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 대한 질문을 시작합니다] ① 야마기시즘에 대한 검토를 중심으로

2020년이 지나갔다. 경험한 적 없는 팬데믹이 일상을 흔들었고, 기후위기는 가속화되고 있다. 변수가 아니라 상수가 되어버린 위기적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미래에 대한 적극적인 질문과 전망, 그리고 그 전망을 향한 구체적인 실천이 필요하다. 20세기에 시작돼 21세기로 이어진 ‘야마기시즘’의 경험이 그 질문과 전망, 실천의 행위에 힌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우주전쟁없었던 2020

2020년이 지나갔다. 1989년에 방영된 한국의 애니메이션 ‘2020 우주의 원더키디’가 그린 시점은 이제 과거가 되었다. ‘2020 우주의 원더키디’의 주인공 아이캔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우주로 나가서 마라 대마왕, 데몬 마왕 등의 적들과 싸운다. 그런데 현실의 2020년에 우리가 싸워야 했던 대상은 우주의 악당들이 아니었다. 바이러스와 기후위기가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일상을 위협했고, 생존의 기반을 흔들었다. 사실, 원더키디의 세계관에서 지구의 인간들이 굳이 지구 밖을 나가 우주의 악당들과 싸우는 이유는 현실의 2020년이 처한 조건과 비슷하다. 늘어난 인구, 환경오염과 자원고갈이라는 치명적인 위기가 인간으로 하여금 우주 개발에 착수하도록 했고, 그렇게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을 찾던 이들이 우주에서 고도로 발달한 기계문명과 만나 싸운다는 이야기. 이 이야기의 구조는 여러 가지 징후들을 통해 지구의 미래를 우울하고 부정적으로 예측하면서도 과학 기술을 통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20세기적 상상력이 재현된 서사의 대표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우주개발은 기술문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신뢰와 상상력의 극단적인 형태인 셈이다. 하지만 현실의 2020년은 전혀 달랐다.

2019년 9월에 시작돼 2020년 2월에야 진화된 호주산불은 10억 마리 이상의 야생동물을 죽였다. by Deep Rajwar  출처: https://www.pexels.com/ko-kr/photo/4621457/
2019년 9월에 시작돼 2020년 2월에야 진화된 호주산불은 10억 마리 이상의 야생동물을 죽였다.
사진 출처 : Deep Rajwar

비록 우주전쟁은 없었지만, 2020년은 앞으로의 시간을 살아갈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기록될 특별한 시점이 될 것이다. 2019년 12월 중국 우한시 보건위원회가 ‘원인불명 폐렴’을 확인하고 3개월이 지나지 않아 2020년 3월 11일 세계보건기구가 COVID19 팬데믹(범유행)을 선언했다. 그리고 COVID19 팬데믹 상황 중에 한국은 유례없는 폭우로 기억 될 여름을 보냈으며, 역시 기이하게 춥고 눈이 많이 오는 겨울을 지내고 있다. 시간대를 조금 뒤로 돌리면, 지금의 팬데믹 상황 직전에 호주에서는 1100만 헥타르 이상의 산림이 불에 타버린 거대한 재난이 있었다. 2019년 9월에 시작돼 2020년 2월에야 진화된 호주산불은 10억 마리 이상의 야생동물을 죽였다. 전문가들은 이 거대한 산불의 원인으로 기후위기를 지목하고 있다. 호주의 평균 기온은 1910년 이후 섭씨 1도 이상 상승했다. 게다가 2019년에는 100년만의 가뭄을 경험하고 있었다. 2020년 미국 서부에서 발생한 사상 최악의 산불 역시 기후위기가 그 원인으로 지목된다. 높아진 북극의 기온이 만들어낸 효과가 미 서부의 이상 고온 현상으로 이어졌다. 같은 시기 한국이 경험한 기록적인 폭우 현상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런 장면들을 토대로 생각해볼 때 만약 팬데믹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2020년은 충분히 위기적인 1년이었을 것이다. 폭우와 폭염, 혹한과 폭설, 미세먼지(팬데믹 상황이 아니었더라도 우리는 마스크를 끼고 살아야했을 것이다.)가 지난해보다 심각한 1년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런 가정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유는 결국 지금의 팬데믹 상황이 기후위기나 기후위기를 초래한 성장주의 이데올로기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된 위기이기 때문이다. 세계바이러스네트워크(Global virus network)는 COVID19의 유행을 분석하며 “기후변화와 지구화는 바이러스의 여권”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더 나열하고 강조할 것 없이 2021년의 우리는 촘촘하게 연결된 종합적인 위기적 상황 속에 놓여있다. 그리고 이 촘촘함은 각각의 현상들 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시간축의 형태로도 존재한다.

사라진 질문과 희미해진 미래적 전망

‘이런 오늘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소설에서나 등장할 법한 대화의 소재였는데, 이제는 매우 현실적인 상황 인식에 입각한 감정 표현이 되었다. 여러 가지 생태계의 위기를 경고했던 이들조차 위기가 일상으로 스며드는 구체적인 장면을 상상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실 당장 하루하루의 삶이 버겁고, 내일과 내년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 고정적인 감정이 된 사람들에게 미래를 그려보는 행위란 일상적인 것이 아니다. 특히 장기적 관점에서 20~30년 뒤의 미래를 내다보는 행위는 매우 특수한 것일 수밖에 없다. 자기 개인의 미래는 ‘장래희망’에 대답하기 위해 그려보지만, 사회나 지구의 미래를 예측해보는 것은 낯선 행위일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SF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같은 것들이 그 행위를 대신하고 있는데, 이미 공상과학의 영역 이상의 것들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 역시 충분한 것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나는 현재 우리가 마주한 위기적 상황의 가장 무서운 점이 바로 미래를 질문하는 행위를 중지시킨 이데올로기적 작용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시장화된 시간과 공간은 개인의 일상을 불안으로 내몰고, 시간과 공간이 빈곤한 사람들은 긴 시간축의 사고를 낭비적인 것이라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해 질문하지 않고서는 미래에 개입할 수 없다. 개입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으로는 적응하는 삶이 있을 수 있는데, 변화에 적응하며 생존하기 위해서는 시장에서 살아남는 적극적인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절망하게 된다. 적극적인 소비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은 모두, 생태계를 파괴하고 지구의 자원을 고갈시켜가며 성장해온 ‘고성장 탄소경제’라는 시스템으로부터 만들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너도 나도 힘을 모아 먹고 사는 기반을 파괴해온 역설을 더 이상 반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2020년 마주한 위기의 본질을 인식했다면, 우리는 이제 미래에 대해 질문하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2015년 경향신문이 진행했던 한 조사를 복기해볼 만하다. 당시 20~34세 청년 100여명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던 청년 미래인식 조사는 20년 뒤(2035년) 미래에 대한 4가지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토론을 진행한 후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이 때 제시된 4가지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붕괴와 새로운 시작’ 시나리오다. 이 시나리오는 경제 위기로 인해 한국의 기업들이 도산하고 많은 사람들이 농촌으로 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을공동체가 발달하면서 중요한 문제는 공동체 내의 민주적 방법으로 결정한다. ‘느림’의 가치가 실현되는 국가가 탄생하는 것이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계속성장사회’이다. 새로운 유전이 발견된다는 가정을 담고 있는 이 시나리오에서 한국은 세계 5대 강국이 되고, 서울은 더 화려해진다. 또 다른 시나리오는 ‘과학기술이 변화를 이끄는 사회‘이다. 화성이 개발되고, 인공지능이 공공정책을 결정한다. 마치 ’2020 우주의 원더키디‘가 그린 미래(현재 시점에서는 과거가 되어버린)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한 시나리오다. 마지막은 ’자원보존사회‘ 시나리오다. 기후변화와 환경문제로 좌절을 겪은 인류는 지속가능성을 중심으로 사회를 운영한다. 에너지와 식량의 소비를 국가가 강하게 통제하는 전체주의적 성향의 미래라는 특성이 있다.

이러한 4가지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토론을 거친 100여명의 참가자들이 희망하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놀랍게도 절반에 가까운(46.4%) 참가자들이 ’붕괴와 새로운 시작‘ 시나리오를 선택했다. ’계속성장사회‘ 시나리오(28.7%)와 ’과학기술이 변화를 이끄는 사회‘ 시나리오(16.6%)가 그 뒤를 이었고, 가장 적은 지지도를 보인 시나리오는 ’자원보존사회‘(8.4%)였다. 그런데 가능성이 높은 미래를 질문했더니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절반이 넘는 참가자가 답한 시나리오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원보존사회‘ 시나리오였다. 103명의 참가자 중 52명의 선택을 받았다.

5년 전에 진행되었던 인식조사의 결과를 현재 시점에 복기해보니,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자원보존사회’라는 시나리오를 가장 가능성이 높은 미래로 예측했던 참가자들의 판단에 대한 부분이다. 당시 조사의 참가자들은 민주주의와 자치가 강화된 공동체적인 미래로서 ‘붕괴와 새로운 시작’ 시나리오에 가장 높은 지지를 보였으나, 현실이 될 시나리오로는 국가에 의한 통제와 전체주의적 경향이 강화된 ‘자원보존사회’를 선택했다. 그로부터 5년 뒤, 위기를 마주한 한국사회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질문해보면 이 같은 예측은 매우 정확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긴박한 위기가 민주주의의 시간을 빼앗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위기에 대해 정확히 진단할 새 없이, 지침이 되어 내려온 규칙에 동참하는 것으로 시민의식의 성숙도를 검증받는다. 두 번째 시사점은 희망하는 미래와 가능성이 높은 미래 사이의 간극에 대한 질문이다. 희망하는 미래로 가장 높은 지지를 받았던 ‘붕괴와 새로운 시작’ 시나리오나 가능성이 높은 미래로 지목된 ‘자원보존사회’ 모두 기존 시스템이 실패할 것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기존 시스템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이는 ‘계속성장사회’나 ‘과학기술이 변화를 이끄는 사회’는 희망적이지도 않고, 가능성 역시 낮은 시나리오로 판단된 셈이다. 그런데 참가자들은 민주주의와 자치가 위기를 돌파할 무기가 되는 사회를 희망하면서도 이를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목표라고 여겼다. 그리고 현실의 세계에서 민주주의와 자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으로 예측한 것은 전체주의적인 통제와 이를 수행하는 국가인 것이다.

나는 희망하는 미래와 가능성이 높은 미래 사이의 간극을 좁혀 가는 것이야말로 사회운동이 설정할 수 있는 최고의 목표라고 생각한다. 될 것 같은 미래가 아니라 되어야 할 미래를 설정하고, 사회의 경로를 그에 맞추는 것이야말로 기후위기 시대의 사회운동이 가져야 할 최우선 과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점점 더 희망하는 미래를 상상하는 행위보다는, 될 것 같은 미래에 적응하는 방식으로 개인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구성하고 있는 것 같다. ‘더 나은 미래는 가능하다’고 했던 구호들은 더 이상 힘을 갖지 못하게 되었고 유토피아적 실험들은 철지난 것들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현실 개입력을 명분으로 제도화된 사회운동이 어떤 미래적 구상을 공유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자리들은 점점 더 드물게 되었고, 위기적 인식이 강화한 도덕적 명령이 토론과 학습을 대체한 덕분에 사회운동의 확장은 기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결과 팬데믹 이후의 미래를 질문하는 행위도 매우 협소해진 것만 같다. 팬데믹 이후의 일상이 팬데믹 이전의 상태로 복귀하기를 욕망하는 흐름은 여전히 강력하고, 이 욕망을 추수하는 것에 현실정치의 모든 역량이 소진되고 있는 모양새다.

20세기에 시작하여 21세기로 이어진 사회적 실험의 검토를 시작하며

그럼에도 우리의 역사가 항상 절망적인 상태로 가득했던 것은 아니며, 절망적 전망이 항상 더한 절망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근거 없는 낙관보다는 개인과 사회에 대한 성찰적인 태도로부터 형성된 생산적인 우려가 사회적인 동력으로 조직되어 위기를 돌파할 계기를 마련한다고 보는 것이, 우리가 역사를 학습한 결과로서 타당한 관점이다.

될 것 같은 미래가 아니라 되어야 할 미래를 설정하고, 사회의 경로를 그에 맞추는 것이야말로 기후위기 시대의 사회운동이 가져야 할 최우선 과제다. by Christian 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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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것 같은 미래가 아니라 되어야 할 미래를 설정하고, 사회의 경로를 그에 맞추는 것이야말로 기후위기 시대의 사회운동이 가져야 할 최우선 과제다.
사진 출처 : Christian Lue

어느 시대에나 미래적 전망을 둘러싼 경합은 존재한다. 20세기 역시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경합이 존재했던 시기였고, 각각의 행위자들은 그 전망을 실현하는 시스템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시스템은 실패했고, 어떤 시스템은 유지되고 있으며, 어떤 시스템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자랑한다. 그 결과 지금의 인간 사회는 한 가지 강력한 시스템이 자리 잡은 듯하다. 전지구적인 신자유주의와 성장주의 이데올로기가 그것이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치명적인 위기로 가득한 2021년이 더 위기적인 이유는, 더 이상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미래적 전망을 둘러싼 경합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절망적인 조건 아닐까?

이런 절망적 조건이 마련되기까지 여러 가지 변수들이 작동했겠지만, 한 가지 내가 갖고 있는 가설은 인류가 수행했던 여러 가지 사회적 실험들을 충분히 복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작은 조직에서도 가장 곤란하고 고약한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은 ‘해봐서 아는’ 분위기가 만들어질 때이다. ‘해봐서 안 된 것을 아는 것’과 ‘무엇을 해봤으며 그것이 어떤 점에서 부족했는지 아는 것’은 완전히 다른 전개를 만들어낸다. 나는 우리 사회에 해봐서 안 된 경험은 축적되었는데, 그 경험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는 작업은 매우 부족하다고 의심하고 있다. 특히 구체적인 사회운동에 대한 분석에 대해서도 그러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사회운동이 가장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는 순간을 기록하는 데 익숙하지만, 그 이후의 장면들을 추적하고 분석하는 것에는 인색하다.

그런 점에서 더 늦기 전에 20세기에 시작되어 21세기로 이어진 어떤 사회적 실험을 복기하는 작업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바로 ‘야마기시즘’이라고 알려진 실험이다. 야마기시즘은 일본의 야마기시 미요조(山岸巳大藏)가 제창한 이념으로 ‘무소유 일체사회’를 지향한다. 이러한 이념을 실현하여 무소유, 공용(共用), 공활(共活)의 사회원리를 적용한 장소가 바로 ‘야마기시즘 실현지’이다. 야마기시즘 실현지는 1958년 일본의 미에현 가스가야마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이후 7개국 40여개소로 확장되었다. 한국의 경우 1984년 경기도 화성에 야마기시즘 실현지가 만들어졌고, ‘산안마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야마기시즘은 한국에서는 주로 이즘의 구현 장소인 실현지가 강조되며 공동체운동의 사례(이근행, 2006)로 연구되거나, 대안공동체(이동일, 2011), 생태공동체(김성균, 2001) 등의 범주에서 소개된 바 있다. 생태공동체적 실험 중에서도 야마기시즘 실현지를 생명지역주의(bioregionalism)의 구체적인 실천 사례로 지목한 연구(송명규, 2000)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2000년대 초반까지 수행된 야마기시즘 실현지에 대한 연구는 생태주의에 기반한 계획 공동체의 성공적인 사례로서 야마기시즘 실현지를 언급하는 특징이 있다.

반면, 사회운동의 관점에서 야마기시즘을 분석한 연구는 잘 확인되지 않는다. 야마기시즘 실현지가 주로 농업에 기반하고 있으며, 자연과 인위의 조화를 핵심 가치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넓은 범주에서 생태주의 공동체로 분류된 근거는 충분하며, 합리적인 접근이었다고 보인다. 하지만, 야마기시즘 자체는 회(會, association)를 조직하여 이를 기반으로 이념을 전파하려 했다는 점에서 확장을 목표로 하는 사회운동의 특성을 갖고 있다. 야마기시즘 실현지가 향후 만들어 질 야마기시즘 사회의 ‘식량기지’ 역할을 한다는 구상은 운동적 특성을 지닌 야마기시즘의 목표를 유추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야마기시즘 실현지는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분배하다는 공산주의적 유토피아를 실현한 작은 실험이기도 한데, 이에 대한 분석 역시 부족한 편이다. 주로 생태주의 공동체로 야마기시즘 실현지를 분류하면서 야마기시즘이 담고 있는 급진적인 사회경제적 지향은 강조가 되지 않은 탓이다. 물론 생태주의는 그 내용 면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한계에 주목하고, 이를 극복하는 것이 생태적 위기에 대응하는 방법이라 공히 강조하고 있지만 분석 대상을 공동체적 실험에 한정한 탓에 보편적 사회기획으로서 제안된 야마기시즘의 경제 시스템을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현재 시점에 야마기시즘 실현지가 채택한 무소유, 공용, 공활의 사회원리가 어떻게 수행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소유, 공용(共用), 공활(共活)의 사회원리를 적용한 장소가 바로 ‘야마기시즘 실현지’이다.  by Rodolfo Quirós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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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공용(共用), 공활(共活)의 사회원리를 적용한 장소가 바로 ‘야마기시즘 실현지’이다.
사진 출처 : Rodolfo Quirós

우선 야마기시즘이 제안한 미래적 전망과 그 경로를 검토할 것이다. 야마기시즘의 사회기획은 종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에 존재하는 특정 이론의 구체적인 사례로 야마기시즘을 연구하는 작업은 유의미하지만 한계가 있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생명지역주의 실천의 사례로서 야마기시즘 실현지를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인간 개인의 존재보다는 자연과 인간, 모든 생명의 연결과 순환을 강조하는 인식론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체적 실체를 강조하는 전일주의적 관점과 연결되고, 이는 생명지역주의가 채택한 환경윤리관과 공유하고 있는 지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명지역주의는 ‘생명지역’을 “인위가 배제된, 그곳의 생활양식의 풍토와 생물상으로 정의되는 지역”으로 규정하는데(송명규, 2000), ‘자연과 인위의 조화’를 모토로 삼고 있는 야마기시즘의 가치 체계가 이와 온전히 일치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야마기시즘은 이즘의 실천적 장소로서 실현지를 ‘공동체’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다른 의견을 밝혀온 바 있다. 야마기시즘의 생활원리는 개(個)가 연합한 공동의 생활이 아니라, 연속된 개(個)의 존재를 자각함으로서 일체(一體)화(化)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 대표적인 이유(야마기시즘 실현지 문화과, 1999)이다. 따라서 ‘실현지’라는 정주 장소를 중심으로 야마기시즘을 ‘공동체’적 경험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야마기시즘은 보편적 사회 기획으로서 이해할 때 좀 더 정확한 접근이 가능하다. 이런 접근을 통해 구체적으로 어떤 사회화 과정이 이 같은 사회원리의 작동을 가능하게 했는지, 그리고 그러한 사회화 과정이 만들어낸 부작용은 무엇이었는지 질문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을 통해 야마기시즘 실현지의 경험은 체제 전환에 대한 보편적 기획의 구체적인 실험으로서 의미를 획득하게 되고 사회운동으로서 그 기능을 재확인하게 될 것이다. ‘언젠가 도래할 이상사회를 미리 살아본다’는 것이 야마기시즘 실현지가 공유한 태도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미리 살아본 이상사회의 경험을 분석하는 작업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지금부터 하는 일은 야마기시즘을 특정 이론의 수행 경험으로 규정하여 해석하기보다는 야마기시즘이라는 사회 기획 그 자체에 집중해서 이러한 기획의 역사적 맥락을 살피고, 미래적 전망이자 구체적 경험으로서 야마기시즘이 현재 시점에 던지는 시사점을 발굴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야마기시즘의 미래 전망에는 앞서 살펴 본 경향신문의 청년 미래인식 조사가 제시한 4가지 미래 시나리오의 내용이 고루 담겨있다. 이런 복잡성은 경험적 자산이 갖고 있는 강점이다. 예를 들어, 야마기시즘이 갖고 있는 농업에 대한 태도나 사회운영의 방식은 많은 부분 ‘붕괴와 새로운 시작’ 시나리오와 닮아 있다. 하지만 야마기시즘은 과학, 특히 기계화가 갖고 있는 긍정적 전망을 부정하지 않았다. “기계화할 수 있는 면은 될 수 있으면 기계화해서, 사람은 사람 밖에 할 수 없는 일을 한다”는 것이 야마기시즘 실현지의 기계관이었다(야마기시즘 실현지 문화과, 1999). 또한, 야마기시즘은 생산성의 증진과 물질적 풍요 역시 이상사회가 구축되기 위해 도달해야 할 목표로 삼는다. 이러한 면모들은 지금과는 다른 생태적 한계에 대한 인식이 존재했던 20세기적 맥락이 작동한 결과일 수 있지만, 어쨌든 ‘과학기술이 변화를 이끄는 사회’ 시나리오나 ‘계속성장사회’ 시나리오의 어떤 전제들을 적극적으로 기각하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자원보존사회’ 시나리오는 전체주의적 경향이 강화된다는 점에서 야마기시즘이 지향하는 사회운영원리와 거리가 있지만, ‘일체사회’라는 개념이 ‘전체주의’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탐구하게 하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야마기시즘은 ‘우두머리나 관리직이 없어 명령이나 통제가 존재하지 않지만, 각자의 자유의지에 의한 임의의 자각으로 역할을 다하는 사회’(야마기시즘 실현지 문화과, 1999)를 지향한다. 이것은 야마기시즘이 채택한 운동론의 핵심이기도 한데, 야마기시즘은 의식혁명을 통해 사회, 정치적 혁명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고, ‘야마기시즘 특강’, ‘연찬학교’와 같은 프로그램이 이러한 의식혁명의 도구로 역할하고 있다. 실제로 야마기시즘 실현지에는 임금도 분배도 없었다. 1990년대에 야마기시즘이 사회적으로 주목 받았던 맥락에는 야마기시즘 실현지가 ‘경쟁’에 기반한 시스템을 채택하지 않고 무소유 일체경영이라는 원리를 구현하였음에도 전체적으로는 놀라운 생산력을 갖추었다는 점이 있었다. 우리가 여전히 시민의식의 성장이나 새로운 시티즌십(citizenship)의 등장을 전쟁이나 파시즘에 의지하지 않고 민주적 원칙과 협력에 기반해 치명적 위기를 돌파할 가능성의 근거로 인정한다면, 의식혁명을 목표이자 방법론으로 선택한 야마기시즘의 경험을 복기할 필요성은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이념적 지향을 실현하고자 했던 실험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도 살펴볼 것이다. 사이좋은 마을, 일체사회라는 이념이 머리에만 존재하고 실천에서는 부족했다는 평가(김현주, 2018)는 큰 시사점을 준다. 예컨대 야마기시즘 사회는 법과 규범으로 다스려지는 사회가 아니라 ‘인간애의 기조 위에 성립되는’ 사회를 지향하고 있는데(송명규, 2000), 이러한 지향은 공식적인 장(長)이 없는 실현지의 운영방식으로 구현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로 오랜 기간 실현지에 있었던 사람에게 정보가 몰리기도 하고, 이념에 대한 이해의 격차도 발생하는데 이러한 차이가 권위가 되는 과정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다는 평가(김현주, 2018)는 여전히 대안으로 제시되는 급진적 민주주의의 지향이 비공식적 권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왜곡될 우려를 사전에 학습하게 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나는 야마기시즘이 매우 멀리 던져진 깃발과 같은 이념이라고 생각한다. 그 거리가 너무 멀다보니 깃발을 던지는 행위에도, 깃발 주변에 모여 있는 행위에도 부자유적인 상황이 뒤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누구도 깃발을 쉽게 던지지 못하게 된 시대에 멀리 던져진 깃발의 자리와 방향이 적당했는지, 그 자리에 가기까지 부족했던 것이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실증적인 차원에서 존재하는 경험으로 말이다.

미리 고백하건대, 여러모로 부족한 글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작업을 용기내어 시작하는 이유는, 질문도 사라지고 미래적 경로를 전망하는 행위도 줄어든 위기의 시대에 기존에 존재했던 미래적 전망과 그 경로를 실현하고자 했던 실험을 복기함으로써 다시 질문하고 전망하기를 제안하기 위해서이다. 10회에 거쳐 글을 이어갈 예정이다. 부디 이 행위가 나와 동료시민들이 비판적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낙관적 전망을 만들어가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 김성균. 2001. 「생태공동체 운동의 오늘과 내일」. 《도시와 빈곤》 51, 17~29쪽.
  • 김현주. 2018. 「산안마을, 시대와 함께하다」. 제11회 마을만들기전국대회 발표자료.
  • 송명규 외. 2000. 「생명지역주의(bioregionalism)의 이론과 실천: ‘산안마을’을 사례로」. 한국학술진흥재단 ‘98 인문사회중점영역연구 최종보고서.
  • 야마기시즘 실현지 문화과. 1999.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야마기시즘 농법: 돈이 필요없는 사이좋은 즐거운 마을 이야기』. 야마기시즘 실현지 출판부 역. 야마기시즘 실현지 출판부.
  • 이근행. 2006. 「한국 공동체운동의 형성과 전개에 관한 연구」. 성공회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 이동일. 2011. 「대안 공동체의 유지와 한계: 변산공동체와 야마기시 실현지를 중심으로」. 부산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 이효상, “[부들부들 청년][1부①우린 붕괴를 원한다]그래도 세상은 변하지 않을 거야…현실은 비관적”. 경향일보. 2015.12.31.
  • 정대연·송윤경, “[부들부들 청년][1부①우린 붕괴를 원한다]이대로는 ‘노답’…‘리셋’된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경향일보. 2015.12.31.

이태영

야마기시즘 실현지(산안마을), YMCA, 체화당과 풀뿌리학교, 녹색당에서 성장하고 배우고 일했습니다. 지금은 제주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소유자나 소비자가 아닌 정체성으로 지역-사회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고, 이에 대해 질문하고 탐구하는 이가 되고자 합니다. 

댓글 2

  1. 잘 읽었습니다
    제 삶이 , 제가 몸 담고 있는 곳이 , 어떤 의미로 조명될지 흥미롭습니다
    한 연구자의 시선은 그냥 시선이 아니라 이미 산안마을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 적극적 실행위라고 여겨지니까요

    1. 안녕하세요. 아마도 결국은 부족할수밖에 없는 작업이 될 것이지만, 작은 벽돌 하나 쌓아올린다는 심정으로 해보려고 합니다.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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