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철학] ⓵커먼즈(commons), 플랫폼자본주의를 넘어서(上)

이 글은 생태적지혜연구소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생태민주주의 시리즈》 두 번째 책인 『생태시민성과 공동체성』(2020 출간예정)의 일부이다. 이 책에 수록될 <공동체성의 작동원리와 전개>의 7가지 키워드를 앞으로 하나씩 [공동체의 철학] 시리즈로 소개할 예정이다. 시리즈 첫 번째는 커먼즈(commons)이다. 커먼즈에 대한 논의는 공유에 대한 혁신적인 사유를 지향하는 모든 부위에서 공통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너와 나 사이에서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닌 커먼즈가 생성되는 과정은 공동체가 갖고 있는 잠재력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커먼즈는 혁신적이고 유능한 공동체경제의 기반이다.

커먼즈의 역사, 공동체의 역사

공동체 논의에서 중요한 개념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 가장 첫손에 꼽는 것이 바로 커먼즈(commons) 논의일 것이다. 여기서 커먼즈는 공동체(community)에서의 공유자산, 공통-부, 공통재, 공유재, 공유 활동 자체 등을 지칭한다. 커먼즈는 자본주의의 시초 축적이 있기 전에 존재했던 공유지로부터 유래를 갖는다. 영국의 존 왕은 귀족들과 서민들의 압력에 밀려 공유지 사용권을 허락하는 마그나카르타 헌장(the Great Charter of Freedoms), 즉 대헌장에 조인을 한다. 이로서 영국에서의 산림과 숲, 하천과 같은 공유지에 전쟁미망인들과 지역주민들의 사용권이 헌법적 수준에서 보장되었다. 이러한 공유지에서의 커머닝(commoning) 즉 공유 활동과 사용은 벌레퇴치, 약초, 발효, 저장, 요리 등의 다양한 생태적 지혜가 발흥할 수 있었던 판과 구도가 된다. 그리고 이는 공유지에 기반한 공동체의 삶과 살림을 풍요롭게 만드는 원천이었다. 그러나 16~17세기의 마녀사냥이라는 여성에 대한 적대적인 행위로부터 시작된 자본주의 시초축적(primitive accumulation)은 종획운동, 즉 양을 키우기 위한 울타리 치기(encloser)와 공유지에 대한 사유지화의 과정을 겪는다. 이에 따라 공유지에 대한 무단점유가 바로 자본주의 성립의 근원임을 유감없이 알려주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인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땅이 없는 노동자 가족들은 종획[운동]에 반대했다. 그들은 땔감을 모았고 추수 이후에 이식을 주었으며 아이들은 나무 열매를 줍고 딸기류를 따고 까마귀들을 쫓아냈으며 너도밤나무 열매 수확 철에는 돼지들을 돌보았고 양을 지켰으며 양털을 모았다.(…) 커머너들은 박하로부터 멘톨을 추출하였고 디기탈리스에서 디기탈리스 제제를 추출하였으며 버드나무 껍질에서 아스피린을 추출하였다.”

피터 라인보우, 『마그나카르타 선언』(2012, 갈무리), p136-137
공기, 물, 햇빛, 바람, 산, 들, 갯벌, 바다 등 우리 주변의 많은 것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내어주는 생명과 자연이라는 ‘커먼즈’이다.
공기, 물, 햇빛, 바람, 산, 들, 갯벌, 바다 등 우리 주변의 많은 것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내어주는 생명과 자연이라는 ‘커먼즈’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유지에 대한 착취, 시초축적은 근대성립 시기에만 일어난 일일까?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자본주의 하에서는 시초축적이 수시로 이루어진다. 즉, 자본주의 성립기에 시초축적이 단 한번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공유지에 대한 채굴, 추출, 착취, 약탈이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에 따라 공유자산, 생태적 지혜, 집단지성, 오픈소스 등은 자본의 먹잇감이 되고 있다. 이른바 정동자본주의, 플랫폼자본주의의 양상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제 공유경제를 촉매하고 고무하는 것은 비단 공동체만이 아니라, 자본 역시도 이에 대해서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사회적 관계조차도 사회자본이 되고, 욕망, 정동과 활력도 활력자본이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플랫폼자본주의 양상을 넘어서 커먼즈의 기반을 강화할 수 있을까? 이러한 역사적인 시도에 대한 단상과 아이디어,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경로와 방법론은 없을까? 커먼즈의 논리 구도를 따라가 보면서 이에 대해서 탐색해 보자.

공유지의 비극을 넘어서

커먼즈는 도처에 존재한다. 공기, 물, 햇빛, 바람, 산, 들, 갯벌, 바다 등 우리 주변의 많은 것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내어주는 생명과 자연이라는 커먼즈이다. 그래서 생명과 자연을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도 하고, ‘순수증여’라고도 한다. 이에 대한 공유 활동은 다양한 비물질적인 공유자산을 만들어냈다. 집단지성, 생태적 지혜, 일반지성이 그 사례이다. 이 역시도 커먼즈를 이룬다. 왜 굳이 커먼즈를 새삼스럽게 얘기하는가,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자연과 생명이라는 커먼즈의 약탈이 심각해지면서, 이에 대한 커머닝 즉 공유 활동 자체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물 사유화와 물 기업, 물 시장의 확대 등을 들 수 있다. 물이 부족한 제 3세계 국가에서는 시민들이 자신의 소득의 25%이상을 물을 사먹는 데 써야 할 정도로 물 사유화가 이미 진행되었다. 물 공공성이 대안이 될 수도 있지만, 이 역시도 커먼즈를 보호하는 제도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혹자는 UN의 《세계인권선언》의 성립기에 물 인권 조항을 집어넣지 못한 데 아쉬움을 표명한다. 또 혹자는 강, 하천, 둠벙, 시냇물, 호수, 습지 등이 공동체의 자주관리를 통해 커먼즈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커먼즈는 제도도 필요로 하지만, 공동의 관리의 자율적인 실천과 노력 역시도 필요로 한다.

공동체의 공동의 자산인 산림, 하천, 강, 습지, 갯벌 등을 커먼즈로서 이용한다는 것은 엄격한 공동체의 규칙과 공동관리, 제도 등의 도움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이를 테면 공동체의 규칙은 “이렇게 해야 한다”일 수도 있지만, “이러지 말아야 한다”일 수도 있다. 그런데 시장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러지 말아야 한다”의 나머지에 해당하는 여백과 공백에 파고들어 무한자유의 개척지로 여기면서 커먼즈를 잠식해 들어왔다. 이를 통해 시장의 원리가 치밀하게 관철되고 커먼즈에 대한 공동체의 규제와 규칙을 무력화시키는 상황을 꿈꾸어 왔다. 시장만능주의자, 신자유주의자들은 개럿 하딘(Garrett Hardin)의 저서인 『공유지의 비극 : The Tragedy of the Commons 』(1968)를 사례로 들면서,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공유지로서의 초원을 무한정 이용하고 관리하지 않고 자유롭게 이용한다면, 서로 양이나 소를 키우기 위해서 ‘나 하나쯤은 어때’식으로 사용하다 황량하게 불모지가 될 것이라고 치부한다.

그러나 이 비극의 우화에는 단 한 가지 중대한 결함이 있다. 공유[재]에 대해 정확히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하딘이 제시한 가상의 시나리오는 초원 주변에 경계도, 초원을 관리하는 규율도, 과용에 대한 처벌도, 뚜렷한 사용자 집단도 없는 시스템을 가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공유[재]가 아니다. 이는 진입이 개방된 열린 접근, 즉 오픈 액세스 체제, 혹은 자유이용 체제다. 공유[재]에는 경계, 규율, 사회적 규범, 무임승차에 대한 규제가 있다. 공유[재]는 자원을 지키는 양심이 있는 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기꺼이 하고자 하는 공동체의 존재를 필요조건으로 한다.

데이비드 볼리어, 『공유인으로 사고하라』(2015, 갈무리), p51

이러한 논리는 공유지를 공동체로부터 분리시켜 고립된 개인과 매개했을 때 가능한 논리이다. 그러나 공동체는 공유지와 분리될 수 없고, 서로 시너지를 발휘하면서 끊임없이 상호작용해왔다. 공동체가 풍요로워지고 다양해지는 데에는 공유지에 대한 공동체의 관리와 규제가 잘 작동하고 있을 때 가능하다.

  • 커먼즈가 발아하고 생산하는 생태적 지혜의 다양성과 풍부함
  • 커먼즈는 제도도 필요하지만, 공동 관리의 자율적인 실천과 노력이 중요

커먼즈는 너와 나 사이에서 네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닌 공동으로 사용해야 할 공유영역이 발생되었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네 것, 내 것 따지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둘 혹은 셋 이상 여럿이 만든 배치가 내리는 결정에 따라 운영되고 관리되는 것이 커먼즈이다. 가령 A와 B가 공동프로젝트를 아이디어회의에서 실행까지 함께 한다고 했을 때, 각자가 기여한 부분은 1부터 5까지 혹은 6부터 10까지라고 정확하게 적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둘 사이의 집단지성은 바로 공동의 성과물이 되고, 커먼즈가 된다. 그렇다고 “그것은 내 것이다”라고 사유화할 수도 없을 것이다. 특히 커먼즈는 성과물 자체만이 아니라, 그 성과에 도달했던 과정이나 방법론 자체에서도 내재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왜(why)라는 본질과 이유에 대한 질문과 더불어 어떻게(how)라는 작동과 양상의 질문 자체에도 커먼즈가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생태적 지혜라는 작동과 양상에 대한 방법론에도 커먼즈가 관철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먼즈는 생태적 지혜와 집단지성으로부터 분리되어 마치 관료시스템이 책임지고 할당할 수 있는 것으로 왜곡된 역사를 갖고 있다. 즉, 국가사회주의 체제는 커먼즈를 국가주의와 동일시하였고, 이에 따라 공공영역과 공동체영역의 낙차효과에 나오는 다양한 시너지를 완전히 무력화시켜 버렸다. 결국 커먼즈가 발아하고 생산하는 생태적 지혜의 다양성과 풍부함은 완벽히 화석화되고 사라지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 커먼즈의 논의가 공공영역과 동일시될 때 갖게 되는 폐해는 비단 국가사회주의만이 아니며, 공공영역의 효율의 논리가 공동체와 시민영역의 자율영역을 잠식할 때마다 발생된다. 물론 공공영역이 갖고 있는 무차별 공중에 대한 제도와 시스템이 덜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공공영역은 무차별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제도의 판을 작동시킴으로써, ‘모아서(=세금) 나누는(=복지) 역할’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영역이 갖고 있는 관계망과 배치에 따라 커먼즈가 관리되고 운영되었을 때라야 비로소 자율성과 생태적 지혜의 잠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공공 주도의 관치가 아닌 시민 주도의 협치, 즉 거버넌스를 통한 커먼즈의 재발견과 재창안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것도 사실이다.

신승철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

댓글 1

  1. 커먼즈와 커머너의 관계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커먼즈가 커머너를 만들고 커머너는 커먼즈를 가꾸는 관계, 그리고 커머너는 새로운 커머너를 환대하고 커머너간의 민주주의로 위계를 만들지 않으며, 또한 커머너 만이 아니라 커머너 바깥의 사람들, 존재들, 자연과 함께 공유하는 그런 커머너를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그건 의식적이지도 자연적이지도 않은 역사적인 방법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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