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리아 미즈(Maria Mies/1931년 2월 6일 – 2023년 5월 15일) …• 학력 : 퀼른 대학교(박사) …• 직업 : 사회학 교수, 작가 …• 소속 : 〈괴테 인스티튜트〉(1963-1967) .…………〈쾰른 대학교 응용과학대학〉(1972-1974, 1981-1993)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사회조사연구소〉(1974-1977) ..………..〈국제 사회학연구소〉(1979-1981) …• 조직 : 〈퀼른 여성 포럼〉, 〈금융거래 과세와 시민행동을 위한 협회〉(Attac) …• 주요 업적 : 『인도 여성과 가부장제』(1980), 『가부장제와 자본주의』(1986), ………….『여성: 최후의 식민지』(1988), 『에코페미니즘』(1993),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1999) …• 배우자 : 사랄 사르카르(1976년 결혼) |

마리아 미즈는 독일의 사회학 교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여성 인권 활동가이자 작가이다. 그녀는 독일 아이펠 화산지대의 농촌 출신으로, 처음엔 교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초등학교 교사로 수 년 간 근무한 후 고등학교 교원 자격증을 딴 뒤에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일하기를 희망해 〈괴테 인스티튜트〉[독일문화원]에 지원했다. 그녀는 인도 푸네의 한 학교에 배정되었는데, 그녀가 맡은 남학생들이 독일어 수업을 듣고 교육을 이어가는 반면, 여학생 대부분은 결혼을 피하려고 그녀의 수업을 듣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쾰른 대학교에서 다시 공부하기 시작한 마리아 미즈는 1971년 ‘인도 여성에 대한 사회적 기대의 모순’을 다룬 논문을 준비해, 이듬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즈는 1960년대 후반부터 활발한 사회 운동을 벌였는데, 그녀의 활동은 여성해방과 평화주의를 옹호하고 베트남 전쟁과 핵무기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1970년대에 퀼른대 응용과학대와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사회조사연구소〉에서 사회학을 가르쳤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여성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된 마리아 미즈는 독일 최초의 여성 쉼터의 설립을 돕고 그곳에서 강의했다. 1979년 그녀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 사회학연구소〉에서 여성학을 정식과목으로 가르치기 시작했고, 저개발국가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페미니즘 이론 기반 석사학위 강좌를 신설했다.
1981년 미즈는 독일 퀼른의 응용과학대학으로 돌아와 에코페미니즘 운동에 몸담으며 유전공학 및 생식[재생산] 기술에 반대하는 활동에 참여했다. 그녀는 여성의 노동을 평가절하하고 눈에 보이지 않게 만드는 과정을 지시하고자 “가정주부화”(housewifisation)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1980년대부터 그녀는 자본주의-가부장제-식민주의의 교집합에 관한 글을 광범위하게 썼다. 미즈는 여성들과 피식민지인이 처한 사회-정치-경제적 위치들 간의 유사성을 맨 처음 인식한 학자 중 하나였다. 그녀의 연구는 여성과 피식민지인의 노동이 자본주의 하에서 평가절하되고 착취된다는 것을 이론화했고, 여성해방 투쟁들이 어떻게 그보다 더 폭넓은 분야인 여성들의 사회정의 및 환경정의 투쟁과 관계 맺는가를 연구했다. 그녀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연구]방법론과 경제학 분야에서 페미니즘적이고 탈식민주의적인 대안적 접근법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여성운동의 역사에 관한 교과서 집필을 포함하는 그녀의 저작들은 국제적으로 분석되었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유년기와 교육
마리아 미즈는 1931년 2월 6일 독일 힐레스하임에서 요한 미즈와 게르트루트 미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시골 출신으로, 프로이센 라인주(州)(현 라인란트팔츠주(州)) 아이펠 화산지대 마을인 아우엘의 한 농가에서 자랐다. 그녀는 열두 자녀 중 일곱째였고, 그들 모두는 교실 하나만 있는 인근 학교에 다니면서 농사일을 병행했다. 어머니는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인물이었고 불같은 성미로 가족을 공포에 빠뜨리곤 했다. 자녀들은 모두 가톨릭 신자로 길러졌다. 마리아 미즈는 가족 모두와 잘 알고 지낸 한 친구와 같이 하숙하면서 게롤슈타인에 있는 중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녀는 그 마을에서 중등학교를 마친 최초의 학생이었다. 이후 그녀는 프륌에 있는 〈레지노-김나지움〉에 입학했지만, 1944년 9월 전쟁으로 인해 학교가 문을 닫았다.
그녀는 1947년부터 트리어에서 교육을 받고 아비투어[독일의 대학입학시험]를 취득한 뒤,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 위해 코블렌츠 소재 교육대학에 입학했다. 그녀는 무상교육을 받기 위해 이수 후 5년간 의무적으로 교직에 종사하는 일에 동의했다. 2년간의 교직을 이수한 뒤에, 처음에는 아우엘의 초등학교로, 이후에는 보름스의 초등학교로 배정받았다. 1950년 미즈는 독일을 여행하던 한 파키스탄 무슬림 관광객 줄피카르(Zulfiquar)와 만났다. 둘의 관계가 연애로 발전하게 되었고, 그들의 만남은 이후 그녀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즈는 그들 각자 믿고 있던 종교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근거로 그의 청혼을 거절했는데, 이 일은 그녀를 종교적 교리와 가부장제를 진지하게 연구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이후 그녀는 자신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수년간 싱글로 지냈다. 1955년 미즈는 새 배정지를 요청해 발령된 트리어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또 익혔다. 1962년 미즈는 중등교사 자격시험을 통과하고 독일 라인란트팔츠주(州)에 있는 모르바흐에서 영어와 독일어를 가르치는 일을 맡았다. 중등 교사직을 썩 내키지 않아 했던 미즈는 〈괴테 인스티튜트〉 아시아‧중동 지역 파견 교사직에 지원했다.
경력과 활동
1963년-1977년
1963년 마리아 미즈는 〈괴테 인스티튜트〉에 5년간 파견직 교사로 채용되어 인도 푸네에서 강의했다. 그녀는 독일어반을 가르치면서 남학생들은 공학을 공부하기 위한 능력을 향상시키려고 입학하는 반면, 여학생 대부분은 자신들의 독립적 생활을 연장하기 위해 수업을 듣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간계급 여성들은 학부 과정을 마치기 전까지는 결혼할 것을 요구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즈가 가르친 학생 중 한 명인 차야 다타르(Chhaya Datar)는 이후 〈타타 사회과학 연구소〉 여성학과 학과장이 되었다. 또 다른 학생 사랄 사르카르(Saral Sarkar)는 차후에 마리아 미즈의 남편이 되었다. 1967년 미즈는 어머니가 중병에 걸리자 5년 교사 계약의 조기 만료를 요청했다. 독일에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고, 미즈는 르네 쾨니히(René König)의 지도하에서 사회학을 연구하기 위해 쾰른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녀는 인도에서 관찰한 여성의 행위와 여성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모순된다는 점을 활용해 1971년에 박사 학위 논문 「교육받은 인도 여성의 역할 갈등」을 준비했다. 1972년 그녀는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그녀의 논문은 다음 해에 출판되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은 전 지구적인 저항의 시대였고 미즈는 그에 동참했다. 그녀는 매년 열리는 부활절 평화행진 가운데 벌어진 베트남 전쟁과 핵무기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그녀는 여성 해방 운동과 연계된 지역 여성 모임인 〈쾰른 여성 포럼〉에 가입해 가부장제 구조와 여성의 평가절하에 맞서 시위를 벌였다. 그녀는 도로테 죌레(Dorothee Sölle)가 조직한 ‘정치의 밤 기도회’에 참여했는데, 모임의 목적은 가톨릭교회 내 여성의 지위가 낮다는 점을 문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여러 시위에 참여하고 여성 불평등에 더 많이 관여하게 되면서, 미즈는 종교에 비판적이게 되었고 그 뒤로는 가톨릭교회를 떠났다. 그녀는 신설된 쾰른대 응용과학대학에서 가르쳤고, 1974년 이후에는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사회조사연구소〉에서 강의했다. 그녀는 3년 동안 ‘역사적인 국제 여성운동’[제1물결 페미니즘]을 연구하는 세미나에 참여했고, 대학이 여성학 강좌를 개설하도록 설득했다. 1975년 미즈는 멕시코 시티에서 열린 〈세계여성대회〉에 참석했고, 여성의 역사가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976년 미즈는 사르카르와 결혼했고, 각자 자기 나라에서 경력을 이어갈 수 있도록 약속한 뒤에 비동거 결혼생활을 하기로 했다. 같은 해 그녀는 주로 자신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인 다른 활동가들과 함께 퀼른에 독일 최초의 여성 쉼터(Frauenhaus[여성의 집])를 설립했다. 미즈는 쉼터에서 강의했고, 여성들에게 폭력과 싸우는 실천적이고 정치적인 방법을 가르쳤다. 그녀는 1977년에 퀼른대 응용과학대학으로 돌아왔지만 다음 해에 다시 인도로 가 기존의 연구 기획을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1978-2001년
마리아 미즈는 1978년 인도에 도착해 농촌의 자급자족 생산을 분석했고, 가사노동과 농장 노동, 가내 수공업 등이 어떻게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게 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지주와 산업가의 부를 늘였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1979년 말까지 인도에 머물렀는데, 그 사이 인도 텔랑가누주에 위치한 하이데라바드의 〈괴테 인스티튜트〉에서 강의하면서 그녀의 옛 제자였던 사르카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농산업에 대한 그녀의 연구 결과는 『나르사푸르의 레이스 만드는 사람들: 인도 주부들이 세계 시장을 위해 생산하다』(1982)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녀는 헤이그에 있는 〈국제 사회학연구소〉에 자리를 얻어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저개발국가 출신의 여성들을 위한 석사학위 과정을 신설했다. 미즈는 학생들이 교육받은 내용을 실무에 적용할 수 있도록 지역의 페미니스트 단체와 접촉해 공동 프로젝트를 개발했다. 대학 행정 담당자들이 다음 학기 “여성과 개발” 강좌를 개설하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미즈와 학생들이 학교와 잘 싸운 덕분에 강좌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당시에는 여성운동의 역사, 특히 ‘지구 남반구’의 여성운동사(史)를 배울 만한 교과서가 없었기 때문에, 마리아 미즈와 콜롬보 대학의 정치학자 쿠마리 자야와데나(Kumari Jayawardena)는 학생들이 사용할 교육 자료집을 만들었다. 미즈는 국제 연구 프로젝트를 출범시키면서, 미아 버든(Mia Berden), 로다 레독(Rhoda Reddock), 사스키아 비에링가(Saskia Wieringa) 등과 함께 아프리카, 아시아, 카리브해, 라틴 아메리카 지역의 전문가와 활동가의 도움을 받아 그 나라들의 여성운동 역사서를 편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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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좌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학회에서 발표한 논문 「페미니즘의 연구 방법론을 향하여」(1977)에서 처음 발전시킨 ‘여성학과 페미니즘 연구’에 관한 생각에 기초를 둔다. 미즈는 학계의 환경에서 자신이 목격했던 이론과 실천의 괴리와 싸우기 위해 기존의 교수법을 다시 만들어내고자 했다. 미즈는 페미니즘 연구는 기존의 연구 모델을 그대로 쓸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기존 연구를 대체할 7가지 단계를 제안했는데, 그 취지는 페미니즘 연구가 유용해지기 위해서는 연구[방법론]를 완전히 다시 상상하고 연구 대상을 마음 깊이 존중하자는 데 있었다. 이 7단계는 양적 방법론에 대한 거부와 함께, 남성에 대한 연구를 여성 경험에 외삽해 적용하지 않는 일을 포함한다. 그녀가 주장하길, [페미니즘] 연구는 참여적이어야 하는데, 이는 연구자와 연구 대상이 연구의 과정과 목표에 협력하고 그래서 여성의 역량을 강화하고 가부장제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논문은 이후 『여성학 이론』(1983)이라는 책의 한 장으로 포함되어 출판되었으며, 그것이 지닌 방법론적 혁신과 이론적 진보로 찬사를 받았다. 언론인이자 학자인 낸시 반스(Nancy Barnes)는 미즈의 논문이 너무 설득력이 있어서 “그 논문만으로도 책을 살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에 덧붙여 이 글이 여성학이 독립적인 학문 분야여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학문 분야와 통합되어야 하는지의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1981년 미즈는 쾰른대 응용과학대학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고, 남편 사르카르도 1982년에 그곳에 영구적으로 합류했다. 그녀는 에코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했으며, 유전자 조작과 생식[재생산] 기술에 반대하는 활동에도 참여했는데, 그러한 공학 및 기술이 여성의 출산권을 빼앗고 인간 생산[출산]을 상업화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미즈는 〈재생산공학과 유전공학에 맞서는 페미니스트 국제 저항 네트워크1〉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다. 이 조직의 활동과 함께, 그리고 자신의 저작 내에서 미즈는 한편으로 지구 북반구 여성들은 출산 촉진과 대리모와 같이 [여성 몸에 대한] 침략적인(invasive) 기술을 사용하도록 종용받고, 다른 한편으로 지구 남반구 여성들은 인구 증가를 통제하기 위해 출산 제한의 압박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미즈는 여성들이 자기 몸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의료서비스 제공자와 정부 관계자들이 설계‧통제‧관리하고 있는 시스템에 제한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녀는 평화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83년 독일에 핵탄두를 배치하려는 나토(NATO)의 계획에 반대하는 시위캠프에 참여했다. 그녀의 평화관은 알리체 슈바르처(Alice Schwarzer)가 제시한 생각, 즉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일한 폭력적 수단을 갖고 사용한다면 [여성]해방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에 반대함으로써 다시 강화되었다. 전쟁에 반대하는 미즈로서는 ‘여성의 가치를 폄하하는 위계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남성과 똑같아지면 된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교직에서 은퇴한 1993년 이후에도 여성운동 및 여러 사회 운동들에 왕성하게 참여했다. 그녀는 1999년에 결성된 〈아탁〉2의 창립자 중 한 명이며, 2001년 베를린에서 열린 〈아탁〉총회에서 〈페미니스트아탁〉(FeministAttac)을 조직했다.
학문적 기여
마리아 미즈의 초기 저작들인 『인도여성과 가부장제』(1980)와 『나르사푸르의 레이스 만드는 사람들: 인도 주부들이 세계 시장을 위해 생산하다』(1982)는 그녀가 인도에서 보냈던 시절에 대한 평가가 담겨있으며, 또한 그 이후에 쓴 논문 「새로운 재생산 기술의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함의」(『얼터너티브[대안]』, 1987)는 불균등하고 계층화된 사회구조─지배와 착취를 조장하는─를 유지하려는 정책들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그녀는 여성의 노동이 어떻게 숨겨지고, 그래서 여성이 남편의 소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평가하고자 했다. 미즈는 여성들이 수행하는 노동에 대한 임금을 제거하고, 그녀들이 늘 계속해서 노동하게 만들며, 가정에만 머물게 해서 사회로부터 소외시키고, 고용 안정성을 제공하지 않으며, 계약이나 노조 결성의 능력을 없애는 일 등이 여성들의 행위성(agency)을 상실시킨다는 점을 이론화했다. 미즈는 여성들을 생산자나 자영업자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래서 착취를 야기하는 과정에 ‘가정주부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류학자 다니엘 레베이예(Danielle Léveillé)는 미즈의 책들을 “걸작”이자 “놀라운” 저작이라고 말하면서, 그녀가 반식민주의 운동, 반인종차별 운동, 생태운동, 페미니즘 운동, 비폭력 운동 등으로부터 발생한 다양한 변수들을 사회 내 권력관계를 형성하는 정책들에 대한 비판과 연결시켰다고 평가했다.
정치학자 엘리자베스 프루글(Elisabeth Prügl)은 미즈가 여성, 피식민지인, 자연을 사회 안에서 실뜨기로 연결함으로써 착취로부터의 벗어날 길을 열었다고 말했다. 여성의 부불노동(否拂勞動)은 공기와 물의 무료 이용가능성과 쉽게 등가화되었다. 프루글은 주부들이 초과 착취당한다는 미즈의 이론을 검증하면서 주부들이 삶이 실제로 그렇다고 확증했다. 프루글은 〈국제노동기구〉(ILO) 자료를 활용해 주부들이 법률이 정한 최저임금보다 보편적으로 적은 임금을 받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프루글은 브라질, 영국, 파키스탄, 태국, 튀르키예의 전업주부들을 조사한 뒤에 주부들이 통상적으로는 노동자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증했다. 그러나 프루글은 여성들 혹은 그녀들이 몸담은 사회들이 가정주부의 문화적·정치적 의미와 그들의 가치를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프루글은 ‘주부’라는 용어의 “다양한 맥락적 의미” 때문에 착취가 자본주의의 경제적 확산보다는 정치적 확산에서 비롯되었을 개연성이 더 크다고 결론지었다. 프루글은 ‘가정주부화’가 정말 자본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했는데, [자본주의적] 착취가 전 지구적 가부장제와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지를 정확히 평가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1980년대 중반부터 미즈는 여성 착취와 여성의 종속에 있어서 가부장제, 자본주의, 식민주의의 연관성을 탐구한 가장 중요한 저서들을 출간했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1986)에서 미즈는 페미니즘의 발전, 성별 분업, 그리고 폭력이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했다. 그녀의 분석에 따르면 ‘가정주부화’ 과정은 자본 축적에 대한 서구적 이상에 기반을 두었다. 달리 말해 남성들은 여성들의 자율성을 파괴하고 그녀들을 소유물로 만듦으로써 생산적 자본을 획득하고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미즈는 가정 폭력을 고대 사회의 잔재가 아니라 근대화 과정의 일부로 보았다. 이 저작에서 그녀는 사회주의의 발전 역시 여성들을 착취하는 [자본주의와] 유사한 사회구조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발견하고, 사회주의와는 다른 페미니즘적인 유토피아 사회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즈가 보기에 노동의 토대[노동을 하게 만드는 근거]에는 축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유용성이 있[어야 한]다. 그녀는 과잉 개발된 지역의 소비자들이 저개발국의 생산자들로부터 생명 유지에 필요한 욕구를 충족했다면, 그것이 착취받는 사람들을 구제할 근거를 전 세계에 제공할 것이라고 점을 이론화했다. 다니엘 레베이예는 이러한 계획이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음악, 꽃, 예술과 같은 것들의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결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음악, 꽃, 예술은 인간 생명을 유지하는 데 본질적이거나 필수적이지는 않지만 치유적인 이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가부장적] 지배라는 주제를 다룬다면, 사회과학자 베로니카 벤홀트-톰젠(Veronika Bennholdt-Thomsen)과 클라우디아 폰 베를호프(Claudia von Werlhof)와 공동 집필한 『여성: 최후의 식민지』(1988)는 피식민지 사람들을 분석했다. 이들 공동 저자들은 여성들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처럼, 종속된 사람[피식민지인]들 역시 주류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착취당하게 되는 자연 자원으로 취급된다고 설명했다. 이 책의 중심 주제는 엄격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논증에서 벗어나 여성과 피식민지인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자본주의에 의해 야기된 부차적 결과가 아니라 전 지구적 생산 메커니즘을 창출하는 데 있어 근본적이라는 점이었다. 캐나다 몬트리올 대학의 인류학 교수 데어드레 마인텔(Deirdre Meintel)은 마리아 미즈의 주장은 노동 착취가 사회 계급과 경제적 분업 모두를 발전시킨 주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마인텔은 미즈가 쓴 7장 “인도에서의 계급투쟁과 여성 투쟁”이 “책값을 낼 가치가 있게 만든다”고 말했는데, 이 장은 인도 남동부의 안드라 프라데쉬에서 남성 농민들의 권리 보호 투쟁과 협력한 여성들의 성공적인 저항을 다루었다.
미즈가 인도의 학자 반다나 시바와 함께 저술한 『에코페미니즘』(1993)은 기후 변화, 다양성 상실, 다체계적 실패, 저항 등을 평가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적 접근법을 사용했다. 그들은 생산 체계와 축적이 토지와 문화의 박탈을 초래해 세계 기아의 문제로 이어지는 방식을 평가했다. 미즈와 시바는 여성들이 자본주의의 팽창과 관련해 공통된 경험을 하면서 국제적으로 연결된다고 주장했다. 환경학자이자 에코페미니스트인 카트리오나 샌딜랜즈(Catriona Sandilands)에 따르면, 이 책은 다른 에코페미니즘 저작들과 달리 지리적 차이와 사회경제적 변이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삶과 몸”이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통해 “식민화되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또한 샌딜랜즈는 젠더 만이 자본주의 불평등을 창출하는 유일한 요인은 아니며, 그렇게 단일 전제에 기반한 이론은 결함이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여성들의 다양한 경험과 문화적 맥락을 고려할 때, 생계 활동이 전 지구적 유통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주장은 유토피아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에코페미니즘』은 2014년에 개정 및 재출간되었으며, 저자들은 자신들이 이전에 다뤘던 문제들이 개선되기는커녕 도리어 악화되었다고 결론지었다. 또한 이 책은 2016년에 스페인어로 번역되었다. 기술, 과학, 문화적 발전의 연관성을 평가한 학자 히메나 안드리유(Jimena Andrieu)와 마리아 페레로(María Julia Eliosoff Ferrero)에 따르면, 마리아 미즈와 반다나 시바는 지구화가 생산과 이윤을 증가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상품화‧사유화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축소시키는 위기를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미즈와 시바는 생명과 건강에 대한 보살핌을 경제의 중심으로 위치시킨다면 사회, 경제, 생태계 간의 균형이 회복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에코페미니즘』의 재출간은 지구 남반구의 사회 운동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안드리유와 페레로는 그녀들의 이론에 동의하지 않으며, 지구 남반구 인구의 상당 부분이 실업 상태에 있고 빈곤한 삶을 살고 있어서 생계와 생명을 유지하는 재화만을 생산하는 방향으로의 전환[자급자족의 생산으로의 전환]은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1999)에서 미즈와 벤홀트-톰젠은 자급자족[생계] 생산, 즉 개인이나 공동체가 사용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이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폄하‧은폐‧주변화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빙산 모델”을 사용해 전통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일하게 눈에 보이는 노동[해수면보다 높은 윗부분]은 공식적으로 임금계약을 맺은 노동력뿐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해수면보다 낮은 빙산 아랫부분에는 부불 가사노동, 돌봄 노동, 비공식적 노동 등이 숨겨져 있는데, 여기에는 초소형 사업자, 아동 노동자, 가족 구성원과 같이 다른 가족 구성원을 위해 일하거나 임시직 노동을 하는 사람 등 다양한 형태의 비과세‧비계약 노동이 포함되어 있다. 저자들은 노동집약형 노동을 특정한 인구에 위임하는 대신, 공동체들이 모든 업무를 분담‧공유하는 사회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공유 모델은 각 개인에게 기본 소득, 일정한 안전, 그리고 의사결정에서 일정 수준의 권한을 제공할 것이다. 웨스턴 시드니 대학교의 사회학자 아리엘 살레(Ariel Salleh)는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가 “정치경제학에 관한 탁월한 페미니즘 자료”라고 밝혔다.
노년, 죽음, 그리고 유산
마리아 미즈는 자서전 『마을과 세계 – 에코페미니스트 마리아 미즈의 삶과 시대』(2008)를 썼다. 30년 여년 간 미즈를 알고 지낸 페미니스트 학자 레나테 클라인(Renate Klein)은 이 책이 미즈 인생의 실패와 성공을 솔직하게 반영한 것이라고 평했다. 클라인은 자급자족하는 농촌 마을에서 보낸 미즈의 유년 시절이 그녀에게 삶의 고난을 극복할 실용적 기술을 주었고, 이후에는 그녀가 연구한 ‘자급자족[생계] 이론’을 형성하게 했다고 말했다. 클라인은 이 자서전이 “현대 여성의 역사에서 중요한 작품”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페미니즘─그리고 차별‧착취‧폭력에 맞선 투쟁─이 어떻게 미즈의 생애를 변화시키고 자라게 했는지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미즈는 노년에는 요양시설에서 지냈고, 생애 말년에는 요양시설에 매일 방문한 그녀의 남편을 알아보지 못하기도 했다. 미즈는 2023년 5월 15일,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작가 모니카 멩겔(Monika Mengel)은 미즈가 독일 여성학의 선구자라고 말한 바 있고, 여성 인권 정책 전문가 아이린 듀벨(Ireen Dubel)은 미즈의 학문적 기여가 선구자적일 뿐만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친 페미니스트 학자들과 활동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 그녀의 고유한 개념인 “가정주부화”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서 처음 소개되었고 이후 ‘인도에서 레이스를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발전되었으며, 지금은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미즈는 사회경제적 위계 내에 위치된 여성들과 피식민지인들의 유사성을 분석한 최초의 페미니스트 학자 중 한 명이었다. 그녀의 책 『에코페미니즘』은 국제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스페인, 튀르키예,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출판되었다.
주요 저작
● Mies, Maria, Indian Women and Patriarchy: Conflicts and Dilemmas of Students and Working Women, New Delhi: Concept Publishing Company, 1980.
● ——————, “The Social Origins of the Sexual Division of Labour”, ISS Occasional Papers, No. 85, Institute of Social Studies, 1981.
● ——————, Lace Makers of Narsapur: Indian Housewives Produce for the World Market, London: Zed Books, 1982.
● ——————, Patriarchy and Accumulation On A World Scale: Women in the International Division of Labour, London: Zed Books, 1986. [한글본]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 여성, 자연, 식민지와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 최재인 옮김, 갈무리, 2014.
● ——————, with Bennholdt-Thomsen, Veronika; Werlhof, Claudia von, Women: The Last Colony, London: Zed Books, 1988.
● ——————, with Shiva, Vandana, Ecofeminism, London: Zed Books, 1993. / with Shiva, Vandana, Ecofeminism, London: Zed Books Ltd, 2014. [한글본] 마리아 미즈, 반다나 시바, 『에코페미니즘』, 손덕수, 이난아 옮김, 창비, 2000. / [한글판](2014년 개정판 번역) 『에코페미니즘』, 손덕수, 이난아 옮김, 창비, 2020.
● ——————, “Preface”, In Sittirak, Sinith (ed.), The Daughters of Development: Women in a Changing Environment, London: Zed Books, pp. x-xv, 1998.
● ——————, with Bennholdt-Thomsen, Veronika, The Subsistence Perspective: Beyond the Globalised Economy, London: Zed Books, 1999. [한글본] 마리아 미즈, 베로니카 벤홀트-톰젠,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 힐러리에게 암소를』, 꿈지모(꿈꾸는 지렁이들의 모임) 옮김, 동연출판사, 2013.
● ——————, The Village and the World: My Life, Our Times, North Melbourne, Australia: Spinifex Press, 2010. [한글본] 『마을과 세계-에코페미니스트 마리아 미즈의 삶과 시대』, 안숙영, 장지은 옮김, 에코리브르, 2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