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하트 「핵 주권」 ⑥ : 번역

이 글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핵 주권 Nuclear Sovereignty」(Theory & Event, Volume 22, Number 4, October 2019,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pp. 842-868)에 대한 번역문으로, 총 6회에 걸친 시리즈 중 마지막 글이다.

불가능한 군비 축소

핵무기의 유지 및 성장이 인간의 생명과 지구에게 점점 더 위험요소가 된다는 사실—이 위기는 조만간 진짜 파국에 이를 것으로 운명지어진 것처럼 보인다—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은 전반적인 군비축소 과정을 시작하고 지원할 어떠한 잠재력도 거의 없는 듯 보인다. 이 무슨 미친 짓인가! 깨인 지식인들은 합리성과 인류의 이름으로 이렇게 고귀하게 애원한다. 오직 인간만이 이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결국 폭탄을 금지할 것이고, 심지어 군사주의 문화를 파괴하면서 그와 나란히 비축한 핵무기 외의 무기들도 파괴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소용없다. 복스 클라만티스 인 데세르토(Vox clamantis in deserto[사막에서 외치는 이의 공허한 소리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재앙을 향하는 이 부조리한 과정을 중단시킬 수 없는 인류는 생존을 계속할 것 같지 않아 보이기 쉽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인류를 전체로서 추론하는 것은 우리의 핵 세상을 영구화하는 진짜 요인을 파악하지 못한다. 엄밀히 말해 군사적 관점이든 도덕적 관점이든 이 쟁점에 접근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지 않은데, 그 관점들은 평화에 호소하거나 심지어 핵무기가 군사적 가치가 거의 없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에 머문다. 핵무기체제의 옹호자들이 일본에 최초의 원폭이 투하되고 서로가 무기경쟁을 부추기는 전면적인 냉전 기간 동안 핵무기체제가 군사적 목적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추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할지라도, 오늘날 베테랑 냉전주의자들조차 핵무기는 군사적 관점에서 해체, 그것도 일방적으로 해체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군사적 이유는 결코 제 1의 동기가 아니며, 그보다는 핵무기의 정치적 사용 및 경제적 역할에 대한 눈가림용이다. 그리고 그것은 평화의 이름으로 핵무기를 해체하자는 호소가 왜 그토록 효과가 없었는지를 말해주는 한 가지 이유이다.

그렇다면 핵군축은 불가능한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핵무기체제의 주된 목적을 확인하고 이 목적을 직접 공격한 이후에만 실현될 수 있다. 첫째, 핵무기는 국민국가에게 주권을 부여한다고 여겨지는 정치적 도구이며, 또한 국가들 내부에서 권력의 집중화를 가속화시키는 지렛대로 기여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지구화 과정이 국가 주권의 다른 지지물을 약화시키는 만큼 주권을 떠받치려고 핵무기에 의존하는 일은 더욱 더 심해진다. 주권을 강화시키는 일에 상응하여 핵무기가 법치질서의 균형추를 행정부 쪽으로 옮기면서 권력들의 내부 재조직화에 기여한다는 사실은 이 상황을 훨씬 더 무겁게 한다. 사실상 주권은 항상 다른 권력들과 관련해 외부적인 요구일 뿐만 아니라, 또한 민주주의 발전을 침식하고 저해하면서 사회의 물질적․사회적 구성의 내적 집중화를 의미해왔다.

이러한 점에서 실질적인 군축과정을 위한 선결조건은 국가 주권을 파괴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국민국가 내․외부에서 일체의 주권 형태를 파괴하는 것이다. 커즌스가 핵기술이 만들어졌고 아니 실제로는 만들어져야만 했던 1945년에 인류의 파국을 향한 돌진을 중단시키기 위해 국가 주권을 폐기하자고 선언했을 때, 그는 옳았다. 그가 주권을 이 논쟁의 열쇠로 인식했고, 인류가 계속해서 생존하려면 국가 주권이 축소 혹은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즌스는 그 과정을 수행하기 위해 요구되는 투쟁을 과소평가했는데, 그가 보기에는 그것을 상상하는 일이 자기 주장이 지닌 합리성과 인류의 관심으로부터 직접 도출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핵무기의 생산과 유지를 추동하는 두 번째 주된 요인은 자본의 필요다. 엄청난 반-생산 기계인 무기 산업은 자본에게 안정적인 수요를 제공하고, 높은 이윤율을 보장한다. 군사 분야의 경제적 지원은 자본이 총이윤율의 장기침체를 겪고 있는 최근 수십 년 동안 훨씬 더 결정적이다. 핵무기는 물론 총 군비의 한 부분만을 구성하지만 그것들은 실질적인 몫을 구성하며, 자본과 군사주의 일반이 맺는 관계의 한 가지 징후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차 대전의 격변을 예감하면서 군사주의가 자본 축적의 특수한 분야이며, 따라서 군비증가, 상비군, 군사 기지 그리고 주기적인 전쟁 등이 자본주의 사회의 필수적이고 내재적인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그녀가 결론짓길, 만일 전쟁과 군사주의를 효과적으로 반대하길 원한다면, 자본과의 투쟁을 벌어야 한다.1 앞서 설명했듯이, 기후변화에 대한 가장 지적인 분석가들 중 몇몇 역시 마찬가지로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는 반자본주의 투쟁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한다. 나의 분석의 도달한 결론은 이와 유사하지만, 어쩌면 훨씬 더 달성이 어려운 것일지 모른다. 즉 진정한 핵 감축과정을 가동시키기 위해서는 자본과 주권 모두에 맞선 투쟁을 해야 한다. 어떤 이들에게 이것은 ‘그래 사실 핵감축은 불가능하지’를 인정하는 것과 같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자본이나 주권 중 하나를 폐지하자는 전망—하물며 둘 다 폐지하자고 하니—은 상상하는 것조차 힘들 수 있기 때문이다.

반자본주의 운동의 힘, 자본의 지배를 의문에 붙이는 일은 세계 전역에서 성장해왔으며, 심지어 미국에서조차 성장했다. by Michael Fleshman 출처 : https://www.flickr.com/photos/fleshmanpix/6986482341
반자본주의 운동의 힘, 자본의 지배를 의문에 붙이는 일은 세계 전역에서 성장해왔으며, 심지어 미국에서조차 성장했다.
사진 출처 : Michael Fleshman

나의 분석의 한 가지 목표는 핵무기의 유지와 성장을 지탱하는 세력들의 권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있으며, 따라서 왜 반핵운동이 지금까지 거의 성공을 거두기 어려웠는가를, 그리고 그 운동들이 왜 그렇게 극적으로 소멸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몇 가지 지표를 제공하는 데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러한 장애물들이 다루기 힘들고 영속적이라는 점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정치적 가능성의 한계는 아주 빨리 변화하곤 한다. 반자본주의 운동의 힘, 그리고 더욱 일반적으로는 자본의 지배를 의문에 붙이는 일은 세계 전역에서 성장해왔으며, 심지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이 불가능했던 저 미국에서조차 성장했다. 주권을 의문에 붙이는 일은 아주 복잡하다.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듯이 엄청난 이론적 작업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주권 개념 자체를 분명하게 설명해 내야하며, 나아가 그보다 더 비주권적인 사회조직과 협치 형태를 상상해 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주권에 대한 대중의 도전을 인식할 수 있는데, 그것은 초국적 수준과 국민국가적 수준 모두에서 일어나는 오늘날의 다양한 사회운동들에 함축되어 있다.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 세기의 전환기에 일어난 운동을 특징지었던 대안지구화의 요구가 있었으며, 2011년에 시작된 투쟁의 순환에 영감을 주었던 “진짜 민주주의”에의 요구가 있었다.2 다른 연구는 자본과 주권—물론 이 두 영역은 중첩되어 있다—의 지형 위에서 벌어지는 오늘날의 투쟁들이 지닌 잠재력을 가늠할 것을 요청받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러한 방향에서의 발전은 이미 존재한다고 제시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리를 핵 파국으로부터 구원하는 일의 중대성이 [기존의] 자본과 주권에 맞선 투쟁들의 중요성에다 다른 이유를 추가시킨다. 마치 우리는 아직까지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러한 운동들 혹은 그와 유사한 어떤 것이 우리가 핵 없는 세상의 방향으로 진짜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기 위해 필요할 것이다.

(끝)


  1. Luxemburg, The Accumulation of Capital, pp. 454-467. [한글본] 로자 룩셈부르크, 『자본의 축적』, 766-767쪽과 779-799쪽.

  2. 주권에 도전하면서도 또한 비주권적인 협치의 제도 및 형태들의 잠재력을 가진 오늘날의 사회운동에 대해서는, 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Assembl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특히 pp. 25-46쪽, [한글본] 마이클 하트․안토니오 네그리, 『어셈블리』, 정유진․이승준, 알렙, 2020, 78-111쪽을 참고하라.

박성진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전공분야인 영문학에서는 낭만주의에, 비전공분야인 철학에서는 맑스주의와, 탈구조주의에 관심이 많다. 문학과 철학의 접목에 관심이 많다. 특히, 자연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 빗발쳤던 낭만주의 시대에 쓰인 시들을 좋아하고, 자연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와 상상력을 좋아한다.

이승준

형식적으로는 시간강사이자 독립연구자이며, 맑스주의자, 페미니스트, 자율주의 활동가 등등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특이체이자 공통체이면서, 풀과 바다이고, 동물이면서 기계이고, 괴물이고 마녀이며, 그래서 분노하면서도 사랑하고, 투쟁하고 기뻐하며 계속해서 모든 것으로 변신하는 생명체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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