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와 함께 춤추는 존재론 – 도나 해러웨이의 『해러웨이 선언문』를 읽고

도나 해러웨이는 두 개의 선언문을 통해 차이를 기반으로 한 존재론을 제시한다. ‘사이보그’는 기계적인 동시에 유기적인 정체성을 제시하며 이를 사상적이고 정치적인 돌파구로 사용하기를 제안한다. 이러한 혼종적 존재들은 서로를 소중한 타자로 대하며 일종의 ‘반려종’ 관계를 이뤄야 한다.

『해러웨이 선언문』 도나 해러웨이 지음 (2019, 책세상)
『해러웨이 선언문』 도나 해러웨이 지음 (2019, 책세상)

빨간색의 책 표지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저자의 사상을 형상화한 듯하다. 세련된 디자인, 그리고 ‘해러웨이’라는 이름이 현대사상의 어떤 아우라를 주는 덕분인지 이 책은 급진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내가 군부대에서 희망도서 리스트로 신청했을 때 별 무리없이 승인받을 수 있었다. 그때 한 번 펼쳐보았지만, 이번이 제대로 된 읽기 도전이다. 올해 초, 겨울에 진행한 생태철학 스터디에서 네 번째로 선정한 『해러웨이 선언문』은 오직 같이 도전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완독할 수 있던 큰 봉우리였다.

충격적이지는 않다. 이것이 논문임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서술 방식이라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학문적인 글쓰기를 직업적으로 자주 접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 평가가 실감나지 않고, 해러웨이의 개성이 곧 텍스트의 어려움으로 체감되었다. 내용적인 면에서 ‘사이보그’라는 말은 친숙하다 못해 구식 기계 같은 느낌이 든다. 포스트 휴머니즘 계열로 요약되어 소개된 것을 그동안 수없이 접해서 그렇다. 또한, 유기체와 기계의 결합이라는 발상은, 20세기 말의 세계에서는 기술적으로 성취되고 시시각각 촉진되는 일이다.

해러웨이가 정보과학, 생명공학을 그 시대의 상징적인 분야로 거론한다면, 기술사상가 케빈 켈리는 ‘신생물학’을 거론하고 기계의 영토를 따로 마련한다. 사이보그 정체성은 무성적이고 혼종적인 고아인 것이 맞다. 그러므로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드러나는 서구적 서사와 남성 중심주의에서 벗어난 진보 정치를 하기 위해 좋은 전략으로 삼을 만하다. 하지만 사이보그는 또한 ‘지배의 정보과학’이 출현하기 훨씬 이전부터 살아온 자기 조직체이다. 21세기에 사는 나는 케빈 켈리를 먼저 읽었다. 

“하지만 유기체와 기계의 구분을 비롯해 서구적 자아의 구조를 만드는 깔끔한 구분선이 무너지면서 출현하는 독특한 가능성을 단호히 포용할 때, 페미니즘은 엄청난 자원을 얻게 된다.”

p.70.

해러웨이의 두 선언은 다른 존재가 되는 법을 다룬다. 이때의 ‘되기’는 같아지기가 아닌 달라지기를 지향한다. 저자가 ‘근원적 일체의 동일시’로 서구의 기원과 서사를 설명할 때, 그것이 매우 추상적인 문명비판적 차원의 발언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페미니즘이 가야 할 길과 다르다는 것은 능히 짐작될 수 있다. 그가 보기에 사회주의 페미니즘과 래디컬 페미니즘은 각각 노동과 성적 대상화 속에서 ‘여성’을 발견하며, 그렇게 일체화된 ‘여성’ 담론에서 유색인종 여성은 배제되었다.

차이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 있는 존재들과의 그 차이 있음을 최대한의 공통분모로 삼는 것이 바로 사이보그다. 그렇게 한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은, 애초에 ‘공통성’이라는 것이 취약한 허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기체와 기계가 결합했을 때, ‘인간성’이 사라질 것을 우려하는 것과 같다. 신체는 유전자와 젠더를 포함하여 역사적으로 배치된 ‘자연문화’로서 구체적으로 실재한다. 이것을 ‘신기술의 사회관계’ 속에서 적극적으로 재배치하는 것이 사이보그 되기의 참뜻이다.

저자는 네트워크 속에 분산된 차이들을 읽어내고 연결하는 능력이 기술적 변화와 더불어 중요하다고 본다. 이는 「반려종 선언」에서 강조되는 내용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예외 없이 다종적인 존재이다. 팔꿈치의 박테리아 그리고 장내 세균총의 네트워크가 모두 한 사람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다른 종과 반려 관계를 이루어 ‘존재론적 안무’를 이어갈 것을 요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소중한 타자성’을 마주하고 서로 끌어안는 그 순간 우리는 사이보그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며, 함께 살아감으로써 존재한다. 누가 있으며 누가 생겨나고 있는지 묻는 것이 의무다.”

p.108.

배선우

그동안 썼던 별명들은 한때의 나를 잘 설명해줬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또 다른 나.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격언을 실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의미를 추구하며, 세계를 사랑하고 싶습니다. 당분간은 지구를 횡단하며 ‘생활철학자’라는 직함으로, 살고 싶은 길, 살아가야 할 길을 궁리하려고 합니다. 잘 살기 위해 책을 읽고, 주로 서평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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