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生生), 회복력 혹은 강요된 여성 젠더 ; 기후 위기 속에서 『주역 계사전』 다시보기

“걔가 애는 착해”라는 말이 있다. 나쁜 짓을 한 사람들 두고 누군가가 이런 평가를 했을 때, “아 그러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런 평가는 그저 참고사항 정도로 들어야 한다. 옛글을 읽으면서도 “그게 원래는 아주 좋은 뜻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정도를 넘어서서, 옛글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옛글 속의 글귀들은 금과옥조처럼 떠받들 때 빛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가 처한 현실 속에서 되씹어볼 수 있을 때 제대로 된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 같다.

『주역 계사전』, 『주역』과 ‘계사’에 대한 해설서

『주역 계사전』은 『주역』과 『주역』에 대한 특정 주석인 ‘계사’를 해설하는 글이다. 유학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중요해서, 한 편의 고전으로 대접받는 글이다. 중국 고대 주나라에서 점을 친 결과를 수습 정리하여놓은 문서라고 할 수 있는 『주역』의 세부 내용에 대하여, 주나라의 문왕과 주공이 가하였다는 주석이 ‘계사’이고, 이를 해설하기 위하여 공자가 썼다는 글이 『주역 계사전』이다. 후대 사람들이 이 고전을 상전 하전 두 부분으로 나누고 각각을 다시 12장으로 나누어 읽었기 때문에, 지금 전하는 『주역 계사전』은 24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 고전을 연구하는 사람 가운데 일부는, 이 글이 공자가 지은 것이 아닌데도, 후대의 사람들이 이 글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하여 ‘공자가 지었다.’라고 했다.

모든 사람에게 권고할만한 처세론

『주역 계사전』은 여러 출판사에서 다양한 버전으로 번역본을 내놓았다. 사진은 지식을만드는지식(정진배 역, 2014)에서 출간한 책표지이다.
『주역 계사전』은 여러 출판사에서 다양한 버전으로 번역본을 내놓았다. 사진은 지식을만드는지식(정진배 역, 2014)에서 출간한 책표지이다.

『주역 계사상전』 제4장에서 주요 부분을 다음과 같이 발췌할 수 있다.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함을 도라 이르니, 계속하여 함은 선이요, 갖추어 있음은 성이다. …… 백성들은 날마다 쓰면서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가 드문 것이다. …… 낳고 낳음을 역이라 이르고, …… [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 成之者性……. 百姓, 日用而不知.故, 君子之道鮮矣……. 生生之謂易, ……]” 세계에는 변화가 한쪽 극단[극(極)]으로 치우치자마자 변화가 반대 방향[반(反)]으로 전개되기 시작하는 법칙이 있어서, 이 법칙에 다른 변화가 계속 반복되는 것이고, 사람들의 의식 속에도 이 법칙성이 깃들어 있는데, 막상 사람들은 이 법칙성의 영향 속에 살면서도 대부분 그렇다는 것을 모르며, 그걸 아는 사람을 성인군자라고 하며, 그 법칙성은 ‘낳고 또 낳음[生生]’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는 말로 바꾸어 볼 수 있다. 한편 『주역 계사하전』 제1장의 끝부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천지의 큰 덕을 생이라 하고 성인의 큰 보배를 위라 하니, 무엇으로써 지위를 지키는가? 사람이며, 무엇으로써 사람을 모으는가? 재물이다. 재물을 다스리고 말을 바르게 하며 백성들의 비행을 금함을 의라 한다. [天地之大德曰生, 聖人之大寶曰位, 何以守位, 曰仁(人), 何以聚人, 曰財, 理財, 正辭, 禁民爲非曰義.]” 이 글에서는 ‘천지[天地]의 큰 덕’을 생이라 하였는데, 여기에서 살짝 바뀐 ‘하늘[天]의 큰 덕’을 생이라고 하는 말이 후대에 애용되기도 하였고, 더 많이 바뀐 생생지덕(生生之德)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이 말은 『주역 계사상전』 제4장의 ‘낳고 또 낳음[生生]’이라는 것을 승화시켜 세계의 회복력과 사람의 재생산 능력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뒤에는 글을 쓴 사람이 성인[왕]에게 권하는 처세론이 이어진다. 『주역 계사전』 전체의 마지막 장인 『주역 계사하전』 제12장은 다음과 같이 끝나는데, 이곳에서는 처세론의 성격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장차 배반할 자는 그 말이 부끄럽고, 중심이 의심스러운 자는 그 말이 산만하고, 길한 사람의 말은 적고, 조급한 사람의 말은 많고, 선을 모함하는 사람은 그 말이 왔다갔다 하고, 그 지킴을 잃은 자는 그 말이 굽힌다. [將叛者, 其辭慙, 中心疑者, 其辭枝, 吉人之事, 寡, 躁人之辭, 多, 誣善之人, 其辭遊, 失其守者, 其辭屈.]”

『주역 계사전』의 내용 대부분은 『주역』에 대한 주석 가운데 하나인 ‘계사’에 대하여 해설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군자(君子)의 도(道) 달리 말하자면 지배자의 처세론을 많이 담고 있기도 하다. 또한, 『주역 계사상전』 제4장 주요 부분 발췌에서는 세계에 대한 설명과 인식의 방식 즉 세계관이 보이기도 한다. 『주역』 자체가 나름의 독자적 논법과 구조로 되어 있는 텍스트이기 때문에 해설이 필요하고 『주역 계사전』은 그 해설서인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지만, 후대의 사상가들은 이 책 속 지배자의 처세론에도 큰 관심을 보여서, 여기에 해설을 붙여서 모든 사람에게 권고할만한 처세론으로 만들었다. 이 처세론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다.

음·양 대대(待對)에서 출발하여 가치의 층차가 있는 음·양 이분(二分)으로 귀결되는 세계관

『주역 계사전』의 또 다른 주요 내용 가운데 하나는 세계관이다. 그 세계관은 변화하는 세계를 음·양 사이의 관계를 중심 도구로 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20세기 중국의 철학자 펑유란(馮友蘭 1894~1990)은, 서구 세계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1) 양이란 말은 원래 ‘햇볕’을, 음이란 말은 ‘그늘’을 뜻하였으나, (2) 후에 점점 발전되어 음양은 우주의 두 원리, 또는 원동력으로 간주되고 (3) 양은 남성적인 것, 능동성, 더위, 밝음, 건조, 굳음 등을 나타내고, 음은 여성적인 것, 수동성, 추위, 어두움, 습기, 부드러움 등을 뜻하게 되었다. 이 양대원동력의 상호 작용에 의해 우주의 삼라만상이 발생하였다. [183쪽]” [(1), (2), (3)은 필자가 한 구분이다.] 이 설명에 따르면, 음·양 개념은 세 단계에 걸쳐 변화하여왔다. (1) 햇볕이 드는 상태와 들지 않는 상태를 일상적 감각으로 받아들여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 (2) 그 표현을 우주의 두 원리 또는 원동력으로 격상시킨 것. (3) 음·양을 가치의 층차가 있는 이분법적 세계 이해의 틀로 고착시킨 것. (1)에서 음과 양은 질적 특성을 가지지 않는 변화의 양 극점으로 볼 수 있다. 비유하자면 시계추가 운동하면서 도달하자마자 반대 방향으로 운동하기 시작하는 양쪽 끝과 같다. 사계절이 뚜렷한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은, 날씨가 점점 추워져서 가장 추워진 순간이 바로 날씨가 따뜻하여지기 시작하는 순간임을 체험한다. 반대로 그들은 날씨가 점점 더워져서 견딜 수 없이 더워진 순간이 곧 날씨가 선선해지기 시작하는 순간임도 체험한다. 여기에서, 최고로 더운 순간부터 더이상 더 더워지지는 않기 시작하는 더위, 최고로 추운 순간부터 더이상 추워지지는 않기 시작하는 추위, 그리고 뒤바뀜의 두 순간을, 중국의 사색가들은 일찍이 극즉반(極則反)이라는 말로 설명하였다. ‘변화는 한쪽 극단에 도달하지 못하고, 도달하기 직전에 반대쪽 극단을 향하기 시작한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1)의 음·양을 변화의 양극점이라 하였던 것이다. 시간적으로 가장 먼저 발생하였을 이러한 관념은 가장 원시적이고 단순하면서도 포괄적이며 보편적용 가능한 변화 설명 도구이다. 이때 음·양 사이의 관계를 대대(待對)라고 한다. 대대는 상대·반대·모순 등과 구별되는 것으로, ‘같아지지 않으면서도 상호 의존’하는 관계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이에 비하면 (2)의 ‘원리’ ‘원동력’ 등은, 일상 감각인 음·양의 격을 높이기 위해 붙여준 이름인 느낌의 것일 뿐, 그 자체가 가치이거나 새로운 정보를 주는 것은 아닌 듯하다. (3)은 음·양을 대대(待對)하는 관계로 보기보다는 세계 속의 모든 존재를 음·양 가운데 어느 한쪽에 배당(配當)하기도 하고 여기에 존재들 사이에는 층차가 있다는 생각을 결합시키기도 한 결과물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러한 세 단계 설명은, 펑유란이 음·양 개념을 서구에 소개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고안해낸 설명이라기보다는, 중국 문화 형성 전개의 초기에 이미 음·양 개념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세 단계의 변화가 반영된 것인 듯하다. 펑유란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한다. “한 사물이 생성되는 데는 그것을 생성시킬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하며, 또 이 사물을 만드는 데 쓰이는 재료가 있어야 한다. 전자는 능동적이요, 후자는 피동적이다. 능동적인 것은 강건한데 이것이 바로 양이다. 피동적인 것은 유순한데 이것이 바로 음이다. 사물이 생성되려면 이 두 가지가 화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음과 하나의 양을 도라 한다.”라고 말하였다. 만물은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 따라서 양도 될 수 있고 음도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한 남자가 자기 부인에 대해서는 양이지만 이러한 양이 덜 드러났다는 점에서 아버지에 대해서는 음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의미에 있어서의 양은 만물을 생성하는 측면을 말하는 양이요, 음은 만물이 생성된 측면을 말하는 음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한 번은 음이 되고 한 번은 양이 되는 것을 도라고 한다”는 말에 있어서 음양이란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다. [220쪽]” 이 설명에서 펑유란은 음·양의 관계가 대대적(待對的)이라고 보는 관점을 굳게 지키는 듯하다가, 설명의 끝부분에 이르러서는 그런 관점에 유보적인 태도를 미세하게 드러낸다. 양을 ‘만물을 생성하는 측면’으로, 음을 ‘만물이 생성된 측면’으로 설명하는 것은 양과 음을 각각 원인과 결과에 배당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음·양은 이미 속성 내지는 질적 특성을 가진 것이 되며, 각각의 성질들은 층차가 명백한 가치 평가를 피할 수 없게 되는 듯하다. 유교적 교양인들은 오륜(五倫)의 하나인 부부유별(夫婦有別)을 두고, 거기에서의 별(別)이 서로 역할이 다름을 의미할 뿐, 부부유별이 상하관계가 고착된 차별을 정당화하는 행동방침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夫)의 역할과 부(婦)의 역할에 대하여 행하여져 온 가치 평가들을 살펴보면, 차별을 정당화하는 행동방침은 아니라는 주장은 공허해 보이게 된다. 역사 속에서 그리고 지금의 현실 속에서 음·양 대비가 존재들에 적용되는 방식을 보면, 음·양 사이의 관계가 ‘같아지지 않으면서도 상호 의존하는 관계’ 즉 대대적(待對的) 관계라는 설명에서도 공허함이 느껴진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주역 계사전』의 첫 구절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에게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역할을 해 온 글귀이다. 사진출처 : Tim Mossholder
『주역 계사전』의 첫 구절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에게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역할을 해 온 글귀이다.
사진 출처 : Tim Mossholder

『주역 계사전』 여기저기에는 앞서 말한 공허함이 단지 공허함에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글귀들이 흩어져 있다. 『주역 계사전』이 시작되는 부분 즉 『주역 계사상전』 제1장을 여는 글귀부터 그러하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니 건곤이 정해지고, 낮은 것과 높은 것이 진열되니 귀천이 자리하고 …… [天尊地卑, 乾坤定矣, 卑高以陳, 貴賤位矣, ……]” 송나라 시대 주희는 이 글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설하였다. “卑(비: 낮음)와 高(고: 높음)은 天地萬物(천지만물)의 높고 낮은 자리이고, 貴(귀)와 賤(천)은 易(역) 가운데 卦爻(괘효)의 위·아래의 자리이다.” 이 해설에 따르면 “낮은 것과 높은 것이 진열되니 귀천이 자리하고”라는 글귀는 ‘『주역』에서는 세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물을 각기 다른 모습과 위치의 괘효를 가지고 표현할 것이다’라는 주장을 담은 글귀로 풀어볼 수도 있겠다. 이러한 풀이가 맞다면 이 글귀는 단순히 『주역』이 세계를 묘사하는 도구, 장치, 방식에 대한 설명인 것이다. 이 설명에 따른다면, 이 글귀를 가지고, 『주역 계사전』을 차별이 내재화된 사람이 만든 문서라고 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 될 것이다. 보다 설득력 있는 판단을 위해서는 이 글귀와 그에 대한 해설을 『주역 계사전』 전체 맥락 속에서 다시 읽어보아야 할 듯싶다. 이것은 ‘맥락 속에서 다시 읽기’라고 할 수 있겠다.

글귀를 놓아보아야 할 맥락은 하나가 아닐 것이다. 글귀가 원래 들어 있었던 문서도 무시해서는 아니 될 맥락이겠지만, 그 글귀가 떠돌아다닌 역사적 사회적 맥락 또한 중요하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지금 여기의 우리들은, 이 글귀를 보는 순간 많은 사람이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말을 떠올리는 현상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천존지비’라는 글귀를 보며, 주희처럼 생각한 사람이 많았을까? 아니면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생각을 떠올린 사람이 많았을까?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았을 것이다. 결국 『주역 계사전』의 첫 구절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에게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역할을 해 온 글귀인 것이다.

덕(德)이 된 낳고 낳음[생생(生生)]

『주역 계사전』은,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관념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한다는 비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회역사적으로 형성된 여성성을 아주 많은 사람에게 강요하는 데 동원된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비판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다.

글을 시작할 때 발췌하여 제시하였던 바와 같이, 『주역 계사상전』 제4장에는 “낳고 낳음을 역(易)이라 이르고 [生生之謂易]” 라 한 구절이 있고, 『주역 계사하전』 제1장의 끝부분에는 “천지의 큰 덕을 생이라 하고 [天地之大德曰生]” 라 한 구절이 있다.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과 관련하여 주희는 “음은 양을 낳고 양은 음을 낳아 그 변화가 무궁[537쪽]”한 것이 이치 즉 변화의 법칙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변화가 무궁하다는 데 두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세계가 끝나지 않는다는 확신의 표명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추위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봄이 오고 만물이 소생하는 것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의 그 경험의 역사적 누적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유교식 불멸에 대한 확신과 문화 계승 의식으로 번져나갔다. 인간은 몸을 가졌기에 유한한 존재일 수밖에 없지만, 자기를 닮은 존재를 재생산해놓음으로써 죽어도 죽지 않는 것이라고, 유교적 교양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세계가 가진 무한한 회복력에 대한 확신이, 인간의 불멸에 대한 확신이 되었는데, 그런 확신들의 바탕이 되어준 것은 생생(生生) 즉 ‘낳고 또 낳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유교식 불멸은 여성의 몸을 가진 사람들이 출산을 통하여 ‘나’를 닮은 사람을 재생산해 줄 때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역 계사전』에 보이는 생생(生生) 즉 ‘낳고 또 낳음’은, 세계의 회복력을 말하는 것을 넘어서, 여성의 몸을 가진 사람들에게 강요된 젠더 즉 사회역사적으로 형성된 여성성인 재생산 능력이 되는 것이다. 한국에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가진 여자고등학교들이 있다고 한다. “겨레의 밭 : 억세고 슬기로운 겨레는 오직 어엿한 모성에서 가꾸어지나니 이 커다란 자각과 자랑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닦는다” 여기에서 ‘밭’은 일 개인을 넘어 겨레 즉 닮은 사람들을 재생산할 수 있는 몸일 것이다. 일 개인뿐만 아니라 겨레라는 소우주의 문화를 전승할 수 있게 하여준다는 의미에서 이 밭은 ‘천지의 큰 덕’이라는 찬사를 받을 것만 같다. 널리 알려진 이 교훈은 대구여자고등학교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고, 경남여자고등학교 동문들에 의하면 유치환 시인이 경남여자고등학교의 교훈으로 만들었던 것이라고 한다.

『주역 계사전』은 여러 가지 미덕을 갖춘 고전이다. 이 고전 곳곳에는 임금된 자[군자]의 처세에 대한 선의의 권고가 제시되어있다. 이 고전에는, 음·양 개념을 비롯하여, 그러한 권고들을 뒷받침하는 세계관들이 제시되어있는데, 그것들은 2천여 년 전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대단히 세련되고 설득력 있는 것들이다. 특히 그 세계관이 세계의 회복력을 낙관하고 긍정하는 점도 주목할 만하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가 그 옛날에 그 처세론과 세계관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보는 세계와 같은 세계는 아니다. 게다가, 음·양 개념의 전개 과정에서도 보았고 부부유별이라는 행동방침이나 생생이라는 덕[능력]에 대한 인식들 사이의 괴리에서 보았듯, 본래적 의의만을 가지고 어떤 세계관이나 가치를 옹호하는 것은, 공허하다.


[이 글을 쓸 때 보고 인용한 『주역 계사전』 출처 : 朱熹[撰], 成百曉[譯註], 『懸吐完譯 周易傳義』 下, 東洋古典國譯叢書 9, 서울 : 社團法人 傳統文化硏究會, 1998, 522~599쪽.]

[이 글을 쓸 때 보고 인용한 펑유란 글 출처 : 풍우란(저), 더크 보드(편), 정인재(역), 『중국철학사 [한글판]』, 서울 : 형설출판사, 1989 / Feng Youlan, Derk Bodde (Ed.), A Short History of Chinese Pilosophy, Macmillan Inc., 1948.]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