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실재적이지만 추상적인 것으로 파악하기 위한 설계 ; 브라이언 마수미 《가상계》 〈서문〉 독후기

형식논리를 핵심적인 도구로 하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세계를 대체로 ‘예측 가능한 곳’으로 만들고, 사람들은 예전보다 훨씬 안전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모든 것이 예측되고 결국은 관리되는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점차 편해지고 안전해지기도 하였으나,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추세가 급격히 진행되어버린 사회에서는 진작부터 의지를 발휘하여 자유롭게 사는 맛을 잃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앞서 핵심적 도구라고 하였던 형식논리에서, 두 발이 아니라, 한 발 빼기를 시도하였다. 아마도 “실재적 추상”이라는 말이 이러한 시도를 대변하는 말로 적합할 듯하다.

가상계

2002년, 듀크 대학교 출판부는 Post-Contemporary Interventions [지금과 그 다음 사이에 끼어들기]라는 기획의 한 부분으로,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의 원고를 스탠리 유진 피쉬(Stanley Eugene Fish)와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가 편집하여, Parables for the Virtual : Movement, Affect, Sensation [가상계우화 : 운동, 정동, 감각]라는 책으로 펴냈다. 이 책은 2011년 『가상계; 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assemblage)』라는 제목을 달고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에는, 원서 제목에 들어가 있던 ‘Parables[우화]’라는 단어가 빠진 대신, ‘얽기[assemblage(아쌍블라주)]’라는 단어가 들어갔다. 이 책의 서문에는 “구체적으로 행하지 않아야 구체적이다” 라는 부제목이 붙어있다.

세기말’, ‘68’, 2002

사람들은 더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자연[세계]의 변화를 더 상세히 알고자 노력하였고, 그 결과 점차 자연을 더욱 법칙적으로 이해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도 자연의 일부이므로 자연법칙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으로 빠져들고, 어떤 사람들은 자연법칙에 입각한 예측을 누리면서 자기가 점점 더 자유로워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냥 씩씩하고 건전하게 살아가고, 또 어떤 사람들은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곧바로 뚝 떨어지지 않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떨어지는 낙엽처럼, 하루하루를 왠지 모르게 불편해하며 살아간다. 앞으로도 사람들은 자연을 더욱더 법칙적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지만, 삶의 모습들은 법칙에 따라 통일되지 않을 듯하다.

1968년 청년조합(Young Union) ‘프라하의 봄(Prague Spring)’ 포스터. 사진출처 : wikipedia ( https://en.wikipedia.org/wiki/Prague_Spring#/media/File:KAS-Prager_Fr%C3%BChling_1968-Bild-12906-1.jpg)
1968년 청년조합(Young Union) ‘프라하의 봄(Prague Spring)’ 포스터.
사진출처 : wikipedia

의지를 발휘하여 자유롭게 사는 맛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다는 느낌.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이런 느낌을 갈수록 강하게 가지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극히 일부의 사람들은 이른바 ‘세기말’인 19세기말 20세기 초에 그런 생각을 강하게 드러냈었다. 유럽에서 이른바 ‘68’이 일어난 1968년을 전후하여 세계 도처에서 벌어진 일들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극소수는 아니며, 아주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이 아주 조금씩 이미 스며들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책이 출간된 2002년은 1968년으로부터 34년이 지난 해이다. 그 해는 1899년 즉 ‘세기말’로부터 103년이 지난 해이기도 하다. 그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당연히 건재한 상태다. 더 좋아진 것도 있을 것이지만, 더 나빠진 것도 있을 것이다. 한편 2002년 이후 2021년까지의 기간은 어떠한가? 이 기간에 정보 기술 분야에서 큰 변화가 많이 일어났다. 코비드-19의 대유행 등 환경 분야의 격변도 많았고, 국제정치와 세계경제도 빠른 속도로 변화함을 보여주었다.

이 책은 2002년, 한 발 떨어져서 현실을 조망하였던 것이라기보다는, 과학기술・문화예술・정치경제 등의 방면에서의 최전선에서 쓰였던 것 같다. 그렇기에 2021년에 이 책을 읽을 때는,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들이 2002-2021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살펴야 하는 ‘지나간 이야기’가 되어있을 가능성이 클 듯하다. 그러면서도 이 책에 담긴 문제의식은, ‘68’을 넘어, ‘세기말’도 넘어, 그 이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만날 수 있는 철학의 쟁점과 이어져 있을 수도 있다. 저자 마수미의 글쓰기 방식에 따라 이 책에 담긴 문제의식이 적어도 스피노자까지는 거슬러 올라가고, 더 멀게는 소크라테스 이전 제논의 문제의식과도 이어져 있는 것이다.

실재적이지만 추상적인[real-but-abstract] 것의 손을 들어주다

“이 책의 목적은 육체 – (운동/감각) – 변화라고 하는 개념적 치환[displacement]이 문화이론에서 함축하고 있는 바를 탐구하는 데 있다.” [10쪽] 저자는 운동 혹은 감각이 사람[육체]의 내부에서 어떤 변화[치환]를 발생시키고 그 결과, 사람이 변화하게 된다고 본다. 이를 통해 그러한 관점에 입각한 문화이론이 어떤 양상을 띠게 되는지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다. 이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과거 20여 년간 문화이론은 저 중간에 있는 항들과 그들의 단절된 결합에 괄호를 치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또한 바깥쪽의 두 항들[육체, 변화]를 상당부분 놓쳤다고 할 수 있다.” [10쪽] 저자는 1982~2002년 전후에 문화이론이 ‘운동/감각’을 외면함으로써 ‘육체,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문화의 양면성 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탈코드의 가능성이 제대로 펼쳐지는 것을 막는다고 보는 듯하다. “문화가 ‘변화하는 육체-주체’를, ‘코드화/탈코드(화)’라는 모순된 양 방향 중 어느 방향으로도 향하게 할 수 있다”고 저자는 본 듯하다. “물질, 운동, 육체, 감각. 매개된 다중은 미끄러진다.” [14쪽] 사람들은 문화의 매개에 따라 육체-주체를 격자[틀]에 박힌 듯 인식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인식 틀에만 갇혀있는 것이 아님을, 저자는 ‘미끄러진다’는 말로 표현한다.

마수미는 자신이 1992년경[‘10년 전’]부터 “물질 안에 그야말로 ‘그대로’ (혹은 ‘보이는 그대로’) 웅크리고 있는 운동, 감각, 그리고 경험의 질이 …… 문화적으로-이론적으로 상상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희망” [14쪽]을 기초로 하면서, “가장 직접적으로 물형적(corporeal)으로 보이는 것을 육체에 되돌려 놓은 것” [14쪽]과 “물질을 즉시 문화 유물론에 되돌려놓는 것” [15쪽]을 목표로 활동을 하여왔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러한 활동의 출발점이 코드화와 단절하고 기호학을 경계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경험의 “구체성”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듯하다.

여기에서 저자는 들뢰즈를 인용한다. 들뢰즈는 ‘움직이는 몸과 비현재적 잠재력 사이의 관계’가 “실재적이지만 추상적” [15쪽] 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몸은 위치를 잡고 틀[격자]에 들어가 박힘으로써, 사람들에게 설명 가능한 것이 되고, 결국은 인식된다는 것. 저자도 이것을 부인하지는 않는 듯하다. 그러나, 몸을 깨끗이 씻고 새 옷을 입은 순간부터 몸과 옷에 때가 타기 시작하는 것처럼, 위치를 잡고 틀에 들어가 박히는 순간부터, 아니 항상, 몸은 정해진 모습과 상태를 유지하지 않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들뢰즈는 “실재적 추상(real-but-abstract)”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미리 존재하지 않으며, 매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15~16쪽 참조] 여기에서 실재(real)와 추상(abstract)은 모순관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실재적 추상(real-but-abstract)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가 육체를 실재적 추상이라고 하였다면 그것은 육체에게 잔뜩 긴장할 것을 요구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육체가 긴장함으로써 구체적으로 인식되지만 구체성에 고착되지 않는 상태 혹은 태도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저자가 이해한 들뢰즈의 생각이었을 수 있다. 이러한 긴장 상태는 “구체적으로 행하지 않아야 구체적이다” 라는 서문의 부제목과도 연관있어 보인다.

“이제, 추상이란 위치 내부에 현존하지 않고, 언제나 이행 속에서만 현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실재적 관계의 이행적 직접성 – 그 자체 미결정성(지금 바로 여기 어디서든 다른 곳 다른 무엇으로도 열린 개방성)의 육체가 가지는 이행적 직접성 – 에 속하는 추상성이다.”

16쪽

저자는 실재가 추상이라고 하면서 추상은 이행 즉, 마치 어떤 목표점이 있는 듯 전개되는 변화 속에서만 현존한다고 한다. 추상성은 실재적 관계의 이행적 직접성, 달리 말하자면, 실재들이 마치 각각 어떤 목표를 향하여 가는 듯 움직이면서 다양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의 연계로부터 독립적이지 않다고, 저자는 생각하는 듯하다. 저자는 또한 자기 바깥을 향하여 열려있어서 자기 바깥의 그 어떤 것과도 관계를 맺을 가능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미결정성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육체와 추상성이 무관할 수 없다고 주장한 듯하다. 저자는 추상성이, 육체가 가지는 이행적 직접성에 속한다고 하였다. 추상성이 변화하는 직접성에 속한다고 한 것이다. 또한 추상성이 저자가 생각하는 실재의 주요 특성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논리 전개는 다시 실재적 추상(real-but-abstract)으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와 마수미는 모두 실재가 전적으로 구체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추상적이기도 하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저자는 무릇 살아가는 존재라면 실재적이면서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행동하지 않을 때 존재하는 구체성에 의문을 던지다

저자는 육체의 비결정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육체가 수반하는 비결정성의 혐의는 육체와는 분리될 수 없다. 비결정성의 혐의는 육체가 이행하거나 과정 중에 있는 한에서(그것이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한에서), 육체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그 혐의는 그 자체 물형적이지는 않다. 운동하고 있는 육체를 사유하는 것은, 구체성의 복원은커녕, 육체의 비물형적 (incorporeal) 수준이 있다는 역설의 수용을 의미한다. 그것 같지만, 그것은 아닌. 실재적(real)이고, 질료적(material)이지만, 비물형적인. 뗄 수 없고(inseparpble), 동시적(coincident)이지만, 이접된(disjunct).”

16쪽

육체는 물건이다. 그러나 그 육체가 운동을 하고 있으면 그 육체는 변하고 있는 것이고, 변하고 있다면 운동이 시작되기 이전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버린 것이니, 운동을 하고 있는 한 육체는 하나의 물건이 아니다 라는 역설이 성립 가능해보인다. 이러한 가능성을 말하려는 듯 저자는 “이행과 위치의 역설들” [17쪽]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추상성뿐만 아니라 실재, 물건, 육체 또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양면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듯하다. 저자는 특히 ‘동시적이면서 이접된’이라는 설명을 사용하였다. 이 설명은 ‘같은 시공 속에서 각각 떨어져 있으면서도 연결되어있기도 한’ 이라고 바꿀 수도 있을 듯하다.

저자는 베르그송의 논리를 인용하여 자신이 제시한 역설을 정당화한다.

“공간을 “연장적인”extensive 것으로, 측정 가능하고 분할 가능한 것으로, 그래서 물체들이 점유하는 가능한 위치들을 수놓은 점들로 공간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생각 속에서 세계를 정지시킨다. 그 역동적 통일, 그 운동의 연속성을 상상으로 놓쳐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로지 실재의 한 수준만을 바라본다.”

18쪽
에드워드 마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 〈달리는 말〉, 1878, 흰자판 사진,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출처: https://www.loc.gov/
에드워드 마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 〈달리는 말〉, 1878, 흰자판 사진,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사진 출처 : loc.gov

저자는, 공간이 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생각 속에서 세계를 정지시키게 된다고 보고, 역동적 통일, 운동의 연속성을 놓친다고 보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사물은 행동하지 않을 때 존재한다. 하나의 사물이란 그것이 구체적으로 위치해 있는 장소이며, 존재하는 바로 그것 – 예를 들어 쏘아진 화살이 성공적으로 목표물에 꽂혀 있는 경우 – 이며 정지되어 있는 상태일 때이다. 구체성은 행동하지 않을 때 존재한다.” [19쪽] 저자는 이 맥락 속에서의 정지상태가 되는 것을 고체화되기(solidify)라고 설명하려 하는 듯하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누군가 어떤 사물을 구체적으로 인식했다는 판단을 내렸을 때, 그는 사물을 고체화한 것이며, 사물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고체화되기(solidify) ↔ 유동화(fluidifying)의 대비를 제시하면서, 베르그송이 이 유동화(fluidifying)라고 설명할 수 있는 발상을 세계 인식에 적용함으로써 자기 이전까지 제기되었던 철학적 세계 인식들과는 차별되는 세계 인식을 제시한 것처럼 주장하는 듯하다. 저자는 이러한 베르그송의 세계 인식 방법이 “운동을 통합적으로 고려” [32쪽]함으로써 정지 상태에 있을 수 없는 존재 즉 모든 존재의 설명에 적합할 수 있는 인식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저자가 ‘구체성은 행동하지 않을 때 존재한다’고 했을 때, 구체성이라는 것은 그 무엇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듯하다. 왜냐하면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 속의 모든 것도 끊임없이 변화[행동/운동]하므로, ‘행동하지 않을 때’란 계기점(moment)으로만 상정할 수 있을 뿐 실재할 수는 없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맥락에 따라서 구체성 개념을 각각 달리 ‘사용’하여서 글을 읽는 이의 주의를 환기시키기는 하지만, 행동하지 않을 때 존재하는 구체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은 확실하다.

마수미는 베르그송이 제기한 세계 인식 방법에 관한 보충설명을 15개 항목으로 정리하여 부가하였다.

항목 (1)에서 저자는 “자연의 개념은 본질(essence)이 아니라 변용(modification)과 관계가 더 깊다.” [20쪽] 라고 하였다. 이는 저자가 이 항목들에서 ‘과정’에 주목할 것을 거듭 강조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또한 항목 (1)에는 “우리의 관심이 [사물이 아니라] 변화에 있다면, “직어”(literal)와 “비유어”(figural)의 대립보다는 “연장”과 “강렬도(intensive)”의 구별이 더 유용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쪽] 라는 주장도 있는데, 여기에 등장한 “강렬도” 또한 항목들 전반에 걸쳐서 반복 강조되었다. 항목 (11)에서는 “계몽주의 휴머니즘, 과학적 이성주의 그리고 정신분석의 연합된 힘들에 의해 경시되었던 마술적 사고(magical thinking)와의 화해” [28쪽 주20]를 제시한다.

“마술에 대한 실용주의적 접근은 “비이성주의”로의 회귀로는 설명할 수 없는 화해, 즉 마술과의 대립과는 정 반대를 가능하게 한다. 비이성주의의 독트린은 잘난체하는 역-형성이며, “우리”, “계몽된 자들”이 거만하게 우리 자신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에 대한 네거티브 투사이다.”

28쪽 주20

이 인용문에서 저자는 중첩되고 애매모호한 대비를 제시하였는데, 이 대비는 형식논리가 아닌 논리나 수사(修辭) 나아가 우화(寓話)를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저자는 이미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문화 이론과 문예 이론에서 지배적인 모델들이 안고 있는 문제는 그들이 실재의 구체성을 파악하기에 너무 추상적이라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그들이 구체적인 것의 실재적 비물형성(real incorporeality)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추상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17쪽]

항목 (12)에서 실재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가 즐겨 말했듯이, 실재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생산주의”productivism라는 말이 어쩌면 구성주의constructivism보다는 더 나을 것이다. “발명주의”inventionism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을 아무리 협소한 의미로 수용한다고 해도, 자연이 자기 스스로를 발명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적합한 말이 있다. 바로 진화이다. ‘문화’의 발생 영역에서 “자연적” 변화 과정의 연장을 나타내기 위해 이와 동일한 말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 구성주의적 진화론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진화론적 구성주의?(4, 9장)”

29~30쪽

여기에서 구체성은 “구체성은 행동하지 않을 때 존재한다”라고 할 때의 구체성과는 다른 의미로, 실재에 대한 설명에 국한하여 ‘사용’된 것이다. 저자는 실재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고도 하고, 구성된다고도 한 셈이고, 발명되는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진화한다는 데에 이르렀다. 저자는 생성을 지나치게 다양하게 표현한 듯하다. 저자는 실재가 고정되어있는 것이 아니며 베르그송이 사용한 말을 빌리자면 생성되는 것임을 강조한 듯하다. 항목 (13)에서 “생산주의적 접근을 도입하려 한다면, 인문학이 존중해 온 비평적 사고의 기술은 그 가치의 한계에 이르게 된다.” [30쪽]라고 한 것도 종래의 인문학이 취해 온 비판 방식이 생성하는 세계를 대상으로 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드러낸 것인 듯하다. 이러한 저자의 소신은 항목 (13), (14), (15)에 걸쳐 서술되었다. 그는 모호함을 즐기라고 권하기도 하고 사유와 언어가 역설을 향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저자는 생성을 중시하고 그것에 의하여 세계를 설명하기 때문에, 추상화의 과정을 거쳐서 개념화된 구체적 사물을 대상으로 행하여졌던 비평들이 이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였고, 그러한 비평의 배후에 있는 태도와는 다른 태도에서 나오는 글쓰기를 권장하고 있는 것을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저자의 의도는 문예학 역사학 철학이 상당 기간 견지하여 온 비판정신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 예상되었다.

감각, 공명, 자기-관계, 정동

구체성, 실재, 추상성 등 세계 인식을 논하는 데 있어서 동원되어 온 주요 개념들을 나름대로 검토한 저자는 라이프니쯔와 스피노자의 논리들을 차용하면서 생성의 결과이기도 하고 과정이기도 한 것으로서의 세계와 사람에 대하여 설명하려 한다.

저자는 본문이 아니라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보통 이 책에서 “지각”은 대상-지향적 경험을 지칭하고, “감각”은 “지각의 지각” 또는 자기-지시적 경험을 지칭한다.” [33쪽 주26] 그의 논리의 연장선상에서는 이 서술과 같이 감각은 외부에 대상을 가지는 것으로 단정지어질 수 없을 듯하다. 저자는 감각을 일종의 공명(resonation) 혹은 침투양식(interference pattern)이라고 보면 좋을 것[32쪽 참조]이라고 한다. 공명은 비유로 보인다. 저자는 그것을 수단으로 세계가 무한연속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세계에서 단절이란 없을 것이다. 그런 세계에는 기원이 따로 있을 수 없으니, 세계 속 한 단위가 기원이었다가 경과지점이었다가 종착점이 되면서 다른 단위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남길 흔적도 없을 것 같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쓴다. “반향과 울림은 소리의 운동을 자르지 않고도 증식시킨다. 운동은 연속되고, 그 증식을 가로질러 그 자신 스스로 연속성을 갖는다. 이 복합적인 자기-연속성이 바로 운동의 자기 자신과 관계 맺기이다. 즉 자기-관계이다.” [32~33쪽] 저자는 ‘자기-관계’를 한 사람 뿐만 아니라 세계의 생성 속에서도 작동하는 것으로 보는 듯하다. 이러한 설명은 시공을 점유하면서 연장성(延長性)을 가지는 물(物)[matter]을 세계에서 소거할 수 있을 듯하며 저자도 그러한 지향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경험에 의해 채워지는 공허 혹은 사이-내부(in-betweenness)는 이미 지적했던 육체의 비물형적 차원이다. 표면의 [공간적] 거리를 강렬함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또한 육체의 물질성을 사건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2, 3, 6, 8장). 그것은 물형적 수준과 비물형적 수준의 일종의 릴레이이다.” [33쪽] 그러면서도 저자는 외부와 단절된 독립체[단자] 조차도 방위 감각을 가진다는 라이프니츠의 세계관을 빌어 세계 속에 있는 것들이 각각 경향성은 가진다고 주장한다. 물(物)[matter]을 세계에서 소거한 대신 경향성을 생성의 동력으로 자리매김하는 형세라 할 수 있겠다. 이어서 저자는 스피노자가 육체를 “운동과 정지의 관계”라고 정의했다고 썼다. [35쪽 참조]

“스피노자에게 육체는 바로 이행들에 다름 아니다. 각각의 이행은 능력의 변주를 수반한다. 즉 정동을 촉발하고 촉발되는 힘들이 다음에 일어날 사건에도 문제가 되는, 그들이 얼마나 쉽게 다루어질 수 있는지-또는 그들이 미래로서 어느 정도까지 제시되는지-를 나타내는 어떤 변화를 수반한다. 그 “정도”는 육체적 강렬함이며, 그 현존하는 미래성은 경향성이다. 정동촉발에 관한 스피노자의 문제의식은 운동, 경향성, 강렬도의 개념들을 처음으로 되돌려 놓으면서 짜 맞추는 하나의 방식을 제공한다. 즉 육체가 그 자신의 이행과 일치하고, 그 이행이 그 잠재력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36쪽

몸은 affection[情動/마음의 쏠림]을 가지고 있고, 그 affection에는 경향성이 있을 것이며, 경향성의 강렬도는 가변적임을 저자는 스피노자의 말을 빌어 주장한 것이다.

여기에서 이 책의 본론이기도 하고 각론이기도 한, 9개의 우화라고도 할 수 있는 글들을 시작하기 위한 정지작업이 마무리되는 듯하다. 이제 9개의 글들을 읽으면서 이 서론과 각각의 글들이 부합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고, 각론들을 통하여 서론에 대한 이해를 점검하여볼 수도 있을 것이며, 이 책 전체의 논리적 정합성과 이 책이 보여주는 세계관의 가치를 평가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형식논리에 의거한 글쓰기가 아닌 예증에 의거한 글쓰기

서론의 줄기는 위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그런데 저자는, 줄기 이외에, 곁가지에 해당하면서도 줄기 못지않게 중요한 주제를 덧붙였다. 저자는 예증에 의거한 글쓰기를 제안한다.

“인문 분야 …… 제도적인 근거에서 글을 쓰는 방식 …… 그들이 발명하는 (혹은 재발명하는) 것은 개념들일 것이며, 개념들 간의 연결이 될 것이다. 개념들을 발명하거나 재발명할 때 가장 처음에 나오는 규칙은 단순하다. 개념들을 적용하지 말 것. 만일에 어떤 개념을 적용하거나 개념들 간의 연결시스템을 적용한다면, 개념을 적용해야 할 물질the material이 개념들보다도 훨씬 더 현저하게 변해 버렸다. 개념들의 체계성에 의해 그 변화는 물질에 강요되고, 그 변화는 물질과 체계의 상동성을 구성한다. 이 모든 것은 대단히 엄격하게 켜진다. 이는 “세계에 더하기”가 아니라 “같아지게 하기”에 가깝다. 이는 발명이 아니라 지배와 통제에 가깝다.”

37~38쪽

저자는 개념 정의를 거치는 글쓰기가 지배와 통제의 도구로 동원되어왔다고 주장한 셈이다. 여기에서 형식논리는 직접 문제삼아 지지 않았다. 그런데 형식논리를 가능하게 하는 모순률(矛盾律)과 배중률(排中律)은 개념 정의도 밑받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형식논리도 지배와 통제의 도구롤 동원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개념의] 적용을 피하기 위해 고안한 한 가지 장치는 “범례의”(exemplary)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다. …… 예증(exemplification)은 자기-관계에 상응하는 논리적 범주이다. …… 사례의 활동성은, 어느 정도는 격렬하게, 개념으로 전송될 것이다. 그 개념은 그 기세로 이탈하게 될 것이다. 그냥 그대로 두자, 그리고 나서, 다른 체계들로부터 가져온, 다른 개념들과 재연결해보라. 연결된 새로운 전체 체계가 형성될 때까지. 그러고 나서, 다른 사례를 들어보라.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39~41쪽

저자는 형식논리와 개념 대신 예증에 의거한 글쓰기를 권한 것이다. 일단 저자가 권하는 글쓰기는 형식논리에 의거한 글쓰기 보다는 제약이 느슨한 가운데 행하여지므로 보다 풍부한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도 그러한 글쓰기는, 형식논리에 의거한 글쓰기와는 달리, 물적 실체의 실재성에 의거하지 않아도 될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과학사의 전개 속에서 보다 엄밀한 글쓰기를 추구하였던 사람들이 예증에 의거한 글쓰기에 대한 대안으로 형식논리에 의거하면서 개념 정의를 거치는 글쓰기를 택하고 그것을 수단으로 지금의 과학을 구축하여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저자가 권하는 예증에 의한 글쓰기를 수용하기에 앞서 그것을 형식논리에 의거한 글쓰기와 계속 비교해보는 부담을 감당해야 할 듯하다.

“사례의 논리적 형식과 가장 밀접하게 제휴하는 글쓰기 장르는 우화(parable)이다. “실재적이지만 추상적인”(real but abstract) 육체의 비물형성(incorporeality)을 일컫는 말은 가상적인 것(the virtual)이다.”

44쪽

“가상적인 것이 그 자체로 완전히 완성되려면, 그 생성과 더불어 공간이 되기를 철회해야 할 것이다.”

45쪽

독자들은 이 책이 우화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저자는 권고하였다. 저자는 자신이 세계를 실제적이지만 추상적인 것으로 보며 세계를 그렇게 보면서 세계 속에 있는 자기는 비물형적인 몸의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이어 저자는 그런 자신에 걸맞은 설명은 ‘가상적(virtual)이라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러한 저자라면 자기의 생성과 더불어 공간이 되기를 철회하는 자세를, 적어도 말로라도, 취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라면 그가 글쓰기 장르를 우화로 선택한 것이 조금은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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