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한 인간과 상상하는 이미지 – 『소진된 인간』을 읽고

사무엘 베케트는 말한다. 자신도 고도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소진된 인간'의 들뢰즈 식으로 말하자면 고도는 '무'에 가깝다. 존재 자체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없다. 고도는 소진된 인간일 수도 있고 다른 무엇과 엮여 신이 나 자유 혹은 다른 무엇이 된다. 그 연결성이 중요한 것이다.

1. 얼음땡

“각 배우들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쿼드, 사무엘 베케트

첫 번째 아이가 있다. 술래이다.
두 번째 아이가 있다. 술래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도망 다닌다.
세 번째 아이가 있다. 두 번째 아이와 똑같이 도망 다닌다.
네 번째 아이가 있다. 세 번째 아이와 똑같이 도망 다닌다.
다섯 번째 아이가 있다. 네 번째 아이와 똑같이 도망 다닌다.
여섯 번째 아이가 있다. 다섯 번째 아이와 똑같이 도망 다닌다.
일곱 번째 아이가 있다. 여섯 번째 아이와 똑같이 도망 다닌다.
여덟 번째 아이가 있다. 일곱 번째 아이와 똑같이 도망 다닌다.
아홉 번째 아이가 있다. 여덟 번째 아이와 똑같이 도망 다닌다.
열 번째 아이가 있다. 아홉 번째 아이와 똑같이 도망 다닌다.
열한 번째 아이가 있다. 열 번째 아이와 똑같이 도망 다닌다.
열두 번째 아이가 있다. 열한 번째 아이와 똑같이 도망 다닌다.
열세 번째 아이가 있다. 열두 번째 아이와 똑같이 도망 다닌다.

아이들은 열심히 도망 다닌다. 열심히 도망 다니는 와중에 붙잡힌다. 붙잡힌 아이는 술래가 된다. 혹은 붙잡히기 직전에 얼음이라고 외친다. 얼음이 된 아이는 술래에게 붙잡히지 않을 수 있지만 움직일 수는 없다. 다른 아이가 땡이라고 외치며 얼음이 된 아이를 풀어 주어야 한다. 이 순환은 반복된다.

그런데 만약 술래가 영원히 아무도 잡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첫 번째 아이가 영원히 술래라면 그때도 이것은 게임일까? (이상의 작품 ‘오감도’의 형식을 빌려왔습니다.)

2. 유튜브

“그는 이제 여인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고 믿게 된다”

유령 삼중주, 사무엘 베케트

질 들뢰즈가 쓴 소진된 인간(L’epuise)은 사무엘 베케트가 만든 ‘텔레비전 단편극에 대한 철학적 에세이’이다. 단편극은 ‘쿼드’, ‘유령 사중주’, ‘한갓 구름만…’, ‘밤과 꿈’ 이렇게 4편이다. 하지만 ‘소진된 인간’에서는 이 4편뿐 아니라 사무엘 베케트 작품 전반을 아우르며 사고하고 있다. 만약 사무엘 베케트의 텔레비전 단편극 작품이 궁금하다면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유튜브를 보는 우리는 피로한 인간일까? 
사진 출처: Szabo Viktor
유튜브를 보는 우리는 피로한 인간일까?
사진 출처: Szabo Viktor

그런데 유튜브를 보는 우리는 피로한 인간일까? 아니면 가능성을 소진해 가는 인간일까? 유튜브라는 플랫폼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할까? 많은 사람들이 영상을 올린다. 영상이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각자의 개성을 만들어낸다. 그곳에는 많은 특징들이 있다. 사회는 구별화되고 사람들은 개별화되어 개개인들은 자신만의 희소성을 찾는다. 혹자는 지금을 초개인화 시대라고 말한다. 그들만의 리그가 만들어지고 그들만의 대화가 생겨난다. 세대 구분이 심화되고 정치적 성향도 극단으로 갈라진다. 좋고 나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좋고 나쁨 사이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그런 다양한 영상들을 사람들의 특성에 맞춰 보여준다. 그것은 점점 고도화되고 사람들은 먹이를 찾는 새처럼 유튜브로 모여든다. 우리의 뇌는 그 자극을 쉬지 않고 쫓는다. 그리고 중독된다.

“우리는 무언가로 인해 피로해졌다.”

소진된 인간

1의 얼음땡으로 돌아가 보자. 끝나지 않는 게임 속의 아이들은 공포를 느낄까? 아니다. 공포는 지속되지 않는다. 결국 게임의 가능성이 모조리 소진될 때 이 게임은 끝이 난다. 아이들 중 누군가가 외칠 것이다. 다른 게임을 하자고. 혹은 집에 가자고. 아이들은 그 지점을 잘 알고 있다. 종종 그 시기를 놓치는 어른들과는 다르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가능한 것이 없는 상태. 소진된 상태. 거기엔 무언가가 있다. 피로한 것과는 다른 무언가.

3. 꿈꾸는 뇌와 이미지

“내가 그녀를 생각할 때는 항상 밤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한갓 구름만, 사무엘 베케트
꿈은 이미지다. 그곳에 스토리는 없다. 이미지의 연결만이 존재한다. 사진 출처: Alexander Grey
꿈은 이미지다. 그곳에 스토리는 없다. 이미지의 연결만이 존재한다.
사진 출처: Alexander Grey

꿈을 꾼다. 꿈은 당신의 상상이지만 뜻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꿈은 이미지다. 그곳에 스토리는 없다. 이미지의 연결만이 존재한다. 아니라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스토리는 꿈에서 깬 당신에게만 있다. 당신이 꿈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할 때, 혹은 당신만의 노트에 기록해 놓을 때 그곳에 스토리가 있는 것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은 수많은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시대에도 그랬을 것이고 현대에도 보기 드문 이미지 들이다. 필자가 그랬듯 현시대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영상에 적응된 사람들은 그의 단편극들을 제대로 보고 있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피로한 인간은 꿈을 꾸지 않는다.

“무언가 보인 것 혹은 들린 것 이것이 이미지다”

소진된 인간

호접지몽이라는 말이 있다.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어느 날 꿈을 꿈 장자는 꿈속에서 나비가 된다. 꿈에서 깬 장자는 자신이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장자가 된 꿈을 꿈 것인지 헷갈려한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들뢰즈의 철학에서는 나비가 장자인지 장자가 나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비의 관점이 있고 장자의 관점이 있을 뿐이다. 존재를 특정 짓는 것은 그 존재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닌 그 존재를 어떤 관점으로 해석하느냐 혹은 그 존재를 이루는 구성요소와 환경이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무엇과 무엇이 연결되는 지점에서 그 무엇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인간의 뇌는 깨어있는 동안 쉴 새 없이 정보를 분석하고 해석한다. 눈과 코, 귀와 피부, 그리고 입으로 들어오는 온갖 자극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것은 잠을 잘 때만 쉴 수 있다. 최근 밝혀진 뇌과학에 의하면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뇌가 그 정보를 단기 기억에서 장기 기억으로 처리하는 과정 혹은 쉴 새 없이 들어오던 정보가 들어오지 않을 때 정보에 대해 기존 정보를 가지고 상상하는 과정이라고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잠을 잘 때만 꿈을 꾼다. 잠은 일종의 임시 소진이다. 그리고 소진된 인간만이 다른 가능성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만약 사고를 당해 눈을 잃었거나 혹은 귀가 먹었을 때 혹은 뇌가 다쳐 어떤 역할을 잃었을 때 뇌는 그 부분을 대체한다고 한다. 촉각을 시각화하거나 청각을 시각화한다. 실제로 다리나 팔이 잘리면 그 부위에 간지러움을 느끼고 허공을 긁으면 간지러움이 해소된다. 뇌는 부족한 부분을 알아서 채우려고 한다. 우리의 안구는 세계를 2D로 본다. 그러나 우리의 뇌는 그것을 3D로 읽는다. 영화가 평면에서 상영되지만 입체감 있게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미지에서 중요한 것은 그 초라한 내용이 아니라 이미지가 포획하고 있는 폭발직전의 강렬한 에너지다”

소진된 인간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과 그것에 대한 해제를 붙인 질 들뢰즈의 이미지는 존재하는 이미지가 아닌 상상하는 이미지인 것이다. 2에서 말했던 특징지어져 만들어지는 존재가 아닌 특징이 사라져 만들어지는 상상의 무궁무진함 말이다.

4. 좀머씨 이야기

“감미로운 꿈들이여 다시 돌아오라”

밤과 꿈, 사무엘 베케트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작품 중 ‘좀머 씨 이야기’가 있다. 작품에 나오는 좀머씨는 쉬지 않고 걷는다. 작품의 화자인 소년은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차인 후 나무에 올라가 자살을 시도하지만 우연히 걷고 있는 좀머씨를 보게 되고 자살을 멈추게 된다. 시간이 흐르고 반대로 소년은 결국 쉬지 않고 걷기만 하다가 마을의 호수로 걸어 들어가 자살을 하는 좀머씨를 보게 된다. 여기서 좀머씨는 소진된 인간이다. 마을 사람들은 실종된 좀머씨를 찾지만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좀머씨는 소진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뭔가 다른 사건인 것이다. 소년은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무의식 중에 그것을 깨닫는다.

“우리가 소진됐다면, 그것은 무로 인해서다.”

소진된 인간

다음은 작가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의 일부이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유명한 이 시에서 작가는 두 가지 길 중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삶에서 많은 선택을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당연하게 다른 선택의 배제도 함유하고 있다.

“가능한 것의 실현은 언제나 배제에 의해 실행된다.”

소진된 인간

3에서 말했던 상상하는 이미지는 선택도 배제도 없다. 가능성을 소진한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마치 별이 소멸한 우주의 텅 빈 공간과 같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니 벌어질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우주는 별들로 가득 차 있고 누군가에게는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 희망을 볼 수도 있고 아니면 허무를, 아니면 다른 무엇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유명한 작품인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작품의 두 주인공은 끊임없이 고도를 기다린다. 이 작품을 본 사람들은 고도에 대한 많은 해석을 붙인다. 고도는 신이기도 하고 자유이기도 하다. 또는 어떤 무엇이다. 그러나 작가 본인은 말한다. 자신도 고도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소진된 인간’의 들뢰즈 식으로 말하자면 고도는 ‘무’에 가깝다. 3에서 말했듯 그것 자체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없다. 고도는 소진된 인간일 수도 있고 다른 무엇과 엮여 신이 나 자유 혹은 다른 무엇이 된다. 그 연결성이 중요한 것이다.

자칫 ‘무’를 허무로 인식할 수도 있겠다. 사무엘 베케트의 연극은 반연극, 부조리극으로도 불린다. 그의 언어에 대한 해석이나 평론에는 허무라는 단어가 따라붙는다. 그것이 잘못된 시선은 아니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허무’만은 아닐 것이다. 이 책에서 들뢰즈는 소진된 인간에게서 그 너머를 본다. 어쩌면 뻔한 클리셰일지도 모르는 시작과 끝의 연결이 있다. 소진된 인간을 쓰던 시점의 들뢰즈가 노쇠한 철학자였다는 점을 돌이켜보면 소진된 인간이라는 주제는 조금 더 인상 깊게 다가온다.

“모든 피로 너머에서 ‘결국 다시 한 번’ 가능한 것과 끝장을 본다.“

이상

컴퓨터 프로그래머. 과학과 동물, 자연과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 경계 어딘가에서 삶의 실마리를 찾아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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