과부에게 삼림의 공유권을 부여하면서 커먼즈로서의 역사적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산업문명의 초기에 목축산업의 기초가 되는 양을 키우기 위한 울타리 치기가 시작되면서 인클로저(encloser)운동이 출발하였다. 이에 따라 커먼즈에 대한 사유화 과정에서 커먼즈로서의 대지에서 싹 텄던 생태적 지혜는 파괴되었고, 마녀사냥에 따라 여성들이 공유지로부터 분리되었다. 피터라인 보우는 『마그나카르타 선언』이라는 책에서 커먼즈로서의 대지가 얼마나 생태적 지혜로 가득했는지를 설명한다.

“땅이 없는 노동자 가족들은 종획[운동]에 반대했다. 그들은 땔감을 모았고 추수 이후에 이식을 주었으며 아이들은 나무 열매를 줍고 딸기류를 따고 까마귀들을 쫓아냈으며 너도밤나무 열매 수확 철에는 돼지들을 돌보았고 양을 지켰으며 양털을 모았다.(…) 커머너들은 박하로부터 멘톨을 추출하였고 디기탈리스에서 디기탈리스 제제를 추출하였으며 버드나무 껍질에서 아스피린을 추출하였다.”2

여기서 커먼즈는 공동이용(sharing)에 따른다기보다는 공동소유(commoning)에 따라 공동의 규칙을 갖고 공동관리하던 공유지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런 점에서 하딘이 얘기하는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에 따라 개인이 자유롭게 공동이용하는 경우 결국 남용으로 이르러 황무지화된다는 속설과도 차이가 있다. 동시에 공동체 소유로서의 공유(共有)와 공공의 소유로서의 공유(公有), 시장의 소유로서의 사유(私有)를 구분하여 바라볼 필요도 있다. 공유(公有)는 국가소유로서의 사회주의 사상으로서 엄밀한 의미에서 공동체의 자율적인 규칙 하에 있는 공유(共有)로서의 질서인 커먼즈와 차이를 갖는다. 그런 점에서 토지공유제와 토지공개념도 현격한 차이를 갖는다. 자기조정 시장으로서의 사유(私有)에 대한 폐해와 남용이 판치고 있을 때 국유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정책적 시도가 있을 수 있지만, 이는 오히려 공동체의 자율성을 현격히 부정하게 되는 결과를 낳고 결국 커먼즈로서의 대지가 갖고있는 인류재건적인 측면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 특히 국가소유로서의 공유(公有)의 폐해는 사회주의국가들의 보여준 모습들이 산업사회와도 성장주의와도 전혀 다르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었으며, 관료제지층에 의한 사적 소유의 또 다른 버전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커먼즈로서의 대지의 해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또한 커먼즈로서의 대지에서의 균형과 조화, 다양성의 원리는 사회와 정치를 구성하는 원리를 배태할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파블로 솔렌 등이 얘기했던 남미원주민 사이에서의 생태적 지혜와도 같은 ‘비비르 비엔’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비르 비엔은 아직 확실히 정립되지 않은 개념이다. 많은 과정을 거쳐서 논의되어 왔지만 아직 하나로 정의된 바는 없으며, 지금도 많은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다.(…) 비비르 비엔 개념은 20세기 말~21세기 초에 등장하여 이론화되기 시작했다. 아마도 신자유주의의 광폭한 영향이나 워싱턴 컨센서스가 없었더라면 수마 카마나와 수막 카우사이는 결코 비비르 비엔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탄생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소련식 사회주의의 실패와 대안 패러다임의 부재, 민영화의 진전과 자연의 많은 영역이 상품화됨으로써 이루어진 자본주의적 근대화로 인해, 오랫동안 폄하되었던 원주민의 실천과 전망에서 다시 배워야 한다는 각성이 일어난 것이다.”3

2. 탈성장과 지대상승의 유관성

코로나19 사태의 급습은 팬데믹 사태로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각국 정부는 대대적으로 자금을 푸는 양적 완화를 감행했다. 주식과 부동산은 날이 갈수록 가격이 인상되었고, 불로소득을 구가하면서 K자형 성장곡선이 나타났다. 양적 완화에 따라 시중에 돈이 많이 풀리니 돈의 가격이 낮아지는 과잉현상이 생겼고, 원자재 가격이 높아지는 품귀현상이 지속되었다. 낮은 금리에 따라 돈이 들어가야 할 곳을 찾지 못했고, 결국 종착지는 부동산이었다. 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높아지고 있는 상황은 사실상 인플레이션 상황의 가속화를 유발하지만, 이는 자본을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격차로 인해서 불평등과 사회부정의 문제로 덮어져 있는 상황으로 연출되었다.

코로나19 사태의 급습은 팬데믹 사태로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각국 정부는 대대적으로 자금을 푸는 양적 완화를 감행했다. 주식과 부동산은 날이 갈수록 가격이 인상되었다. by Nemo_Jo, 출처 : https://pixabay.com/ko/photos/%EB%8C%80%ED%95%9C%EB%AF%BC%EA%B5%AD-%ED%95%9C%EA%B5%AD-%EC%84%9C%EC%9A%B8-%EB%8F%84%EC%8B%9C-3448697/
코로나19 사태의 급습은 팬데믹 사태로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각국 정부는 대대적으로 자금을 푸는 양적 완화를 감행했다. 주식과 부동산은 날이 갈수록 가격이 인상되었다.
사진 출처 : Nemo_Jo

여기서 가추법(abduction)에 따라 양적 완화에 의한 의도적 인플레이션이 유발하는 효과에 대해서 설명력을 갖추려 한다면 어떨까? 의도적 인플레이션은 구매력을 증가시키지만, 실물 원자재나 상품의 가격을 높인다. 이에 따라 상품가격 상승으로 인한 내핍과 희생이 유발하는 탈성장을 상상해 볼 여지도 있다. 물론 한국사회를 주권의 테두리로 이루어진 이론적 진공상태로 본다면 그렇게 생각해 볼 여지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국제자유무역에 따라 실물 상품가격의 저하가 지속되고 제 3세계에 대한 약탈이 지속되는 한 하나의 주권국가에서의 원자재 가격의 상승으로 탈성장을 생각할 여지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돈의 가치의 하락과 대량으로 돈을 찍어내는 양적 완화의 정책은 코로나19사태의 해결책으로 부상하였지만, 오히려 탈성장이 아니라, 성장을 부추기는 소비 진작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인류학적으로 볼 때 화폐가 너무도 많아서 폐총을 만들 정도면서도 다른 한 편에서는 버젓이 조개껍데기 화폐가 유통되었던 경험도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인류학적 상황에서 탈성장과 같은 시스템이 작동했다는 증거는 없다. 전통적인 탈성장의 입장에서는 화폐가 너무 많은 상황은 탈성장과 거리가 멀다. 전통적인 탈성장 입장은 검소, 소박, 검약, 유한성에 기반한 도덕적인 원리에 입각하여 있기 때문이다.

최근 물건 가격을 천정부지로 높이고 화폐를 대대적으로 푸는 방식으로 그린뉴딜이나 기본소득과 같은 대안적인 시스템을 제시했던 이론이 부상하고 있다. 이를 현대화폐이론(MMT : Modern Monetary Theory)이라고 부른다. 국가의 경제정책은 재정정책과 화폐정책 두 가지로 분류된다. 재정정책은 세입과 세출을 제로섬 게임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재정정책에서는 너무 흑자가 나서도 적자가 나서도 안 되는 상황에 선다. 재정정책은 칼 폴라니가 얘기했던 ‘모아서 나누는’ 국가의 역할을 그대로 따른다. 반면 정부의 통화정책은 정부가 돈을 찍어서 은행을 거쳐 기업과 시민에게 푸는 형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은행을 거치기 때문에 이자와 금리를 부여하는 방식의 부채통화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돈을 찍어서 빚을 부풀리는 정책이 부채통화이다. 부채통화에서는 금리나 돈을 빌릴 자격 등이 시민들에게 문턱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시민들이 접근하기 어렵고 기업들에게는 저금리를 약속하기 때문에 돈이 돈을 낳는 자본의 성립을 용이하게 한다.

그러나 MMT는 부채통화처럼 은행을 거쳐 화폐를 푸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직접 화폐를 찍어 시민들에게 나눈다. 이를 주권통화라고 한다. 다시 말해 국가가 돈을 찍어 기본소득과 공공일자리의 재원을 직접 마련하는 것이다. MMT는 자본이나 부동산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화폐질서가 아니라, 시민자산으로 직접 쓰일 수 있는 화폐질서를 구상한 것이라는 점에서 대안운동세력의 여러 가지 상상력을 자극했다. 특히 노동소득이 사라지고 있는 첨단기술사회에서 일자리와 소득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MMT와 같은 혁신적인 안이 필요하다는 입장이 제출된다.

“MMT의 자금조달 방안은 화폐 창조가 국가의 주권적 특권이라는 입장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 관점은 상업 은행이 개인과 기업에게 대출을 할 때 화폐가 창조되는 현행의 체제와 대조를 이룬다. MMT에 따르면 정부는 화폐를 창조하는 특권을 행사하여 적자의 자금을 조달하여 일자리를 창조할 수 있다. 그리고 케인즈주의 이론의 승수효과에 따라 경제 활동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므로 늘어난 조세 수입이 애초의 적자를 감당한다. MMT는 또 다른 분석틀에 근거하여 일자리 보장 프로그램에 의해 초래된 적자는 경제의 민간 무역 부문과 대외 무역 부문의 흑자에 의해서 상쇄되기 때문에 지속가능하다고 주장한다.”4

그러나 MMT의 문제점은, 화폐를 무한정 찍어서 나누어 줄 때 실물가격의 인상 중에서도 특히 부동산 가격이 상승한다는 점이다. 첨단기술사회에서의 일자리와 소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MMT의 문제설정은 참신하지만, 이러한 통화의 증가가 부동산 가격상승으로 연동되어 진행된다는 점이 맹점이다. 다시 말해 기본소득을 받은 만큼 임대료가 높아질 수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부동산에 대한 대대적인 규제와 세금부과가 없다면, 사실상 MMT 자체는 해법이 될 수 없다. 돈의 가격을 하락시킴으로써 원자재와 상품의 가격을 높이는 인플레이션을 통한 탈성장의 도달은 사회라는 복잡계 속에서 그대로 적용될 수 없는 하나의 가설로만 만족해야 할 것이다.

기후변화는 경제와 사회에 있어 막대한 리스크(risk)의 도래를 의미한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위치 이동이나 자리바꿈으로 만족하는 수동적 전환(transition)이 있을 수 있다. 더불어 체제와 시스템 전반을 바꾸는 능동적 전환(transformation)이 있을 수 있다. 이 중 수동적 전환의 프로그램으로 인플레이션을 의도적으로 유발하여 막대한 사회부정의와 불평등, 빈곤 등을 유발하고 부동산 가격을 천정부지로 오르게 만드는 정책이 있을 수 있다. 능동적 전환의 프로그램으로 불평등과 사회부정의를 해결하기 위해서 부동산과 불로소득 등에 대한 강력한 규제와 세금부과와 더불어 기본소득 등을 통한 해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능동적 전환과 수동적 전환은 한꺼번에 찾아온다.

수동적 전환은 이미 진행 중이다. 금리 인하와 화폐를 무한 공급하는 양적 완화가 그것이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이러한 상황에는 어떤 사회적 맥락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현존 자본주의 문명이 미래세대에 대한 투자전망인 이자(interest)가 아닌 단기투기적인 지대(rents)로 이득의 원천을 이동시키고 있다는 사회적 맥락이 수립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금리가 너무 싸기 때문에 이자이득이 아닌 부동산이나 주식 등을 통해서 단타 형태의 이득을 취득하려는 지대형태의 투자가 자리 잡는 것이다. 이는 미래세대를 포기하고 현 세대의 찰나의 이득에 연연하면서 사실상 기후위기 시대의 세대 간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한계를 노정한다. 수동적 전환의 상황에서 가진 자들은 더욱 축배를 들 수밖에 없고, 미래세대,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은 사회의 벼랑 끝으로 향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 핵심부위에 부동산이 위치한다. 결국 미래세대들은 부동산 취득의 전망을 갖지 못할 것이다. 이는 자본을 갖지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자본 자체가 미래세대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능동적 전환의 상상력은 어디로부터 나올까? 이는 가난과 토지공유제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는 프란체스코 성인을 사례로 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정적인 것은 가난의 긍정과 소유에 대한 비판이 궁핍이나 금욕이 아니라 풍요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프란체스코는 ‘우수스 파우퍼usus pauper[가난한 사용]’, 즉 재화에 대한 절제되고 제한된 사용을 제안하면서 다음의 성서 구절을 급진적으로 해석한다. “믿는 자들의 다중이 한 마음 한 뜻이었다. 그가 가진 물건 중 어느 것도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이가 없었으며, 그들은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가졌다.(『사도행전』4장 32절)” 물질적 측면에서 가난을 풍부한 것으로 긍정하는 것과 사적 소유를 전복하자는 권고는 우리의 협동적 생산능력이 가진 가치와 정치적 힘을 강조한다. ‘우수스 파우퍼’에는 공유된 부가 풍요롭다는 생각과 공통적인 것의 잠재적 구성에 대한 예감이 있다.“5

네그리의 언급처럼 가난은 소유에 대한 반역이며, 커먼즈의 잠재력에 대한 개방이다. 탈성장은 화폐의 풍요로부터 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불온한 더불어 가난, 함께 가난 속에서의 커먼즈운동으로부터 올 것이다. 이에 따라 토지공유제의 하나의 단상이 설립된다.

3. 정동자본주의하에서의 이윤의 지대화 현상

현 자본주의는 산업자본주의-금융자본주의-인지자본주의를 거쳐 정동자본주의 단계에 다다랐다. 정동자본주의(affective capitalism)는 플랫폼(platform)에서 웃고 울고 즐기고 향유하다보면 그 이득은 모두 플랫폼이 가져가게 되는 시스템이다. 그런 점에서 정동자본주의는 플랫폼자본주의라고 불린다. 여기서 정동(affect)은 전(前)개체적인 생명력과 활력, 힘의 흐름을 의미한다. 정동자본주의에서는 활력정동이 생성되는 곳에 권력과 자본이 동시에 발생하며, 그렇기 때문에 활력 자체가 주는 돈과 권력을 탐닉하면서 관심받고 추앙받기 원하는 인플루언서라는 개인들을 만들어낸다. 대표적인 플랫폼기업인 구글, 넷플릭스, 유튜브, 아마존 중에서도 구글(google)의 경우에는 막대한 빅 데이터(Big Data)를 다루기 때문에 부동산기업으로서 성공한 케이스이기도 하다. 정동자본주의에서 플랫폼은 정동이 뛰어 놀 수 있는 마당의 역할을 하는 판과 구도이다. 이는 부동산기업이 갖고 있는 삶의 잉여가치의 마당과 판을 장악하려는 의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정동자본주의(affective capitalism)는 플랫폼(platform)에서 웃고 울고 즐기고 향유하다보면 그 이득은 모두 플랫폼이 가져가게 되는 시스템이다. by Pixelkult, 출처 : https://pixabay.com/ko/photos/%eb%af%b8%eb%94%94%ec%96%b4-%ec%86%8c%ec%85%9c-%eb%af%b8%eb%94%94%ec%96%b4-%ec%95%b1-998990/
정동자본주의(affective capitalism)는 플랫폼(platform)에서 웃고 울고 즐기고 향유하다보면 그 이득은 모두 플랫폼이 가져가게 되는 시스템이다.
사진 출처 : Pixelkult

정동자본주의 이전의 인지자본주의 단계에서는 컴퓨팅에 기반한 ‘의미화=코드화=상품화=자본화’의 다소 합리적인 유형의 약탈의 질서가 구축되었다. 이른바 코드의 잉여가치(surplus of code)가 핵심적인 착취와 추출의 메커니즘이었던 것이 인지자본주의의 경우였다. 코드의 잉여가치는 ① 1세계와 3세계의 분리차별, ② 오픈소스, 다중지성, 집단지성과 생태적 지혜에 대한 약탈, ③ 젠트리피케이션, ④ 골목상권에 대한 대기업진출, ⑤ 플랫폼자본주의 등의 항목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서 정동의 흐름에 대해서 코드(code)를 부여하고 추출함으로써 코드를 부여한 자신의 소유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이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의 영역에서의 지대추출의 방식인데, 도시재생과 마을 만들기, 도시재정비 등이 활성화되는 과정에서 이와 상관없는 임대업자의 지대이득만 높아지는 상황을 의미한다. 코드의 잉여가치 단계의 경우 자본은 정동의 사건이 발생되는 현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동의 외부에서 그 부수효과를 탐하며 약탈하고 추출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정동자본주의는 플랫폼 하에서의 모방과 따라하기 등에 따라 인지부조화를 보이며, 빅 데이터에 기반한 인공지능에 따라 작동한다. 문제는 정동자본주의에서 ‘이윤의 지대화’의 경향이 커졌다는 점이다. 결국 기후위기 시대에 미래전망을 상실한 자본에게는 ‘이윤의 지대화’가 단기이득만을 추구하는 상황이거나 생존을 위한 위치재로서의 의미를 갖지만, 정동자본주의 내적 논리에 따르면 정동의 흐름 자체를 만들어낼 마당이자 판으로서의 플랫폼을 깔겠다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코드의 잉여가치가 아닌 흐름의 잉여가치(surplus of flux)가 핵심적인 작동원리가 된다. 흐름의 잉여가치는 정동의 흐름 자체가 권력이자 자본이기 때문에, 흐름이 형성되는 판의 주도권을 자본이 가지려는 상황을 의미한다. 원래 흐름의 잉여가치는 대안운동세력의 것이었지만, 플랫폼은 버젓이 공동체와 유사한 판을 깔면서 영업을 하기 시작한다.

이제 정동자본주의 단계에서는 인지자본주의처럼 외부에서 정동의 흐름에서 활력을 추출하고 채굴하려고 하는 자본의 모습이 아니라, 정동의 흐름 자체의 판을 까는 모습으로 자본의 모습이 바뀐다. 생산의 과정은 커먼즈에 기반한 집단적인 정동의 발휘의 영역이 되고 자본은 여기에 기생하면서 판과 마당을 제공하는 자로 존재하게 된다. 그 판에는 가상현실의 플랫폼도 포함되지만, 토지와 부동산도 포함된다. 여기서 이윤의 영역은 지대차익이라는 생산 외적 속성을 갖는 것으로 바뀐다. 이는 정동 자체가 노동도 아니고 생산 활동도 아니지만 핵심적인 변수가 됨을 의미한다. 여기에 대해서 이항우는 마이클 하트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자본은 여전히 재산 소유권을 토대로 공통재 생산에서 창출된 가치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고 지대 형태로 그것을 몰수한다. 즉 “지대는 자본과 공통적인 것 사이의 갈등에 대처하는 하나의 메커니즘”(Hardt, 2010:9)인 것이다. 하트는 자본주의적 수익의 지배적 형태가 이전에는 지대로부터 이윤으로 이동했지만, 오늘날에는 이윤에서 지대로의 정반대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며, 금융이 이러한 ‘이윤의 지대되기’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 영역이라고 주장한다.“6

정동자본주의에는 외부가 없다. 이윤은 지대화되어 토지가격과 부동산가격, 가상플랫폼의 지대차익, 메타버스의 가상공간 부동산가격 등으로 나타난다. 이는 성장주의가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를 보여주며, 정동의 흐름의 판을 지대화하는 방식으로밖에 승부를 걸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동시에 기후위기 상황에서 미래세대에 대한 전망을 상실한 자본이 기성세대와 결탁하여 ‘부자아빠 가난한 자녀’라는 형상의 세대 간 차별을 한 결과이기도 하다. 문제는 정동자본주의 하에서는 정동이라는 활력과 생명력 자체가 발휘되는 판 자체를 자본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 판 위에서 엄청난 활력과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는 인간군상의 모습을 통해 어찌 되었건 지대로서의 이윤은 안정되고 보장된다는 점에 있다.

정동자본주의 하에서의 부동산 가격의 상승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던 자본주의의 퇴행적인 모습과 결합된다. 겉으로는 4차 산업혁명이다, 디지털뉴딜이다 첨단기술발전에 입각한 최신의 자본주의로의 이행처럼 자신을 홍보했지만, 사실상 돈이 되는 영역은 오직 부동산이라는 점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알 수밖에 없는 ‘이윤의 지대화’ 현상이 지배적인 양상이 된 것이 정동자본주의의 모습이다. 첨단기술사회에서 기계류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모든 정동과 욕망, 비물질적 노동 등에 대한 보상의 문제가 기본소득으로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나, 이에 앞서 첨단기술사회 자체가 갖고 있는 ‘이윤의 지대화’ 현상에 대해서 정면으로 문제제기하지 않고서는 성장주의, 개발주의, 토건주의의 퇴행적 모습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정동자본주의의 ‘이윤의 지대화’에 편승한 신개발주의 붐이 단기이득을 탐하는 자본의 퇴행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가는 기후위기에 대해 제대로 대응할 수조차 없다. 첨단기술사회인 정동자본주의 개막은 오히려 신공항이며 도로건설이며 아파트단지 건설, 신도시 건설 등의 전통적인 토건세력을 득세하게 했던 상황을 낳았다. 그러나 이러한 부동산이득에 대한 자본의 탐닉에도 불구하고 시시각각 다가오는 기후위기 상황은 지금의 삶의 유형과 제도, 시스템을 유지한다면 인류공멸로 향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점에서 정동자본주의 ‘이윤의 지대화’의 양상은 기후정의의 문제를 제기하게 만든다.

아이폰은 캘리포니아에서 세상에서 가장 비싼 창조적 노동으로 ‘디자인’되어 중국의 폭스콘 공장에서 세상에서 가장 싼 노동으로 ‘조립’되어 비싼 값에 팔려 나간다. 실리콘밸리의 창조계급에게 돌아가는 높은 가치는 ‘노동자들의 무덤’으로 불리는 폭스콘의 열악한 저임금 노동과 교환된 것이다. 창조든, 조립이든, 인간 노동이 가해지기 전의 재료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놀라운 기술은 콜탄이 매장된 우간다의 숲에서 시작되어, 마지막은 인도나 아프리카의 빈민촌에서 분해되어 끝난다. 그 시작과 끌에는 항상 여성과 아동에 대한 폭력과 범죄, 불법적 강제 노동과 인권유린이 존재한다. ‘창조경제’나 ‘문화산업’, ‘비물질 자본주의’를 선도하는 고부가가치 하이테크 상품들의 경로는 대체로 이와 비슷하다.7

첨단기술사회는 제 3세계에 대한 약탈을 의미하며, 제 1세계의 비물질화나 정동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사실상 제 3세계로 공장을 떠넘기고 추출과 채굴경제를 작동시킨 탈동조화(decoupling)로 인한 이득을 누리는 것에 불과하다. 이는 첨단기술사회로서의 정동자본주의가 철저히 이윤의 지대화를 통해서 단기적인 이득만을 바라는 투기자본으로 전락해 있으며, 인류문명의 지속가능성과 기후정의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4. 전환시점에서의 토지개혁의 쟁점

개발주의와 성장주의는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헌법 121조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호시탐탐 유명무실화하기를 바라고 있는 중이다. 물론 경자유전은 최소원칙으로서 성장주의를 제어할 원칙이라는 점에서 유지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커먼즈로서의 토지를 구성하는 데는 일정한 변화와 보완이 필요한 시점이다. 토지개혁은 일제 강점기를 경유하여 남한의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원칙’과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 사이에서 커다란 논쟁의 씨앗을 만들었다. 문제는 남북한 모두 국가 주도의 토지개혁을 실행했으며, 그 과정에서 커먼즈로서의 토지공유운동과 같은 영역이 만들어질 여지를 없앴다는 점이다. 해방 전후에 협동조합 중심의 토지공유운동과 같은 아래로부터의 일부 움직임이 있었으나 국가 주도의 토지개혁은 이를 말살하고 제거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경자유전의 원칙은 농민이 토지를 보유할 수 있는 기본원칙이 되었다.

탈성장 전환사회의 개막은 농업 중심의 사회로의 재편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커먼즈로서의 농지는 그 기반이 될 귀중한 원칙이 될 수 있다. by pxfuel, 출처 : https://www.pxfuel.com/en/free-photo-qfiqc
탈성장 전환사회의 개막은 농업 중심의 사회로의 재편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커먼즈로서의 농지는 그 기반이 될 귀중한 원칙이 될 수 있다.
사진 출처 : pxfuel

탈성장 전환사회의 개막은 농업 중심의 사회로의 재편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커먼즈로서의 농지는 그 기반이 될 귀중한 원칙이 될 수 있다. 농민 자신이 갖고 있는 토지에 대한 애정과 정동(affect), 돌봄, 살림의 발현이 토지에 대한 소유로부터 기반한다는 것은 사실상 근대적인 문제설정에 가두어진 결과다. 사실은 소작농과 같이 땅을 빌려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대부분도 대지에 대한 돌봄과 살림, 정성의 손길을 여전히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경자유전은 땅을 일구고 돌보는 사람들에 대한 권리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커먼즈 기반의 대지에 대한 권리는 개발주의자들이 무력화하고 있는 경자유전의 원칙을 넘어서 실질적인 농업 종사자들의 토지에 대한 권리를 실효성 있게 바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힌트를 제공하는 것이 영국에서 시작한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이다. 한국에서의 내셔널트러스트운동 역시도 90년대 그린벨트의 유명무실화에 저항하면서 싹트기 시작하여 강화 매화마름군락지, 동강 제장마을, 연천 DMZ일원임야, 원흥이방죽 두꺼비서식지, 영주 내성천범람원, 맹산 반딧불이자연학교, 함평 군유산임야, 임진강 두루미서식지 등을 시민자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에서의 내셔널트러스트운동 : 공유화 정신이 잘 실현되었던 우리나라에서도 ‘내셔널트러스트’와 동일한 전통적인 가치관이 존재하였습니다. 관습법상의 ‘동유재산’이 바로 그러한 제도입니다. 동유재산은 지역 공동체의 운명과 함께하는 자연환경[예:공동으로 이용하는 어장(漁場), 목장(牧場), 송산(松山) 등]을 공동체 모두의 소유로 관리하고 운영하는 제도입니다. 즉 동유재산은 자손만대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 미래세대를 위해 현재세대에게 신탁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동의하였더라도 처분이나 매각할 수 없는 지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관습법의 지위가 인정되지 않는 지금, 시민운동인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을 통해 전통적 가치를 복원하고 미래세대를 위해 물려주어야 할 자연·문화유산의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8

한국 전통에서 동유재산, 혹은 총유(總有)는 문중자산을 의미하며, 공동의 관리와 공동의 규칙에 따라 운영되어 온 관습법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커먼즈로서의 토지공유제에 대한 역사적인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그러한 한국전통을 잘 살리고 계승한다면 커먼즈 운동의 획기적인 역사적 맥락화도 가능할 것이다.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민자산화운동이나 사회연대은행, 소셜펀딩 등의 현대적인 움직임도 토지공유제와 결합하여 함께 작동할 여지가 있다.

내셔널 트러스트운동은 문화유산이나 자연환경에 대해 보존의 입장에서 커먼즈의 정신을 만들어냄으로써, 경자유전에 기반한 토지에 대한 소유 기반 제도에 대해서도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내셔널트러스트운동에 영향을 받아 원주와 괴산 등지에서 ‘농지살림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한살림생활협동조합의 주도로, 늘어가는 고령 농업은퇴자와 귀농귀촌한 젊은 사람들을 연결하는, 농지출자와 공익신탁지정을 통한 커먼즈로서의 농지의 되살림운동이었다.9 다시 말해 더 이상 농업을 유지하기 어려운 고령농업은퇴자가 자신의 농지를 경작 할 수 있는 귀농귀촌 청년들에게 불하하기 위한 선한 의지를 발휘하려고 할 때, 공익농지신탁을 통해서 이를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경자유전을 현대화한 새로운 커먼즈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국가주도로 이루어진 토지개혁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자율적인 움직임에 따른 토지개혁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토지가격의 상승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에서 이루어졌고, 이는 양적 완화와 정동자본주의 개막 등에 영향을 받은 ‘이윤의 지대화’의 경향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농지살림과 같은 새로운 커먼즈로서의 토지공유제운동의 움직임은 약화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지대가격의 상승과 부동산가격의 상승 등은 토지공유운동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청년들이 소작농으로 농촌에 들어와 땅을 기름지게 만들고 경관을 정리하고, 흙을 고르게 만들고 집을 수리하는 활동을 하면, 다시 그 땅을 회수해버리고 지대가격을 높게 책정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농촌에서 젊은이들의 공동화 대책을 수립하겠다는 지자체와 정부의 슬로건이 현실화되려면 소작농의 토지권에 대한 보장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전제되어야 할 것이 토지공유제를 통해 기초자산을 농촌의 청년층에게 보장하는 일이다. 이를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공공영역에서 토지를 매입함과 동시에 공동체, 협동조합을 위탁관리기관으로 만들어 토지공익신탁을 제도화하는 방향성으로 향해야 한다. 기초자산이라는 개념은 농민 기본소득 이후에 포스트담론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토마 피게티(Thomas Piketty)의 『21세기 자본』(2014, 글항아리)의 주장처럼 자본의 소득과 노동의 소득의 격차가 속도와 양적 측면에서 현격히 벌어진 상황에서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면 기본소득으로 부족하고 기초자산 제도가 더 절실하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를 사적 소유 형태의 기초자산이 아니라, 토지공유제를 통한 기초자산으로 사유를 넓혀 본다면 못할 것도 없는 제도이다. 농촌으로의 청년층 유입을 위해서 청년주택을 짓는다, 결혼자금을 준다 등의 부수적인 정책을 펴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토지공유제를 위한 기본적인 제도와 시스템을 정비해야 하는 시점이다.

5. 나가며 : 탈성장 전환사회와 토지공유제의 전망

유대전통에는 5년마다 한 번씩 자신이 가진 모든 부와 자산을 나누는 희년(禧年)이라는 행사가 있었다. 율법에서 정해 놓은 제도이기 때문에 자신의 자산과 부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러한 재분배와 정의를 실현하는 율법 자체를 사실상 스스로가 율법에 의거하고 있다는 바리새파 등의 교회세력이 독점하게 된다. 이러한 교회세력의 율법독점행위에 의해서 희년은 유명무실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혁명가 예수는 교회 바깥에서 민중과 함께 오병이어 기적(五餠二魚─奇蹟)을 실현한다. 이는 희년을 매 순간으로 계속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혁명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행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세력이 그토록 예수를 증오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경자유전의 원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경자유전 원칙은 누가 농업에 종사할 것인가의 여부와 무관하게 개발주의자들에 의해서 유명무실화된 채 제도의 골격만 앙상하게 남아 있다. 경자유전의 원칙은 낡은 것이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개발주의에 대한 최후의 심리적 마지노선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경자유전의 원리는 사유(私有)에 기반한 토지정책의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경자유전에서 토지공유제라는 획기적인 정책으로 이행을 논의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토지의 권리를 창조주의 권리라고 보면서 희년을 옹호했던 헨리 조지(Henry George)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토지사유제에 대하여 무슨 변명의 말을 하더라도 정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제도가 옹호될 수 없다는 게 분명해진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토지 사용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공기를 숨 쉴 권리를 가져야 하는 것처럼 명확하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로 선언된 권리인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존재할 권리가 있다는데, 다른 사람들은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얘기인 까닭이다. 우리 모두가 창조주의 공평한 허가에 의해 여기에 오게 된 것이라면,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선물을 공평하게 즐길 수 있고, 또 자연이 그처럼 공평무사하게 제공한 모든 것을 공평하게 사용할 권리가 있다.”10

커먼즈로서의 토지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는 일단 상상력이 필요하다. 가장 유력한 방식은 각급의 협동조합 중심으로 공익토지신탁과 출자를 통해서 토지공유제를 시민과 농민의 자율적인 힘에 의해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클라우드펀딩이나 시민자산화를 위한 시민펀드, 도농교류은행의 설립 등의 깨알 같은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이의 실행과 관리주체는 협동조합 등이 맡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토지공유제를 위한 더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다. 탈성장 전환사회에서 농업 중심의 사회로의 이행과 수많은 농가치를 실현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시점이다. 오래된 미래의 약속인 희년의 기억을 되살려냈던 헨리 조지를 넘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만들었던 혁명가 예수의 실천을 통해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1.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2009, 도서출판 길) 홍기빈 옮김, p465

  2. 피터 라인보우, 『마그나카르타 선언』(2012, 갈무리), p36~137

  3. 파블로 솔론 외, 『다른 세상을 위한 7가지 대안』(2018, 협동조합 착한 책가게)p18~19

  4. 제프 크로커, 『기본소득과 주권화폐』(2021, 미래를소유한사람들), p71

  5. 안토니오 네그리, 『어셈블리』(2020, 알렙), p131

  6. 이항우, 『정동 자본주의와 자유노동의 보상』(2017, 한울앰플러스(주)), p28

  7. 기후정의포럼, 『기후정의선언 2021』(2021, 한티제), p32

  8. 한국내셔널트러스트 홈페이지

  9. 한살림생활협동조합 블로그

  10. 핸리 조지, 『진보와 빈곤』(2019, ㈜현대지성) p351-352

이 글은 2021년 10월 요산문화축전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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