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일 수 없는 자본주의 – 『가상계』 3장 「소속의 정치경제」 파생문(派生文)

세계 설명들이 기반할 수 있는 논리는 하나여야 한다거나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믿음은 무뎌진 듯하다. 여러 논리들이 동시에 세계의 설명에 적용되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그 적용을 관리 통제한다고 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관리 통제를 받아들이면서도 상대적 독립성을 유지하고 나아가 자본주의가 자유의 지평을 확대하리라 기대하고 있다. 그러한 기대는 자본주의와 세계 자체에 대한 생각을 얽히고 꼬이게 만든다. 그 얽힘과 꼬임의 양상과 거리를 두면서, 인류가 하나의 논리 즉 형식논리로부터 한 발 벗어나던 단계를 반추해 본다.

가상계
브라이언 마수미 저, 『가상계; 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assemblage)』 (갈무리, 2011년)

2002년, 듀크 대학교 출판부는, Post-Contemporary Interventions [지금과 그 다음 사이에 끼어들기]라는 기획의 한 부분으로, 브라이언 마수미의 원고를 스탠리 유진 피쉬와 프레드릭 제임슨이 편집한 책 Parables for the Virtual : Movement, Affect, Sensation [가상계우화 : 운동, 정동, 감각]을 펴냈다. 이 책은 2011년 『가상계; 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assemblage)』라는 제목을 달고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에는, 원서본 제목에 들어가 있던 ‘Parables[우화]’라는 단어가 빠진 대신, ‘얽기[assemblage(아쌍블라주)]라는 단어가 들어갔다. 이 번역본의 서문에는 “구체적으로 행하지 않아야 구체적이다” 라는 부제목이 붙어있다. 이 책과 그 한국어 번역본의 서지정보는 다음과 같다.

Massumi, Brian , Fish, Stanley Eugene (EDT), Jameson, Fredric (EDT), Parables for the Virtual : Movement, Affect, Sensation (Post-Contemporary Interventions), Duke University Press, 2002.04.09.

브라이언 마수미(지음), 조성훈(옮김), 『가상계; 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assemblage)』, 아우또노미아총서 28, 갈무리, 2011.07.30.

아래의 글은 위의 책의 제3장 「소속의 정치경제; 그리고 관계의 논리」1의 파생문(派生文)2이다.

야구장과 야구공 그리고 파동입자 이중성

아마도 형이상학 강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강의를 야구장과 빛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 철학자가 있었다. 다소 불성실했던 어느 수강자의 기억을 더듬어 그 철학자의 강의 내용을 재구성해 본다. 그는 강단을 두드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강단은 단단해 보이지만 이것을 이루는 최소 단위인 원자는 속이 텅 비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자에는 핵이 있고 전자가 핵 주위를 돌고 있는데, 비유하자면, 핵이 야구장 한 가운데 투수석이라면 전자의 회전 궤도는 야구장의 펜스 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전자와 투수석 사이에 넓은 공간이 있듯, 핵과 전자 사이는 텅 비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텅 비어있는 원자들이 모여서 형성된 이 강단은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이는 존재[being]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부터 시작하곤 하던 20세기 말의 형이상학 강의에 흔히 등장하는 예화(例話)는 아니었을 듯싶다. 그렇지만 원자론은 기원전 고대 그리스의 식민지 이오니아의 현인에 의해서 그 원시적 발상이 제기된 바 있고, 19세기에 이미 오늘날 접할 수 있는 원자론의 기본적인 얼개가 만들어졌으므로, 20세기 말의 형이상학 강의에서 존재를 논하기 시작할 때 이런 예화는 오히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의식을 제기하기에 걸맞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철학자의 형이상학 강의에서는 파동-입자 이중성도 등장하였다. “파동-입자 이중성(波動粒子二重性)[wave-particle duality]은 양자역학에서 모든 물질이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동시에 지니는 성질이다.”3 그 철학자는 헤르츠의 파동설과 아인슈타인의 입자설을 나란히 소개한 후, 오늘날의 백과사전에서도 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설명보다 더 상세하게 파동-입자설을 설명하였다.

“1912, 파울 크니핑(Paul Knipping)과 발터 프리드리히(Walther Friedrich)는 결정을 이루는 원자 간의 좁은 틈을 이용하여 라우에 반점이라고 불리는 엑스선의 회절 사진을 얻었다. 이로써 엑스선은 파동이라는 증거를 얻었다. 그런데 드브로이는 1920년대 초, 엑스선으로도 광전효과를 확인할 수 있으며 즉, 에너지가 양자화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비슷한 시기인 1922년에 아서 콤프턴은 엑스선 산란 연구를 한 뒤 그 결과를 분석한 바 엑스선은 입자와 같다고 발표하였다.(1923) 즉 엑스선에서도 입자성과 파동성이 모두 확인되었다. 이후 사람들은 빛이 파동의 성질과 입자의 성질, 모두를 가졌다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는 아주 작은 세계에서만 일어난다고 하여 원자보다 작은 세계를 다루는 새로운 역학, 양자역학을 만들었다. 빛에 국한되어있던 이중성[파동입자 이중성]을 확장시켜, 루이 드 브로이는 입자라고 생각해왔던 전자 역시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고 착안, 물질파 이론을 고안해냈다.(1924)”.4

엑스선에서도 입자성과 파동성이 모두 확인되었다.
사진: Cara Shelton

그 철학자는 어떤 책에 실린 엑스선 회절 사진 보여주기도 하였고, 회절 양상을 칠판에 그려주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그 철학자는 파동-입자 이중성에 관찰자를 관련시켰다. 관찰자가 누구냐, 어떤 조건에서 관찰이 이루어지느냐 등등 여러 조건들의 변화와 그것들 사이의 관계의 양상에 따라 관찰 결과[인식 내용]가 크게 다르게 보고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관찰 내지 인식의 조건들 사이의 관계의 양상을, 다른 말로 하자면, ‘관계의 논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관찰 결과는 이른바 관계의 논리에 의하여 변동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관계의 논리는 동일률·모순율·배중률을 기반으로 하는 형식논리와는 다른 논리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별도의 체계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고도 할 수 있고, 그 논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체계적인 설명을 중요시하지 않거나 거부한다고 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들은 파동-입자 이중성의 제기 이후 형식논리의 기반이 되는 동일률·모순율·배중률을 견지하는 상태에서는 세계를 더 이상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 철학자의 설명과 주장을 접하고 나서는, 실재에 대한 소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수강자들 중에도, 객관성을 더 이상 고집하지 않는 경우가 생겨났다. 객관성뿐만 아니었다. 그 철학자의 형이상학 강의는, 일부 수강자들로 하여금, 인식 대상과 인식 주관을 나누고 양자가 실재한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전개하는 인식론에 선뜻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한 수강자들은 나중에 철학사를 접하면서 또는 독일관념론을 접하면서, 칸트 아니 이미 데카르트의 철학에서부터 철학자들은 인식론을 나름대로 제기하면서도 항상 회의적 태도[skeptical attitude]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는 것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듯하다. 그 철학자의 수강생들 가운데 적어도 한둘은 회의적 태도를 견지하는 형이상학이라는 것을 낯설지 않게 느끼게 된 듯하다. 이 회의적 태도는 앞서 언급한 형식논리나 이른바 관계의 논리를 사용하는 데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예외와 관습

베르톨트 브레히트.
사진: Kolbe, Jörg

회의적 태도는 물적 세계를 대할 때만 요청되는 것은 아니다. 문화와 사회 또한 회의적 태도를 가지고 보아야 한다. 1930년대에 이미 그러하였다. 1930년대가 되면 이미 그런 현실이 반영된 문예창작이 등장하였다. 『예외와 관습』5이 그런 것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예외와 관습』은 베르톨트 브레히트6가 1930~1937년에 엘리자베트 하우프트만·에밀 부리와 함께 공동 작업하여 완성한 희곡이다. 1938년 팔레스타인의 집단 농장 키부츠의 아마추어 극장에서 성황리에 초연되었으며, 독일에서의 초연은 1956년 뒤셀도르프 캄머슈필레 무대에서 행해졌다고 한다.7 이 희곡은 다음과 같이 요약 설명할 수 있다.

9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작품의 전개상 1장에서 7장까지의 전반부와 8장 및 9장인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에서는 석유 사업 허가를 따내기 위해 여행길에 오른 독일인 상인 카를 랑만이 최대한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고자 길잡이와 짐꾼을 다그치며 가혹하게 다룬다. 그러나 상인은 경찰이 없는 사막 지대에 이르자 길잡이와 짐꾼이 공모하여 자신을 해칠까 봐 두려워진 나머지 길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며 길잡이를 해고한 뒤 짐꾼만을 대동하여 사막에 들어선다. 예상대로 짐꾼이 사막에서 길을 잃자 상인은 짐꾼을 매질하고, 그의 수통도 빼앗아 버린다. 그런데도 짐꾼은 심한 갈증을 느끼는 상인에게 해고당한 길잡이가 길을 잃을 경우를 대비해 몰래 챙겨준 여분의 수통을 건네는데, 상인은 이것을 자신을 해하려는 돌멩이라고 착각하여 만일을 대비해 준비했던 권총으로 그를 사살해 버린다. 후반부인 8장과 9장은 무전유죄 유전무죄를 비판하는 재판에 관한 노래와 짐꾼의 아내에 의해 제기된 상인의 재판에 관한 것이다. 이미 8장의 노래를 통해 암시된 것처럼 상인은 무죄판결을 받게 되는데, 그 이유는 짐꾼이 건넨 것이 돌멩이가 아닌 수통이라는 것이 밝혀짐으로써 상인의 살인이 정당방위가 아닌 것이 분명한데도, 경쟁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애를 기대할 수 없으며, 그 때문에 짐꾼의 선행을 상인이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브레히트는 이 작품을 통해 계급 갈등이 첨예화된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인간적 신뢰는 불가능하며, 주인과 하인, 자본가와 노동자, 착취자와 피착취자 모두 첨예한 상황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고 진단한다.”8

여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건은 짐꾼의 선행을 상인이 예측할 수 없다는 판단인 듯하다. 이 판단의 근거는 자본주의라고 잘라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이 개관적이며 공정하고 상식적이리라고 믿는 재판관·배심원 등등의 판단은 자본주의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상인과 길잡이도 명백히 자본주의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억울하게 죽긴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짐꾼이 자본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믿어버려도 될까? 브레히트는 이 희곡의 배경이자 무대가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때그때 주어지는 조건에 따라 각기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작동하고, 그렇게 하여 변화해 가는 각자의 마음은 또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 각자의 생각과 행동의 조건이 된다는 것을 관객들이 스스로 각자의 머릿속에 떠올리게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 듯하다.

관계의 논리에 따라 소속을 찬탈하여 소속의 정치경제를 재생산하는 자본주의와 불안

앞에서 본 바와 같이, 1930년대에 이미, 브레히트는 그의 희곡에서 자본주의를 끊임없이 변하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그런 발상이 가능한 판은 이미 19세기에 원자론이 깔아놓았으며 1920년대에 양자역학이 성립하면서 그 판은 더 넓고 평탄해졌다. 21세기에 들어온 후, 끊임없이 변하는 자본주의에 양가적 감정을 가지고 그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심사를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이 새로운 권력 구성체는 오래된 이름이 있다: 자본주의. 지불과 투자의 수단인 돈은 모든 사건공간을 가로지르고 간극을 이루는 모든 육체를 예외없이 실어 나르는 유일한 사건 전송기이기 때문이다. 현대 자본은 모세혈관 네트워크, 유통의 유통자, 이행성의 원동력이다. 상관적인 것의 한계 내이다. 현재의 자본주의 권력 양태를 통제라고 부를 수 있다. 코드화도 아니고 성문화도 아니며, 정례화도 아니고 규제도 아닌, 그 양자를 내재적으로 포괄하는 조정이다. 통제 권력은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에 이미 예고되어 있다. 통제 권력은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이다. 그것은 운반된다. 통제는 권력 요인이 만들어지는 변조이다. 그것은 잠재력의 기동이다. 궁극적인 포획, 즉 표현 요소들의 포획도, 심지어 표현의 포획도 아닌, 사건 그 자체의 운동의 포획.”9

이러한 토로에는 자본의 지배력을 두려워하면서도 자본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은 듯한 분위기가 보이는 듯하다. 말하자면 자본 즉 돈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사람과 사물을 이리저리 이동하도록 하며, 가치평가를 끊임없이 갱신한다는 것이다. 이 갱신을 다음과 같이 ‘소속의 찬탈’이라고 설명하기도 하는 듯하다.

바로 잠재력의 표현. 상관성의 운동. 함께되기. 소속. 자본주의는 소속의 전 지구적 찬탈이다. 이는 단순한 한탄이 아니다. 즉 권력은 이제 새로운 행성의 양태로서 대규모로 잠재화되고 있다고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축하할 일은 아니다. 즉 잠재화는 단지 증식하는 격납의 공간들로 대규모로 운반되고 있다. 소속 그자체가 세계적인 규모의 문제로 부상했다는 점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것은 이 행성 차원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축복도 아니고 한탄도 아니다. 다시 말해 개인과 집단을 다시 생각하고 다시 경험해야할 요청인 것이다.”10

소속의 찬탈이 야기한 문제는 끊임없이 가치평가를 갱신하는 일을 자행하면서도 그러는 자기에 대하여 스스로 미덥지 못해 하고 있는 현상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어느 쪽이 될까?”11 끊임없는 가치평가의 갱신은 자본의 지배에 종속되는 쪽으로 흐를까? 자본 자체를 철저히 도구화하고 통제하는 쪽으로 흐를까? 이 밖의 전개 양상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여러 가능성을 생각하기 전에, 논리의 변천을 거슬러 올라가보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듯하다. 21세기 들어서 이른바 관계의 논리를 가지고 세계 특히 자본주의를 설명하려던 사람들은 관계의 논리가 형식논리보다 강력하지 못하다고 느끼고 그런 느낌으로 인한 불안을 적절히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논리에 관련된 불안은 인식에 대한 자기 불신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을 자신있게 하지 못하는 데로 이어지는 것 아닐까? 사정이 이러하다면, 서구 문명에서 한발 빠져나와 다른 문명과 서구 문명을 비교하여보는 것이 치유책이 될런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다른 문명들은 다양한 다른 논리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논리들의 비교는 내가 의지하고 있는 논리가 왠지 불완전하다는 느낌에 딸려나온 불안으로부터 내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하여줄 수 일을런지도 모른다.

세계 설명들이 기반할 수 있는 논리는 하나여야 한다거나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믿음은 무뎌진 듯하다. 여러 논리들이 동시에 세계의 설명에 적용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그 적용을 관리 통제한다고 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관리 통제를 받아들이면서도 상대적 독립성을 유지하고 나아가 자본주의가 자유의 지평을 확대하리라 기대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한 기대는 자본주의와 세계 자체에 대한 생각을 얽히고 꼬이게 만든 듯하다. 그 얽힘과 꼬임의 양상과 거리를 두면서, 인류가 하나의 논리 즉 형식논리로부터 한 발 벗어나던 단계로 소급하여, 그때로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되짚어 보았다. 자본주의는 사람을 즐겁고 사치스럽게 할 때도 있지만 불안하게 할 때도 있는 듯하다. 이때 그 불안에는 쉽사리 해소되지 않는 면도 있겠지만, ‘느낌적 느낌’에 필적하는 ‘불안적 불안’도 있는 듯하다. 그런 ‘느낌적 불안’이라면 굳이 거기에 끄달려 있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형식논리는 아직 견고하며 쓸모도 있지만, 거기에서 한 발 빠져나온 데에서 느끼는 불안이 있다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불안은 보다 많은 역사 속의 여러 논리들과의 통시적 공시적 비교를 통하여 해소할 수 있을 듯하다. 그 다음에는 자본주의를 보는 눈도 조금 바뀔 듯하다. 자본주의는 좋지도 않지만 전적으로 나쁘지도 않은 것이다. 좋거나 나쁨과 무관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걷어낼 수 있는 불안을 걷어내고 나면 생각이 이쯤에 미칠 것 같다.


  1. 이 글에서는 「소속의 정치경제; 그리고 관계의 논리」로 줄여 쓰겠다.

  2. 스핀오프(spin-off)의 변종이라고 할 수 있다.

  3. 『위키백과』, ‘파동-입자 이중성’

  4. 『위키백과』, ‘파동-입자 이중성’

  5. Die Ausnahme und die Regel

  6. Bertolt Brecht[1898~1956]

  7. 『독일문학 번역DB UeDeKo』 ‘예외와 관습 (Die Ausnahme und die Regel)’ 참조.

  8. 『독일문학 번역DB UeDeKo』 ‘예외와 관습 (Die Ausnahme und die Regel)’

  9. 「소속의 정치경제; 그리고 관계의 논리」 156~157쪽.

  10. 「소속의 정치경제; 그리고 관계의 논리」 157쪽.

  11. 「소속의 정치경제; 그리고 관계의 논리」 157쪽.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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