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댁 이야기] ③ 고초 당초 시집살이

어머니가 닭고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딸이 보성댁에게 닭고기 요리를 종종 해드리게 되고 보성댁은 자신이 젊었을 적 아기를 가졌을 때 닭고기를 맛있게 먹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딸이 오랜만에 보성댁을 방문했다. 지난번에 외손녀가 왔을 때 감자 넣고 고추장 넣고 볶아준 닭고기를 맛있게 잘 먹었더니 이번에는 간장 양념한 닭고기를 가져와 볶아서 저녁을 차려줬다. 나이가 90을 넘고 몸이 점점 힘들어지니 딸이건 아들이건 한 번씩 이렇게 찾아와 밥을 차려주는 게 참 좋았다. 보성댁은 닭고기를 좋아해서 명절이면 이렇게 딸이 간장양념 해온 닭을 잘 먹었다. 그런데 그때는 사람들이 많아 딸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밥보다는 닭고기를 더 많이 먹는 보성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엄마가 닭고기 좋아한다고 올 때마다 닭고기 해 오는 건 좀 그렇겄제?”

보성댁은 그 말에 좋다 싫다 대신에 자신의 젊을 적 이야기를 꺼냈다.

“나가 닭고기를 좋아하기는 좋아해. 저그 뭐이냐 느그 보고 이야기를 했는가 안 했는가 몰라도 애가 섰을 때 닭고기가 묵고자와서, 닭고기만 묵고자와 죽겄드랑께. 오빠들 서이 슬 때는 그래도 젼딜 만 했는디 느그 큰언니 슬 때게 닭고기가 환장흐게 먹고싶드란 말이다. 다른 건 암껏도 안 먹고 싶고 닭고기만 먹고 잡았제”

“그래서 아부지가 닭고기 해 줬어? 닭 잡아 줬어?”

셋째 아들을 낳고 2년 만에 넷째 아이가 들어서자 보성댁은 닭고기가 너무나 먹고 싶었다. 그때 당시 광양에 살던 때라 광양 장으로 나서는 남편에게 말했다.

아이가 들어서자 보성댁은 닭고기가 너무나 먹고 싶었다. 사진출처 : monica
https://www.flickr.com/photos/kiryu/5921381387
아이가 들어서자 보성댁은 닭고기가 너무나 먹고 싶었다. 사진출처 : monica

“예, 나 닭고기 묵고 잡소. 오늘 장에 가시믄 나 닭 한 마리 사다 주시씨요.”

“이 알았네.”

넷째 아이가 들어선 후 뭘 먹지 못해 야위어 가는 아내가 내심 안타까웠던 남편은 오늘 장에서 꼭 닭을 한 마리 사다 주리라 맘을 먹고 길을 나섰다. 점점 쑥쑥 크는 큰아이 신길 고무신을 사고 집에 와 계시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간고등어 한 손을 사고 닭을 사러 가려는데 누가 불러 세웠다.

“거, 상덕이 아닌가? 상덕이 맞제?”

돌아보니 혼인하고 고향집을 떠나온 후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동네 친구 봉구였다.

“아이,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자네도 광양 사는가?”

“어디가, 처가가 광양 아닌가, 장모가 아파서 집사람이랑 왔다가 잠깐 장구경 나왔네.”

“장모가? 어디가 아프신디? 많이 편찮으신가?”

“이잉, 으디가 잘못 넘어졌는가 허리가 아파서 꼼짝 못 하고 누워 계신다네.”

“아이고 저런”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쪽에서 은자 아부지하고 부르는 소리에 잉, 가네 대답하고선

“잉, 어째 자네는 잘 산가. 나 갈라네. 잘 살소.”

하며 봉구는 가 버렸고 그 바람에 닭을 사야 한다는 걸 깜박 잊은 채 상덕씨는 집으로 돌아갔다.

“나 왔네.”

하며 남편이 집으로 들어서는데 보성댁은 남편의 손부터 확인하며 말했다.

“인자 오시오. 근디 닭은?”

“아, 장에서 갑자기 봉구를 만나갖고 이야기하다가 깜박해부렀네.”

장에 간 남편이 닭을 사가지고 올 거란 기대에 남편보다 닭을 더 기다렸던 보성댁은 갑자기 서러워졌다.

‘어무이가 좋아하는 간고등어는 저렇게 사왔으면서……’

보성댁은 그만 울컥 눈물이 나와 버렸다. 보성댁의 눈물을 본 남편은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자상하지는 않아도 마음이 여린 남편이었다. 그런 보성댁을 보던 남편은 그 길로 돌아나가 닭장수를 하는 옆집에 가서 장닭을 한 마리 사왔다. 남편이 닭을 사오자 보성댁은 물을 끓이기 시작했고 닭을 잡는 옆에 쪼그리고 앉아 닭다리부터 달라고 재촉했다.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생으로 닭발을 뜯어 먹었다. 보성댁이 살아온 세월 속에 그렇게 맛있는 닭고기는 먹은 적이 없었다.

“그 닭발이 왜 그렇게 맛나든지. 쌩닭을 그렇게 먹는디 어째 이빨도 한나도 안 아프고 어째 그리 맛나냐! 그래가꼬 인자 닭을 쌂아 가꼬 한 그륵 먹고 났는디, 그 이튿날이 주일날인디 그날 성당엘 다 갔다니까, 멫날 메칠 암껏도 못 묵고 드러누워 있던 사람이 닭 고놈 묵고 난께 주일 미사를 다 갔다.”

“아부지가 그거 보고 ‘오매 닭 안 잡아 줬으면 어쨌을랑가.’ 그러셨겄네. 흐흐”

“그래가꼬 느그 작은 언니 가졌을 때는, 그 때도 광양 살았는디, 누가 벵아리를 한 마리 키우라고 갖다 주길래 키워 가꼬 요만이나 컸어. 근디 느그 언니 슴서 도저히 못 젼디겄길래 그놈 잡아주라 그랬어. 그래가꼬 잡아 묵었그만. 할무니가 덜 좋아 하드라. 느그 할무니가”

“씨어매라.”

“흐흥, 닭 한 마리 있는 걸 못 봐서 묵어쁜다 금시롱. 그으, 이상하게 쪼끔 묵으믄 안 묵고잡아. 그럼시로 그러고 묵고자바.”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 보면 임신한 각시가 밤중이고 새복이고 묵고 싶은 거 있다고 신랑 깨워서 기어이 사오라고 하고선, 막상 사오면 한 번 묵고 안 묵어불고 아니면 냄새 난다고 저리 치우라고 하는 거 종종 나오잖아요.”

“쪼깜 묵고 안 묵고 자운께 아부지하고 할무니하고 둘이서 다 묵었어.”

“아니, 근디 할머니는 큰아들이 돈도 많고 우리 아부지는 가난했는데 왜 자꾸 엄마네 집에 와서 살았다요?”

“……”

구술의 기억은 일상의 역사다. 보성댁의 이야기가 간직하고 있는 건 단지 한 여인의 이야기나 한 집안의 내력에 머물지 않는다. 사진출처 : The Manic Macrographer
https://pxhere.com/ko/photo/289686
구술의 기억은 일상의 역사다. 보성댁의 이야기가 간직하고 있는 건 단지 한 여인의 이야기나 한 집안의 내력에 머물지 않는다. 사진출처 : The Manic Macrographer

“하긴 큰엄마가 욕심이 좀 많기는 했제. 작은 메느리가 큰 메느리보다 속아지가 좋아서 와서 살았으믄 그런 거 가꼬 뭐라 하지 말고 많이 묵어라 그래야지 애기 가진 사람이 그랬다고”

시어머니가 세상을 뜰 때 뱃속에 있던 셋째 딸은 할머니를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할머니에 대한 정 같은 건 없는 듯했다.

보성댁의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친정 식구 데려다가 먹여 살린다고 늘 못마땅해 했다. 보성댁이 5남매를 낳아 기르면서 혼자 아이들을 돌보는 게 힘들어 친정 동생을 데려다가 일을 도와주게 하는 걸 맘에 들지 않아 했다. 보성댁은 ‘갯벌에 찔룩기 같은’ 자식들을 돌보며 그 애기들을 다 돌보는 게 힘들어 어려서 열병을 앓고 바보 같아진 동생을 데려다 어린 애들을 업어주게 했다. 우는 아이들 업어 재워주는 동생이라도 있어서 보성댁은 그나마 견디며 살 수 있었다. 가난한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고 보성댁은 쌀 도매상에 가서 쌀을 가져와 이고 다니며 쌀장사를 했다. 보성댁이 비록 덩치도 있고 키도 커서 힘이 좋았지만 이고 다닐 수 있는 쌀도 한계가 있었고 거기다 아이까지 업고 다닐 수 없어 그렇게 다니는 동안 동생이 아기를 업고 돌보며 있었다. 그렇게 쌀장사를 하고 집에 돌아오는데 동생이 울며 집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안자야, 너 왜 울어? 어디 가?”

“언니, 할머니가 쌀 아깝다고 나 집에 가래. 엉엉”

“뭐? 가지 마, 언니랑 들어가자.”

“할머니가 머라 그런디.”

동생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 주저했다.

“괜찮아 언니가 말할게. 들어가자.”

시어머니는 마루 끝에서 앉아 있다가 동생을 데리고 들어오는 보성댁을 못마땅한 얼굴로 맞이했다.

“어무니, 엄니가 얘 가라고 하셨어요? 저는 얘 있어야 해요. 저 애기 업고 쌀자루 이고 못 다녀요. 나가 쌀 이고 나가면 안자가 나 없는 동안 애기 업어주고 하는데 왜 가라고 해요? 얘 보내고 엄니가 애기 업어주실 거예요? 이제 얘 가란 말씀 하지 마세요”

이야기를 듣던 딸이 물어봤다.

“할매가 애기도 봐주도 않음서 그랬어요?”

“아이고, 느그 할매 애기 못 봐. 옛날 노인이 팔십이 넘은 노인이 어찌케 애기를 업고 뭘 흔데.”

“긍께 애기도 봐주지도 못할 거면서 왜 쫓아 쫓기는 으이! 그게 시집살이 씨엄씨 노릇이지. 아으!”

딸은 자신의 전 시어머니 생각도 나는지 진저리를 치면서 말 했다.

“친정 식구 델다 놓고 다 믹에 살려가꼬 집안 망한다고”

“그래서 큰이모가 솥단지째 놓고 밥 먹었어? 그것도 아니잖아. 긍께 그것이 다 갑질이여 갑질. 씨엄씨 갑질”

처음에 보성댁이 혼인해서 여수머리에서 살다가 순천으로 이사해서 살겠다고 결정했을 때 시어머니는 망해 먹으려고 순천으로 이사간다고 야단이었다. 보성댁의 남편 상덕씨는 서당을 다니며 글을 배웠을 뿐 학교는 다니지 않았지만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신혼 살림을 하던 마을은 생각이 고루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보성댁의 친정은 달랐다. 보성댁의 친정아버지는 할 수만 있다면 자식들에게 공부를 많이 시키고 싶어 했다. 시대가 어려운 시대이다 보니 보성댁은 소학교를 3학년까지만 다니고 못 다녔지만 더 공부를 시키지 못 하는 걸 아버지는 안타까워 하셨다. 그리고 아들이 없이 딸만 있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보성댁의 식구들은 모두가 한 상에서 밥을 먹었다. 그렇게 자란 보성댁은 상덕씨와 혼인하고 부부만 사는 집이어서 묻지도 않고 남편과 겸상을 하고 밥을 먹었다. 그런 모습을 이웃 사람이 보고 저 집은 서방 각시가 겸상하고 밥을 먹는다고 동네방네 흉을 보고 다녔다.

또 여수머리는 바닷가여서 이 마을 여자들은 갯벌에 나가 일을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보성 산골 마을에서 살다가 시집온 보성댁은 갯것일을 하는 것이 서툴렀다. 이 마을 처녀고 부인이고 어지간히 자란 여자들은 갯바닥에 나가 일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그래서 보성댁도 손윗 동서를 따라 갯벌에 다녔지만 이 마을에서 오래 살아 온 여자들처럼 익숙하게 할 수가 없었다. 갯바닥 일을 하고 나오는 보성댁의 바구니는 누가 봐도 다른 사람들 것에 비해 빈약했다. 그것도 마을 사람들에게는 입방아거리였다.

마당에 초례청 차리고 혼례를 올리던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과 달리 순천 시내의 성당에서 면사포를 쓰고 혼례미사를 한 보성댁의 혼례식도 마을 여자들에게는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마을 사람들이 존대말이란 걸 몰랐다. 어린 손자가 할머니나 할아버지에게 ‘할매 그랬는가, 하네 잠 주소.’ 하는 건 예사인 동네였다.

그런 마을에서 보성댁이 외롭고 힘들게 사는 모습을 지켜보던 상덕씨는 이런 곳에서 살면 나중에 애들이 태어나도 보고 배울 게 없겠다는 생각에 순천으로 나가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 시대 남편답게 상덕씨는 아내인 보성댁과 상의없이 혼자 결정짓고 가족들에게 발표했다. 욕심 많고 불퉁스런 큰며느리보다는 어른 말씀에 순종하는 작은 며느리가 순천으로 이사 가버리면 한 마을에 사는 큰딸 집에 반찬 갖다주는 일이 어려워질 거라 생각한 보성댁 시어머니는 심통을 부렸다.

“저거, 즈그 여편네가 쏘삭거려서 가자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덕씨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아들이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시어머니는 아들에게는 말도 못 하면서 딸이나 큰며느리 앞에서 보성댁 탓만 해댔다.

최은숙

35년의 교직생활을 명퇴로 마감하고 제 2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소설로 쓰고 있습니다. 올해 91세인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어머니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글로 남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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