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레오폴디나 포르뚜나띠가 쓴 ‘Learning to Struggle: My Story Between Workerism and Feminism’을 옮긴 것이다. 원문은 「Learning to Struggle: My Story Between Workerism and Feminism」 (VIEWPOINT MAGAZINE, September 15, 2013)에서 볼 수 있다. |
내가 오뻬라이스모(operaismo)1를 접했을 때, 나는 19살이었다. 나는 파도바 대학교 학생 운동의 풀뿌리 활동가였다. 나는 어렸고, 그래서 조용했으며 배우고 있었다. 많은 모임에서 나는 말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지만, 수줍고 자신감이 없어서 조용히 있는 것을 선호했던 것이 기억난다. 운동의 지도자들은 대개 정당이나 정치 조직을 이전에 경험하여 정치를 하는 법을 이미 배운 학생들이었다. 반면에 나는 평등, 자유, 정의의 승리를 위해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신념만 가지고 있었다.
나의 유일한 예전 정치 경험은 14세 때 태평양에서의 프랑스 핵실험에 반대하는 파업에 참여한 것이었다. 당시 나는 파도바의 “티토 리비오”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매우 적은 수의 학생들만 파업에 참여했다. 어느 순간 교장이 도착했고, 나를 보자 귀를 잡으려 하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 나는 그를 뿌리치며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파업에 참여한 학생들은 모두 파업 참여로 인해 학사 과정이 유예되는 처벌을 받았다.
나에게 정치적 참여의 삶을 교육한 두 번째 중요한 경험은 16살 때 내가 무신론자라고 선언한 것이었다. 나는 당시 파도바와 베니스 사이의 작은 도시인 돌로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고, 우리 가족은 매우 종교적이었다(가톨릭). 하지만 나는 주변에서 많은 가난과 부정의를 목격했고, 이에 대해 교회 당국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교회 위계의 역할에 반대하는 나의 입장은 부모님께 충격이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견뎌냈다.
마침내, 18살이 되었을 때, 나는 부모님이 부유하고 내 학비를 내줄 수 있었음에도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내 힘으로 살아가기 위해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는 내 삶을 통제하고 사회적 특권 없이 살고 싶었다. 나는 서점 보조부터 미술품을 다루는 무역 대리인, 그리고 대학 도서관 사서까지 다양한 일을 했다. 이번에는 부모님이 많이 우셨다. 부모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의 유일한 딸(나에게는 세 명의 형제가 있었다)이 가장 반항적이었고 그들이 보기에는 고난을 초래할 것 같은 방식으로 삶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파도바 대학교 인문학부에 입학했을 때, 학생 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대학에서의 변화를 시작으로 우리의 삶의 방식과 사회 조직을 재발명하고자 하는 거대하고 엄청난 운동이었다. 나는 큰 열정을 가지고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학생으로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 특히 노동자들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시 자신들의 투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통근자들과 백화점 노동자들의 투쟁에 참여했다. 통근자들은 그들의 통근 시간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 시간의 일부로 기업에게 인정받기를 원했다. 더욱이 통근자들의 기차는 모든 국영철도 중 최악이었다. 불결하고 항상 연착되었으며, 통근자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연착되었을 때 왜 연착되었는지, 기차가 언제 도착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백화점 노동자들은 더 높은 임금 그리고 더 짧은 노동 시간을 비롯한 더 나은 노동 조건을 원했다. 이러한 투쟁에 참여하면서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역할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그 역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페루치오 감비노(Ferruccio Gambino)가 정치학부에서 진행하는 세미나에 참석하기로 했는데, 그곳에서 칼 맑스의 『자본』을 토론했다. 나는 운동에서 사용되던 많은 개념과 범주들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지만, 그것들의 의미는 당시 내게 모호하게 다가왔다. 페루치오의 맑스 수업에서 내가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계급, 자본, 노동계급, 노동,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잉여가치 등 기본 개념들이었다. 하지만 이것들은 맑스 이후의 사회 역사에서,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자본에 의해 생산된 모든 변화를 효과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재구성되었다. 그 결과 페루치오가 제안한 사회 해석은 공산당이 발전시키고 제안하던 정통 맑스주의의 비전과는 매우 달랐다.
나는 곧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에 관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과거를 이해하는 것에서도 큰 정치적 지혜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뽀떼레 오뻬라이오〉(노동자의 힘) 그룹과 그 그룹의 담론이 모든 활동가들의 정치적 투쟁에 강력한 도구를 제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그룹은 학생들뿐 아니라 노동자들도 연합할 수 있는 공간을 찾을 수 있는 조직적 플랫폼을 만드는 데 전념했다. 당시 큰 문제는 학생들을 공장의 노동자들 및 다른 노동자들로부터 강하게 분리하는 사회적 장벽을 허무는 것이었다.

사진 출처 : Laura Ohlman
하지만 이렇게 재검토된 맑스는 정통적인 버전에 비해 강력했음에도, 여성들이 살아가는 현실에 대해서는 여전히 맹목적이었다. 그래서 〈뽀떼레 오뻬라이오〉의 담론은 새로운 공장들, 현대 자본주의 체계에서 새로운 노동자들의 역할을 고려하는 데 있어서는 매우 진보적이었지만, 가사노동, 정동, 감정, 섹슈얼리티, 교육, 가족, 대인 관계, 사회성 등을 고려하는 데 있어서는 매우 빈약했다.
나는 〈뽀떼레 오뻬라이오〉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그들이 여성의 사회적 조건과 역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고 여러 차례 비판하고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나는 그 운동의 활동가들이 활동가 풀을 늘리고 공장 노동자부터 피고용인까지, 고등학생부터 중고등학교 교사까지 다른 계급 부문을 끌어들이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또한 정통 맑스주의 바깥에서 정치적 담론을 확장하는 데 엄청난 진전을 이루었다. 그들은 맑스의 유산을 20세기 후반의 사회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 역동적이고 유용한 것으로 만들었다. 나를 포함한 모든 풀뿌리 활동가들에게 맹종하지 않으면서 맑스를 활용하는 능력을 가르치면서 말이다. 하지만 〈뽀떼레 오뻬라이오〉에 대한 나의 참여는 제한적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새롭게 부상하는 그룹 〈로따 페미니스따〉(페미니즘 투쟁)에 참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22살 때 〈로따 페미니스따〉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나는 성장했고, 많은 것을 배웠으며, 대중 앞에서 말하는 것에 대한 수줍음을 극복했고, 내 개인적인 선택에도 정치적 의미를 부여해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많은 여성들이 자신을 위해, 그리고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참여했던 개인적인 투쟁들은 그들의 힘을 증대시킬 울림판과 단결하는 세력을 필요로 했다. 이 세력은 여성들에 의한 계급 의식의 발견이었고, 이는 그들의 사회적 투쟁을 위한 정치적 조직화의 원동력으로 기능했다. 〈로따 페미니스따〉는 오뻬라이스모의 경험을 페미니스트 운동으로 가져왔다.
이러한 정치적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재고된 정치경제학의 시각으로 여성의 삶의 조건을 분석하는 데 주력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페미니스트의 경험과 정치적 전통에 비추어 맑스주의적 범주를 수정해야 했다. 나는 페미니스트 투쟁의 실천적 필요에 의해 〈재생산의 비밀〉(L’arcano della riproduzione)을 쓰게 되었다. 이 시도에 있어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Mariarosa Dalla Costa)와 (〈포떼레 오뻬라이오〉의) 산드로 세라피니(Sandro Serafini)가 책의 각 장을 검토하며 큰 도움을 주었다.
사실 이 책은 당시 전체 정치 운동 내에서 논의되던 주요 정치적 쟁점들을 다루고 있다. 우리는 우리 그룹 내에서, 페미니스트 운동 내에서, 그리고 학생들과 〈뽀떼레 오뻬라이오〉 및 〈로따 꼰띠누아〉(지속적인 투쟁) 같은 정치 조직들로 구성된 더 넓은 운동 내에서 공개적이고 정치적인 논의를 다루어야 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전체 운동에게 왜 활동가들이 맑스주의적 범주를 넘어서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래야 하는지를 명확히 하고 설명해야 했다. 예를 들어 어떤 면에서 여성들이 노동계급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 어떤 여성들이 그럴까?
〈로따 페미니스따〉는 더 넓은 페미니스트 운동 내에서 항상 소수 경향이었다. 이는 페미니스트 운동의 여성들이 처음에는 남성적 정치 전통에서 발전된 어떤 정치 이론에 대해서도 당연히 경계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더 넓은 페미니스트 운동이 우리의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즉, 양육, 돌봄 등을 포함한 “가사노동”)이라는 정치적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훨씬 더 강력하고 견고해졌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점을 알지 못한 채, 여성에게 임금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가사노동 바깥의 노동을 위해 싸우는 레닌주의 전략을 취했다. 하지만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위원회들이 그들의 제안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페미니스트 여성들은 가사노동을 완전히 거부하고 집을 떠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우리 오뻬라이스모 페미니스트들은 전체 페미니스트 운동에게 [가사]노동 거부가 임금 단체 협상2 과정 내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그렇지 않으면 가사노동이 우리가 또한 투쟁하고 있던 집 밖의 노동과 함께 다른 방식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점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다시 말해, 페미니스트 운동은 그들의 일반적인 정치 프로그램에 가사노동에 대한 돈을 요구함으로써 먼저 가사노동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획득하겠다는 우리의 목표를 결코 포함시키지 않았다. 페미니스트들이 가사노동에 적용한 전략은 여성들에게 그것을 단순히 거부하라고 권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 후 이 전략은 효과가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 전략은 가사노동을 대대적인 규모로 사라지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 운동은 여성들에게 사회적 수준에서 전반적인 협상력을 부여했다는 큰 공로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예상한 대로 “가사노동”, 즉 집 안의 노동의 문제는 여성들의 정치적 의제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이 전략의 실패에 대한 성찰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새로운 세대의 여성들은 이러한 정치적 오류로부터 배우고, 물질적 및 비물질적 측면에서의 가사노동이 생산적 노동으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