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성장을 이끌 ‘영웅’은 없다.

탈성장(De-growth)에 대한 논의를 하다보면, 그 일을 해낼 사람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인상을 받는다. 근대적인 주인공 담론에서 벗어나, 탈성장 전환사회를 위한 정동경제와 새로운 인간형을 상상해야 한다.

1. 들어가며_탈성장을 해낼 사람 만들기 : 주체성 생산의 과제

탈성장(De-growth)에 대한 논의를 하다보면, 그 일을 해낼 사람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인상을 받는다. 그것이 마치 기후위기 대응과 관련된 정책적인 아젠다(agenda)에 따라 근대적인 책임주체(subject)로 미리 주어져 있다는 생각까지도 엿보인다. 그러나 탈성장과 관련된 주체성 생산(The production of subjectivity)의 과제를 배제한 채 시스템 다이내믹스나 제도 생산 등을 언급하는 것은 무망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개인적인 주체성이 아니라 집단적 배치에 따르는 주체성과 관련해서는 더욱 주체성 생산의 과제는 직접적인 현안이 될 수밖에 없다.

2050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탈탄소화라는 기술주의적 해법으로는 불충분하며, 물질발자국을 1/10 수준으로 획기적으로 줄여야만 달성될 수 있다. 
사진 출처:  Manfred Richter
2050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탈탄소화라는 기술주의적 해법으로는 불충분하며, 물질발자국을 1/10 수준으로 획기적으로 줄여야만 달성될 수 있다.
사진 출처: Manfred Richter

현재의 객관적인 상황을 볼 때 기후위기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으로서 2050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탈탄소화라는 기술주의적 해법으로는 불충분하며, 물질발자국을 1/10 수준으로 획기적으로 줄여야만 달성될 수 있는 과제라는 상황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탈성장 자체가 질서 있는 후퇴와 수축경제의 구체적인 이행기의 전략을 구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상적이고 구체성이 결여된 꿈으로만 간주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물질발자국의 축소는 소비와 생산에서의 감축을 의미하며, 욕망의 미시정치를 통한 공동체성 회복을 전제로 한 수축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내핍으로서의 탈성장 상황에 대한 완충영역으로서의 기후정의 맥락이나 미래세대와 현존 세대 간의 더 불편해질 수밖에 없음에 대한 사회적 합의,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소득에 대한 전환프로그램으로서의 정의로운 전환 등이 요구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탈성장의 제도를 다시 얘기하는 것 역시도 ‘그 일을 해낼 사람 만들기’로서의 재특이화 과정, 다시 말해 주체성 생산의 과정을 설명하지 못한다. 오히려 성장주의 시대의 주체성 생산전략을 되짚어보면서 이와 구별되는 탈성장의 주체성 생산전략을 상상해 볼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 성장주의에서의 주체성 생산전략은 분명 성공주의, 승리주의, 자기계발, 속도, 효율성, 공리주의 등을 통해서 달성되어 왔다. 성장주의의 주체성 생산의 판은 지극히 근대적인 주인공 담론에 따라 무대와 배역이 설정되었으며, 이는 동시에 실험실 유형이기도 했다. 그러나 성공주의 중심의 입시 제도는 학력차별에 저항하는 투명가방끈운동의 반격으로 주춤하며, 승리주의 중심의 스포츠는 2021 도쿄올림픽 때 한국 선수들의 승리와 패배와 무관하게 경기를 즐겼던 패자의 품격으로 무력화되었다. 자기계발 담론 역시도 과도한 자기착취 유형의 자영업자 유형의 삶에 대한 반격으로 연대와 나눔의 거대한 사회적 경제의 물결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속도에서는 패스트푸드에 맞선 슬로푸드운동이, 효율성에서는 하나의 효율적인 모델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탄력적인 모델에 따르는 사회생태운동이, 공리주의에서는 최대 다수 최대행복을 기치로 한 소수에 대한 희생에서 소수자되기를 통한 공동체운동과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으로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2. 탈성장에 최적화된 몸과 마음 만들기 : 탈성장 인간형

여기서 문제는 탈성장 전환사회에 최적화된 몸과 마음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종의 새로운 인간형과 같은 주체성 생산의 과제에 응답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탈성장 전환사회는 돌봄모듈의 강렬한 상호작용이나 커먼즈 기반 경제 등으로 구성될 것이다. 그러한 구체적인 양상에 대한 지적 이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지점은 ‘자원으로서의 사물, 생명, 자연 등이 먼저 있고 그 다음 활력이 뒤따르던 성장주의 시대의 정동경제가 무력화된다는 점에 있다. 자원에 있어서의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수축은 기후정의와 정의로운 전환 등의 완충제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활력의 원천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완전히 다른 정동경제와 새로운 인간형을 상상해야 한다. 바로 자본주의 외부성과 접속하고 있는 예술가적 인간형이나, 활력의 자기생산의 노하우나 암묵지를 갖고 있는 활동가적 인간형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자원이 있고, 그 다음 활력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활력이 먼저 있고 그 다음 자원이 뒤따르는 것이 탈성장 전환사회의 정동경제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활동가 유형의 인간형은 탈성장 전환사회에 최적화된 몸과 마음 만들기의 정체이기도 하다. 활동가들은 소진이라는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 활력의 순환과 보존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도록 어떻게 배치되어야 할 것인지, 활력의 자기생산을 위한 여러 설정들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랑해”를 여러 번 반복하면 사랑에너지가 생긴다. 사진 출처: efes
“사랑해”를 여러 번 반복하면 사랑에너지가 생긴다.
사진 출처: efes

활력으로서의 정동(affect)의 발생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으나, 그중 주목해봐야 할 부분이 펠릭스 가타리의 『분열분석적 지도제작』(1992, 국내 미출간)에서의 기호의 반복이 활력과 에너지의 발생으로 나타난다는 논점이다. 이는 무의미한 주문(呪文)을 반복할 때 나타나는 주력(呪力)과 같은 영역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쉽게 생각해 보면 “짜증나”를 여러 번 반복하면 짜증에너지가 생기고, “사랑해”를 여러 번 반복하면 사랑에너지가 생긴다는 구도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기호는 단지 언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냄새, 색채, 음향, 몸짓, 맛, 이미지 등의 비기표적 기호계에 대해서 해당사항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커피향의 반복은 카페를 가고 있는 욕망과 활력을 만들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러한 에너지와 활력으로서의 사랑, 욕망, 정동 등이 반복되면 실물적인 사물이 된다는 것은 증여와 호혜의 선물(Gift)이 갖는 특징을 잘 보여준다. 결국 양자역학에서 얘기하고 있는 “기호의 반복 → 활력”로 향하는 1차적 특이점과 “활력의 반복 → 사물”로 향하는 2차적 특이점을 함께 생각해 보면, 활력 이후에 자원이 뒤따르는 탈성장 정동경제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3. 탈성장의 투 트랙 : 돌봄모듈과 커먼즈 기반 경제

탈성장의 강렬한 정동과 활력의 상호작용으로서의 돌봄모듈에 기반하고 있다. 돌봄모듈은 2~3인 단위의 소규모 팀조직으로서 강렬한 상호작용과정에서 엄청난 이야기를 남기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돌봄모듈은 의존과 동일시의 사랑이라는 밀접한 관계만이 아니라, 협동과 견제, 이타적인 것과 이기적인 것이 어우러지는 우정이라는 거리조절의 관계 속에서도 가능하다. 더욱이 국지적이고 지엽적인 근접거리 돌봄모듈은 자신과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존재에 대한 사랑인 ‘연대’(solidarity)라는 행위의 근거가 되는 탈물질화된 이야기들과 공통개념 등을 발생시키는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연대는 다른 종이나 기후난민, 제3세계 민중 등에 대한 사랑으로 향할 수 있다.

또한 쉐어링으로서의 공동이용의 플랫폼이 아니라, 커머닝으로서의 공동소유, 공동관리의 커먼즈 기반 경제를 만들어내는 것이 탈성장의 특징이다. 탈성장은 커먼즈 다시 말해서 공유지, 공통재, 공유자산 속에서 싹트는 관계 기반의 활동을 특징으로 한다. 도시사회에서 관계 없는 사람의 정보와 지식을 전해 듣고, 관계없는 사람과 거래를 하고, 관계 없는 사람과 벽을 맞대고 자는 등의 삶은 커먼즈와 같이 공동규칙을 갖고 있는 관계 기반의 경제활동에 대해서 둔감하게 만든다. 그러나 탈성장 전환사회는 보다 많은 규칙과 약속을 깨알같이 만들어내는 생태시민성과 공동체성의 길항지점인 커먼즈에서 발아하고 창궐할 것이다.

4. 나오며 : 왜 탈성장에서 도덕주의/영성주의를 배제하는가?

탈성장에서의 도덕주의/영성주의 배격의 부분은 논쟁의 여지를 갖고 있다. 물질발자국의 실질적인 감축과 수축의 과정에서 탈물질화과정을 동반하지 않는가? 이러한 탈물질화는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으로 비화될 수 있지만, 사실상 사물 기반 활력에서 비물질적인 기호 기반 활력으로 이행을 보여줄 수 있지 않는가 말이다. 사실상 물질발자국의 실질적인 감축을 가능케 하는 자발적 가난에 도달한 인류의 경험은 영성주의/도덕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 역시도 주지해 봐야 할 것이다.

탈성장에 있어 블랙박스화되어 있는 마음생태에서의 복잡한 심리역동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귀결되는 수행성은 탈성장으로 향하는 행위양식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결국 도덕주의/영성주의 기반의 탈물질화에 대해서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더욱이 그러한 수축과 자발적 가난에 이르는 심리역동이나 공동체의 미시정치에 대해서 기록하였던 사례가 2010년도 마포구 성미산 마을에서의 카쉐어링 과정에서의 다양한 논의과정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바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다시 말해 도덕주의/영성주의가 신비주의가 아니라,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모심과살림연구소 주최 2022 생명운동포럼 〈전환의 기대, 생명운동의 길찾기〉 자료집에 실린 글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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