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댁 이야기] ⑥ 느그 각시가 쏘삭거렜제?

보성댁은 가난한 시누이 걱정을 하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시누이를 도우며 살아간다. 아이들이 태어나 자라는 것을 보며 남편은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고향을 떠날 결심을 하고, 아들을 보내기 싫은 시어머니는 보성댁 탓을 한다.

보성댁이 처음 시집을 갔을 때는 시부모는 물론 시숙네 가족도 함께 살았다. 그리고 남편 남매의 맏이인 큰 시누이도 같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큰시누이네 집은 가난했다. 그래서 시어머니는 늘 큰딸의 일을 마음에 두고 애탕글탕했다. 어쩌다 먹을 만한 반찬이 상 위에 올라오면 당신 몫의 반찬을 슬그머니 상 아래에 내려두었다. 밥을 다 먹고 나면 그걸 들고 쭈뼛쭈뼛 큰딸의 집으로 향하였다. 큰딸네에 갖다 주려는 거다. 큰며느리인 동서는 그걸 매우 못마땅해 했다. ‘어매는 왜 저러는가 몰라?’하며 궁시렁댔다. 시어머니는 그런 큰며느리와 큰아들이 못내 서운했다. 하루 세 끼를 제대로 먹지 못 하는 때가 많은 큰딸의 모습이 늘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뭐든 갖다주고 싶었지만 큰며느리의 눈치는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방되기 전, 만주에 가면 농사가 잘 되어서 배는 곯지 않는다는 말에 시부모는 이미 가정을 이룬 큰아들과 부자집으로 시집을 간 작은 딸을 두고 막내 아들인 상덕씨와 너무 가난해 먹고 살기 힘들어하는 큰딸네 식구를 데리고 만주에 가서 살았었다. 상덕씨가 보성댁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의하면 그 만주땅이 기름져 배는 곯지 않고 살았다고 했다. 윗동네라 벼농사가 잘 되지는 않았지만 감자를 심으면 어린 아이 머리통만한 감자가 나왔다고 했다. 감자나 따며 두어 해 배 곯지 않고 살았지만 해방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해 여름에 캔 머리통만큼 큰 감자를 갖고 올 재간이 없어 두고 오면서 너무나 아쉬워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내려왔다고 했다.

상덕씨는 아이가 주변 사람들을 따라하는 걸 보며 순천으로의 이사를 결심한다. 더 나은 교육환경을 위한 이주는 부모의 삶이 어느 만큼 아이의 성장에 스며 있는지 옅보게 한다. 사진출처 : Don O'Brien
상덕씨는 아이가 주변 사람들을 따라하는 걸 보며 순천으로의 이사를 결심한다. 더 나은 교육환경을 위한 이주는 부모의 삶이 어느 만큼 아이의 성장에 스며 있는지 옅보게 한다.
사진 출처 : Don O’Brien

그러다 보니 대목인 큰아들과 갯것일을 잘하는 큰며느리의 경제력에 기대어 살게 된 처지여서 시어머니는 큰며느리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못 먹어 얼굴이 홀쭉한 딸을 보고도 뭣 하나 기꺼이 나누지 않는 큰며느리가 맘에 들지 않았다. 큰며느리는 갯것일을 잘 해 돈은 잘 벌었지만 나누고자 하는 마음은 부족했다. 부창부수라더니 큰아들도 그랬다. 손에 쥔 것은 좀체로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두 부부가 고생을 해서 돈을 버는 걸 생각하면 그 마음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지만 서운한 건 서운한 거였다.

그에 비해 보성댁은 어른 깍듯이 섬기고 고분고분해 시어머니는 작은 며느리가 더 마음이 편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시숙네가 당머리에 땅을 사고 집을 새로 지어 이사갈 때 시어머니도 당연히 따라갔지만 시어머니는 여수머리에 남아 살고 있는 보성댁 집에 자주 와서 며칠씩 지내다 가곤 했다. 시어머니는 큰아들 집을 두고 작은아들 집에 자주 오는 게 스스로도 민망했던지 ‘느그집은 성당이 가까운께 성당 댕기기가 좋아야.’라고 하곤 했다. 성당이 사람 많이 사는 면소재지로 옮겨 간 뒤에도 시어머니는 종종 왔다. 시어머니가 보성댁 집에 오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사실 따로 있었다.

시어머니의 딸 사랑은 며느리의 몫

시어머니가 집에 오신 날이면 보성댁은 평소보다 신경써서 밥상을 차렸다. 갈치도 한 토막 굽고 갯바닥에 가서 모처럼 잡아 온 낙지를 넣고 국도 끓였다. 밥상 앞에 앉은 시어머니는 당신 앞으로 놓아둔 갈치 토막을 보더니 슬그머니 접시를 상 아래로 내려 놓았다. 그걸 본 보성댁이 말했다.

“어무니, 그 갈치 그냥 잡수씨요. 성님네에 갖고 갈 거 따로 뒀응께. 낙지국도 따로 한 냄비 떠놨응게 진지 잡숫고 갈치랑 성님집에 갖다 주시씨요.”

“이, 그래? 이이 알았다 알았어. 글믄 이건 나 묵을란다.”

시어머니는 겸연쩍어 하면서도 반색을 하며 말했다. 어려서부터 어른들을 공경하고 공손하게 대해야 한다고 친정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온 보성댁은 이렇게 하는 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첫딸이라고 서운해 하지 않고 자신에게 많은 사랑을 주고 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보성댁은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는 일을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큰며느리가 딸 셋을 줄줄이 낳고 작은 며느리도 첫 아이로 딸을 낳고 그나마 바로 세상을 뜨고 하는 걸 겪으며, 시어머니는 많이 속상해 했다. 당신은 그래도 딸 둘에 아들 둘을 낳아서 집안 대를 잇게 했는데 왜 며느리들은 아들을 못 낳는지 애가 닳았다. 그러다 작은 며느리가 두 번째 아이를 떡하니 아들을 낳아 큰며느리가 아들을 못 낳아도 이 애를 데려다 장손 삼으면 되겠다 했는데 이레 후에 큰며느리가 아들을 낳아 이젠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았다. 그런 귀한 아들을 돌이 되자마자 젖을 떼어버린 작은 며느리가 마음에 안 들었다. 보성댁은 그 이후로 일곱 남매를 더 낳으면서도 늘 아이가 돌이 지나면 젖을 먹이고 싶지 않아져서 그렇게 다 젖을 뗐다. 그건 후의 일이고 시어머니는 갓 돌이 지난 아이의 젖을 뗀 며느리가 참 독하지 싶었다.

“아이, 저 어린 게 안 짠하냐? 어째 벌써 젖을 안 멕인다는 거야?”

“어무니, 지도 멕애볼라고 했는디 못 하겄어요.”

“아이고, 니는 에미가 되가꼬 어찌 그리 독하다냐? 저리 애타게 젖 찾는 게 안 뵈기냐?”

“어무니, 지도 멕일 수 있으믄 멕이지요.”

“으이그, 독한 것, 독한 것…….”

젖을 떼고 나니 보성댁은 달거리가 시작되었고 두어 번의 달거리 후 둘째가 들어섰다. 늘 잘 먹던 고구마 줄기 볶는 냄새가 역하게 느껴지며 먹은 것을 토하기 시작했다. 시어머니의 닦달에 억지로 물렸던 젖은 더 이상 물릴 수가 없게 되었다. 가슴이 아프고 당겨서 도무지 젖을 물릴 수가 없었다.

“어떤 놈이 나올지 알아서 저 귀한 큰아들 젖을 안 멕일꼬?”

시어머니는 궁시렁대며 딸이 나오기만 해봐라고 벼르고 기다렸다.

“씨잘 데 없는 가시내가 나오기만 해 봐. 나가 가만 안 둘 것이여.”

둘째를 낳고 보니 아들이었다. 그것도 피부도 하얗고 잘생긴 아이였다. 시어머니가 벼르고 있는 것을 모르지 않는 보성댁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잘생긴 사내아이가 태어나니 시어머니의 잔소리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아들을 낳아야 구박을 면하던 시절

이렇게 두 번째 아이가 태어나자 상덕씨는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 마을에서 계속 살아야 하나, 아니면 순천으로 이사를 가는 게 좋을까. 상덕씨가 그런 고민에 빠진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아내인 보성댁이 바다와는 거리가 먼 곳에서 살다 이 바닷가 마을로 시집을 오니 이 마을 다른 아낙들처럼 갯것을 하러 다니게 되었다. 다른 아낙들은 여수머리에서 나고 자라며 어려서부터 갯일을 다닌 사람이 많았고 그러지 않더라도 당머리나 둑실 등 바닷가에서 자라 갯일을 하며 자란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보성댁은 보성읍에 살면서 갯일하고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고 그러다 보니 갯일을 하러 나가는 아낙네들은 물론 자신보다 어린 처자들보다 갯일이 서툴렀다.

연지곤지를 찍고 초례청에서 혼례식을 올리거나 형편이 어려워 그야말로 물 떠놓고 절을 하는 걸로 혼례식을 끝낸 다른 아낙들과 달리, 성당에서 신식으로 면사포 쓰고 혼인을 한 것이며 학교를 다니다 말았지만 글을 곧잘 읽는 것 등으로 해서 이웃 아낙들의 경원의 대상이 된 보성댁이었다. 그런 보성댁이 정작 갯일에서는 어린 처녀애들보다 못 하니 다른 아낙들은 보성댁을 은근히 무시하기 시작했다. 물론 보성댁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아낙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뒤에서 보성댁을 흉보는 아낙들이 적지 않았다. 보성댁이 갯일에 서툴다는 것만 그들의 입길에 오른 게 아니라 보성댁이 남편과 겸상해서 밥 먹는 것도 그들의 흉거리였다.

“하이고 보성댁은 서방이랑 점상(겸상)을 해서 밥 묵대? 먼 그런 각시가 있는가 몰라?”

우연히 보성댁 집에 왔다가 남편과 둘이 겸상을 해서 밥을 먹는 것을 본 가산댁이 우물가에서 빨래하며 다른 아낙들에게 한 말이었다. 물을 길러 갔던 간터댁이 그 말을 듣고 보성댁에게 옮겼다. 서방, 각시 단 둘이 살면서 겸상해서 밥 먹는 게 뭐가 잘못인가 싶었다.

보성댁이 처음 시집을 오고 그 다음 날 보성댁은 손윗 동서와 함께 밥상을 준비했다. 밥상이 거의 차려지자 동서가 자신의 큰딸 아이를 불렀다.

“영애야, 가서 할매랑 하네랑 느그 아부지랑 밥 묵게 오시라 해라.”

“이, 알았네.”

하며 집앞 텃밭으로 간 동서의 딸아이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할매, 하네, 얼렁 와서 밥 묵소”

보성댁은 깜짝 놀랐다.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예절 교육을 받으며 자라온 보성댁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할매, 하네’라고 부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아이에게 어른들을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니라고 가르치지 않는 동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건 이 마을 사람들의 보통 모습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하네, 할매’라 부르고 ‘하소’로 말을 맺는 것은 흔한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이 불편했지만 동서 앞에서 조카들을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남편에게 슬그머니 말을 꺼내 봤다.

“예말이오.”

보성댁은 쑥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남편을 차마 ‘여보’라고 부르지 못했다. 남편도 비슷했던지 보성댁을 부를 때는 ‘어이’하고 불렀다. 무슨 할 말이 있어 부르는 건가 하는 표정으로 남편이 보성댁을 건너다 봤다.

“아그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를 하네, 할매 하고 부르는디 괜찮다요?”

“응? 무슨 말인가?”

“아니, 할아버지, 할머니 하고 불러야제 하네, 할매 하는 건 좀 버릇이 없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글고 말흘 때도 하네 밥 묵소, 할매 어쨌능가 하는 것도 거시기하고요.”

“잉, 무슨 말이다고…….”

그러곤 상덕씨는 생각에 잠긴 듯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자기 조카들 말버릇을 지적해서 기분이 상했나 싶어서 보성댁은 남편 눈치를 살폈다. 이후로 상덕씨는 조카들이 하네, 할매라고 하면 할아버지, 할머니 그래야제 하며 나직하게 조카들을 타이르기 시작했다.

아들들이 태어나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주위 사람들의 말을 따라 하면서 보성댁과 상덕씨는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하네, 할매 하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고 가르쳤지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하네, 할매 하니 아이들은 종종 따라가곤 했다. 그런 아들들을 보면서 상덕씨는 고민을 했고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상덕씨는 자식 교육을 위해 이사를 결심

“어이, 우리 순천으로 이사 가서 사까?”

“예? 순천이요?”

“이, 아무래도 이 동네에서 오래 살다간 아그들 버릇을 잘못 들일 것 같네. 아그들 데꼬 순천으로 이사가세.”

“순천으로 가믄 멋해 묵고 살라고요?”

상덕씨 앞으로 많지는 않지만 농사지어 먹을 땅이 조금 있고 보성댁도 서툴지만 갯것을 하러 다닐 권리를 갖고 있어서 이 마을에서는 그럭저럭 먹고 살고 있었다. 그 무렵 보성댁의 어머니도 보성을 떠나 순천으로 와서 살고 있어서 순천으로 이사를 가면 어머니를 좀 더 자주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반가웠지만 생계 문제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장사라도 좀 하든가 하면 살기는 하겄제. 암만해도 순천으로 가든지 해야제 아그들 교육할라믄 역서 살믄 안 될 것 같네.”

그렇게 상덕씨는 여수머리를 떠날 결심을 하고 형님 내외와 어머니에게 자신의 결심을 알렸다. 누구보다 시어머니가 반대를 했다.

“아이, 순천이라니 먼 소리다냐. 느그 각시가 논밭 폴아서 순천으로 가자고 쏘삭거렜냐? 안 된다. 다 폴아 가꼬 순천 가서 다 느그 처갓집 밑으로 쓸어널라고 그러냐?”

“아니, 엄니 그게 아니라요. 이 동네 살아가꼬는 아그들 다 베릴 것 같아서 그래요. 아그들 교육상 순천으로 갈라고요.”

그러나 시어머니는 막내아들이 조금이라도 먼 곳으로 떠난다는 게 맘에 들지 않았다. 맘 먹고 조금만 걸어오면 만날 수 있는 곳에 살던 아들이 기차를 타거나 하루 종일 걸어가야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이사간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막내아들 내외가 여수머리를 떠나면 큰딸네 집으로 적지 않게 가던 반찬들도 이젠 갖다주지 못하게 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며느리가 시누이네 갖다 주라고 반찬도 곧잘 챙겨 주더니 내심으로는 싫은 걸 하고 있었던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느그 각시가 쏘삭거렜제? 순천으로 가자고 쏘삭거렜제?”

“아니에요 엄니. 저 사람은 한 번도 그런 말 안 했어요. 제 생각이에요. 이 동네가 애들이 보고 배울 게 없어서 이사 갈라고 하는 거당게요.”

상덕씨는 순천으로 이사 갈 결심을 굳히고 살던 집과 논밭을 내놓았다.

최은숙

35년의 교직생활을 명퇴로 마감하고 제 2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소설로 쓰고 있습니다. 올해 91세인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어머니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글로 남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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